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권 제2부
제2부
1
1805년 10월, 러시아군은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촌락과 도시를 점령하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또 새로운 부대들이 계속 도착해 브라우나우 요새 부근에 숙영하면서 주둔지 주민들에게 무거운 부담을 주고 있었다. 브라우나우에는 총사령관 쿠투조프의 군사령부가 있었다. 1805년 10월 11일, 브라우나우에 막 도착한 보병 연대들 중 하나는 총사령관의 사열을 기다리며 도시에서 반 마일 떨어진 지점에 머물고 있었다.
마지막 행군이 있던 날 저녁부터 총사령관이 행군 중에 연대를 사열한다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 바람에 30베르스트(1베르스트는 약 1.066킬로미터)를 행군한 병사들은 연대장의 명령으로 눈도 붙이지 못한 채 밤새도록 수선을 하고 몸과 의복을 청결히 했다.
그때 신호병들을 배치해 둔, 도시에서 뻗어 나온 길에 말 탄 사람 둘이 나타났다. 부관과 그 뒤를 따르는 카자크였다. 부관은 군사령부가 전날의 명령서에서 불분명하게 언급한 사항을 확실히 말해 두고자 파견됐는데, 바로 총사령관이 연대를 행군 중인 상태 그대로, 군인 외투와 먼지막이를 착용한 채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모습 그대로 보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전날 빈에서 궁정전쟁위원회의 위원 하나가 쿠투조프를 찾아와 페르디난트 대공과 마크 장군의 군대에 합류할 수 있도록 최대한 빨리 와 달라는 제안과 요구를 해 왔다. 그러한 합류가 유리하지 않다고 생각한 쿠투조프는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할 여러 증거들 중 하나로 러시아에서 오고 있던 병사들의 비참한 상태를 오스트리아 장군에게 보여 주기로 작정했다. 바로 이런 목적으로 연대를 방문하고자 한 것이었으므로 연대의 상태가 열악할수록 총사령관은 더욱 흡족해할 것이었다.
이 말을 듣자 연대장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없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신경질적인 몸짓으로 두 팔을 벌렸다.
“괜한 짓을 벌였군!” 그가 말했다.
30분 후, 모든 게 이전의 질서로 되돌아갔다. 사각형 대열들이 검은색에서 회색으로 변했을 뿐이었다. 연대장은 다시 떨리는 걸음으로 연대 앞에 나와 멀리서 그 모습을 둘러보았다.
2
"오십니다!” 그때 신호병이 외쳤다.
연대장은 후들거리는 손으로 등자를 잡고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타 자세를 바로잡은 후, 장검을 뽑아 들고 행복하고 결연한 얼굴로 입을 비스듬히 벌린 채 고함지를 준비를 했다.
"차려어엇!” 연대장은 자신에게는 즐겁고 연대에는 엄하며 다가오는 상관에게는 공손한, 영혼을 뒤흔드는 목소리로 외쳤다.
양옆에 나무가 늘어서 있고 자갈이 깔리지 않은 대로를 따라 쌍쌍이 종대(縱隊)로 늘어선 말들이 끄는 차체가 높은 빈풍의 하늘색 콜랴스카가 가볍게 스프링 소리를 내면서 빠르게 달려왔다. 콜랴스카 뒤로 수행단과 크로아티아인 호위대가 말을 타고 따랐다. 쿠투조프 옆에는 오스트리아 장군이 러시아군의 검은 군복들 틈에서 낯설게 보이는 하얀 군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콜랴스카가 연대 곁에 멈추었다.
쿠투조프는 대열 사이를 지나다가 이따금 발을 멈추고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알게 된 중대장 티모힌, 그리고 가끔은 병사들에게도 다정한 말을 몇 마디 건넸다. 그는 신발을 바라보며 우울한 표정으로 여러 번 고개를 저었다. 연대장이 몸을 쭉 펴며 차림새를 단정히 하고 총사령관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에게 경례하는 모습, 총사령관의 말 한마디 한마디와 몸짓 하나하나에 펄쩍펄쩍 뛰어오르는 모습으로 볼 때, 그는 상관의 의무보다 부하의 의무를 수행하는 데서 더 큰 기쁨을 느끼는 것이 분명했다.
잘생긴 부관이 총사령관 뒤에 가장 가까이 붙어 걷고 있었다.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이었다. 그와 나란히 걷는 사람은 동료 '네스비츠키'였다. 그는 웃음 띤 온화하고 잘생긴 얼굴에 촉촉한 눈동자를 지닌, 키가 크고 몹시 뚱뚱한 참모 장교였다. 네스비츠키는 곁에서 걷고 있던 까무잡잡한 경기병 장교(제르코프)가 불러일으킨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경기병 장교 제르코프는 웃지도 않고 시선을 고정시킨 눈동자의 표정을 바꾸지도 않은 채 진지한 얼굴로 연대장의 등을 바라보며 그의 동작을 하나하나 흉내 냈다.
3
사열식에서 돌아온 쿠투조프는 오스트리아 장군을 데리고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큰 소리로 부관을 불러 지금 도착하고 있는 부대들의 상황에 관한 서류들과 전위 부대를 지휘하는 페르디난트 대공에게서 온 편지들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이 쿠투조프가 요구한 서류를 들고 총사령관 집무실에 들어섰다.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 앞에 쿠투조프와 궁정전쟁위원회 위원인 오스트리아인이 앉아 있었다.
“하나만 말하지요, 장군. 만약 이 일이 나의 개인적인 희망에 달린 문제라면 프란츠 황제 폐하의 의지는 오래전에 실현되었을 거요. 나는 이미 오래전에 대공과 합류했을 거란 말이오. 그리고 나의 정직함을 믿어 주시오. 나 개인으로는 말이오, 오스트리아에 그토록 많은, 나보다 식견이 높고 노련한 장군에게 군대의 최고 지휘권을 넘기고 이 모든 무거운 책임을 내 어깨에서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나 개인으로는 참으로 기쁠 것이오. 하지만 현실은 이따금 우리보다 더 강합니다, 장군.”
"나의 확고한 믿음이기도 하고, 페르디난트 대공 전하가 내게 하사하신 최근 편지에 근거해 예측해 보아도, 오스트리아 군대는 마크 장군 같은 노련한 조력자의 지휘 아래 지금은 이미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며 더 이상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오.”
쿠투조프는 그렇게 말하며 양 입술 언저리에 비웃음을 띤 채 페르디난트 대공의 편지에서 마크의 군대에서 보낸 최근의 편지 부분을 오스트리아 장군에게 독일어로 읽어 주었다.
“우리는 완전히 집결된 약 7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소. 따라서 적이 레흐강을 건너려 할 경우 그들을 공격하여 무찌를 수 있소. 우리는 이미 울름을 확보했으므로 도나우강 양쪽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이점이 생겼소. 따라서 만일 적이 레흐강을 건너지 않을 경우에 우리는 언제라도 도나우강을 건너 적의 연락로를 덮친 후 하류 지역에서 다시 도나우강을 넘어올 수 있소. 적이 모든 병력을 우리의 신실한 동맹군 쪽으로 돌리려 한다면 적의 의도가 실현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소. 따라서 우리는 러시아 제국군이 충분한 준비를 갖출 때까지 기꺼이 기다리겠소. 이후 서로 힘을 합치면 적이 마땅히 받아야 할 운명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은 쉽사리 찾게 될 것이오.”(독일어)
그는 옆에 있던 안드레이에게 서류 몇 장을 건네며 말했다. “이것들 전부를 토대로 해서 프랑스어로 깨끗이 비망록을 작성하게. 우리가 오스트리아군의 움직임에 대해 확보한 모든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기록한 뒤에 폐하께 제출하도록 하게.” 안드레이는 서류를 모으고 두 사람 모두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조용히 양탄자를 밟으며 대기실로 나왔다. 쿠투조프는 자신이 폴란드에 있을 때 합류한 안드레이 공작을 몹시 다정하게 맞아 주었고, 그를 잊지 않겠노라 약속했으며, 다른 부관들보다 더 아꼈다.
안드레이가 대기실로 나왔을 때, 바로 그때 맞은편에서 이제 막 도착한 것이 분명한 프록코트 차림의 키가 큰 오스트리아 장군이 들어왔다. 머리에 검은 수건을 동여매고 목에는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을 달고 있었다.
“쿠투조프 총사령관은?” 막 도착한 장군은 양옆을 돌아보고 거침없이 집무실 문으로 다가가며 날카로운 독일어 발음으로 빠르게 말했다.
집무실 문이 열리고 쿠투조프가 나타났다. 머리에 천을 동여맨 장군은 위험에서 벗어나려는 것처럼 몸을 숙인 채 야윈 다리로 빠르게 쿠투조프에게 다가갔다.
“각하는 지금 불행한 마크를 보고 계십니다.” 그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예전부터 퍼져 있던, 오스트리아군이 패했고 울름 부근의 군대 전체가 항복했다는 소문이 사실로 밝혀졌다. 30분 후에는 이미 부관들이 지금까지 아무 활동도 하지 않고 있던 러시아군도 곧 적과 맞닥뜨릴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는 명령서들을 지니고 여러 곳으로 파견되었다.
