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4)

제2권 제1부

by Andy강성

[제2권]

제1부

1


1806년 초, 니콜라이 로스토프는 휴가를 받아 돌아왔다. 데니소프보로네시(모스크바에서 약 450킬로미터 떨어진 러시아 남부의 도시)의 집으로 가는 길이어서 로스토프는 모스크바까지 함께 가서 자기 집에 머물라고 그를 설득했다. 끝에서 두 번째 역참에서 동료를 만난 데니소프는 그와 술을 세 병이나 마시고 역마가 끄는 썰매 바닥에 너부러져 길이 울퉁불퉁한데도 모스크바에 닿을 때까지 로스토프 옆에서 한 번도 깨지 않았다.


마침내 썰매가 현관 계단 입구를 향해 오른쪽으로 돌았다. 그는 썰매가 멎기도 전에 훌쩍 뛰어내려 현관으로 달려 들어갔다. 누군가가 이미 젊은 주인을 보고 알렸는지 그가 응접실로 달려가기도 전에 옆문에서 무언가가 폭풍처럼 맹렬하게 달려 나와서는 그를 안고 입을 맞추었다. 다른 문에서, 또 다른 문에서, 다른 존재가, 똑같아 보이는 또 다른 존재가 뛰쳐나왔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사이에 데니소프가 방으로 들어서다가 그들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닦았다. “바실리 데니소프입니다. 아드님의 친굽니다.” 그는 의아하게 바라보는 백작에게 자신을 소개하며 말했다. “어서 와요. 압니다, 알다마다요.” 백작이 데니소프에게 입을 맞추고 얼싸안으며 말했다. “니콜루시카가 편지에 썼지요..."


소냐는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그에게 충격을 주었다. 로스토프가 그녀를 잠깐 보았을 때 그녀는 더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는 열여섯 살의 매력적인 소녀였고, 분명 그를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이 점을 단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다른 즐거움과 일들이 너무 많다! 그는 생각했다. ‘난 자유로운 몸으로 남아야 해.’


"그런데 넌 어때? 보리스를 배신한 거 아니야?” 오빠가 물었다.

“바보 같은 소리!” 나타샤가 깔깔거리며 소리쳤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해서도, 그 누구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아. 알고 싶지도 않고.”

“그럴 수가! 왜 그렇게 된 거야?”

“난 누구와도 결혼하고 싶지 않아. 보리스를 보면 똑같이 말할 거야.”


2


3월 초에 일리야 안드레예비치 로스토프 노백작은 영국 클럽에서 바그라티온 공작의 환영 만찬을 준비하는 일로 정신이 없었다. 백작은 클럽의 창립 멤버이자 간사였다. 그는 클럽으로부터 바그라티온을 위한 환영회 준비를 위임받았다. 그처럼 아낌없이 넉넉하게 연회를 준비할 사람이 드문 데다, 특히 연회 준비에 돈이 필요할 경우 자기 돈을 보탤 수 있고 또 기꺼이 보태려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인 3월 3일 오후 1시에서 2시 사이, 만찬에 모인 영국 클럽 회원 250명과 손님 50명은 귀빈이자 오스트리아 원정의 영웅인 바그라티온 공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소식을 접한 모스크바는 처음엔 당혹에 빠졌다. 그러나 얼마 후 배심원들이 협의실에서 나오듯 클럽에서 견해를 제시하던 세도가들이 그 원인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인들의 배신, 열악한 군량, 폴란드인 프르제비솁스키와 프랑스인 랑주롱의 배신, 쿠투조프의 무능, 그리고 보잘것없는 나쁜 사람들을 신뢰한 (사람들은 조용히 수군거렸다) 군주의 젊은 나이와 미숙함. 그러나 군대는, 러시아 군대는 대단해서 용맹의 기적을 이루어 냈다고 다들 입을 모아 말했다. 병사들, 장교들, 장군들은 영웅이었다. 하지만 영웅 중의 영웅은 쇤그라벤 전투와 아우스터리츠 퇴각으로 명성을 떨친 바그라티온 공작이었다. 그 같은 경의에는 쿠투조프에 대한 혐오와 비난이 무엇보다도 잘 표현되고 있었다.


“풀을 바르고 또 발라라. 그러면 자기 몸에도 온통 풀이 묻을 것이다.” 아군의 패배를 과거의 승리에 대한 추억으로 위안 삼던 돌고루코프 공작이 한 말을 온 모스크바가 되풀이하고 있었다. 또한 프랑스 군인들을 전투에 끌어내려면 화려한 문구를 써야 하고, 독일인들과는 후퇴가 전진보다 더 위험하다고 설득하면서 논리적으로 따져야 하지만, 러시아 군인들은 단지 억제시키며 “더 천천히!”라고 당부하기만 하면 된다는 라스톱친의 말도 회자되었다.


아군 병사들과 장교들이 아우스터리츠에서 보여 준 용기의 개별 사례에 대한 새롭고 새로운 이야기들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그 중에는 베르크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서, 그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가 오른판에 부상을 입어 왼손으로 장검을 쥐고 전진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볼콘스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를 가까이 알던 사람들만 그가 임신한 아내를 괴짜 아버지에게 남겨 두고 일찍 죽은 것을 애석해할 뿐이었다.


3


3월 3일, 영국 클럽의 모든 방마다 이야기를 나누는 목소리들로 웅성거렸다. 참석한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 지긋한 명망가들이었는데, 그들은 익숙한 자리에 앉아 익숙한 일정한 소모임을 이루었다. 참석자들 가운데 소수는 뜻밖의 손님들이었다. 주로 청년들이었는데, 그중에는 데니소프와 로스토프 그리고 다시 세묘놉스키의 장교가 된 돌로호프도 있었다. 네스비츠키는 클럽의 오랜 회원으로 또한 그곳에 있었다.


아내의 명령에 따라 머리카락을 기르고 안경을 벗고 유행하는 옷을 입은 피에르는 슬프고 우울한 표정으로 홀을 거닐었다. 나이로 보면 그는 젊은 사람들 틈에 끼어야 했지만 재산과 인맥에 따라 그는 존경받는 노인 손님들의 모임에 속했다. 그래서 그는 이 모임과 저 모임을 오갔다. 중심으르 이루는 이들은 저명한 부류에 속하는 논인들이었다. 큰 모임들은 라스톱친 백작과 발루예프와 나리시킨 주위에 꾸려졌다.


