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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 Jun 21. 2024

아이와의 관계설정

오늘은 아이와의 관계 설정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 가장 필연적이고 전 세계적, 인류역사적 가장 보편적인 관계입니다.

그래서 생각지 못했고, 생각 자체가 필요치 않을 것 같은 그런 이야기일 수 있죠.


부모에게 자녀는 좋은 자녀, 나쁜 자녀의 구분이 없습니다.

하지만 자녀에게 부모는 좋은 부모, 나쁜 부모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생각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좋은 부모라면 자녀가 부모와의 관계를 크게 고민하지 않겠지만, 만약 나쁜 부모라면 자녀에게 부모와의 관계는 아주 어려운 문제가 된다는 것도 대부분 생각하지 못합니다.

부모라는 끊을 수 없는 끈 때문에 관계가 이어지기는 하지만 오히려 끊어 버릴 수 없어서 부담되고 버거운 관계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죠?


나는 어떤 부모인가? 어떤 아빠인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나는 자녀에게 부모라는 존재에 대한 경험을 어떤 것으로 만들어 주고 있는가?

매일매일 생각하고 돌이켜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설정이라는 말은 무언가를 의도하고 그 의도대로 이루어지도록 무언가를 실행하는 것일 테지요.


이왕 아이와의 관계를 생각한 거 조금 넓게 생각을 해보니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 독립해서 살아갈 때도 즐거운 일 어려운 일 많은 일들을 겪을 텐데 그런 일들을 공유하고 함께 고민해 줄 대상이 필요하겠죠.

그리고 그 대상으로 가장 적합한 존재가 엄마와 아빠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생각을 한번 더 넓혀 아이들이 성인이 돼서 이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때 부모와의 관계를 거울삼아 사회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자기 역할을 감당하며 사회와 공동체에 기여하는 그런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고민에 포함되었습니다.




심각하고 거창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는데요.

사실 저의 고민은 아이들이 중고등학교 사춘기 때 저와 아이들이 어떤 상태로 살아가게 될까 라는 걱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이들의 사춘기 시절 그 질풍노도라 고하는 시기를 어떻게 잘 겪을 수 있을까요?

다들 아시고, 직접 겪기도 하셨겠지만 이 시기의 아이들은 엄청난 신체적 정신적 변화를 겪게 되죠...

아이들 자신도 감당하기 어렵겠지만 부모 역시 그런 아이들을 감당하기 버거운 것도 주변 지인들을 통해 목도한 사실입니다.


저희는 남자아이 둘.

사실 저는 이 시기가 두렵기까지 합니다.


어떻게 해야 잘 넘길 수 있을까?

아니 잘 넘기는 것을 넘어서서 어떻게 해야 유익한 시간이 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많이 합니다.


생각할수록 그 문제가 발생할 당시의 대응 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되더군요.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지금부터 아이들과의 관계를 잘 만들어 놓아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그 시기의 일반적인 아이와 부모와의 모습을 예상해 보고 주위 많은 경우를 통해 생각해 보면, 아이는 세상의 모든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동안은 부모라는 필터를 통해 세상을 들었고 배웠고, 또 많은 것들이 부모를 통해 차단되어 미처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아이가 몸도 컸고, 생각도 커집니다.

그동안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서 판단하고 결정되던 그 부모의 기준에 의문이 생기고, 납득도 안되고...

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일을 부모는 계속 이야기하며 자신에게 강요하죠.

거기에 자기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싶은 욕구가 커지면서 어느 시점에서는 충돌이 생기게 됩니다.

심할 경우 굉장히 큰 가정 불화로 이어지기도 하고요.

이 시기에 부모와의 관계, 특히 아빠와 아들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평생을 애증관계로 지내는 경우도 우리는 허다하게 봅니다.


솔직하게 제가 고민하는 부분도 이런 점입니다.

나는 사랑으로 대한 것인데 그것 때문에 아이가 힘들고 나와의 관계가 망가지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일까요?

이렇게 예상가능한 문제인데 미리미리 고민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입니다.

이런 격동의 시기에 아이들과의 관계의 문제부터 그리고 길게는 아이가 인생을 살면서 겪을 수많은 일들에 언제든지 고민을 이야기하고 그런 고민에 보템이 되어 줄 수 있는 그런 관계였으면 좋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가 살면서 즐거움도 있겠고 어려움도 있겠죠.

매 순간을 잘 지냈음 싶은데 그때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의 필요는 절대적일 테고 그 대상으로 부모만 한 존재가 없지만 부모가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모든 부모님들이 아이들과 관계된 많은 것들에 대해서 고민하실 텐데요.

저는 그렇게 고민을 하면 할수록 답은 한 가지로 귀결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찾은 그 답을 하나의 키워드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바로 ‘존중’입니다.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아이를 보호와 교육의 대상으로 대하지 아이도 자신의 필요와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 입장이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아이들의 필요와 문제는 어른이 보기에는 대부분 중요치 않은 문제처럼 보입니다.