안드레이 공작은 자만하던 오스트리아가 치욕을 당한 것과, 일주일 후에는 자신이 수보로프 이후 처음인 러시아군과 프랑스군의 충돌을 목격하고 그 속에 참여하게 될 것을 생각하면서 무심결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군의 모든 용기보다 더 강한 것으로 드러날 수 있었던 보나파르트의 천재성을 두려워했고, 그와 더불어 자신의 영웅이 수치를 당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4
파블로그라트 경기병 연대는 브라우나우에서 2마일 떨어진 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니콜라이 로스토프가 사관후보생으로 복무하는 중대는 독일 마을 잘체네크에 배치되어 있었다. 기병 사단 전체에 바시카 데니소프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중대장 데니소프 대위는 밤새 카드놀이에서 돈을 잃고 로스토프가 아침 일찍 말을 타고 나가 말먹이 징발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도 숙소에 돌아오지 않았다.
로스토프가 창문을 힐끔 쳐다보니 숙소로 돌아오는 데니소프가 보였다. 데니소프는 얼굴이 빨갛고 검은 눈동자가 빛나는, 부스스한 검은 콧수염과 머리카락을 지닌 작달막한 사내였다. 그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침울한 모습으로 현관 계단으로 다가왔다.
"이런! 난 어젯밤에 몽땅 잃었어, 개자식 같으니!” 데니소프가 소리쳤다. “그런 불행이! 그런 불행이……! 자네가 자리를 뜨자마자 그렇게 돼 버렸어.”
그는 기병 특무 상사가 찾아오자 금화가 몇 닢 든 돈지갑을 로스토프에게 던지며 중얼거렸다.
“로스토프, 거기 얼마나 남았나 세어 보고 베개 밑에 좀 넣어 줘.” 그리고 기병 특무 상사에게 나갔다.
로스토프는 돈을 쥐고 기계적으로 오래된 금화와 새 금화를 따로 나누어 나란히 쌓으며 세기 시작했다.
“아! 텔랴닌, 반갑네! 난 어젯밤에 다 날렸네.” 옆방에서 데니소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느다란 다른 목소리가 말하더니 뒤이어 텔랴닌이 방에 들어왔다. 같은 중대에 소속된 키 작은 중위였다.
로스토프는 돈지갑을 베개 밑에 던져 넣고 자신에게 내민 작고 축축한 손을 쥐었다. 텔랴닌은 연대 내에서 훌륭하게 처신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로스토프는 이 장교에 대한 자신의 까닭 모를 혐오감을 도저히 극복할 수도, 숨길 수도 없었다.
로스토프는 텔랴닌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텔랴닌에게 산 말이 왼쪽 앞다리를 절기 시작해서) 말을 끌고 오라는 지시를 하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다시 텔랴닌에게 돌아갔다. 텔랴닌은 작고 하얀 두 손을 비비며 로스토프가 나갈 때와 똑같이 게으른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들은 현관 계단으로 나가서 마구간을 향했다. 텔랴닌 중위는 말에 징 박는 법을 보여주고 자기 숙소로 떠났다.
로스토프가 돌아왔을 때 탁자 위에는 보드카 한 병과 소시지가 놓여 있었다. 데니소프는 탁자 앞에 앉아 펜을 사각거리며 뭔가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베개 밑에서 지갑을 꺼내기 위해 침대로 다가갔다.
“어디다 뒀어, 로스토프?”
“아래쪽 베개 밑에.”
“없어.”
데니소프가 베개를 둘 다 바닥에 던졌지만 지갑은 없었다.
“데니소프, 누가 가져갔는지 알겠어.” 로스토프는 계속 눈을 내리깐 채 문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데니소프는 동작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로스토프가 한 말을 알아차린 듯 그의 팔을 붙잡았다. “말도 안 돼!” 그는 목과 이마의 힘줄이 새끼줄처럼 부풀어 오를 정도로 소리 질렀다. “자네에게 말해 두는데, 자넨 정신이 나갔어. 난 그렇게 하도록 허락 못해."
로스토프는 텔랴닌의 숙소로 찾아갔다. 거기서 텔랴닌의 종졸이 알려준 선술집으로 간 로스토프는 현관 계단 곁에서 텔랴닌의 말을 보았다.
중위는 선술집 두 번째 방에서 소시지 한 접시와 포도주 한 병을 앞에 놓고 앉아 있었다.
“아, 젊은이, 당신도 들렀군요.” 그가 웃음을 띤 채 눈썹을 높이 치켜올리며 말했다.
로스토프는 옆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텔랴닌은 식사를 끝내자 호주머니에서 두 겹으로 된 지갑을 꺼내 위쪽으로 구부러진 작고 하얀 손가락들로 죔쇠를 연 뒤 금화 한 닢을 꺼내 눈썹을 약간 치켜올리며 하인에게 돈을 내밀었다.
“얼른 계산해 주게.” 그가 말했다.
금화는 새것이었다. 로스토프가 자리에서 일어나 텔랴닌에게 다가갔다.
“지갑 좀 보여 주시겠습니까?” 그는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스토프가 텔랴닌의 팔을 잡고 말하며 창가로 끌고 가다시피 했다. “이건 데니소프의 돈입니다. 당신이 가져갔어요…….” 그가 텔랴닌의 귓가에 소곤거렸다.“뭐요? 뭐라고요……?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텔랴닌이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애처롭고 절망적인 비명이자 용서를 구하는 애원으로 울렸다. 그 목소리의 울림을 듣는 순간, 로스토프의 영혼에서 의심의 커다란 돌덩이가 떨어져 나갔다.
두려움으로 창백해진 텔랴닌의 얼굴 근육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시선은 계속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로스토프의 얼굴에 이르지 못하고 아래쪽 어딘가를 배회했다. 그리고 흐느낌이 들려왔다.
"백작! 젊은이를 파멸시키지 말아 줘요……. 여기 이 재수 없는 돈, 가져가요…….” 그가 탁자 위에 돈을 던졌다. “나에겐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습니다!”
5
그날 저녁 데니소프의 숙소에 기병 중대 장교들이 모여 활발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로스토프, 당신에게 말해 두는데, 당신은 연대장 앞에서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머리카락이 희끗하고, 굵직한 윤곽의 주름투성이 얼굴에 커다란 콧수염을 지닌 훤칠한 이등 대위가 흥분으로 새빨개진 로스토프를 향해 말했다.
“당신이 장교들 앞에서 연대장에게 그런 더러운 말을 하니까…….” 이등 대위가 말을 이었다.“보그다니치가 (사람들은 연대장을 보그다니치라고 불렀다) 당신의 콧대를 꺾은 겁니다.”
“이봐요, 당신은 얼마 전에 연대로 왔습니다. 지금은 여기 있지만 내일이면 부관이 되어 어딘가로 옮겨 갈지도 모르지요. 사람들이 ‘파블로그라트 연대의 장교들 가운데 도둑이 있다!’라고 말해도 당신은 상관하지 않겠죠. 하지만 우리는 그 문제에 무심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내게서 단 한 마디의 사과도 듣지 못할 겁니다.” 로스토프가 애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용서를 빌 수는 없습니다. 맹세코 당신이 바라는 대로 할 수는 없어요! 어떻게 어린아이처럼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한단 말입니까?”
“그럼 마음대로 하세요.” 이등 대위가 말했다.
“도대체 그 불한당은 어디로 꺼진 거야?” 그가 데니소프에게 물었다.
“아프다고 했다는군. 내일 명령에 따라 제대할 거야.” 데니소프가 말했다.
“그렇다면 병입니다.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어요.” 이등 대위가 말했다.
“병이든 아니든 내 눈에 띄기만 해 봐. 죽여 버릴 테니까!” 데니소프가 잔인하게 외쳤다.
제르코프가 방으로 들어왔다.
“자네, 어쩐 일이야?” 장교들이 갑자기 들어온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출정이야, 제군들. 마크가 투항했어. 그것도 군대가 모조리.”
“그것참, 다행이군. 너무 오래 죽치고 있었어.”
6
쿠투조프는 (브라우나우에 있는) 인강과 (린츠에 있는) 트라운강의 다리들을 파괴하며 빈을 향해 퇴각했다. 10월 23일, 러시아군은 엔스강을 건너고 있었다. 정오 무렵 러시아군의 수송 대열과 화포와 종대(縱隊)는 다리 양쪽에 걸쳐 엔스 시를 가로지르며 뻗어 있었다. 비 내리는 따뜻한 가을날이었다.
고지에 배치된 대포들 사이에서 후위 부대의 책임자인 장군이 수행 장교와 함께 서서 망원경으로 지형을 관찰하고 있었다. 조금 뒤쪽에는 총사령관이 후위 부대로 파견한 네스비츠키가 포신에 걸터앉아 있었다. 맞은편에 적과 그 포병 중대가 육안으로 보였고, 포구에서 우유처럼 하얀 연기가 조그맣게 피어올랐다. 연기에 이어 멀리서 포성이 울려 퍼졌다. 아군이 강을 건너려고 서두르는 모습도 보였다.