벨 소리가 울렸다. 이 방 저 방에 흩어져 있던 손님들이 삽 위에서 흔들리는 호밀처럼 한 무더기로 몰려나와 홀의 문 옆에 있는 큰 응접실에 멈춰 섰다. 현관방 문가에 바그라티온이 모자도 장검도 없이 나타났다. 클럽 관례에 따라 수위에게 맡기고 온 것이다. 몸에 꼭 맞는 새 군복을 입고 가슴 왼편에 별 모양의 게오르기 훈장이며 러시아와 외국의 훈장들을 달고 있었다.


“건배할 일이 많을 겁니다. 이제 시작할 때입니다!” 그는 이렇게 속삭이고는 샴페인 잔을 잡고 일어섰다. 모두 입을 다물고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황제 폐하의 건강을 위하여!” 그가 외쳤고, 순간 선량한 두 눈은 기쁨과 환희의 눈물로 젖었다. 이때 「승리의 우렛소리여, 울려라」가 연주되었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우라!” 하고 외쳤다. 바그라티온도 쇤그라벤 벌판에서 외쳤을 때와 똑같은 목소리로 “우라!” 하고 부르짖었다.



"우라" 또다시 3백 명의 손님들이 외쳤고, 연주 대신 파벨 이바노비치 쿠투조프(총사령관과는 다른 인물, 원로원 의원이자 시인)의 칸타타를 합창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러시아인들을 가로막는 모든 방해가 헛되도다,

용맹은 승리의 증표라,

우리에게는 바그라티온들이 있으니

모든 적들이 우리 발아래 있으리라…….


4


피에르돌로호프와 니콜라이 로스토프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는 만찬 내내 침묵을 지켰다. 그를 괴롭히던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모스크바에서 공작 영애가 그의 아내와 돌로호프의 친밀한 관계에 대해 던진 암시와 오늘 아침 받은 익명의 편지였다. 편지에는 모든 익명의 편지 특유의 비열한 조롱과 함께 그가 안경을 쓰고도 잘 보지 못하며, 그의 아내와 돌로호프의 관계는 오직 그 한 사람게만 비밀이라고 쓰여 있었다.


돌로호프는 피에르와 흥청망청 놀던 친구라는 관계를 이용해 곧장 그의 집으로 찾아왔고, 피에르는 그를 집에 묵게 하면서 돈도 빌려 주었다. 피에르는 돌로호프가 집에서 지내는 것에 대해 엘렌이 생글거리며 불만을 드러내던 일, 돌로호프가 그 앞에서 뻔뻔하게 그의 아내의 미모를 칭찬하던 일, 돌로호프가 모스크바에 도착한 순간부터 단 한 순간도 그들 부부와 떨어지지 않았던 일을 떠올렸다.


피에르는 눈을 내리깐 채 돌로호프를 쳐다보지도, 그에게 대꾸하지도 않고 자기 잔을 마셨다. 쿠투조프의 칸타타를 나눠 주던 하인이 피에르를 더 존경할 만한 귀빈으로 대우하며 그의 앞에 종이를 놓았다. 그가 그것을 집으려 하자 돌로호프가 몸을 숙이고 그의 손에서 종이를 낚아채 읽기 시작했다.

“멋대로 가져가지 마시오!” 그가 소리쳤다.


돌로호프는 유쾌함과 잔혹함을 띤 눈을 빛내면서 ‘아, 바로 이런 게 내가 좋아하는 거지’ 하고 말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피에르를 바라보았다.

“주지 않겠습니다.” 그는 또박또박 분명히 말했다.

얼굴이 창백해진 피에르가 입술을 바들바들 떨며 종이를 잡아챘다.

“당신…… 당신은…… 악당이야! 당신에게 결투를 청합니다.” 그는 의자를 밀치고 테이블에서 일어섰다.



다음 날 오전 8시, 피에르와 네스비츠키는 소콜니츠키 숲에 도착하여 이미 와 있던 돌로호프와 데니소프와 로스토프를 발견했다. 피에르는 눈앞의 일과 전혀 상관없는 어떤 생각에 몰두한 사람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핼쑥해진 얼굴이 누런빛을 띠었다. 밤새 자지 않은 듯싶었다.


모든 것이 준비되고, 두 사람이 걸어서 다가가야 할 한계선을 표시하기 위해 기병도가 눈 속에 박히고 피스톨이 장전되자 네스비츠키가 피에르에게 다가갔다.

“백작, 만약 이처럼 중요한, 너무나도 중요한 순간에 내가 당신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는 소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 일이 이유도 충분하지 않을뿐더러 피를 흘릴 만한 가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잘못했습니다. 당신이 잠시 흥분한 겁니다…….”


“아, 그래요, 끔찍할 정도로 어리석은 짓이지요…….” 피에르가 말했다.

“그러니 내가 당신의 유감을 전달하게 해 주십시오. 난 상대방도 당신의 사죄를 받아들이는 데 동의할 거라고 확신합니다.” 네스비츠키가 말했다.

“아니요,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피에르가 말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럼 준비됐습니까?” 그는 덧붙였다. “어떻게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로 쏘아야 할지만 알려 주십시오.” 그는 어색하고도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떤 사과도 절대 있을 수 없어.” 돌로호프는 그의 편에서 역시 화해를 시도한 데니소프에게 이렇게 대꾸하고는 정해진 장소로 다가갔다. 눈이 계속 녹고 있었고, 여전히 안개가 깔려 있었다. 마흔 걸음 떨어진 두 사람에게는 서로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3분이 흐르자 이미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시작하기를 주저했다. 다들 침묵했다.


5


“두 사람 모두 화해를 거부했으니 이제 시작하는 게 어떨까요? 피스톨을 쥐고 ‘셋’ 하는 말이 들리면 서로를 향해 걸어가십시오.” “하나! 둘! 셋……!” 데니소프는 성난 목소리로 외치고 옆으로 물러났다. 두 사람은 안개 속에서 서로를 확인하며 사람들의 발길에 다져져 생긴 길을 따라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갔다. 두 적수에게는 한계선까지 가는 동안 언제든 원할 때 피스톨을 쏠 권리가 있었다. 돌로호프는 밝게 빛나는 하늘색 눈으로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며 피스톨을 들어 올리지 않은 채 천천히 걸어갔다.