지금 좀 더 노는 것이고, 딱지를 하나 더 갖는 것이죠. 보던 책을 계속 보는 것이고, 아이스크림을 하나 더 먹는 겁니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부모의 판단을 아이들의 결정보다 우선시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부모의 지시대로 바로바로 행동하지 않는 것에 말을 안 듣는다고 꾸중합니다.


사실 아이들이 말을 안 듣는 것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자신들의 생각과 의사가 있다는 반증 아닐까요?

아이들의 수준에서 그 일은 부모의 일보다 훨씬 중요하고 소중한 일들일 텐데, 그렇게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자신들의 생각이 무시당하는 경험을 매일매일 무수히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을 부모는 미처 생각을 못합니다.


아이들이 만으로 4~5세 이상이 되면서 흔히 겪는 일들이 부모가 이야기를 하지만 못 듣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특히 남자아이들이요.

그래서 몇 번을 다시 이야기하고, 결국엔 소리 지르고, 그래도 안되면 위협까지 하게 되죠.

아이들의 이런 행동은 안 들려서가 아니라 들었지만 대답하면 지금 하고 있는 것을 못하게 되니까 대답하지 않고 못 듣는 척하는 것입니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엄마 아빠가 자신들의 생각과 필요를 무시하니까 자신들도 엄마아빠의 지시를 무시하는 당연한 결과인 것이죠.

물론 아이들이 의도적으로 엄마아빠의 이야기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죠. 그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좀 더 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고 결론적으로 부모가 스스로 아이들이 자신을 무시하도록 자초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실 얼마 전까지 아이들에게 부모는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자신들의 필요를 다 알고 미리미리 해결해 주는 그런 존재였죠.

자기들이 무엇을 하든지 웃어주고, 기뻐해주고, 무한 애정으로 칭찬을 마다하지 않는 그런 존재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부모는 제제하고, 지시하고, 야단치는 존재가 되어버렸죠.

아이들이 그런 부모를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굉장히 낯설고 당황스럽지 않을까요?


아이들도 자신들만의 필요에 의한 자신의 입장과 생각이 있다.

비록 아이들의 그 생각이 미숙하더라도, 어른이 보기에 하찮은 것일지라도, 이런 아이의 상태에 대해 이해하고 여기에서부터 아이를 대하는 태도를 고민하는 것.

이것이 아이에 대한 배려이고 존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이가 유아기에서 유년기로 성장하는 데에도 같은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유아기 아이들은 절대적으로 부모가 필요하니 마지못해 부모의 뜻에 맞춰 행동을 하지만, 유년기 아이들은 이미 몸은 다 커서 키도 아빠보다 크고, 힘도 세고 그런 상태에서도 자신의 뜻을 무시하는 부모의 말을 고분고분 듣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치게 무리한 기대가 아닐까요?

그래서 이때 격한 충돌이 생기고, 그 깊어진 갈등의 골만큼 부모와 아이와의 관계는 회복되기 힘든 지경까지 갈 수 있는 것이죠.


많은 부모님들이 꼭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 볼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주위에서 많은 사례를 봤고, 안 좋은 사례, 좋은 사례 보면서 생각을 해봐야겠다 싶었고, 그런 생각의 끝에 존중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저도 이제 막 건져 올린 이 키워드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아직은 잘 모릅니다.

그래서 더 진지하게 실행하고 그 가운데 아마도 많은 시행착오도 겪으며 사용을 해나가겠죠.


존중의 의미를 담아서 아이를 믿어주고 기다려주고,

때로는 마음으로 설득하고,

지시보다는 자기들의 의지를 통해서 무언가를 해보고, 

그러면서 실수를 통해 배우도록 믿고 기다려주고,

마음을 담아 설득하고, 

언젠가는 따라와 주기를 또 믿고 기다리고,

부모의 이런 태도가 자녀의 사춘기, 질풍노도, 반항과 방황을 꼭 필요한 만큼만 최소화할 수 있기를,

세상을 향한 불안도 직접 시도하고 경험하고 실수하고 실패하면서 더 크게 성장하는 시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아이는 세상을 살아가는 올바른 방법을 배우길 원합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아이에게 부모라는 존재는 언제든지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할만하며, 자신들의 생각을 지지해 주며, 자신의 실수를 용납해 주고, 그 실수에서 교훈을 얻게 해주는 그런 존재로 경험되고 인식될 수 있도록 관계가 만들어지기를 희망합니다.


이후 이곳에서 아이들과 관계된 글을 이끌고 갈 주제는 이 존중이라는 키워드가 될 것 같습니다.

이 존중이라는 말은 때로는 듣기라는 말로, 때로는 경험이라는 말로, 때로는 믿음이라는 말로, 때로는 설명이라는 말로, 때로는 기다림이라는 말로 아이를 대하는 상황마다 다르게 사용될 것 같습니다.


많은 부모님들이, 그중 많은 아빠들이 이 키워드를 잡고 아이와의 관계를 고민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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