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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Nov 04. 2020

07. 일하고 삽니다.

집순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동


2019년 3월의 어느 하루, 

집에서 뒹굴거리던 뉴질랜드에 사는 한 집순이가 일을 구하겠다고 구직사이트를 뒤적거린다.

오랜만에 노트북에 가득 찬 활자들을 보니 머리가 새하얗다 못해 투명해진다. 다시 닫아야겠다. 


 달이 지고 해가 다시 뜬 다음 날, 마음을 가다듬고 노트북을 켰다. 일 ‘안’하고 돈 버는 법을 검색하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깨닫고 다시 일자리 찾기에 몰두했다. ‘일하기 싫어 병’ 말기를 앓고 있던 나는 가볍게 하루에 다섯 시간 정도만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하고는 급하게 써놓은 이력서를 전송했다.      


걸어서 10분, 5시간 근무, 점심 제공    

 

그럴싸한 이유 들이 세 가지가 있다. 나로서는 꽤나 큰 메리트다. 워킹홀리데이의 ‘워킹’을 실천할 기회를 부여받게 된 것이다. 그렇게 첫 번째 취직에 성공했다. 휴 다행히 밥은 먹고 살 수 있겠다.     

처음으로 선택한 워킹의 첫 시작은 스시 가게 였다.

뉴질랜드에서 흔하게 먹는 음식을 뽑자면 의외로 스시다. 왜 김밥 천국보다 스시 가게가 더 많은지는 나도 알 수 없다. 


또 아이러니한 사실 하나, 스시 가게의 사장님들은 한국인들이 많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한일합작인가.     

5시간 동안 내게 주어진 일은 상당히 간단하면서, 스피드가 요구되는 일이었다. 아니 사실 전혀 간단하지 않다.

일단 아침 아홉시에 출근해서 스시 10줄 정도를 먼저 썰고 진열한다. 그리고 나머지 10줄은 일정한 크기로 썰어 팩에 넣고, 게살 샐러드를 만들고 아니 쓰다 보니 생각보다 내가 많은 일을 했다. 억울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시급 더 부를 걸 그랬다. 뭐 어쨌든 주어진 일을 급하게 11시까지 마무리해야만 도착 지점에 있는 버저를 누를 수 있다. 출발드림팀에 출전한 선수처럼 앞만 보고 달려야 도전 성공이다. 면접 때 그렇게 손이 빠르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역시 사람은 입조심 해야 한다는 걸 몸소 경험했다. 경험치 획득 성공이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1주일 정도 고난도의 강습을 마치고 나니 어느새 나는 ‘달인’이 되어있었다. 생활의 달인에나 나가볼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렇게 정말 손이 빠르다는 걸 스스로 입증했다.      

매일 아침 11시 30분이 되면, 나와 단골손님의 대화가 시작된다.


“헬로, 아보카도 스시 나왔니?”

“응 당연하지, 널 위해 남겨놨어, 이리 오렴”     

“헬로, 오늘은 조금 색다르게 아보카도 롤을 먹어볼게, 아니다 그냥 아보카도 스시 먹을게”

“응 놀랄뻔했네, 여기 너 꺼 미리 빼놨어”     

“헬로, 오늘도 부탁해”

“아임 쏘리, 오늘은 아보카도 스시가 없어”     


그 말을 듣는 순간, 하늘이 무너진 듯 세상 불쌍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그런 그를 아보카도 키위라 불렀다.

아보카도 키위는 아보카도가 뭐가 그리 좋은지, 먹을 때마다 연신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이 아보카도의 존재가 참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아보카도가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건 아니었다. 사장님에게 이놈은 애증의 존재였다. 몸값 비싼 아보카도를 구하기 위해 주말마다 차를 타고 나가서 구하곤 했고, 그마저도 안될 땐 이 녀석을 대체할 놈을 찾느라 바빴다.


그럴 때마다 아보카도 키위가 생각나서, 내심 아보카도 스시는 계속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서너 달이 흘렀다. 이제 나는 눈 감고도 아보카도 스시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만하면 생활의 달인에서 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내가 먼저 연락해 봐야겠다.


 하지만 경험쟁이인 나는 다른 일을 경험해 보기로 했다. 캐릭터를 키우기 위해서는 경험치를 획득해야 한다.

그 날도 아보카도 키위는 아보카도를 찾았다. 주머니 속 네모모양의 아이는 시끄럽게 울어 대다 이내 소리가 멈췄다. 폰이 고장 난 게 아니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때 문득 번호의 출처가 생각났다. 며칠 전 FOH(Front Of House, 즉 서빙)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나 바리스타 하고 싶으니까 뽑아줘’ 따위의 문장으로 가득한 이력서를 보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에이 설마 했지만 예상이 맞았다.      


“너 바리스타 하고 싶다고 이력서 보냈지?”

“응, 맞아, 너네 바리스타 구하니 찡긋”

“응 우리 바리스타 구해. 그럼 내일 세시에 면접 보러 올래?”     


인생은 정말 타이밍이다. 축하합니다. 경험치 +1을 획득 하였습니다.

정말 운이 좋게도 새로 오픈 한 그 카페에서는 정말로 바리스타가 필요했고, 나는 타이밍 좋게 이력서를 전송했다. 

대망의 면접날, 나는 얼굴에 긴장을 잔뜩 묻힌 채 면접장에 앉아 있다. 내 앞에는 세 명의 면접관들이 있다.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은지 끊이지 않는 질문 폭격으로 아득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았다. 붙고 싶다. 붙었으면 좋겠다. 붙게 해주세요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여느 날과 같은 일상의 반복이다. 아보카도 키위는 변함없이 아보카도를 찾았다. 이 정도면 아보카도 홍보대사 시켜줘야 할 판이다. 그때 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설마 하는 눈빛으로 액정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떨어질 것으로 예상했던 그 카페였다. 


담당자는 수화기 너머로 나에게 언제부터 출근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어젯밤의 기도가 통했나 보다. 정말 붙어버렸다. 영어 듣기를 잘못하는 편이지만 이런 말은 또 어찌나 잘 들리던지. 역시 사람은 듣고 싶은 말만 들리나 보다. 이제 아보카도 키위와 작별인사를 해야 할 날이 왔다.     

그렇게 정확히 2주 후, 나는 바리스타로 카페에 출근했다. 설렌다. 공짜 커피를 많이 마실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결코 공짜 커피 때문에 설렌다는 건 아니다. 오해 마시길.

카페에서 일하다 보면 나와 비슷한 피부색을 가진 이들을 볼 수 있다. 나만의 자국민 구분법이 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플리즈” 한국인이다.

“두 유 해브 아이스 아메리카노?” 역시 한국인이다.     


한국인이 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할 때면, 

역시 너도? 야 나도.     


뉴질랜드에서 일하고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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