셋이란 말에 피에르는 사람들의 발에 다져진 길에서 벗어나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빠르게 걸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피에르는 피스톨을 쥔 오른손을 앞으로 쭉 뻗고 있었다. 피에르는 발밑을 쳐다보고 다시 돌로호프를 재빨리 쳐다본 뒤 배운 대로 손가락을 당겨 피스톨을 쏘았다. 연기 뒤에서 그의 형체가 나타났다. 한 손은 왼쪽 옆구리를 꽉 누르고 다른 손은 축 늘어뜨린 피스톨을 쥐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가 양쪽 한계선 사이의 공간을 막 넘어가려는데 돌로호프가 소리쳤다. “한계선으로!” 피에르는 사태를 파악하고 자기 쪽 기병도 곁에 멈춰 섰다. 그는 차가운 눈을 삼키고 핥았다. 입술은 바들바들 떨렸지만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두 눈은 마지막으로 힘을 모으려는 노력과 적의로 빛났다. 그가 피스톨을 들고 조준했다. “옆으로, 피스톨로 몸을 막아요.” 네스비츠키가 외쳤다.

“몸을 막아요!” 데니소프조차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적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피에르는 연민과 후회가 깃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무력하게 두 팔과 두 다리를 벌린 채 넓은 가슴을 돌로호프 앞에 쫙 펴고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데니소프와 로스토프와 네스비츠키는 실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총소리와 돌로호프의 적의에 찬 고함 소리를 들었다.

“빗나갔어!” 돌로호프가 외치고는 힘없이 눈 위로 엎어졌다.



로스토프와 데니소프는 부상당한 돌로호프를 데려갔다. 돌로호프는 눈을 감은 채 말없이 썰매에 누워 있다가 모스크바에 들어서자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힘겹게 고개를 들더니 옆에 앉은 로스토프의 손을 잡았다.

“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 나의 천사, 열렬히 사랑하는 나의 천사, 어머니.” 그러더니 돌로호프는 로스토프의 손을 쥐고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흥분이 가라앉자 그는 자신이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으며, 어머니가 죽어 가는 그를 보면 견디지 못하시리라는 것을 로스토프에게 털어놓았다. 그러고는 어머니에게 가서 미리 마음의 준비를 시켜 달라고 애원했다. 로스토프는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먼저 갔다가, 이 광포한 인간이, 결투광 돌로호프가 늙은 어머니와 척추 장애를 가진 누이와 함께 사는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한 아들이자 오빠였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


6


피에르는 최근에 아내와 얼굴을 마주한 적이 별로 없었다. 결투를 벌인 다음 날 밤, 그는 종종 그랬듯 침실로 가지 않고 아버지의 거대한 서재에 있었다. 마음속에 이런저런 감정과 상념과 기억의 폭풍이 갑자기 너무도 강하게 일어서 잠을 이룰 수도, 자리에 앉아 있을 수도 없었던 탓에 그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방 안을 돌아다녔다.


'내가 뭘 잘못한걸까' 그는 물었다. ‘네 잘못은 네가 그녀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결혼한 것, 네가 자신도 그녀도 속인 것이다.’ 그러자 바실리 공작의 집에서 저녁 식사 후 내면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그 말,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했던 순간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모든 것이 그 때문인가? 난 그때도 느꼈다.’ 그는 생각했다. ‘그때도 그 일이 옳지 않다고, 나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고 느꼈어. 결국 이렇게 됐어.’


‘왜 그녀에게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했을까?’ 그는 속으로 계속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렇게 열 번이나 그 질문을 되풀이하고 나자 몰리에르의 “빌어먹을, 도대체 그는 그 갤리선에서 무엇을 하려던 거지?”라는 문구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밤에 그는 시종을 불러 페테르부르크로 떠날 채비를 하라고 일렀다. 그녀와 한 지붕 아래 있을 수는 없었다. 이제 그녀와 말을 나누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다음 날 떠나기로, 그리고 그녀에게는 영원히 그녀와 이별하고자 한다는 편지를 남기기로 결심했다.


아침에 시종이 커피를 들고 서재에 들어왔을 때 피에르는 오토만에 누워 책을 펼쳐 든 채 자고 있었다. 그녀가 침착하고 당당하게 방으로 들어왔다. 살짝 튀어나온 대리석 같은 이마에 분노의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녀는 결투 이야기를 듣고 온 것이다.


“여기 대단한 용사가 나셨군요! 자, 대답해요, 그 결투는 뭐죠? 그걸로 뭘 입증하려 한 건가요? 뭐예요? 내가 당신에게 묻고 있잖아요.” 피에르는 소파 위에서 굼뜨게 돌아누워 입을 열었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당신이 대답하지 않겠다면 내가 말해 주죠…….” 엘렌이 말을 이어 갔다. “당신은 사람들이 당신에게 하는 말을 다 믿고 있어요.” 엘렌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돌로호프가 내 정부라고 말이에요.”


그녀는 다른 어떤 말도 그렇듯, 특유의 천박하리만치 정확한 말로 ‘정부’라는 단어를 발음하며 프랑스어로 말했다. “그리고 당신은 그 말을 믿었어요! 하지만 당신이 그걸로 입증한 게 도대체 뭐죠? 그 결투로 뭘 입증했나요? 당신이 바보라는 거죠, 당신이 바보라는 것 말이에요. 다들 그 점을 잘 알고 있어요. 이게 어떤 결과를 낳을까요? 난 온 모스크바의 웃음거리가 되겠죠."


다들 당신이 취한 모습으로 정신이 나가서 아무 근거 없이 질투하던 사람에게 결투를 청했다고 하겠죠.” 엘렌이 점점 목소리를 높이며 열을 올렸다. “모든 면에서 당신보다 뛰어난 사람에게요…….”

“어떻게 당신은 그 사람이 내 정부라고 믿을 수 있어요……? 어떻게요? 내가 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해서요? 만약 당신이 더 똑똑하고 더 유쾌한 사람이라면 나도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을 더 좋아하겠죠.” 당신 같은 남편과 살면서 정부를 (데 자망을) 두지 않는 아내는 아마 없을 거예요.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어요.”


“우리, 헤어지는 게 좋겠소.” 그는 띄엄띄엄 말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헤어지죠. 단, 당신이 나에게 재산을 준다면요.” 엘렌이 말했다. “헤어지자고요? 그런 걸로 위협하다니!”