네스비츠키가 숨을 헐떡이며 일어나 싱글싱글 웃으며 장군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상황이 좋지 않아.” 장군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말했다. “아군이 늦장을 부렸어.”
“제가 내려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각하?” 그가 다시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해 주시오.” 장군은 이미 한 번 상세하게 지시한 것을 되풀이하며 말했다. “그리고 경기병들에게 말하시오. 내가 명령한 대로 그들이 마지막으로 건넌 다음에 다리를 태우라고 해요. 다리 위의 발화 물질도 다시 한번 점검하라 하고.”
7
적의 포탄이 벌써 두 발이나 다리 위를 날아가는 바람에 다리 위에서는 북새통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리 한복판에는 말에서 내린 네스비츠키 공작이 육중한 몸을 난간에 바싹 붙이고 서 있었다. 네스비츠키 공작이 앞으로 움직이려 하자마자 병사들과 마차들이 덮치듯 밀려와 다시 그를 난간에 밀어붙였다. 그는 웃음을 지을 수밖에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이! 동포들! 왼쪽으로 물러나. 잠깐 기다리란 말이야!”
그러나 동포들은 총검이 서로 얽힌 채 어깨를 밀치면서 빽빽하게 한 덩어리를 이루어 잠시도 멈추지 않고 다리를 따라 움직였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다들 걸음을 멈추었다. 자주 일어나는 일로, 연대의 짐마차를 끄는 말들이 다리가 끝나는 곳에서 주춤거리는 바람에 무리 전체가 기다려야만 했다.
다리 밑의 엔스 강물을 돌아보던 네스비츠키는 갑자기 새로운 소리를 들었다. 빠르게 다가오는…… 커다란 무언가의, 물속으로 털썩 떨어지는 무언가의 소리였다.
“야, 이놈아, 어디로 가냐!” 가까이 서 있던 병사가 소리 난 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엄하게 말했다.
“어서 지나가라고 힘을 북돋는 거지.” 다른 병사가 초조하게 말했다.
무리가 다시 움직였다. 네스비츠키는 그것이 포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네스비츠키는 명령서를 전달해야 할 연대장을 출구 옆에서 발견하고는 임무를 수행한 후 말을 돌렸다. 말 몇 마리가 함께 달리는 듯 맑은 말발굽 소리가 다리의 판자를 따라 울려 퍼졌다. 장교를 선두로 한 줄에 네 명씩 정렬한 기병 중대가 다리를 따라 길게 늘어서서 맞은편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행군을 저지당한 보병들은 다른 병과(兵科)들이 서로 마주칠 때 으레 드러내는 거리감과 조소가 뒤섞인 특유의 반감을 품은 채, 그들 옆을 질서 정연하게 지나가는 말쑥하고 세련된 경기병들을 바라보았다.
8
나머지 보병들이 입구에 깔때기 모양으로 몰려들며 서둘러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마침내 짐마차들이 전부 지나가 혼잡이 줄었다. 마지막 대대가 다리에 들어섰다. 데니소프 중대의 경기병들만 다리 저편에 남아 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맞은편 산에서는 멀리 보이던 적군이 아래쪽 다리에선 아직 보이지 않았다.
앞쪽에는 황야가 있었고, 그곳 여기저기서 아군의 척후병인 카자크 무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갑자기 맞은편 고지에 난 길 위로 파란 외투를 입은 군대와 대포가 나타났다. 프랑스군이었다. 카자크 척후 기병들은 급히 산 아래로 물러났다. 기병 중대와 적군 사이에는 몇 안 되는 척후 기병 외에 아무도 없었다. 3백 사젠 가량의 텅 빈 공간이 기병 중대와 적을 갈라놓고 있었다.
적이 있는 언덕에서 포연이 보이더니 경기병 중대의 머리 위로 포탄이 쉭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함께 서 있던 장교들이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경기병들은 말들을 정렬하기 시작했다. 기병 중대의 모든 것이 소리를 죽였다. 모두들 명령을 기다리며 앞쪽의 적과 중대장을 바라보았다. 두 번째, 세 번째 포탄이 날아왔다. 경기병들을 향한 포격임이 분명했다.
기병 중대는 다리를 건너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포격을 벗어났다. 뒤이어 산병선(散兵線)을 형성하던 제2중대도 건넜고, 마지막 카자크들도 건너편에서 철수했다. 파블로그라트 연대의 두 기병 중대는 다리를 건너자 차례차례 산으로 되돌아갔다. 파블로그라트 연대 병사들에게 낯익은, 어깨를 높이 치켜올린 제르코프가 (그는 얼마 전 그들의 연대에서 전출되었다) 연대장에게 다가왔다.
“연대장님.” 그는 동료들을 둘러보면서 특유의 침울하고 심각한 태도로 로스토프의 적에게 말했다. “다리를 소각하라는 명령입니다.”
연대장은 마치 말에게 모든 잘못이 있다는 듯 근육질의 긴 다리로 말을 걷어차고는 앞으로 나와서 제2중대에, 로스토프가 데니소프의 지휘 아래 있던 바로 그 중대에 다리로 되돌아가라고 명령했다. 명령이 떨어졌다.
“빨리! 서둘러!” 그의 주위에서 몇몇 목소리가 말했다. 경기병들이 가까스로 다리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프랑스군 포병 중대는 더 이상 방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쏠 대상이 있다는 이유로 경기병들을 향해 포탄을 쏘아 댔다. 프랑스군은 경기병들이 말 당번병에게 돌아가기 전에 산탄을 세 차례 쏠 수 있었다. 두 번의 일제 사격은 부정확하여 산탄이 전부 머리 위로 넘어갔지만 마지막 탄은 경기병 무리 한가운데에 떨어져 세 명을 쓰러뜨렸다.
“내가 다리를 소각했다고 공작께 보고하시오.” 연대장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만약 손실에 대해 물으시면요?”
“사소합니다!” 연대장이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경기병 둘이 부상당했고, 한 명이 즉사했습니다.” 그는 행복한 미소를 억누르지 못하고 즉사했습니다라는 아름다운 말을 거침없이 내뱉으며 자못 기쁜 듯이 말했다.
9
보나파르트가 지휘하는 10만 프랑스군의 추격을 당하고, 주민들의 적대적인 태도에 부딪히고, 더 이상 동맹군을 신뢰할 수 없고, 식량 부족을 겪고, 전쟁의 모든 예상 조건들을 벗어나 행동할 수밖에 없게 된 3만 5천 명의 러시아군은 쿠투조프의 지휘 아래 도나우강을 따라 하류 쪽으로 서둘러 퇴각했다.
10월 28일, 쿠투조프는 군대를 이끌고 도나우강 왼쪽 기슭으로 건너가서 자신과 프랑스군의 주력 부대 사이에 강을 두고 처음으로 퇴각을 멈췄다. 30일에는 도나우강 왼쪽 강변에 진을 치고 있던 모르티에(나폴레옹 군대의 원수) 사단을 공격하여 격파했다. 러시아군은 이 전투에서 처음으로 전리품을 획득했다. 군기와 대포와 적의 장군 두 명이었다. * 뒤른슈타인 전투
안드레이 공작은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이 전투에서 전사한 오스트리아의 슈미트 장군 곁에 있었다. 그가 탄 말이 다쳤고, 그도 한쪽 손에 총알로 인한 가벼운 찰과상을 입었다. 총사령관은 특별한 애정의 표시로 그를 이 승전보와 함께 오스트리아 궁정에 파견했다. 이미 오스트리아 궁정은 프랑스군의 위협을 받던 빈이 아니라 브륀(현 체코의 브르노(Brno))에 있었다.
별이 가득한 어두운 밤이었다. 전투 당일인 전날 내린 하얀 눈 사이로 거무스름하게 한 줄기 길이 보였다. 지나간 전투의 기억들을 곱씹고, 자신이 승전 소식으로 불러일으키게 될 기대를 기쁘게 상상하고, 총사령관과 동료들의 송별회를 떠올리면서 안드레이 공작은 역마차를 타고 질주했다. 그는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마침내 갈망하던 행복의 시작을 손에 넣은 사람의 감정을 맛보고 있었다.
안드레이 공작이 브륀에 도착해 높은 집들, 상점과 집의 창문과 가로등에서 흘러나오는 불빛, 포장도로를 따라 덜컹덜컹 소리를 내는 아름다운 에키파시, 그리고 막사를 벗어난 군인에게 늘 그토록 매력적인 활기찬 대도시의 모든 분위기에 자신이 둘러싸인 것을 보았을 때는 이미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그는 즉각 황제를 알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궁전의 큰 현관 입구 곁에 있는 그에게 관리가 달려 나와서 특사임을 확인하고는 다른 현관으로 그를 안내했다. 5분 뒤 시종 무관이 돌아와 각별히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안드레이 공작을 앞세우고 복도를 지나 국방 대신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국방 대신의 집무실 문으로 다가가는 동안 안드레이 공작의 즐거운 감정은 상당히 시들해졌다. 그는 모욕감을 느꼈고, 그 순간 모욕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무 근거 없는 경멸감으로 바뀌었다. ‘이자들은 화약 냄새를 맡아 보지 않아서 승리를 아주 쉽게 생각하는 게 틀림없어!’ 그는 생각했다.
