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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Nov 05. 2020

08. 운명론

그 거창한 단어에 대하여


새로운 집에 익숙해 진지 벌써 한 달째, 

높디높은 월세의 벽에 결국 백기를 들고 플랫메이트를 받기로 결정했다. 


예상과 달리 사이트에 글을 올리자마자 집을 보러 온다는 연락이 빗발쳤다. 순식간에 인기 글이 되었다. 새벽 2시에 올린 보람이 있다. 다들 나와 같은 올빼미족인가 보다.


 첫 손님이 도착했다. ‘민서’라는 이름을 가진 이 친구는 이모와 함께 집을 보러 왔다. 한눈에 봐도 여기서 오래 살았을 이모님을 보니 이 친구가 의지를 많이 했겠구나 싶다. 아니나 다를까 껌딱지처럼 이모 곁을 한순간도 떠나지 않는다.      


‘우리 애가 학생인데, 같이 살면 밥도 잘 챙겨 주면 좋겠는데’, ‘내가 반찬이랑 밥솥도 갖다 줄게 호호’

‘그리고 우리 사위가 변호사니까 도움받을 일도 있을 거야 호호’  

   

안 흔들린다. 안 흔들린다. 흔들린다. 매우 흔들린다.     


‘아 근데 부산 살았다고 했었죠? 어느 고등학교?’

‘아 저 데레사여고라고, 범일동 쪽에 있는 학교 다녔어요’

‘어머, 나도 거기 나왔는데, 나 때는 명문이었는데, 이제 그건 아닌가 보다. 아 그리고 지금 쓰는 밥솥은 별로던데 이런 거 쓰지마 밥맛 없어 호호’     


어휴 밥맛이다. 화자가 드디어 흔들림을 멈췄습니다. ‘벌컥 민서 잘 살고있나 와봤어 호호’, ‘우리 민서 밥은 잘 챙겨 주고 있지?’


앞으로의 미래가 보인다. 민서야 미안하다. 우리는 인연이 아닌가 보다.     

그렇게 2주가 흘렀다. 한 식탁에 3명이 오붓하게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고 있다. 민서와 함께 살게 됐냐고? 설마 그럴 리가. 

사실 민서가 다녀간 후 집을 보러왔던 한 친구가 있다. 이곳 뉴질랜드에 온 지 한 달도 안 된 새내기로서 집을 구하는 중이라고 했다. 나보다 3살이나 어린 이 친구는 집에 들어온 지 10분 만에 한 마디를 무겁게 뱉었다.      


“계약할게요”     


집주인을 당황하게 하는 이 아이는 뭐지. 

당황하며 여기도 보고 저기도 자세히 둘러보라는 이상한 말을 주절댔다.

지금 생각해보니 당황한 거 다 티났을거다.      


“근데, 제가 집을 너무 많이 봐서, 이번에 집 못 구하면 그냥 여행하고 한국 돌아가려구요”     


덤덤하게 말하는 그녀를 보니, 뭔가 마음이 쓰였다. 동생은 없지만 동생 같고, 챙겨 주고 싶은 괜한 오지랖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이 오지랖이 어쩌면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를 우연을 인연으로 만들어 주었다. 

운명론은 믿지는 않지만 만날 인연은 어떻게든 만난다는 말에 동의한다.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이름들 속에서 서로의 이름을 알아가는 일이 참 흥미롭다. 


새롭지만 낯설지 않은 이 동생과 뉴질랜드에서 나와 모든 것을 함께 했던 내 친구, 그리고 나. 이렇게 워홀러 3인방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너무나 신기하게도 셋은 모두 부산 출신의 디자이너. 그리고 집 좋아하는 집순이들.     



이 정도면 운명론을 믿어볼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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