피에르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비틀거리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죽여 버리겠어!” 그는 이렇게 소리치고는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한 힘으로 탁자의 대리석 상판을 붙잡고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향해 번쩍 쳐들었다.


그는 상판을 내동댕이쳐 부수고는 두 팔을 벌린 채 엘렌에게 다가가며 소리쳤다. “꺼져!” 온 집안에 그 고함 소리가 끔찍하게 들릴 정도로 너무나 무시무시한 목소리였다. 엘렌이 방에서 달아나지 않았다면 그 순간 피에르가 무슨 짓을 했을지는 하느님만 아실 일이다. 일주일 후 피에르는 자기 재산의 대부분을 이루는 대러시아에 있는 모든 영지의 관리를 아내에게 위임하고 혼자 페테르부르크로 떠났다.



7


아우스터리츠 전투와 안드레이 공작의 전사 소식이 리시예 고리에 전해진 지 두 달이 지났다. 대사관을 통해 아무리 편지를 보내도, 아무리 수색을 해도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고 포로 명단에도 이름이 없었다. 신문들에는 러시아군이 눈부신 전투 이후에 퇴각해야 했고 그 퇴각이 질서 정연하게 이루어졌다는 기사가 언제나처럼 아주 간략하고 모호하게 실려 있었다.


신문이 아우스터리츠 전투 소식을 전한 지 일주일 후에 공작의 아들에게 닥친 운명을 알리는 쿠투조프의 편지가 당도했다. “내 눈앞에서 당신 아들은…….” 쿠투조프는 썼다. “연대의 선두에서 군기를 손에 쥐고 아버지와 조국에 걸맞은 영웅으로 쓰러졌습니다. 나와 전 군대가 유감스러워하는 바이나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지금까지도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살아 있다는 희망으로 나 자신과 당신을 달래고 싶습니다."


평소 시간에 맞춰 노공작의 방에 들어선 마리야 공작 영애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얼굴을 보았다. 갑자기 그녀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눈은 더 이상 사물을 또렷이 볼 수 없었다. 아버지의 얼굴에서, 슬퍼 보이지도 절망스러워 보이지도 않지만 적의에 차서 무리하게 자신을 억누르는 그 얼굴에서 그녀는 지금, 지금 끔찍한 불행이, 이제껏 겪은 적 없는 인생 최악의 불행이, 돌이킬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불행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머리 위에 드리워 자신을 짓누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버지! 앙드레예요?”

“더러운 놈들! 비열한 놈들!” 노인은 그녀에게서 얼굴을 돌리며 외쳤다. “군대를 괴멸시키다니, 병사들을 죽이다니! 뭘 위해서? 가라, 가, 리자에게 말해 줘라.”

마리야 공작 영애가 리자에게 갔을 때 작은 공작 부인은 일감을 들고 앉아서 임신한 여자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행복하고도 평온한 내면적인 눈빛을 띤 독특한 표정으로 마리야 공작 영애를 바라보았다.


"마리……." 그녀는 수틀을 물리고 몸을 뒤로 젖히며 말했다. "손 이리 줘 봐." 그녀는 공작 영애의 손을 잡아 자신의 배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의 눈이 기대에 차서 미소 짓고, 솜털이 보송한 입술른 위로 치켜 올라가서 어리아이 같은 행복한 모습으로 그녀의 옷 주름에 얼굴을 묻었다.

"무슨 일이야, 마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슬퍼져서……. 안드레이를 생각하니까 슬퍼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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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올케에게 말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며칠 내로 곧 닥칠 해산 날까지 올케에겐 끔찍한 소식을 숨기자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마리야 공작 영애와 노공작은 저마다 나름대로 자신의 슬픔을 견디며 숨겼다. 노공작은 희망을 품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안드레이 공작이 전사했다고 판단하여, 아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 오스트리아로 관리를 파견하면서도 정원에 세울 작정으로 그에게 모스크바에서 묘석을 사 오도록 분부했다.


8


“있잖아, 오늘 (요리사 포카가 그것을 부르는 대로) 프뤼슈티크(아침 식사) 때문에 몸이 안 좋아진 거 같아.”

“무슨 일이야, 언니? 얼굴이 창백하잖아. 이런, 너무 창백해.” 마리야 공작 영애가 특유의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걸음으로 올케에게 달려가며 깜짝 놀라 말했다.

공작 영애가 산파인 마리야 보그다노브나를 부르러 방에서 뛰어나갔다.

“오! 하느님! 하느님!” 하는 소리가 그녀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5분 후 공작 영애는 무언가 묵직한 것을 옮기는 소리를 자신의 방에서 들었다. 하인들이 안드레이 공작의 서재에 있던 가죽 소파를 침실로 옮기고 있었다. 노공작은 서재에서 뒤꿈치를 쿵쿵 울리며 이리저리 거닐다가 티혼을 마리야 보그다노브나에게 보내 어찌 되었는지 묻게 했다.

“공작님께 출산이 시작되었다고 보고하게.” 마리야 보그다노브나가 심부름 온 사람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티혼은 공작에게 가서 보고했다.


“어머나, 공작 영애님, 아가씨, 누가 프레시펙트로 말을 타고 와요!” 그녀가 창틀을 붙잡은 채 닫지 않고 말했다. “등불을 들었어요. 틀림없이 의사 선생님일 거예요…….”

“아, 하느님! 하느님, 감사합니다! 마중하러 가야 해요. 그분은 러시아어를 모르니까요.”

마리야 공작 영애는 숄을 걸치고서 말을 타고 오는 사람을 맞으러 달려갔다.


방한 부츠를 신은 발소리가 보이지 않는 계단 모퉁이를 따라 더 빨리 다가왔다. ‘안드레이야!’ 마리야 공작 영애는 생각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렇다면 너무 이상한 일이지.’ 그녀가 그렇게 생각한 바로 그 순간, 하인이 양초를 들고 서 있던 층계참에 옷깃이 눈으로 덮인 털외투를 입은 안드레이 공작의 얼굴과 형상이 나타났다. 그랬다. 바로 그였다.