“쿠투조프 원수가 보냈습니까?” 그가 물었다. “바라건대 좋은 소식이겠지요? 모르티에와 충돌이 있었다던데? 승리했소? 그럴 때도 됐잖소!”
그는 자기 앞으로 온 급송 공문을 집어 들고 침울한 표정으로 읽기 시작했다.
“아, 하느님! 하느님! 슈미트!” 그가 독일어로 말했다. “이런 불행이, 이렇게 불행한 일이!”
궁정에서 나왔을 때 안드레이 공작은 승리가 안겨 준 모든 흥미와 행복이 이제 자신을 떠나 국방 대신과 정중한 부관의 무심한 손에 넘어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사고방식이 순식간에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그에게는 전투가 오래전의 아득한 기억처럼 느껴졌다.
10
안드레이 공작은 브륀에서 지인인 러시아 외교관 빌리빈의 집에 묵었다.
“아, 친애하는 공작, 이보다 더 반가운 손님은 없습니다.” 빌리빈이 안드레이 공작을 맞으러 나오며 말했다."뭐라고요? 승리의 사자라고요? 멋지군요. 난 보다시피 몸이 안 좋아서 틀어박혀 있어요.”
빌리빈은 안드레이 공작과 같은 사회에 속한 서른다섯 살의 독신 남자였다. 그들은 페테르부르크에 있을 때부터 아는 사이였지만 안드레이 공작이 지난번 쿠투조프와 함께 빈을 방문했을 때 더욱 가까워졌다. 안드레이 공작이 군사 무대에서 전도유망한 청년이듯이 빌리빈 역시 외교 방면에선 더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볼콘스키는 지극히 겸손한 방식으로 전투와 국방 대신의 응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이런 소식을 가져온 나를 볼링장에 들어온 개처럼 대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빌리빈이 가볍게 웃으며 주름살을 폈다.
“하지만 친구…….” 그는 자신의 손톱을 멀리서 찬찬히 바라보고 왼쪽 눈 위의 살갗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내가 아무리 ‘정교회 러시아 군대’를 존경한다 해도 나는 당신들의 승리가 더할 나위 없이 눈부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째서일까요? 당신들은 1개 사단밖에 없는 불쌍한 모르티에에게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달려든 데다, 모르티에는 당신들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지요? 도대체 뭐가 승리란 말입니까?”
"당신들이 정말로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고, 심지어 카를 대공도 승리를 거두었다고 칩시다. 그런다고 대세가 달라집니까? 프랑스 군대가 빈을 점령해 버렸는데. 이제는 이미 늦었어요.”
"점령이라니요? 빈이 점령되었단 말입니까?”
“점령되었을 뿐 아니라 보나파르트가 쇤브룬에 와 있습니다. 백작, 우리의 친애하는 브르브나 백작이 명령을 받들기 위해 그가 있는 곳으로 떠날 참이에요.”
“오늘 아침 리흐텐펠스 백작이 이곳에 왔었습니다.” 빌리빈이 말을 이었다. “빈에서 있었던 프랑스군의 사열식을 상세히 적은 편지를 내게 보여 주었습니다. 뮈라* 공작과 다른 온갖 소동들에 대해서도……. 보다시피 당신들의 승리는 그다지 기쁜 일이 아니고, 당신은 구세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겁니다…….”
11
이튿날 그는 늦게 잠에서 깼다. 지난 하루의 일을 곱씹으며 그는 오늘 프란츠 황제를 알현해야 한다는 것을 무엇보다 먼저 떠올렸고 국방 대신, 정중한 오스트리아 시종 무관, 빌리빈, 지난밤의 대화를 기억해 냈다. 서재에는 외교단의 신사 넷이 있었다. 대사관의 비서관 이폴리트 쿠라긴 공작과 볼콘스키는 아는 사이였다. 다른 사람들은 빌리빈이 소개해 주었다.
"여러분, 죄송하지만 여러분의 환대를 누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제 나가 봐야 합니다.” 볼콘스키가 시계를 쳐다보며 말했다.
“어디로요?”
“황제께요.”“황제와 말을 나누게 되면 식량 배급 질서와 교통로가 잘 정비된 것에 대해 최대한 열심히 극찬하세요.” 빌리빈이 볼콘스키를 현관방까지 배웅하며 말했다.
12
빌리빈의 예상과 달리 그가 가져온 소식은 기쁘게 받아들여졌다. 감사 기도의 일정이 잡혔다. 쿠투조프에게 마리아 테레지아 대십자 훈장이 하사되었고, 군대 전체에 포상이 내려졌다. 볼콘스키는 사방에서 초대를 받아 오전 내내 오스트리아 고관들을 방문해야 했다.
오후 5시가 다 되어서야 방문 일정을 마친 안드레이 공작은 전투와 브륀 여행에 대해 아버지에게 보낼 편지를 머릿속으로 쓰면서 빌리빈의 집으로 돌아왔다. 빌리빈이 임대한 집의 현관 계단 옆에는 짐으로 절반가량 채워진 브리치카 한 대가 서 있었고, 빌리빈의 하인인 프란츠가 힘겹게 여행 가방을 끌며 문에서 나왔다.
“무슨 일인가?” 볼콘스키가 물었다.
“아, 공작 각하!”(독일어) 프란츠가 여행 가방을 브리치카에 간신히 실으며 말했다. “좀 더 멀리 떠나려는 참입니다. 악당 놈이 또 우리 뒤를 바짝 쫓아왔습니다!”
빌리빈이 볼콘스키를 맞으러 나왔다. 언제나 침착하던 얼굴에 동요하는 기색이 보였다.
“무슨 일이냐고요? 문제는 프랑스인들이 아우어슈페르크가 방어하던 다리를 건넜고, 다리는 폭파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뮈라가 브륀을 향해 달려오고 있으니 오늘내일 중으로 이곳에 당도할 겁니다.”
“어떻게 여기로요? 아니, 왜 다리를 폭파하지 않았답니까? 다리에 지뢰가 설치되어 있는데요.”
“내가 당신에게 묻고 싶은 말입니다. 아무도, 보나파르트 자신도 모릅니다.”
이 소식은 안드레이 공작에게 비통하고도 달가운 소식이었다. 러시아 군대가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알자마자 그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바로 자신이야말로 러시아 군대를 그런 상황에서 구출하도록 예정된 사람이다. 바로 이곳이야말로 숱한 무명 장교들 틈에서 그를 끌어내어 영광을 향한 첫길을 그에게 열어 줄 저 툴롱(지중해 연안 항구도시, 1793년 스물네 살의 나폴레옹이 툴롱에서 프랑스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하여 처음 이름을 알리게 됨)이다!
"농담 그만하세요" 그가 말했다.
"농담이 아닙니다." 빌리빈이 계속해서 말했다. "이보다 더 정확하고 비참한 이야기도 없어요."
그러니까 어제 뮈라, 란, 벨리아르, 이 세 원수가 말을 타고 다리로 향합니다. (셋 다 가스코뉴 출신이라는 점에 주의해 주세요 - 허풍쟁이라는 뜻) 그 원수들은 자기들만 다리로 건너와서 하얀 손수건을 치켜듭니다. 그들은 휴전이라고, 원수인 자신들이 아우 어슈페르크 공작과 교섭하러 왔노라고 단언합니다. 당직 장교는 그들을 교두보로 들여보냅니다. 그들은 그에게 가스코뉴식 헛소리를 1천 가지쯤 늘어놓습니다. 전쟁이 끝났다느니, 프란츠 황제가 보나파르트와의 회담을 결정했다느니, 자신들은 아우어슈페르크 공작과 만나기를 원한다느니 하면서 말입니다. 장교는 아우어슈페르크를 모셔 오도록 사람을 보냅니다. 그 원수들은 장교들을 얼싸안고 농을 지껄이며 대포 위에 걸터앉습니다.
그사이에 프랑스군 대대 하나가 눈에 띄지 않게 다리 위로 진입해서 발화 물질이 든 자루를 물에 던지고 교두보로 접근 합니다. 드디어 우리의 친애하는 공작 아우어슈페르크 폰 마우테른 중장이 친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원수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친애하는 적이여! 오스트리아군의 꽃, 투르크 전쟁의 영웅이여! 반목은 종식 되었고, 우리는 서로에게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 황제께서는 아우어슈페르크 공작을 알고 싶다는 열망으로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자들은 괜히 가스코뉴 출신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들은 아우어슈페르크에게 아름다운 말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원수들과 그처럼 빠르게 친해진 것에 황홀해져서, 뮈라의 긴 망토와 타 조 깃털에 완전히 눈이 멀어 버려서 그저 그들의 불을 보기만 할 뿐 적들에게 발사해야 했던 자신의 불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프랑스 대대는 교두보로 달려 들어가 대포의 포문을 막고 다리를 점령합니다. 아뇨, 하지만 무엇보다 훌륭한 점은......"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지닌 매력에 흥분했다가 차츰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을 이었다.
