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역 전개!
불확정성정리에 따라 한계를 가진다는 글을 쓰자마자 떠오른 다음 주제
https://brunch.co.kr/@andtax1003/52
한참 중2병이 낫지 않던 저의 학창 시절, 저는 고등학생까지 그 병이 완치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좌우명은 수학에 빠져 '극한'이었고, 한계에 도달하자는 마음으로 살다가, '한계돌파'라고 좌우명을 바꿨습니다. 내 한계를 두면 그 한계만을 향해 다가갈 뿐이었고, 어느 지점에 수렴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한계를 두지 않으면 무한으로 나아가는 저의 가능성을 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입력값 x에 따라 결괏값 y가 정해지는 함수에서는, 결국 함수가 무엇이냐에 따라 입력값에 따라 결괏값이 정해집니다. 아무리 좋은 입력을 넣어도 쓰레기 함수에 넣으면 쓰레기가 나오고, 아무리 적은 입력값이어도 좋은 함수에 넣으면 좋은 결과가 나오기도 합니다. 연속하는 함수에서는 대부분 입력값에 대한 결괏값을 가지고 있겠지만, 우리가 체감하는 삶은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저는 극한(수렴)에서 한계돌파(발산)로 좌우명을 바꿨을 때에는 '저'는 '좋은 함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당시보다 2배 이상의 나이를 먹고 보니 수렴하는 듯한 느낌도 들면서, 수렴한 곳이 한계에 가까워진다는 생각도 그다지 들지 않습니다. 저의 한계는 이렇게 와버리는 걸까요?
사실 수학은 극한, 발산, 무한, 수렴 등 다양한 '한계'에 대해서 논하게 됩니다. 저는 수학자도 아니고 수학과도 아니고 수학과 관련된 일을 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수학을 참 좋아했었던 것 같습니다. 무한하면서도 미세한 숫자의 세계는 정말로 이상적이지만, 인간의 삶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무한한 세계를 볼 수 있는 유한한 존재는 참으로 덧없고 서글픈 것 같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한계를 갖지만, 그 한계를 아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라는 칸트, 모든 인간은 자신이 넘지 못할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니체, 그리고 덕은 한계의 중용에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철학자들은 이러한 덧없음을 인지하면서도 결핍을 느끼지 않고 균형을 논하거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 초월의 시작점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법은 이러한 한계에서 매우 예리한 편인데, 경계를 정확하게 긋고 그 안에서는 유효, 그 경계를 벗어나면 무효로 하는 등, 한계를 명확하게 하는 것을 중요시합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경계는 시대나 사회, 사람들의 인식, 그리고 새로운 판례를 통해서 바뀌기도 하는데, 그러한 경계를 매우 명확하게 하려고 하면 할수록 법은 그 경계가 허물어지기도 하고 밀리기도 하고 좁아지기도 하고 넓어지기도 하는 굉장한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입니다.
또한 그러한 경계는 사람마다 달라지기도 하고, 역사적으로는 인종, 성별, 직업 등에 따라도 달라지기도 합니다.
인간의 천부인권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기존에 쓴 글이 있습니다
https://brunch.co.kr/@andtax1003/43
표현의 자유를 생각해 봅니다. 법은 어느 범위까지는 표현을 보장하고 그 이상의 표현을 금지하거나 처벌하는 등으로 제한을 했을 것입니다. 한국은 지금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폐지하는 논의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미 사실을 말하더라도 공익에 부합하면 처벌하지 않고 있긴 한데, 이제는 허위인지 사실인지에 따라 처벌여부만 변경될 것입니다.
https://www.munhwa.com/article/11537827
헌법적으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은 애초에 제한한 범위보다 더 강하게 제한됩니다. 쉽게 말하면 표현의 자유가 100중에서 80 정도는 자유롭게 말하라는 취지였다면, 실제로 표현은 60~70 정도로 머물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허용되는 79, 80이 모르다 보니 내가 80을 말하는지 81을 말하는지 전혀 몰라서, 그보다는 안전하게 말을 해야 하다 보니 80보다는 더 줄어든 범위 내에서 위축되어 말하게 됩니다. 이를 칠링이펙트(chilling effect, 위축효과)라고 합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C%84%EC%B6%95_%ED%9A%A8%EA%B3%BC
결국 80에 수렴하고자 했던 표현의 자유는 사실상 80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한계에는 다다르지 못하게 되거나 한계인줄 알았으나 그 한계를 돌파하는 표현을 하게 되는 모호성을 내재하게 됩니다.