9


작은 공작 부인은 하얀 실내용 모자를 쓴 채 베개를 베고 누워 있었다. (그녀는 방금 막 고통에서 풀려났다.) 땀이 송골송골 솟은 뜨거운 두 뺨 위에 검은 머리카락이 가닥가닥 달라붙어 있었다. 입술이 거무스름한 솜털로 덮인 매혹적인 작은 붉은 입이 벌어지면서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안드레이 공작은 방으로 들어가 그녀 앞에, 그녀가 누운 소파의 발치에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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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처럼 놀라서 불안하게 쳐다보던 빛나는 눈동자가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그에게 멈추었다. ‘난 당신들 모두를 사랑해요. 난 누구에게도 나쁜 짓을 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왜 내가 고통받는 거예요? 날 도와줘요.’ 그녀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보았다. 하지만 그가 그녀 앞에 지금 나타난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녀는 그가 온 것에 놀라지 않았을뿐더러 그가 온 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다시 진통이 시작되었고, 마리야 보그다노브나는 안드레이 공작에게 방에서 나가 줄 것을 청했다.

산부인과 의사가 방에 들어왔다. 안드레이 공작은 밖으로 나갔다가 마리야 공작 영애를 마주치자 그녀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끔찍한 비명 소리가 (그녀의 비명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렇게 비명을 지를 수 없었다) 옆방에서 울렸다. 안드레이 공작은 그녀의 방문으로 달려갔다. 비명은 멎었지만,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렸다. 의사가 창백한 얼굴로 턱을 덜덜 떨며 방에서 나왔다. 그는 아내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그가 5분 전에 보았던 그 자세로 죽은 채 누워 있었다.‘난 당신들 모두를 사랑했고 누구에게도 나쁜 짓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당신들은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죠? 아, 당신들은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요?’ 그녀의 매혹적인, 가련한 죽은 얼굴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부터 두 시간 뒤 안드레이 공작은 조용한 걸음으로 아버지의 서재로 들어갔다. 노인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문 바로 옆에 서 있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노인은 바이스같이 뻣뻣한 늙은 두 팔로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는 어린아이처럼 흐느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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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뒤에 작은 공작 부인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관 속에는 눈을 감기는 했지만 여전히 똑같은 얼굴이 있었다. 노인도 올라와 다른 한 손 위에 평화로이 그리고 높이 놓인 그녀의 창백한 작은 손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얼굴이 그에게 말했다. '아, 당신들이 나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그리고 왜 저지른 건가요?' 그 얼굴을 본 노인은 화가 나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닷새가 지났을 때, 어린 공작 니콜라이 안드레이치는 세례를 받았다. 사제가 작은 거위 깃털로 손바닥과 발바닥에 성수를 찍어 바르는 동안 유모는 턱으로 배내옷을 누르고 있었다. 대부인 할아버지는 젖먹이를 떨어뜨릴까 봐 겁이 나서 부들부들 떨며 아기를 안고 찌그러진 양철 성수반을 돌아 대모인 마리야 공작 영애에게 건넸다. 안드레이 공작은 성례가 끝나고 성수반에 던진 머리카락 붙은 밀랍이 가라앉지 않고 떠 있었다고(행복한 운명이 신생아를 기다린다는 미신이 있다) 전해 주는 보모의 말에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10


돌로호프와 베주호프의 결투에 로스토프가 관여한 사건은 노백작의 노력으로 무마되었다. 그리하여 로스토프는 자신이 예상한 대로 강등되는 대신 모스크바 총독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바람에 그는 가족과 함께 시골에 가지 못하고 새 직무를 수행하느라 여름 내내 모스크바에 남아 있었다. 돌로호프는 건강을 회복했다. 이 시기에 로스토프는 그와 각별히 친해졌다. 돌로호프는 열렬하고 부드럽게 그를 사랑하던 어머니의 집에 누워 있었다.


로스토프를 좋아하게 된 늙은 마리야 이바노브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래요, 백작님, 그 애는 오늘날같이 타락한 세상에 살기에는 마음이 지나치게 고결하고 깨끗해요.” 그녀는 말했다. “덕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모두의 귀에 거슬릴 뿐이지요. ..... 아니, 우리 시대에 간통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뭐 그가 그토록 질투심 강한 사람이라면, 난 이해해요, 미리 느끼게 해 줄 수도 있었잖아요. 1년이나 계속된 일인데요."


돌로호프도 회복기에 그에게서 결코 기대할 수 없었던 말들을 로스토프에게 종종 했다.

“사람들이 나를 나쁜 인간으로 생각한다는 걸 알아.” 그는 말했다. “그러라고 해.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알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바칠 만큼 사랑해. 나머지 사람들은 만약 내 길을 가로막으면 다 짓밟아 버릴 거야. 나에게는 내가 열렬히 사랑하는 너무도 소중한 어머니와 두세 명의 친구가 있어. 자네도 그중 하나야."


니콜라이 로스토프가 모스크바에서 보낸 1806년 겨울의 첫 시기는 그에게나 가족들 모두에게나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시절에 속했다. 니콜라이는 부모의 집에 많은 젊은이들을 끌어들였다. 베라는 스무 살의 아름다운 아가씨였고, 소냐는 갓 피어난 꽃송이 같은 매력이 넘치는 열여섯 살의 아가씨였다. 반은 아가씨고 반은 소녀인 나타샤는 때론 어린아이처럼 우스꽝스러웠고 때로는 아가씨처럼 매혹적이었다.


로스토프가의 집에 들락거리는 젊은이들 가운데 돌로호프는 가장 먼저 드나든 축에 속했다. 나타샤를 제외한 모든 가족들이 그를 마음에 들어 했다. 하지만 나타샤는 돌로호프 때문에 오빠와 싸울 뻔했다. 그녀는 돌로호프가 나쁜 사람이라고, 베주호프와의 결투에서 옳은 쪽은 피에르이고 잘못한 쪽은 돌로호프라고, 돌로호프는 불쾌하고 가식적인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여자들의 모임을 좋아하지 않던 돌로호프가 자주 집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누구 때문인가 하는 의문은 곧 (누구도 그 점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풀렸다. 소냐 때문이었다. 소냐도 차마 입 밖에 내어 말한 적은 없지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돌로호프가 나타나면 늘 얼굴이 쿠마치 천처럼 붉게 물들었다.


1806년 가을부터 모두들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1천 명당 열 명의 신병 징집뿐 아니라 1천 명당 아홉 명의 민병 모집이 결정되었다. 도처에서 보나파르트를 저주하는 소리가 들렸고, 모스크바에서는 전쟁이 임박했다는 소문만 나돌았다. 로스토프가로서는 이런 전쟁 준비에 대한 관심이 오직 니콜루시카가 축일 후 함께 연대로 떠나기 위해 데니소프의 휴가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점에 쏠려 있었다.