"이것입니다. 대포를 신호로 지뢰에 불을 붙여 다리를 폭파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 대포 옆에 배치된 중사가, 다름 아닌 그 중사가 다리로 달려오는 프랑스 부대를 보고 발포하려 했지만 란이 그의 손을 밀친 겁니다. 아마 자신의 장군보다 더 똑똑했던 중사는 아우어슈페르크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공작님, 공작님은 속고 계십니다. 저기 프랑스군이 오고 있습니다!' 중사가 말을 하게 내버려 두면 작전이 실패한다는 것을 뭐라는 압니다. 그는 놀라는 척하며 (영락없는 가스코뉴 사람이지요) 아우어슈페르크를 돌아봅니다.
'세상에서 그토록 찬양받는 오스트리 아직 규율로는 보이지 않는군요.' 그가 말합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부하가 이런 식으로 말하도록 내버려 두는군요!' 천재적입니다. 아우어슈페르크 공작은 모욕을 느끼고 중사를 체포할 것을 명령합니다. 아뇨, 인정하세요. 멋지지 않습니까, 다리에서 일어났던 이 모든 일 이 말입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행위도 아니고, 비열한 짓도 아니고......"
“어디 갑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방으로 향하는 안드레이 공작에게 그가 불쑥 물었다.
“부대로요.”
“당신은 왜 떠날까요? 난 압니다. 당신은 군대가 위기에 처한 이 순간에 군대로 달려가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난 그걸 이해합니다, 친구, 하지만 그건 영웅주의예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안드레이 공작이 말했다.
“나는 친구로서 진심으로 말하는 겁니다. 신중하게 생각해요. 지금 여기 남을 수 있는데 어디로, 그리고 무얼 위해 떠난다는 겁니까? 당신을 기다리는 건 둘 중 하나예요. (그는 왼쪽 관자놀이 위에 주름을 잡았다.) 당신이 부대에 닿기도 전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거나 아니면 쿠투조프의 군대와 함께 패배와 치욕을 겪는 겁니다.”
“그런 것을 헤아리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안드레이 공작은 차갑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난 군대를 구하기 위해 가는 거야’라고 생각했다.
“친구, 당신은 영웅이군요.” 빌리빈이 말했다.
13
바로 그날 밤 볼콘스키는 국방 대신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부대로 떠났다. 그러나 정작 어디에서 부대를 찾아야 할지 몰랐고, 크렘스로 가는 도중 프랑스군에 잡힐까 봐 두려웠다. 브륀에서는 궁정의 모든 사람들이 짐을 꾸리고 있었고, 무거운 것들은 이미 올뮈츠로 향하고 있었다.
카자크 대장에게 말 한 마리와 카자크 한 명을 받은 안드레이 공작은 굶주림과 피로에 지친 몸으로 수송 대열을 추월하며 총사령관과 자신의 짐마차를 찾아 말을 몰았다. 도중에 군이 처한 상황에 관한 아주 불길한 소문들이 그에게 전해졌고, 무질서하게 달려가는 군대의 모습이 그 소문들을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안드레이 공작은 끝없이 뒤죽박죽 이어지는 부대와 짐마차와 군수품 이동 창고와 대포를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다시 짐마차로, 또 짐마차로, 진흙투성이 길을 꽉 채운 채 서너 줄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지나가는 온갖 종류의 짐마차로 눈길을 돌렸다. 병사들은 무릎까지 진흙탕에 빠지며 대포와 치중차(輜重車)를 들어 나르고 있었다.
마을에 들어선 그는 말에서 내려 첫 번째 집으로 갔다. 그 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은 창문에서 네스비츠키의 잘생긴 얼굴이 튀어나왔다. 네스비츠키가 축축하게 젖은 입으로 무언가를 씹으며 두 팔을 흔들어 그를 불렀다.
“볼콘스키, 볼콘스키! 뭐야, 안 들려? 얼른 와.” 그가 소리쳤다.
집으로 들어서며 안드레이 공작은 무언가를 먹고 있던 네스비츠키와 또 다른 부관을 보았다.
안드레이 공작은 쿠투조프의 에키파시와, 수행원들의 지친 말들과, 자기들끼리 큰 소리로 떠드는 카자크들 옆을 지나 현관으로 들어갔다. 안드레이 공작이 들은 대로 쿠투조프는 바그라티온 공작과 바이로터와 함께 농가에 있었다. 바이로터는 전사한 슈미트를 대신해서 온 오스트리아 장군이었다.
문을 열려는 순간 방 안의 목소리들이 뚝 그치더니 문이 저절로 열리고 퉁퉁한 얼굴에 매부리코인 쿠투조프가 문지방에 나타났다. 안드레이 공작은 쿠투조프 바로 맞은편에 섰다.
“총사령관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안드레이 공작은 봉투를 내밀며 꽤 큰 소리로 말했다.
쿠투조프는 바그라티온과 함께 현관 계단으로 나갔다. 그가 바그라티온에게 말했다.
“자, 공작, 잘 가게. 그리스도가 자네와 함께하시길! 자네가 큰 공훈을 세우길 기원하네.”
“총사령관 각하, 제가 이곳에서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바그라티온 공작의 부대에 남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볼콘스키가 말했다.“어서 타게.” 쿠투조프가 말했다. 그는 볼콘스키가 머뭇거리는 것을 보았다.“내게도 훌륭한 장교가 필요하네. 내게도 필요하단 말일세.” “내일 그의 부대 가운데 10분의 1이라도 돌아온다면 하느님께 감사드릴 텐데.” 쿠투조프가 혼잣말을 하듯 덧붙였다.
14 [훌라브룬 전투]
11월 1일, 쿠투조프는 정찰병을 통해 자신의 군대를 궁지에 가까운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던 소식을 접했다. 정찰병은 대규모 병력의 프랑스군이 빈의 다리를 건너 러시아에서 오는 부대와 쿠투조프 사이의 연락로로 향했다고 보고했다. 만약 쿠투조프가 크렘스에 남기로 결정한다면 나폴레옹의 15만 군대는 모든 연락로를 차단하고 그의 기진맥진한 4만 군대를 에워쌀 것이다. 그러면 그는 울름에서 마크가 처했던 상황에 놓이게 된다.
정보를 입수한 날 밤, 쿠투조프는 바그라티온의 전위 부대 4천 명을 크렘스-츠나임 가도에서 빈-츠나임 가도로 가도록 산지 너머 오른쪽으로 보냈다. 폭풍이 휘몰아치는 밤에 신발도 신지 않은 굶주린 병사들을 이끌고 길도 없는 45베르스트의 산속을 행군하다 부대의 3분의 1을 낙오로 잃은 끝에 바그라티온은 빈-츠나임 가도에 자리한 홀라브룬에, 빈에서 홀라브룬으로 접근 중인 프랑스군보다 몇 시간 앞서 닿았다.
쿠투조프가 츠나임에 도달하려면 수송 대열을 이끌고 하루 밤낮을 꼬박 더 행군해야 했다. 그러므로 그 군대를 구하기 위해서는 바그라티온이 굶주리고 지친 병사 4천 명을 이끌고 홀라브룬에서 맞닥뜨린 적군 전체를 하루 밤낮 동안 붙잡아 두어야 했다. 분명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기이한 운명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다.
츠나임 가도에서 바그라티온의 미약한 부대와 마주친 뮈라(조아생 뮈라(Joachim Murat), 장 란(Jean Lannes)과 함께 나폴레옹의 최측근 사령과)는 이들을 쿠투조프의 전군으로 생각했다. 이 군대를 확실히 분쇄하기 위해 그는 빈에서 오는 도중 뒤처진 부대들을 기다렸고, 그럴 목적으로 양 군대가 각자 위치를 바꾸지 않고 현 지점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흘간의 휴전을 제안했다. 바그라티온은 자신에게는 결정권이 없다고 답변한 뒤 그 제안을 보고하기 위해 쿠투조프에게 부관을 파견했다.
쿠투조프는 그 소식을 받자 지체 없이 자기 휘하에 있던 시종 무관장 빈첸게로데를 적의 진영으로 보냈다. 빈첸게로데는 휴전을 받아들여야 했을 뿐 아니라 항복의 조건도 제시해야 했다. 그동안 쿠투조프는 부관들을 후방으로 파견하여 전 군대에 크렘스-츠나임 가도를 따라 수송 대열의 이동을 최대한 서두르라고 지시했다. 지치고 굶주린 바그라티온의 부대는 수송 대열과 전 군대의 이러한 이동을 엄호하며 여덟 배나 우세한 적군 앞에 단독으로 꼼짝 않고 머물러야 했다.
홀라브룬에서 25베르스트 떨어진 쇤브룬에 있던 보나파르트는 휴전과 항복에 관한 뮈라의 보고를 받자마자 즉각 속임수를 간파하고 뮈라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뮈라 공작에게. 쇤브룬, 1805년 브뤼메르 25일, 오전 8시.
