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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Nov 06. 2020

09. 겨우 이런일로

겨우 이런일로 웃을 수 있다는 행복감


“띠리리리리리”     


시끄럽게 귓가를 때리는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이 시끄러운 잡음에도 이놈의 동거인들은 도통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나 몰래 투명 귀마개를 끼고 자는 것이 분명하다. 오늘은 쉬는 날이라 본인도 여유롭게 눈을 뜨려고 했으나, 아차 어제 알람 끄고 자는 걸 깜박했다.     


모두가 자고 있는 집안 공기는 적막 그 자체. 홀로 잠이 깨버린 나는 결국 무료함을 참지 못하고 노트북을 들고 거실로 도둑걸음으로 나왔다. 쉬는 날 보려고 아껴놨던 ‘블랙미러-밴더스내치’를 보기 위해서다.  

    

전장에 나가는 군인이 총을 장착하듯 경건하게 귓구멍에 에어팟을 장착했다. 괜히 뭐라도 된 기분이다. 으쓱

영화를 보기 전에 할 일이 있다. 수액을 맞아야 한다. 바로 커피 수액. 전기 포트 따위 없는 주방에서 냄비에 물을 끓인다. 아메리카노는 역시 냄비 발이지. 

커피 가루가 담긴 컵에 끓인 물을 옮겨 담으면 이제 진짜 영화 볼 준비 끝


그렇게 영화에 집중하다 보면 한밤중이던 동거인들이 하나둘씩 잠에서 깨기 시작한다. 절대 내가 깨운 것은 아니라고 자부한다. 정말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자취생의 영원한 과제 ‘밥 차려 먹기’에 온 정성을 기울이기 시작한 때가. 집순이 3인방은 진지하게 토론을 시작했다. 오늘의 메뉴는 뭐가 좋을지. 세계정상회담 부럽지 않은 열띤 토론 중이다. 아아 1시간에 걸친 토론 끝에 오늘의 메뉴는 연어로 결정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우ㄹi는 ㄱr끔 집에서 연어파티를 열곤 ㅎH.’     


동거인들 모두 쉬는 날에는 집 밖에 잘 안 나가는 집순이들이지만, 오늘만큼은 큰맘 먹고 바깥 외출을 해보기로 한다. 외출 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최단노선을 짜는 일이 우선이다. 이 세상 모든 집순이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집에서 20분 정도 떨어져 있는 피쉬마켓이 있다. 이름하여 뉴질랜드 수산시장이다. 깔끔하게 정돈된 수산코너들과 너도나도 아기자기하게 자리 잡은 테이블들이 조화를 이루어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눈 돌아가는 구경거리가 많지만, 오늘의 목적은 오로지 연어다.


여기저기 구경하느라, 다른 길로 샐 뻔했지만 겨우 정신을 붙잡고 영롱한 주황빛 주인공을 온몸으로 맞이하기로 했다.  


오늘의 목적 달성을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종이로 돌돌 감싸진 연어를 풀고 나니, 윤기가 좌르르. 벌써 군침이 도는 건 왜일까 베어그릴스처럼 통으로 뜯어볼까 하고 잠시 동안 고민했다. 스시집에서 매일 20줄의 스시를 썰며, 배웠던 칼질을 드디어 선보일 차례다. 연어 껍질을 슥슥 칼로 벗겨내고, 적당히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냈다. 


혼자만의 쉐프 놀이 시작이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뿌듯한 건지 어깨가 하늘에서 내려올 생각을 안 한다.     

 

한입 크기로 도톰하게 각 잡힌 연어를 접시에 줄 맞춰 플레이팅 하고, 나머지는 초밥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미스터 초밥왕에 한껏 심취했다. 참지 못하고 몰래 한입 또 한입. 원래 몰래 먹는 한입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거다. 


너무나 일상적이고 집순이다운 이 시간 들이 새삼 행복하다. 기분 탓 일 수도 있지만, 사실 내가 잘라서 더 맛있기도 했다. 검증된 사실이다. 아마도    


차리는 건 반나절, 먹는 건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나를 포함한 동거인들 모두 자칭 연어 킬러들이다. 우리의 입속으로 수 많은 연어들이 희생되었다. 미안하다. 정말 맛있는 거 먹을 때 우리만의 구분법이 있다. 셋 다 말없이 먹는 행위에만 오롯이 집중한다. 그럼 정말 천상의 맛인 거다. 하지만 맛없는 걸 먹을 때는 서로에게 먹어보라는 배려가 살아난다. 


셋 다 어찌나 배려가 깊은지 모른다. 배가 슬슬 불러오니 이제 서야 쌓여있던 설거지들이 눈에 보인다. 치울 게 산더미지만 풍선처럼 가득 부푼 배를 보니 잠깐의 휴식이 필요하겠다. 치열한 접전 끝에 결정된 오늘의 설거지 당번은 애석하게도 본인이다. 구수하게 노래 한 자락을 뽑으면서, 그릇을 씻고 있자니 한국에 계신 엄마 생각이 문득 난다. 오늘 전화 한 통 드려야겠다.     


야무지게 식사를 끝내고 나면 다 같이 해야 할 일이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누워서 영화 보기

침대 머리맡에 달달한 간식거리를 쟁여두고 나면, 곧 상영이 시작한다. 모두 핸드폰은 진동 모드로 바꿔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평범하디 평범한 하루하루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다. 

집에서 보내는 수많은 나날을 오늘도 활자로 남겨 놔야겠다.      



매일 우린 겨우 이런 일로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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