11


크리스마스 주간의 사흘째 되는 날, 니콜라이는 집에서 식사를 했다. 최근 들어 그에게 좀처럼 없던 일이었다. 주현절(예수가 대중 앞에 나선 것을 기념하는 예수 세례 기념 축일. 성탄절로부터 12일째 되는 날) 후에 데니소프와 함께 연대로 떠나기 때문에 이것은 공식적인 작별 만찬이었다. 돌로호프와 데니소프를 포함해 스무 명가량의 사람들이 만찬에 참석했다.


니콜라이는 여느 때처럼 말 네 마리가 기진맥진할 만큼 마차를 몰고서도 들러야 할 곳과 초대받은 곳을 다 돌아보지 못한 채 만찬 직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집 안에 사랑의 분위기가 팽팽하게 감도는 것을 느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모임을 이룬 사람들 가운데 몇 명을 지배하고 있는 이상한 당혹감을 눈치챘다. 감성이 풍부한 니콜라이는 만찬 전에 소냐와 돌로호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니콜라이는 나타샤를 불러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그에게 달려온 나타샤가 말했다. “내가 말했는데 오빠는 내 말을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지.”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돌로호프가 소냐에게 청혼했어.”

요사이 아무리 소냐에게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어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니콜라이는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상상이 가? 소냐는 거절했어. 깨끗하게 거절했단 말이야!” 나타샤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소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했어.” “엄마가 아무리 부탁해도 소냐는 거절했어. 난 알아. 소냐는 일단 무언가 말하고 나면 마음을 바꾸지 않아…….”

"엄마가 소냐에게 부탁했다고?" 니콜라이가 비난하는 투로 물었다.“니콜렌카, 화내지 마. 하지만 난 오빠가 소냐와 결혼하지 않을 거란 걸 알아. 내가 오빠한테 소냐를 보낼게.”


1분 뒤 소냐가 놀라고 당황하고 죄지은 얼굴로 들어왔다.

“소피…… 만약 당신이 훌륭하고 조건이 좋은 남편감을 거절하려 한다면, 그는 멋지고 고결한 남자이기도 한데……. 또 그는 내 친구고……. 만약 당신이 나를 위해 거절하는 것이라면 난 두렵습니다. 나에게…….”

소냐가 다시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애원이 담긴 놀란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니콜라, 나에게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그녀가 말했다.


“아니, 말해야 해요. 내가 당신에게 느끼는 이런 우정과 신뢰와 사랑의 감정은 누구에게도 품어 본 적이 없지만 난 숱하게 사랑에 빠졌고 앞으로도 많은 사랑을 하게 될 겁니다. 게다가 난 젊어요. 엄마는 이 일을 원하지 않고요.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 난 아무 약속도 할 수 없어요."

"내겐 그걸로 충분해요." 소냐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난 당신을 오빠로서 사랑하고, 언제나 사랑할 거예요.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당신은 천사입니다. 난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어쩌면 내가 당신을 속이고 있는게 아닐까 두렵습니다." 니콜라이는 한번 더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12


이오겔의 무도회는 모스크바에서 가장 즐거운 무도회였다. 이 무도회의 독특한 점은 주최를 맡은 남녀가 없다는 점이었다. 팔랑이는 깃털처럼 댄스 규칙에 따라 한 발을 뒤로 뺀 채 인사하며 모든 손님들에게 수업을 위한 표를 받는 선량한 이오겔이 있을 뿐이었다. 이오겔은 베주호프 저택의 홀을 빌렸고, 무도회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어여쁜 소녀들이 많았고, 특히 로스토프가의 아가씨들이 아름다운 축에 속했다. 이번 마지막 무도회에서는 에코세즈와 앙글레즈 그리고 이제 막 유행하기 시작한 마주르카(폴란드 민속춤)만 추었다.


새로 도입된 마주르카를 추기 시작했다. 이오겔은 선두에서 그의 자랑이자 최고의 학생인 나타샤와 짝을 이루어 춤을 추었다. 단화를 신은 조그만 두 발을 가볍고 부드럽게 옮기면서 이오겔은 부끄러워하기는 하지만 열심히 스텝을 밟는 나타샤와 함께 맨 앞에서 홀을 날아다녔다. 데니소프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자신이 춤을 추지 않는 것은 못 춰서가 아니라 그저 추고 싶지 않아서라고 분명히 말하는 그런 표정으로 기병도를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었다.


데니소프가 뛰어난 마주르카 솜씨로 폴란드에서조차도 명성을 떨친 사실을 알고 있던 로스토프는 나타샤에게 달려갔다. “가서 데니소프를 골라. 그럼 춤을 출 거야! 정말 굉장해!” 그가 말했다. 그녀는 리본 달린 신발을 신은 발로 재빨리 걸음을 옮기며 혼자 홀을 가로질러 데니소프가 앉은 한구석으로 수줍게 달려갔다. 기다리던 박자가 나오자 그는 의기양양하면서 익살스럽게 파트너를 옆으로 흘깃 쳐다보더니 느닷없이 한 발을 쿵 찍고 공처럼 탄력 있게 바닥에서 튀어 올랐다.


그러고는 파트너를 이끌면서 원을 그리며 날 듯이 돌았다. 그는 한 발로 홀의 절반을 가로지르며 소리 없이 날아가더니, 앞에 놓인 의자들을 보지 못한 듯 그쪽으로 곧장 질주했다. 그러다 갑자기 박자를 울리고 두 발을 벌리더니 뒤축을 딛고 잠깐 멈춰 섰다가, 박차를 요한하게 울리며 두 발로 한곳을 쿵 하고 구르고는 빠르게 빙글빙글 돌았다. 그런 다음 왼발로 오른발을 가볍게 치고 다시 원을 그리며 날아갔다. 나타샤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직감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를 따르며 자신을 맡겼다.


한참을 추고 난 후 그가 나타샤를 그녀의 의자 앞에서 잽싸게 돌린 후 박차를 울리며 허리 숙여 인사했을 때 그녀는 그에게 무릎을 굽혀 인사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마치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 미소를 머금은 얼굴에 당혹감을 드러내며 그를 응시했다. “이건 도대체 무슨 춤이에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이오겔이 이 마주르카를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다들 데니소프의 춤 솜씨에 매혹되어 끊임없이 그에게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청했다. 그는 땀을 닦으며 나타샤에게 다가앉아서 무도회 내내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13


그 후로 이틀 동안 로스토프는 자기 집에서도 그의 집에서도 돌로호프를 보지 못했다. 사흘째 되는 날, 그는 돌로호프로부터 쪽지를 받았다.