당신에게 나의 불만을 표현할 마땅한 말을 찾을 수가 없소. 당신은 나의 전위 부대만 지휘하면 될 뿐, 내 지시 없이 휴전을 맺을 권리가 없소. 당신은 나로 하여금 원정 전체의 전과를 잃게 하고 있소. 지체 없이 휴전을 파기하고 적을 향해 진격하시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부관은 뮈라에게 보내는 이 준엄한 편지를 지니고 전속력으로 말을 몰았다. 자신의 장군들을 믿지 못한 보나파르트는 이미 다 마련된 제물을 놓칠까 두려워하며 근위대를 전부 거느리고 직접 전장으로 움직였다. 바그라티온의 4천 명의 부대원은 즐겁게 모닥불을 피워 옷을 말리고 몸을 덥혔으며 사흘 만에 처음으로 카샤를 끓였다. 부대원들 어느 누구도 그들 앞에 닥칠 일을 알지 못했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았다.
15
끈질긴 간청 끝에 쿠투조프의 승낙을 받아 낸 안드레이 공작이 그룬트에 도착하여 바그라티온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오후 3시가 지나서였다. 보나파르트의 부관이 아직 뮈라의 부대에 도착하지 않아서 전투는 시작되지 않았다. 안드레이 공작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임무를 받았을 때 어디로 가야 할지 알기 위해 진지를 둘러보고 부대의 배치를 알고 싶다며 허락을 구했다. 당직 장교가 안드레이 공작을 안내하겠다고 나섰다.
“보세요, 공작, 저런 인간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겁니다.” 참모 장교가 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휘관들이 기강을 망치고 있어요. 자, 여기를 보십시오.” 그가 종군 매점인 천막을 가리켰다. 그들은 말에서 내려 천막으로 들어갔다. 장교 몇 사람이 지칠 대로 지친 벌건 얼굴로 탁자 앞에 앉아 먹고 마시고 있었다.
“아니, 제군들, 도대체 이게 뭐요!” 참모 장교는 이미 여러 차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한 사람처럼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이렇게 자리를 비우면 안 되지. 공작께서 아무도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지시하셨는데. 아, 당신이군요, 이등 대위.” 참모 장교는 작은 키에 지저분하고 야윈 포병 장교를 향해 말했다.
그는 부츠도 없이 (그는 그것을 매점 상인에게 말려 달라고 맡겼다) 긴 양말만 신은 차림으로 자연스럽지 않은 웃음을 지으며 들어온 사람들 앞에 일어섰다.
“아니, 투신 대위, 당신은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참모 장교가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은 포병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이 부츠도 없군요. 경보가 울리면 부츠 없이 아주 꼴좋겠습니다. (참모 장교는 씩 웃었다.) 제군들, 제자리로 돌아가시오, 다, 다.”
참모 장교와 안드레이 공작은 말에 올라 계속 나아갔다.
걷고 있는 병사들과 장교들을 앞지르기도 하고 마주치기도 하면서 마을 밖으로 나간 그들은 왼편으로 새로 파낸 깨끗한 진흙으로 축조 중인 붉은 요새들을 보았다. 바람이 찬데도 루바시카만 걸친 여러 대대의 병사들이 흰개미처럼 요새들 위에서 우글거렸다. 그들은 맞은편 산으로 향했다. 그 산에서는 프랑스군이 눈에 들어왔다. 안드레이 공작은 말을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바로 여기에 우리 포병 중대가 있습니다.” 참모 장교가 가장 높은 지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부츠도 없이 앉아 있던 그 괴짜의 부댑니다. 저기서는 다 보입니다."
안드레이 공작은 제일선으로 나간 뒤 전선을 따라 말을 몰았다. 왼쪽과 오른쪽 측면에서는 아군과 적군의 산병선이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아침에 군사들이 오간 가운데 지점에서는 어찌나 가까이 붙었는지 서로 얼굴을 보며 말을 나눌 정도였다. 프랑스 병사는 오스트리아군과 러시아군을 혼동하여 울름에서 항복하고 달아난 것이 러시아군이라 주장했고, 이 곳에 와 있던 돌로호프는 러시아군은 항복한 적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프랑스군을 무찔렀다고 주장했다.
“이곳에서도 네놈들을 쫓아내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쫓아내고 말 테다.” 돌로호프가 말했다.
“네놈들의 카자크들 전부와 함께 붙잡히지 않게 애쓰기나 하시지.” 프랑스군 척탄병이 말했다.
“보나파르트는…….” 돌로호프가 말문을 열었지만 프랑스인이 가로막았다.
“보나파르트가 아냐. 황제시다! 이 빌어먹을 놈아…….” 그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
“악마가 네놈들의 황제를 갈기갈기 찢어 놓을 거다!” 돌로호프가 맞받아쳤다.
그러더니 돌로호프는 러시아어로 병사들처럼 거칠게 욕설을 퍼붓고는 라이플총을 둘러메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는 라이플총에서 탄환을 빼고 탄약 상자를 터뜨리고 다들 서둘러 집으로 흩어져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라이플총은 여전히 장전된 채였고, 집들과 요새에 만들어진 총안(銃眼)은 여전히 준엄하게 전방을 응시했으며, 포차에서 분리된 대포들도 전과 다름없이 서로를 겨누고 있었다.
16
안드레이 공작은 전선의 오른쪽 측면에서 왼쪽 측면까지 전부 돌아본 후 참모 장교의 말대로라면 전장 전체가 보이는 포병 중대로 올라갔다. 그곳에 이르자 그는 말에서 내려 포차에서 분리한 대포 네 문 가운데 가장 끝에 있는 대포 옆에 섰다. 포병 중대 바로 맞은편, 맞은편 언덕의 지평선에는 쇤그라벤 마을이 보였다. 마을 왼쪽과 오른쪽의 모닥불 연기에 싸인 세 지점에서 프랑스 대군을 식별할 수 있었다.
안드레이 공작은 대포에 팔꿈치를 괴고 수첩을 꺼내 자신을 위한 부대의 배치도를 그렸다. 그는 바그라티온에게 보고할 작정으로 두 군데에 연필로 표시를 했다. 그는 첫째로 포병대를 전부 중앙에 집중시키고, 둘째로 기병대를 뒤쪽 골짜기 맞은편으로 이동시킬 것을 고려해 보았다. 그는 이 임박한 전투에서 자기도 모르게 전반적인 모습 속에서만 군사 행동의 향후 진행을 그려 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막사에서 들려온 목소리들의 진심 어린 말투가 너무도 인상 깊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안드레이 공작에게 왠지 친숙하게 느껴지는 기분 좋은 목소리가 말했다.
“아니지, 친구. 난 말이야,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만 있다면 우리 가운데 누구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거야. 그렇지, 친구.”
좀 더 젊은 다른 목소리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무서워하든 무서워하지 않든 마찬가지야. 피할 수 없으니까.”
그때 윙 하는 소리가 공중에서 들렸다. 가까이, 더 가까이, 더 빠르게, 더 크게, 더 크게, 더 빠르게, 포탄은 마치 꼭 해야 했던 말을 미처 다 하지 못했다는 듯 무자비한 힘으로 흙먼지를 일으키며 막사에서 멀지 않은 땅바닥에 쿵 떨어졌다. 대지가 무시무시한 타격에 신음하는 듯했다. 순간 막사에서 몸집이 작은 투신이 파이프를 옆으로 문 채 맨 먼저 튀어나왔다. 선하고 지적인 얼굴이 다소 창백했다.
17
안드레이 공작은 말을 탄 채 포병 중대에 남아 포탄을 날려 보낸 대포의 연기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드넓은 공간을 따라 내달렸다. 마침내 전투가 시작되었다. 안드레이 공작은 말을 돌려 바그라티온 공작을 찾기 위해 그룬트로 되돌아 달려갔다. 그의 등 뒤에서 포격 소리가 점점 더 잦아지고 심해졌다. 아군의 응전이 시작된 듯했다. 아래쪽, 군사들이 오간 곳에서 라이플총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르 마루아가 보나파르트의 준엄한 편지를 지니고 지금 막 뮈라에게 달려왔다. 무안해진 뮈라는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려고 즉각 부대를 중앙과 양 측면으로 움직였다. 그는 저녁이 되기 전에, 그리고 황제가 당도하기 전에 자기 앞에 있는 보잘것없는 부대를 짓밟고 싶었다.
구축 중이던 요새에 닿기도 전에 그는 흐린 가을날의 저녁 빛 속에서 말을 타고 자기 쪽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았다. 맨 앞 사람은 펠트 망토를 걸치고 챙 없는 새끼 양 가죽 모자를 쓰고 백마를 타고 있었다. 바그라티온 공작이었다. 안드레이 공작이 자기가 본 것을 말하는 동안 그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군, 그래.” 바그라티온은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포차들을 지나 맨 끝의 대포 쪽으로 말을 몰았다.
그가 가까이 다가갔을 때 대포에서 그와 수행원의 귀를 먹먹하게 하는 소리가 울리고, 갑자기 대포를 감싼 연기 속에 대포를 붙잡고 온 힘을 다해 밀어서 서둘러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는 포병들이 보였다.
