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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날엔 Dec 22. 2020

목소리는 유전되는 것일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고, 아버지와 덩그러니 집에 남겨졌다. 학교를 빠지고 새로운 세상을 찾아 나갈 용기같은 건 없는 학생이었지만, 친척들은 내가 알지 못할 그 어딘가로 사라질까 걱정하셨다. 걱정하시는 만큼 집을 싫어하긴 했지만, 길거리를 떠돌만큼 저돌적인 성격은 못됐다. 아버지와 나의 생활을 둘러싼 염려들 속에서, 할머니가 양육을 자처하고 나서셨다. 다 자라버린 손녀와 늙어가는 아들을 돌보기 위해 나서신 70대의 할머니. 아버지는 술과 함께 지냈고, 본인의 생활도 감당하기 버거운 상태였다. 나는 할머니가 차려주시는 밥상에 앉으며 몸둘 바를 몰라 했다. 심지어 입도 짧았다. 푹 끓인 생선탕 같은 것을 잘 먹어낼 만큼 훌륭하게 자라지도 못했기에 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럼에도, 잘 먹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할 수 있는 건 그런 것밖에 없는 청소년이었다. 


할머니가 집에 계시면서 집 전화기도 덩달아 바빠졌다. 당시에도 핸드폰이 보편화 되어 있었기에 굳이 집전화를 쓸 일이 많지도 않았지만,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오시는 분들은 집전화를 애용하셨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가 울리면 일단 내가 받았다. 할머니, 아버지와 비교하면 내가 가장 빨랐기에 끊기기 전에 내가 받아 할머니에게 건네 드리곤 했었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으면, 상대방은 일단 말이 없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끊겼나 싶어 두세 번 쯤 목소리를 높여 말을 하면, 큼큼 하며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나고 할머니 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 대부분은, 말을 시작하면서 더듬거렸다. 

“아.... 아.... 저....  ㅇㅇ이니? 할머니 계시니?”

"아, 네. 바꿔 드릴게요. 잠시만요."

할머니께 전화기를 전해드리고 뒤돌아서면 전화내용이 들려왔다.

“그래, 쟤가 목소리가 지 엄마랑 판박이야. 며칠 전에 ㅇㅇ도 전화왔고, ㅇㅇ도 전화왔었는데 다들 깜짝 놀랐다더라.”

 




어머니와 목소리가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왔기에 그런가보다 하며 살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의 문제는, 결이 다른 것이었다. 전화를 걸어오는 이들은 바로 얼마 전에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들은 이들이었고, 대다수는 장례식에도 참석했던 분들이었다. 별생각없이 전화를 건 그들은 내 목소리를 듣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렸고, 순간 이게 무슨 일일까 생각하며 침묵하고, 아, 고인(故人)이 아니라 딸이 전화를 받은 거구나 생각하며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매일같이 이런 일들이 일어났기에 나 역시 고민에 빠졌다. 본의 아니게 저승을 떠올리게 하는 이 목소리를 어째야 하나, 고민했다. 


TV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보통 "ㅇㅇ동입니다"라고 전화를 받던데 그걸 흉내내볼까 싶었다. 하지만 이 동네에 산 지 고작 1년도 안 된 입장에서 "ㅇㅇ동입니다"라고 전화를 받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뭐라고 해야 전화를 건 분들이 놀라지 않을까.


아, 이름을 대야 하나? "여보세요"만 해도 상대가 놀라는 상황이니 통성명이 시급했다. 전화가 오면 "네, ㅇㅇ입니다"라고 이름을 말해야지 결심했다. 몇 번의 연습 끝에 시도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보세요' 같은 흔한 답변을 기다리는 상대에게 대뜸 이름을 말하면 잘 못 알아들었다. 전화를 받으면서 "네, ㅇㅇ입니다" 하면 상대는 보통 "네? 어디시라고요?" 하고 되묻곤 했다. 전화를 걸었으면서 어디냐고 물으면 나는 무엇이라 말을 해야 할까. 이름을 말했는데 왜 어디인지를 묻는 걸까. 


그럼 또 다시 "ㅇㅇ인데요"라고 이름을 말하고, 상대는 "네?"하는 도돌이표. "저 손녀 되는 ㅇㅇ이라고요"라고 다시 풀어 말하면, "아니, 너는 전화를 왜 그렇게 받니?"라는 질문이 이어졌다. 17살의 어린 나이에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다. 여러 날이 이어졌고, 결국 찾은 해법은 목소리를 변조하는 것이었다. 

전화가 울리면 바로 받지 않았다. 일단 목소리를 가다듬고 '솔' 음에 가까운 소리를 내려 애썼다. 

"여-보-세-요" 

높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끊어서 말을 하면 상대가 바로 알아 들었다. 그제서야 별 무리 없이 할머니에게 전화를 건네 드릴 수 있었다. 





지금도 가끔씩 목소리가 '특이'하다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굳이 글로 설명하자면 여자치곤 낮은 음역대에 바람이 섞인(?), 그런 류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20년지기 친구조차 내 목소리가 특이하다고 하니, 아 좀 특이한가 여기며 산다. 

문득 똑같은 목소리라고 주변에서 말했던 어머니는 내 나이대쯤엔 어떤 이야기를 들으셨을까 궁금해진다. 어머니의 마지막 나이에 가까워지고 있는 내 나이. 이 무렵, 어머니는 어떤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을까. 어머니도 목소리가 특이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으며 지내셨을까?


참 궁금한데, 물어볼 수가 없다는 건, 좀 서글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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