“자네도 아는 이유로 더 이상 자네 집엔 가지 않을 작정이고, 또 부대로 돌아갈 거라서 오늘 밤 친구들과 함께 송별회를 하려고 해. 영국 호텔로 와.”


그날 밤 9시가 넘어 로스토프가 영국 클럽에 갔을 때 돌로호프가 돈을 앞으로 밀고 패를 돌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로스토프는 그의 옆에 앉았고, 처음에는 게임에 끼지 않았다. 돌로호프가 그를 힐끗거렸다.

“안 하는 거지?” 돌로호프가 말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니콜라이는 카드를 받고 얼마라도 판돈을 걸어서 게임을 시작해야만 할 것처럼 느꼈다.

“돈이 없어.” 로스토프가 말했다.

“후불로 해도 돼!”


로스토프는 번번이 져서 그의 앞으로 기록된 빚은 8백 루블에 이르렀다. 그는 또 한 카드에 8백 루블을 적었다. 지난 일요일 일리야 안드레이치 백작은 아들에게 2천 루블을 주었다. 백작은 아들에게 5월 전까지 마지막 돈이니 이번에는 좀 더 알뜰하게 써 줄 것을 부탁했다. 니콜라이는 그 돈도 너무 많다고, 봄이 오기 전에는 맹세코 더 이상 돈을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제 그 돈에서 1천2백 루블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하트 7은 1천6백 루블을 잃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이 한 맹세를 어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네는 나와 승부하는 것이 두렵지 않은가 보군?” 돌로호프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고는 마치 즐거운 이야기라도 들려주려는 듯 카드를 내려놓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 빙글거리며 천천히 지껄이기 시작했다.

“내가 사기꾼이라는 소문이 모스크바에 무성하다지? 그러니 자네들에게 나를 조심하라고 충고하겠네.”

“어서 패나 돌려!” 로스토프가 말했다. 그는 자신이 갚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잃었다.

“그래도 도를 넘지는 마.” 돌로호프는 로스토프를 힐끔 쳐다보고 계속 패를 돌리며 말했다.


14


1시간 30분이 지나자 게임하던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게임을 장난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승부는 로스토프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1천6백 루블 대신 그의 앞으로 긴 열을 이룬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그는 1만 루블까지는 셈을 했지만 이제는 1만 5천 루블까지 올라갔으리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사실 기록된 숫자는 이미 2만 루블을 넘어섰다.


그는 그 기록이 4만 3천으로 늘어날 때까지 게임을 계속하기로 결심했다. 그 숫자를 선택한 이유는 43이 그와 소냐의 나이를 더한 값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는 암슈테텐 다리 위 전장에서 기도한 것처럼 하느님에게 기도하기도 하고, 탁자 아래 구겨진 카드 더미에서 그의 손에 들어오는 첫 카드, 그 카드가 자신을 구해 줄 것이라고 상상하기도 하고, 자신의 상의에 장식 줄이 몇 개인지 세어서 그와 똑같은 숫자의 카드에 지금까지 잃은 돈 전부를 걸어 보려고도 했다.


도움을 구하며 다른 도박꾼들을 둘러보기도 했고, 이제는 싸늘한 돌로호프의 얼굴을 쳐다보며 그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간파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내가 날린 그 돈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도 잘 알 텐데.’ 그는 속으로 말했다. ‘그가 나의 파멸을 바랄 리는 없잖아? 그는 나의 친구였어. 나는 정말 그를 사랑했는데……. 하지만 그의 잘못도 아니지. 운이 좋아서 그런 것인데 그가 뭘 어쩌겠어? 내 잘못도 아니야.’ 그는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방이 덥지도 않은데 그는 벌겋게 상기된 채 땀에 푹 젖어 있었다. 특히 침착하게 보이려는 무기력한 바람 때문에 그의 얼굴은 끔찍하고 가련했다. 결국 기록된 액수가 4만 3천이라는 숙명의 숫자에 다다랐다.

“나한테 4만 3천 루블의 빚을 졌군요, 백작.” 돌로호프가 말하고는 기지개를 켜며 탁자 앞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피곤하군. 너무 오래 앉아 있었어.” 그가 말했다.


“돈은 언제 받을 수 있을까요, 백작?”

로스토프는 얼굴을 확 붉히며 돌로호프를 다른 방으로 불렀다.

“들어 봐, 로스토프.” 돌로호프가 환한 미소와 함께 니콜라이의 눈을 보며 말했다. “자네도 이런 속담 알지? ‘애정 운이 좋은 자는 카드 운이 나쁘다.’ 자네 사촌 누이는 자네에게 푹 빠져 있더군. 난 알아.”

“내 사촌 누이는 이 일과 아무 상관 없어. 그녀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는 격분하여 소리쳤다.

“그럼 돈은 언제 받을 수 있을까?” 돌로호프가 물었다.

“내일.” 로스토프는 이렇게 내뱉고 방에서 나가 버렸다.


15


‘내일’이라고 말하면서 체면을 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혼자 집에 와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을 대하고, 자신의 행동을 고백하고, 맹세를 해 놓고 권리도 없는 돈을 청하는 것은 끔찍했다. 집에서는 사람들이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로스토프가의 젊은이들은 극장에서 돌아와 밤참을 먹고 클라비코드 옆에 앉아 있었다.


니콜라이가 홀에 들어서자마자 이 겨울 그들의 집을 지배한 사랑이 넘치는 시적인 분위기가 그를 사로잡았다. 이제 그 분위기는 돌로호프의 청혼과 이오겔의 무도회 이후 뇌우가 내리기 전의 대기처럼 소냐와 나타샤 위에 더욱 짙게 드리워진 듯 보였다. 데니소프는 클라비코드 앞에 앉아 건반을 치며 화음을 넣으면서 자신이 지은 시 「마법의 여인」을 노래했다. 그리고나서 나타샤를 설득하는 데니소프의 유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어떤 핑계도 안 됩니다. 당신이 「베네치아의 뱃노래」를 부를 차례라고요. 부탁합니다."


백작부인이 말없는 아들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 있니?" 어머니가 니콜라이에게 물었다.

