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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Nov 04. 2020

01. 집순이가 살아가는 법


 | 집에서 하는 건 없고요 그냥 누워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나는 항상 집을 좋아했다. 굳이 아무것도 안 해도 집에서 뒹굴거리는게 좋고, 이 아늑함을 온전하게 느끼는 것도 좋았다. 아무도 없는 집구석에서 혼자 나만의 모노드라마를 찍고 있으면 세상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오늘은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가 방영될 예정이다.   

  

“음 이거는 방콕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요린데, 맛이 아주 재밌습니다.”     

열심히 똠양꿍맛 컵라면을 음미하며 백종원님을 연기하던 그 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덜컥’  

   

혼자만의 드라마가 끝나는 순간이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집에서 낮잠 자던 친오빠가 일어났다. 너 뭐하냐. 라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린다. 순간의 머쓱함이 밀려오지만, 뭐 어쩌라고 라는 마음이 불쑥,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가족들과 같이 살다 보니 나만의 모노드라마가 급하게 종영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그것 또한 집순이의 또 다른 재미라면 재미라고 볼 수 있다.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뒷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내 방으로 들어오니 그 새 할 일들이 가득하다. 정말 중요한 ‘누워서 아무것도 안 하기’를 먼저 실천하기 위해 이불 속으로 파고들던 찰나     




| 집순이의 평화가 깨지는 소리


‘카톡’    

 

적막을 깨는 알람 소리와 함께 나의 오래된 동네 친구에게서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육교 밑 그 집에서 술 먹자, 나온나”     


적잖이 고민했지만, 결국 마음 약한 집순이는 이내 승낙하고 만다. 항상 거절을 잘못해서, 선 승낙 후 고민으로 난제를 겪곤 한다. ‘이불아 조금만 기다려 금방 돌아올게’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는 약속을 혼자 읊조리며, 이불 밖으로 스멀스멀 빠져나왔다. 사실 집순이에게 집 밖에 나가는 것은 상당히 귀찮은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먼저 이 안락한 이불을 박차고, 침대를 나가야 하지, 뽀득뽀득 씻어야 하지, 옷도 갈아입어야 하지. 막상 만나면 제일 잘 노는 게 집순이라지만 그 전까지 수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나가기도 전에 지치는 일은 수두룩하다. 집 밖을 나가면서도 생각한다.


'아! 집 가고 싶다'    

    



| 익숙함이 좋아서


나는 장소도 사람도 익숙한 게 좋다. 그래서 항상 가던 식당만 주구장창 가고 만나던 친구들만 항상 만난다. 아직은 이 안락함의 패턴을 벗어나고 싶지 않나 보다. 동네에 오랜 나의 단골집이 있다. 교통부 다리 밑에 자리한 자그마한 동네 술집, ‘육교 밑 그 집’ 하면 아는 그곳. 밤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가도 어색하지 않은 그곳. 

유리문 넘어 보이는 주인아주머니의 뒷모습,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계신다. 무얼 그렇게 열심히 보시나 하고, 고개를 따라가 보니 익숙한 텔레비전 속의 주인공들이 열연을 펼치고 있다. 서로에게 감정적 교감을 나누려고 하던 찰나,  

   

‘드르륵’     

내가 문을 연 순간 몰입이 깨지고 말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멋쩍은 미소로 회답하기로 한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죠”

“아이고 오랜만이네, 술은 뭘로 줄까?”     

들어가자마자 우리에게 대뜸 술 종류부터 물어보신다. 그때 친구와 눈이 마주쳤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라는 텔레파시를 주고받았다.     

“대선 한 병이요”     


이제부터 소주에 어울릴만한 안주조합을 찾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미션이다. 시작은 늘 그렇듯, 라면과 김치전으로 스타트를 끊는다. 바삭한 김치전 한 점에 소주 한잔, 뜨끈한 라면 국물 한 수저에 소주 두 잔. 점점 미세한 취기가 오른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안주들을 보며, 내 눈은 다음 안주를 물색한다. 또 다른 안주가 필요한 시점이다. 다음 안주로는 무엇이 적합할까, 오물오물 씹으면서도 생각한다. 

그래! 마지막은 닭똥집 볶음으로 정했다.     


“사장님, 저희 닭똥집 볶음에 땡초도 추가 해주세요!”    


갓 볶아진 양파와 닭똥집을 집어서, 고소한 참기름에 푹 찍어 입속으로 골인. 땡초가 들어가서 칼칼하고도 매콤한 이 맛을 느끼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내 손은 소주잔을 향한다. 이렇게 소소하지만 익숙한 술자리를 하고 있을 때면, 나도 이제 어른이 된 거 같은 착각이 든다. 취했다는 얘기다. 




| 집순이 본능이 깨어나는 시간


알딸딸한 취기와 함께, 내면의 숨어있던 집순이의 본능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아주 그냥 신데렐라가 따로 없다. 강력한 귀소본능이 말한다. ‘빨리 집에 가자’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얼른 집에 들어가자”   

   

혼잣말 같지 않은 혼잣말을 내뱉으며, 급하게 외투를 챙겨 입는다.

오늘도 본능에 충실한 집순이는 망할 귀소본능에게 지고 말았다. 항상 이놈에게 백전백패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습관처럼 침대 머리맡에 둔 일기장을 꺼내 든다. 손 가는 대로 펜을 이리저리 흔들다 보면 노트는 어느새 검은색 활자들로 가득 채워진다. 오늘의 안주 성공, 역시 동네에서 먹는 술이 최고, 근데 배가 너무 많이 나왔네, 바지 안 맞음. 의식의 흐름대로 적는 그 날 그날의 일기를 다음날 꺼내 보면, 도통 무슨 생각으로 적은 건지 알 수가 없다.


뭐 어떠하랴, 뭐든 기승전결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가끔 잠 안 오는 새벽 감성에 젖어 일기장을 꺼내 들면, 내가 무던하게 잘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의외로 ‘잘하고 있어’라는 친구의 한마디 위로보다, 한 살 덜 먹은 내가 살아낸 날들의 자취를 보는 것이 마음의 위안을 줄 때가 있다. 


 올해의 내가 작년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게 있다면, 그동안 살아내느라 수고했던 나를 꼬옥 안아주고 싶다. 나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의외로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스스로에게 ‘자주 행복하지 않더라도, 일상이 편안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말이 씨가 되길 바라면서. 행복은 무색무취라 옆에 있어도 알아차리기 어렵다. 이놈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잡으려고 아등바등 애써도 쉽게 잡히지 않는다. 잡으려고 하면 달아나고, 신경 쓰지 않으면 옆에 슬그머니 자리 잡는 고양이 같은 놈이다. 야옹



나는 오늘도 그런 고양이 같은 놈과 함께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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