이처럼 법률은 한계를 정해주려고 하지만 한계는 모호하고, 그 한계를 다투기 위해서 수많은 재판에서 변호사와 검사가 다투고 있었습니다
사실 저런 경계는 매우 어려운 경계에 속하는데, 법에서는 다소 분명한 경계가 다수 있긴 합니다. 예컨대 시간과 관련된 한계는 법에서 다소 정확하게 구분하려고 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에서도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2025. 10. 5. 에서, 마감일은 2025. 10. 5. 까지라고 정해두면 2025. 10. 4. 에서 10. 5.로 넘어가는 0시가 마감일지, 2025. 10. 5. 에서 10. 6.로 넘어가는 0시일까 등입니다.
상식적으로 우리는 10. 5. 가 다 가는 시간까지는 글을 써도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여기서 헷갈리가 2025. 10. 5. 0시까지라고 하면, 당연히 2025. 10. 4. 24시와 동일하므로 하루가 부족하게 됩니다.
생각보다 이러한 고민은 옛날부터 있었는데, 아래 판례는 무려 77년도에 나온 것입니다
"향토예비군설치법시행령 제13조 제2 항에서 말하는 「소집일 7일 전」까지를 정함은 형사소송법 제66조의 기간계산방법을 역산 준용할 경우이므로 소집일 전일을 기산일로 하여 거꾸로 계산하여 7일이 말일이 되고 그날의 오전 0시에 7일의 기간이 만료한다고 해석되니 따라서 늦어도 7일의 전날 자정까지를 가리킨다고 하여야 된다 할 것이다. 본건에 있어서 '77.5.13. 이 교육훈련일이라는 것이니 소집일 7일 전까지는 위 역산계산방법으로 쳐서 '77.5.5. 자정까지라고 하겠다." - 대법원 1978.10.10. 선고 78도 2208 판결
사실 제일 쉬운 접근은 '기한의 이익이 추정된다'는 대원칙에 따라 유리하게 해석하면 24시를 마감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헷갈릴 수 있는 다른 사건을 보면,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2025. 10. 5. 까지라고 하면 이제 위에서 말한 대로 11시 59분 5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 초까지 인 건데, 놀랍게도 근무시간인 18시까지 아니냐는 사례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장에 조금은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접근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저도 처음 들었을 때에는 실소부터 나왔긴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떠나서 그날 돈을 주기로 했다고 해봅니다. 아니면 6시까지(혹은 은행 업무시간인 4시라던가..) 반드시 이체되어야 하는 돈이라는 점을 상호 간 알았다고 해봅니다. 일부러 엿을 먹일 생각이 아니라면 11시 59분 59초에 예약이체를 걸고 돈을 보내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옛날에는 저 시간에는 은행점 검시간이기도 하지만...).