키가 작고 등이 굽은 투신 대위는 대포 받침대에 걸려 비틀거리고는 장군이 온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자그마한 손 밑으로 내다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2리니야 더 올려. 그럼 딱 맞을 거야.” 그는 가느다란 목소리에 자신의 외양과 어울리지 않는 기개를 더하려고 애쓰며 외쳤다. “2번 대포.” 그가 빽빽거리며 외쳤다. “때려 부숴, 메드베데프!”
안드레이 공작은 바그라티온 공작과 지휘관들의 대화와 그가 내리는 명령에 세심히 귀를 기울이다가 놀랍게도 어떠한 명령도 내려지지 않았다는 사실, 바그라티온 공작은 필연과 우연과 개별 지휘관들의 의지에 따라 일어나던 모든 것, 이 모든 것이 비록 자신의 명령대로는 아니라 해도 자신의 의도대로 일어나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애쓸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가 보여 주던 요령 덕분에 안드레이 공작은 사건들의 우연성과 지휘관의 의지에 대한 무관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가 극히 많은 것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18
바그라티온 공작은 아군의 오른쪽 측면에서 가장 높은 지점으로 나가서 우레 같은 총소리가 들리고 화약 연기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아래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골짜기 가까이 내려갈수록 앞을 보기가 더 힘들어졌지만 그야말로 실제 전장이 가깝다는 사실은 더 실감이 났다. 그들은 부상병들과 맞닥뜨렸다. 장교가 바그라티온을 보더니 돌아오라고 고함을 치며 무리 지어 걸어가고 있던 병사들을 뒤쫓아 달려갔다. 바그라티온은 대열로 다가갔다.
쇠약해 보이는 야윈 노인인 연대장이 미소를 지으며 바그라티온 공작에게 다가와 귀빈을 영접하는 집주인처럼 그를 맞이했다. 노안을 절반 이상 덮은 눈꺼풀이 온화한 인상을 더하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 기병이 자신의 연대를 공격했다고, 연대가 공격을 물리치긴 했지만 병력을 절반 이상 잃었다고 바그라티온 공작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사실 그 스스로가 자신의 부대에 그 30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서, 공격을 격퇴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연대가 적의 공격에 격퇴를 당한 것인지 확실히 말할 수 없었다.
바그라티온 공작은 이 모든 것이 완전히 그가 예상한 대로였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부관에게 얼굴을 돌리고 그들이 방금 지나쳐 온 엽병 제6연대의 2개 대대를 산에서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그가 말하는 동안 바람이 일어 마치 보이지 않는 손처럼 골짜기를 덮고 있던 연기의 휘장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걷어 냈다. 그러자 프랑스군이 진군하고 있는 맞은편 산이 그들 앞에 드러났다. 모든 눈길이 자신들을 향해 움직이며 계단 모양의 비탈을 휘감고 있던 프랑스군 종대에 쏠렸다.
전투에 참가하고 있던 아군 연대의 나머지가 서둘러 정렬하여 오른쪽으로 후퇴했다. 그 뒤에서 낙오병들을 몰아내며 엽병 제6연대의 2개 대대가 질서 정연하게 다가왔다. 그들은 아직 바그라티온에게 다다르지 않았지만 대군 전체가 발맞춰 걷는 묵직하고 육중한 발소리가 들렸다. '왼발…… 왼발…… 왼발…….’ 위협적인 침묵으로부터, 그리고 동시에 땅을 울리는 단조로운 발소리로부터 구령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프랑스군은 아주 가까이 있었다. 바그라티온과 나란히 걷던 안드레이 공작은 붕대와 붉은 견장과 심지어 프랑스군의 얼굴까지 뚜렷이 식별하고 있었다. 바그라티온 공작은 새로운 명령을 내리지 않고 계속 입을 다문 채 대열의 선두에서 걷고 있었다. 갑자기 프랑스군 사이에서 총성이 한 발 울렸다. 그리고 두 발, 세 발……. 뒤이어 혼란에 빠진 적군의 대열 전체로 연기가 퍼졌고, 포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토록 유쾌하게 열심히 행군하던 둥근 얼굴의 장교를 포함한 아군 몇 명이 쓰러졌다.
그러나 첫 번째 총성이 울려 퍼진 바로 그 순간, 바그라티온은 뒤를 돌아보고 외쳤다. “우라!”
“우라아아아!” 아군의 전선에서 길게 늘인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군은 무질서하지만 유쾌하고 활기찬 무리를 이루어 바그라티온 공작을 앞지르고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혼란에 빠진 프랑스군을 쫓아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19
엽병 제6연대의 공격은 오른쪽 측면의 후퇴를 안전하게 확보해 주었다. 중앙에서는 쇤그라벤을 불태우는 데 성공한 투신의 잊힌 포병 중대의 활동이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저지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바람에 번지는 불을 끄느라 러시아군이 퇴각할 시간을 주었다. 골짜기를 통한 중앙의 후퇴는 다급하고 소란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부대들이 후퇴하는 가운데 명령의 혼동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로스토프가 복무하던 기병 중대는 말에 올라타자마자 적과 대면하면서 발이 묶이고 말았다. 엔스강의 다리 위에서처럼 다시 또 기병 중대와 적 사이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형을 꾸리라는 명령이 울려 퍼졌고, 이어 칼집에서 빼낸 기병도가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속도를 높여라!” 명령이 들렸다. 로스토프는 자신의 그라치크가 갤럽으로 발을 바꾸며 엉덩이를 쳐드는 것을 느꼈다. 로스토프는 그라치크에게 박차를 가하며 다른 사람들을 앞질러 전속력으로 말을 몰았다. 앞쪽에 벌써 적이 보였다.
갑자기 무언가가 넓은 빗자루로 쓸듯 기병 중대를 내리쳤다. 로스토프는 적을 벨 태세로 기병도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 순간 앞쪽에서 말을 달리던 병사 니키텐코가 그에게서 멀어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움직이지 않는 거야? 말에서 떨어졌구나. 난 죽은 거야…….’짧은 순간에 로스토프는 스스로 묻고 답했다. 그는 들판 한가운데에 홀로 있었다. 따뜻한 피가 그의 몸 아래 고여 있었다. ‘아니야, 나는 부상당했고 말이 죽은 거야.’
그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프랑스군을 바라보았다. 총검을 앞으로 기울인 채 숨을 죽이며 자기를 향해 가볍게 달려오는 그의 흥분한 낯선 표정이 로스토프를 놀라게 했다. 로스토프는 피스톨을 꽉 쥐더니 그것을 쏘기는커녕 프랑스인에게 내던지고 온 힘을 다해 떨기나무 숲으로 뛰어갔다.
그는 엔스 다리를 지날 때 품었던 의혹과 투쟁의 감정이 아니라 사냥개를 피해 달아나는 토끼의 심정으로 달렸다. 그의 왼팔은 2푸드짜리 아령이 매달린 것처럼 너무나 무거웠다. 그는 마지막 힘을 모아 오른손으로 왼쪽 팔을 잡고 떨기나무 숲까지 뛰었다. 떨기나무 숲에는 러시아 저격병들이 있었다.
20
숲속에서 불시의 습격을 당한 보병 연대는 숲 밖으로 도망쳤고, 중대들은 다른 중대와 뒤섞여 무질서하게 무리를 지어 달아났다. 겁에 질린 한 병사가 별 의미 없는, 하지만 전쟁터에서는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었다.“차단당했다!” 그러자 그 말은 공포의 감정과 함께 군대 전체로 퍼졌다.
"포위됐다! 차단됐다! 끝장났다!” 달아나는 병사들의 목소리가 부르짖었다.
뒤쪽에서 총소리와 외침이 들려온 순간 연대장은 자기 연대에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바로 그 순간 불손한 기병 연대장이며 장군으로서의 위엄은 다 잊은 채, 특히 위험이나 자기 보존의 감정은 깡그리 잊은 채, 우박처럼 쏟아지면서도 다행히 자신을 피해 가는 총탄 아래에서 안장의 굴곡진 가장자리를 잡고 말에 박차를 가하며 연대를 향해 질주했다.
전에는 병사들에게 그토록 준엄하게 들리던 연대장의 필사적인 고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또 딴사람이 된 듯한 연대장의 시뻘겋게 격분한 얼굴과 그가 휘두르는 장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병사들은 계속해서 떠들고 달리며 허공에 총을 쏘기만 할 뿐 명령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전투의 운명을 결정짓는 정신적 동요는 분명 공포 쪽으로 기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절망 앞에서 멈춰 섰다. 모든 것을 잃은 듯싶었다. 하지만 그 순간 아군을 공격하던 프랑스군이 별안간 눈에 띄는 이유도 없이 뒤로 달아나더니 숲 언저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뒤이어 러시아군 저격병들이 숲에 나타났다. 티모힌의 중대였다. 유일하게 숲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있던 그들이 숲 옆 도랑에 매복했다가 불시에 프랑스군을 공격한 것이었다.
