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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윈제 Oct 05. 2020

폐가

열아홉 번째였나 열여덟 번째였나 세다가 자꾸 헷갈렸지만 아무튼 그 즈음의 이사를 했다. 우리는 은행과 함께 집을 얻었고 한동안 짐을 싸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조금 안도할 수 있었다. 


이사 후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꽃무늬 몸뻬바지를 입은 할머 니와 유치원 가방을 멘 손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바로 건너편 주택으로 들어갔다. 남색 대문에서 쉰 소리가 났다. 시선을 미처 거두지 못한 곳에는 낡은 현수막이 있었다. 먼지 섞인 천 조각에 뚜렷한 글 이 집은 내 집이다 개발하려면 날 죽이고 개발해라라고 적혀 있었고 날 죽이고라는 글자는 빨간색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 눈빛은 무엇을 말했을까. 

건너편의 집 중 몇 채는 이미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지 않아 창문이 깨진 채로 밤 고양이들의 쉼터가 되어 있었고 그 앞 건물은 철제 조각들이 감싸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택가 집집마다 크고 붉은 깃발들이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저녁마다 골목마다 사람들의 외침이 들려 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멈춰 버린 골목의 우리는 사실 너무나 같은데 어쩌다가 감 하나 나눠먹을 수 없다니. 

나는 영주 빌라 12동 102호로 돌아갔다. 열쇠가 없어 계단에 앉아 울고 있을 때 본인의 집으로 들어와서기다리라며 문을 열어 준 옆집 아줌마, 빌라 앞에 돗자리를 펼쳐 놓으면 여기저기서 자기가 가장 아끼는 인형을 들고 나오던 언니와 동생들, 다마고치를 하고 있는 나에게 다가와 너는 뭐 키워라고 묻고 나는 거북이라는 첫인사를 나누던 삼층 오빠, 우리 막내가 고열이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다며 혼자 있던 엄마가 새벽에 무작정 문을 두드렸을 때 달려와 응급처치를 해준 위층의 간호사, 며칠을 앓고 나서 함께 베어 먹던 여름날의 복숭아. 


변해 버린 것들과 언젠가 모두 변해 버릴 것들. 걷잡을 수 없는 높이와 벽. 창밖에 내려온 어둠을 밝히는 오렌지색 가로 등 불빛들이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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