"아, 아무 일 없어요." 그는 늘 똑같은 질문이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

‘우리 집 사람들은 항상 똑같아. 그들은 아무것도 몰라! 난 어디로 가야 하나?’ 니콜라이는 이렇게 생각하며 다시 클라비코드가 있는 홀로 향했다.


image.png [클라비코드 (Clavichord)]


'맙소사, 난 명예도 모르는 파멸한 인간이야. 이마에 총알 한 방, 남은 건 그거 하나야, 노래하는 게 아니라.' 그는 생각했다. '떠날까? 하지만 어디로? 상관없어, 노래하라 그래!' 니콜라이는 방 안을 계속 거닐었고, 침울하게 데니소프와 소녀들을 흘깃거리면서 그들의 시선을 피했다.

‘니콜렌카, 무슨 일 있어요?’ 그를 향한 소냐의 시선이 물었다. 그녀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금방 알아차렸다. 니콜라이는 그녀에게서 얼굴을 돌렸다.


데니소프의 부탁에 나타샤가 무용수들이 그러듯 고개를 살짝 들고 죽은 사람처럼 두 팔을 축 늘어뜨린 후 발뒤꿈치를 바닥에 내딛고 발가락 끝으로 걸음을 떼는 열정적인 움직임으로 홀 한가운데에 나아가 멈춰 섰다.

나타샤가 첫 음을 잡았다. 그녀의 목구멍이 확장되고, 가슴이 곧게 펴지고, 눈동자가 진지한 빛을 띠었다. 미소를 띤 입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누구나 똑같은 시간 동안 똑같은 음정으로 낼 수 있는 소리였지만, 천 번은 당신을 냉담하게 내버려 두다가 천한 번째에야 당신을 전율하고 흐느끼게 만드는 소리였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니콜라이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쟤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오늘은 정말 잘 부르잖아!’ 그는 생각했다. 불현듯 그에게는 온 세상이 다음 음, 다음 악절에 대한 기대에 집중한 것 같았고, 세상의 모든 것이 3박자로 나뉜 것 같았다. 니콜라이는 생각했다.

'이 모든 것, 불행도, 돈도, 돌로호프도, 악의도, 명예도, 이 모든 게 다 부질없어……. 바로 이게 진짜야'


니콜라이는 자기도 깨닫지 못한 사이에 나타샤의 시 음을 박쳐 주기 위해 노래하고 있었다. '오, 하느님! 얼마나 아름다운가! 내가 정말 이 소리를 낸 건가? 정말 행복하다! 그는 생각했다.아, 그 3도 화음이 어떻게 떨렸던가! 로스토프의 영혼 속에 있는 가장 고귀한 무언가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던가! 그 무언가는 세상 그 무엇과도 상관이 없고, 세상 그 무엇보다 고귀한 것이었다. 카드놀이에서 돈을 잃은 것, 돌로호프도, 맹세도, 그런 게 다 뭐란 말인가! 다 시시하다! 사람을 죽이고 도둑질을 한다 해도 여전히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16


로스토프가 이날처럼 음악에서 그런 희열을 맛본 것은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나타샤가 「베네치아의 뱃노래」를 끝내자마자 다시 현실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홀을 나와 아래층의 자기 방으로 향했다. 15분 후 노백작이 즐겁고 흡족한 모습으로 클럽에서 돌아왔다. 니콜라이는 노백작이 도착하는 소리를 듣고 그에게 갔다.


“아버지, 볼일이 있어서 왔어요. 깜빡 잊어버릴 뻔했네요. 돈이 필요해요.” “도박에서 돈을 약간, 아니 많이, 아주 많이 잃었어요. 4만 3천이오.” "내일 갚겠다고 약속했어요." 니콜라이가 말했다.

“이런!” 노백작은 두 팔을 벌리며 말하고는 힘없이 소파에 주저앉았다.

“아버지! 아……버지!” 그는 흐느끼며 뒤에서 아버지를 향해 외쳤다. “절 용서해 주세요!” 그러고는 아버지의 손을 와락 잡아 입술을 꼭 대며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와 아들이 상의하는 동안 어머니에게는 딸과 못지않게 중요한 해명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타샤가 흥분해서 어머니에게 달려왔다.

“엄마! 엄마……! 그 사람이 나한테 했어요…….”

“뭘 해?”

“했어요, 청혼을 했어요. 엄마! 엄마!” 그녀가 외쳤다.


“무슈 데니소프가 너한테 청혼한 게 사실이라면, 그 사람에게 바보라고 말해 줘라. 그걸로 충분해."

"아니에요. 그 사람은 바보가 아니라고요." 나타샤는 모욕감을 느끼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넌 어떻게 하고 싶어? 너희는 요즘 다들 사랑에 빠진 모양이구나. 그래, 사랑하면 결혼하렴.” 백작 부인이 화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길!”

“아뇨, 엄마, 난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요.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게 분명해요.”


나타샤는 응접실을 가로질러 홀로 달려갔다. 데니소프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앉아 있었다.

"나탈리." 그가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내 운명을 결정해 주십시오. 내 운명은 당신의 손에 달렸습니다!"

"바실리 드미트리치, 난 당신이 너무 가여워요! 아니에요, 당신은 너무나 훌륭한 분인데……. 그렇지만 안 돼요…… 그렇게는……. 하지만 난 당신을 늘 사랑할 거예요."


데니소프는 백작 부인을 바라보았고, 그녀의 엄한 표정을 알아채고는……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백작 부인"하고 말하면서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고 나타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빠르고 단호한 걸음으로 방에서 나갔다. 이튿날 로스토프는 모스크바에 단 하루도 더 이상 더 머물려 하지 않은 데니소프를 전송했다. 모스크바에 있는 친구들이 집시의 집에서 데니소프를 배웅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썰매에 눕혀졌는지, 처음 세 개의 역참을 어떻게 지나쳤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데니소프가 떠난 후 로스토프는 노백작이 그렇게 갑자기 마련할 수 없던 돈을 기다리며 모스크바에서 2주를 더 보냈다. 그는 집 밖에 나가지 않고 아가씨들의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소냐는 그에게 전보다 더 헌신적이고 다정했다. 그러나 니콜라이는 이제 자신이 그녀에겐 합당치 않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4만 3천 루블을 다 보내고 돌로호프에게 영수증을 받은 뒤 이미 폴란드에 가 있던 연대를 쫓아 11월 말에 집을 떠났다.

<제2권 제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