티모힌과 나란히 달리던 돌로호프는 프랑스군 한 명을 정통으로 맞혀 죽였고, 항복한 장교의 멱살을 맨 먼저 움켜잡았다. 달아났던 병사들이 다시 돌아오고 대대들이 집결했다. 왼쪽 측면의 부대를 둘로 갈라놓았던 프랑스군은 순식간에 격퇴되었다. 예비 부대가 드디어 합류했고, 탈주병들도 걸음을 돌렸다.
“각하, 여기 전리품 두 개가 있습니다.” 돌로호프가 프랑스군의 장검과 탄약 주머니를 가리키며 말했다.“제가 포로로 잡은 장교입니다. 제가 중대를 멈추었습니다.” 돌로호프는 많이 지친 듯 무겁게 숨을 몰아쉬며 연대장에게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중대 전체가 증언해 줄 겁니다.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각하!”
투신의 포병 중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라졌다. 전투가 완전히 끝날 무렵이 되어도 계속 중앙에서 대포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바그라티온 공작은 포병 중대에 속히 후퇴하라고 명하도록 당직 참모 장교와 안드레이 공작을 연이어 그곳으로 보냈다. 투신의 대포 옆에 배치되었던 엄호 부대는 전투가 한창일 때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떠나 버렸다.
그러나 포병 중대는 계속 포격을 했고, 누구의 엄호도 받지 못한 대포 네 문에서 그토록 대담한 포격이 가해졌으리라고는 적군이 상상할 수 없었던 오직 그 이유로 프랑스군에 붙잡히지 않았다. 오히려 이 포병 중대의 열정적인 활약으로 적군은 여기 중앙에 러시아군의 주력 부대가 결집되어 있다고 생각하여 두 차례에 걸쳐 이 지점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다. 그리고 두 번 모두 이 고지에 외롭게 놓인 대포 네 문의 산탄 사격에 물러나고 말았다.
매번 그를 움찔하게 하던 쉴 새 없는 포성에 귀가 먹먹해진 투신은 짧은 담배 파이프에서 손을 놓지 않은 채 연기 자욱한 가운데 이 대포에서 저 대포로 뛰어다니며 포를 조준하고, 탄약을 세고, 죽거나 다친 말의 교체를 지시하고, 쇠약하고 가늘고 더듬대는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 댔다. 그의 얼굴은 점점 더 생기를 띠었다.
“투신 대위! 대위!”
투신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그룬트에서 자기를 쫓아낸 참모 장교였다. 그가 숨찬 목소리로 외쳤다.
“뭡니까, 정신 나갔어요? 퇴각하라는 명령을 두 번이나 받고도 당신은…….”
그러나 대령은 하려던 말을 끝맺지 못했다. 가까이 스치고 날아간 포탄 때문에 급히 몸을 푹 숙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자마자 또다시 포탄이 가로막았다. 그는 말을 돌려 멀찍이 떨어졌다.
“후퇴! 전원 후퇴!” 그가 도망가며 멀리서 외쳤다.
잠시 후 부관이 똑같은 명령을 가지고 나타났다. 안드레이 공작이었다. 투신의 대포들이 배치된 공간으로 나아갔을 때 가장 먼저 그의 눈에 띈 것은 다리가 부러져 마구가 벗겨진 채 포차에 매인 말들 주위에서 울부짖는 말이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는 동안 포탄이 잇달아 머리 위로 날아갔고, 그는 오싹한 한기가 등골을 타고 달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명령을 전하고 나서도 포병 중대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군의 무시무시한 포격 아래 투신과 함께 시체를 넘어 다니며 그는 대포들을 철거하는 일에 몰두했다.
안드레이 공작은 투신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 다 너무 바빠서 서로의 얼굴을 볼 틈도 없는 것 같았다. 대포 네 문 가운데 망가지지 않은 두 문을 포차 앞부분에 연결하고 그들이 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파손된 대포 한 문과 일각포는 내버려 두었다), 안드레이 공작은 투신에게 말을 몰고 다가갔다.
“자, 그럼 다음에 봅시다.” 안드레이 공작이 투신에게 한 손을 내밀며 말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친절하신 부관님.” 투신이 말했다. “부관님은 좋은 분입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친절하신 부관님.” 투신은 왜 갑자기 솟구쳤는지 알 수 없는 눈물과 함께 말했다.
21
바람이 잠잠해지고, 검은 먹구름이 지평선에서 화약 연기와 하나로 어우러지며 전장에 낮게 드리웠다. 날이 어두워지자 화재의 불빛은 두 지점에서 그만큼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포격은 약해졌지만 라이플총 소리는 뒤쪽과 오른쪽에서 더욱 빈번하게, 더욱 가까이 들렸다. 투신이 자신의 대포를 끌고 부상병들을 피해 돌아가거나 그들과 부딪치기도 하면서 포격을 벗어나 골짜기로 내려가자마자 상관들과 부관들이 그를 맞았다.
서로를 향해 쏘아 대던 사격도 차츰 멎기 시작했다. 갑자기 오른쪽 가까이에서 다시 비명과 포성이 울렸다. 포격으로 어둠 속에서 빛이 번득였다. 프랑스군의 마지막 공격이었다. 마을 인가에 묵고 있던 병사들이 공격에 응수했다. 프랑스군은 최후의 격퇴를 당했다. 또다시 완전한 어둠 속에서 투신의 대포는 웅성대던 보병들에게 액자처럼 에워싸인 채 어딘가를 향해 앞으로 움직였다.
“대위님, 장군님께 가 보십시오. 저 농가에 계십시다.” 포병대 하사가 투신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지금 가겠네, 친구.”
투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의 단추를 잠그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뒤에 모닥불 곁을 떠났다…….
포병들의 모닥불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바그라티온 공작을 위해 마련된 농가에서는 공작이 저녁 식탁 앞에 앉아 그의 숙소로 모인 몇몇 부대 지휘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바그라티온 공작은 몸집이 작은 늙은 연대장에게 얼굴을 돌렸다.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보병대, 기병대, 포병대 할 것 없이 모든 부대가 영웅적으로 활약해 주었어요. 그런데 중앙의 대포 두 문은 어쩌다 방치된 겁니까?” 그는 눈으로 누군가를 찾으며 물었다.
투신이 문지방에 나타나 장교들의 등 뒤에서 쭈뼛쭈뼛 걸어 나왔다.
준엄한 상관의 모습을 본 투신은 그제야 비로소 자신은 살아남았지만 대포를 두 문이나 잃어버린 죄와 불명예를 극심한 공포 속에서 떠올렸다. 그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미처 그 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모르겠습니다, 각하……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각하.”
“엄호 부대에서 몇 사람 차출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엄호 부대가 없었다는 것,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음에도 투신은 그 점을 말하지 않았다.
안드레이 공작은 투신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의 손가락들이 초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각하…….” 안드레이 공작이 특유의 날카로운 목소리로 침묵을 깼다. “장군께서 저를 투신 대위의 포병 중대로 파견하셨습니다. 저는 그곳에 갔다가 사람들과 말 3분의 2가 죽고 대포 두 문이 망가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어떤 엄호 부대도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성공은 무엇보다 이 포병 중대의 활약과 투신 대위를 비롯한 중대원들의 영웅적인 끈기 덕분입니다.” 말을 마친 안드레이 공작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곁을 떠났다.
바그라티온 공작은 투신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며 투신에게 물러가도 좋다고 말했다. 안드레이 공작은 그를 뒤따라 나갔다.
“고맙습니다. 저를 곤경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친절하신 부관님.” 투신이 그에게 말했다.
안드레이 공작은 투신을 바라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곁을 떠났다. 안드레이 공작은 슬프고 마음이 무거웠다. 이 모든 것이 너무도 낯설었고, 그가 기대한 것과 너무도 달랐다.
'저들은 누구일까? 저들은 왜 여기 있는 것일까? 저들은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언제 끝날까?’ 로스토프는 눈앞에서 계속 바뀌는 그림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팔의 통증은 계속 더 심해지고 있었다. 순간 그는 의식을 잃었다. 하지만 그 짧은 망각의 순간에 그는 꿈속에서 수많은 대상들을 보았다. 그는 어머니와 그녀의 크고 하얀 손을 보았다. 소냐의 가냘픈 어깨를, 나타샤의 눈동자와 웃음을, 특유의 목소리와 콧수염을 지닌 데니소프를, 텔랴닌을, 텔랴닌과 보그다니치와 자기 사이에 벌어졌던 모든 일들을 보았다.
"어이, 어디가 아픈가?” 몸집이 작은 병사가 모닥불 위에 루바시카를 털며 물었다.
로스토프는 병사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불 위에 흩날리는 작은 눈송이를 바라보며 러시아의 겨울을, 따뜻하고 밝은 집과 푹신한 털외투와 빠른 썰매와 건강한 육체와 가족들의 넘치는 사랑과 보살핌을 떠올리고 있었다. ‘난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을까!’ 그는 생각했다.
이튿날 프랑스군은 공격을 재개하지 않았고, 바그라티온 부대의 살아남은 병사들은 쿠투조프의 군대에 합류했다.
<제1권 제2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