아니면 근로일자만 정해진 경우에 퇴근을 언제 하여야 하느냐는 문제는 18시로 보는 게 맞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돈을 주기로 한 사람이 겨우겨우 돈을 마련했는데 5시 55분이 되어가고, 받기로 한 회사는 6시에 문을 닫아버리고, 그날 돈을 내지 않으면 지연손해금이 무자비하게 발생한다고 해봅니다. 5시 55분에 열심히 그 사채업자의 사무실에 찾아갔지만 6시 5분이 약간 넘었고 사채업자 사무실은 굳게 닫혀있었습니다. 망연자실하게 돌아가니 저녁 늦게 연체하였으니 기한이익 상실하고 지연손해금 20,000%를 부담하겠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실소한 제가 미안해집니다. 한계가 없으면 날짜도 헷갈리고, 이자율도 헷갈리게 됩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한 일들도 다시 살펴보아야 하는 이러한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시간의 개념은 '지구시간'에 맞춰줘 있습니다. 만약 중력이 다른 시간에 따라서는 시간이라는 의미가 없어질 수 있습니다. 무한한 우주(사실 유한한 것 같지만..)에서는 시간도 거리도 지구와는 다를 것입니다. 밀러 행성에서 5시간 이후에 만나기로 한 지구인은 1시간 지각한 친구가 나보다 7살이 더 많아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는 행성 간 소송이 걸리는 경우 14일 내에 법원에 도달하여야 하는 서류는 의미가 없을 듯합니다. 밀러행성을 기준으로 지구에서의 2주는 행성에서는 20초 정도입니다.
https://www.hankyung.com/article/2014111743741
우리가 부동산에서 땅을 보면, 지상으로는 건물을 짓고 지하로는 지하실을 만들게 됩니다. 이러한 점을 보면 땅을 사면 무한한 건물과 무한한 주차장을 지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돈도 무한하지 않고, 다양한 법률이 이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우주를 뚫을 듯한 건물을 지을 수도 없고, 맨틀까지 내려가는 주차장을 만들 수도 없습니다
민법 제212조 (토지소유권의 범위)는 "토지의 소유권은 정당한 이익 있는 범위 내에서 토지의 상하에 미친다."라고 하여 정당한 이익이 없는 범위까지는 상하의 한계를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우리가 종종 듣는 용적률, 그리고 건폐율 등으로 변경되며, 내 땅이라고 내 건물을 아주 높게, 그리고 아주 넓게는 지을 수가 없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귀멸의 칼날의 무한성은 불법건축물이 됩니다. 당연히 허가도 안 받았겠지만 도시계획, 지구계획에도 맞지 않도록 건축물을 지었을 것으로 보고, 용적률이나 건폐율도 지키지 않았을 것이며, 나키메와 무잔의 의사대로 무한한 증축을 하게 됩니다. 또한 대피동선도 불확실하니, 소방법 등도 위반한 것으로 보입니다. 무잔은 도쿄를 벗어난 적이 없다고 하니, 도쿄시청 건축과 공무원들은 무잔의 무한성에 방문하면 '무한'과태료, 과징금 부과가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무한의 영역을 이야기하는 또 다른 재미난 만화로는 주술회전이 있는데, 작중 최강자 중에 하나로 나오는 고죠사토루라는 주술사는 무량공처라는 기술을 사용합니다.
만화책보다는 애니메이션에서 표현하는 저 기술은 인터스텔라에는 못 미치지만 무한한 공간 속에서 무한한 시간과 정보, 그리고 그러한 모든 무한한 것들이 우리를 지나쳐가는 모습을 느끼게 해 줍니다. 무한한 시간과 정보 속에서 우리의 뇌는 무한 속에 갇혀버리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shorts/0qtV3g6FKBo
"아난아, 어떤 색이 없는 중생들은 일체의 색(色)이라는 생각을 벗어나, 대상이 있다는 생각을 멸하여, 약간의 생각도 없어, 무량공처(無量空處)인 이 공처를 성취하여 노니나니, 곧 무량공처천(無量空處天)이다. 이것을 제5 식주라 한다." - 불교 "중아함경"
무한의 이르는 의식과 정보를 인간이 수용하지 못하듯이, 무한한 권리와 자유는 결국 인간이 수용하지 못하게 됩니다.
자주 우리는 대중교통 빌런을 보게 됩니다. 인천에서 30년을 넘게 산 저로써는 1호선 빌런도 자주 보았습니다. 지하철은 원래 그런 것인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https://www.chosun.com/national/national_general/2023/10/16/FJKS5GBF4NDSTLXYKBKXTACYXI/
https://v.daum.net/v/20230211054405099
https://news.nate.com/view/20250814n16664
진상들의 생각구조를 우리가 다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나에게 저러한 행동을 할 자유가 있고, 자유의 범위 안에서 나는 나의 의지로 저러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자유에 한계가 없다면, 특히 내가 하고 싶은 행동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자유만 보장되면 당연히 타인의 자유, 특히 담배연기를 맡지 않을 자유, 나도 편하게 의자에 앉을 자유가 침해되는 것이고,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나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계는 위에서 말한 대로 사실 약간은 모호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경계를 새로 그을 때마다 우리는 위축되게 됩니다. 흡연을 금지하고 과태료를 물게 한들, 누군가는 지금 당장 담배가 너무 피고 싶고, 과태료를 내더라도 괜찮다고 결정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의 담배를 뺏는 행동에 대해서 법적으로 판단하기가 애매해집니다. 의자를 어디까지 내려도 된다고 정해놓은 규정이 없거나, 특히 비행기에서 노트북을 하고 있는데, 앞자리에서 의자를 위로 눕히면서 내 노트북이 파손되었다고 해봅니다. 그러면 누구 책임인지도 애매해집니다. 한국법상 과실손괴죄는 없고, 과실이 없다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도 없습니다. 그냥 나는 노트북이 하고 싶었을 뿐이고, 앞사람은 그냥 뒤로 편하게 앉고 싶었을 뿐입니다.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4282817
보통의 범죄자들은 자신이 처벌받지 않을 것을 고려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을 듯합니다. 적어도 잡히기 전에는 그러한 생각을 했다면 그렇게 분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사람은 자신이 범죄에 대한 처벌도 달게 받길 원하면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은 내심의 자유가 있으므로 마음속으로 범죄를 상상한 것 만으로는 처벌할 수는 없지만, 행동을 저지르기 전(미수를 포함해서)과 후로 나누어 그 경계를 분명하게 한 다음, 한 발자국이라도 더 범죄에 가까워지면 처벌하거나 제지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유명 인사들에 대한 테러 또한 이런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모든 참석자에게 금속탐지기를 돌려볼 수도 없고, 갑자기 저지르는 돌발행동은 경호원의 능력에 따라 막아지기도 막아지기 않기도 합니다.
이러한 한계, 즉 저 사람이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거나, 범죄를 저지르기로 이미 맘을 먹고 그 처벌도 달게 받기로 한 사람, 또는 마땅히 도덕적으로나 경범죄에 해당해서 강하게 금지하기 어려운 어떤 행동들은 이를 막기가 어렵다는 한계가 늘 산재합니다
심지어 범죄를 저질러도 형사소송법에 따라 절차를 지켜가며 재판에 따라서 죗값을 치르게 됩니다. 이러한 한계 속에서 용케도 세상은 잘 돌아갑니다.
인간의 사상도 사실은 유한할 수 있습니다. 오감을 초월하는 인식은 일반인에게는 너무나 어렵고, 인간의 지능도 한계가 있으므로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그러한 영감과 인식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면서 더 쉽고 더 용이하게 퍼져나갑니다. 노벨상을 받은 새롭고 놀라운 이론도 시간이 갈수록 그 영향과 가치는 어느 지점에 수렴하게 됩니다.
세상의 질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법령이 바뀌고 정권이 바뀌고 사회와 인식이 바뀌어도 세상은 어느 지점에서 수렴해 가게 됩니다. 다소 흔들리더라도, 어떠한 가치를 향해 갑니다. 어떤 가치가 그 함수의 위에 있는지 아래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그러한 흔들림도 하나의 가치로 수렴해 갑니다.
하나의 인간의 삶은 유한하나, 어쩌면 세대를 이어가는 인간의 삶은 무한하지는 않더라도 상당한 시간 동안 발산해갈 것입니다. 우리 개개인은 그러한 인류의 삶에서 작은 모래알 같은 존재일지 모르지만, 흘러가는 무한한 세상 속에서 그 세상을 만들어가는 무한의 한 조각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