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8)

제2권 제5부

by Andy강성
제5부

1


피에르는 안드레이 공작과 나타샤의 혼담 이후 별다른 뚜렷한 이유도 없이 갑자기 이전의 삶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음을 느꼈다. 그가 그토록 열정적으로 빠져든 자기완성의 내적 노동에 처음 몰입하던 무렵이 아무리 기쁨으로 넘쳤어도 안드레이 공작과 나타샤의 약혼 이후,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소식을 받은 이오시프 알렉세예비치의 죽음 이후 예전의 삶은 돌연 그에게 모든 매력을 잃고 말았다.


그는 일기 쓰기를 중단하고, 교단 모임을 피하고, 다시 클럽에 나가고, 다시 폭음을 하고, 다시 독신자 친구들과 가까이 지내고, 옐레나 바실리예브나 백작 부인이 엄하게 책망할 필요가 있다고 여긴 그런 삶을 영위하기 시작했다. 아내가 옳다고 느낀 피에르는 그녀의 평판을 해치지 않기 위해 모스크바로 떠났다.


모스크바의 사교계는 노파부터 어린아이까지 모두 늘 자리를 준비해서 비워 둔 채 오랫동안 기다리던 손님인 양 피에르를 맞았다. 모스크바 사교계의 눈에 피에르는 더할 나위 없이 친근하고 선량하고 똑똑하고 유쾌하고 관대한 괴짜이자, 멍하면서 다정다감한, 예스러운 러시아 지주였다. 그의 지갑은 모든 이들을 위해 열리는 터여서 늘 비어 있었다.


7년 전 외국에서 막 왔을 때 그는 진심으로 러시아에 공화국을 세우기를 갈망하고, 때로는 나폴레옹이, 때로는 철학자가, 때로는 전술가가 되어 나폴레옹에 대한 승리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의 그는 부정한 아내를 둔 부유한 남편, 먹고 마시고 단추를 푼 채 정부를 가볍게 욕하기를 즐기는 퇴직 시종, 모스크바의 영국 클럽 회원이자 모두에게 사랑받는 모스크바 사교계의 일원이었다.


그의 눈에는 모든 분야의 일이 악과 기만에 결부되어 있었다. 그가 무엇이 되려 하든 그가 무슨 일에 손을 대든, 악과 거짓은 그를 밀치고 모든 활동의 길을 가로막았다. 오직 술의 영향을 받을 때에만 그는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난 이걸 풀어낼 거야. 이제 난 해명할 준비가 되어 있어. 지금은 시간이 없을 뿐이야. 나중에 이 모든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겠어!’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나중은 결코 오지 않았다.



2


초겨울에 니콜라이 안드레이치 볼콘스키 공작은 딸과 함께 모스크바로 왔다. 그의 과거 때문에, 그의 지성과 독창성 때문에, 특히 그 무렵 알렉산드르 1세의 통치에 대한 열광이 시들해졌기 때문에, 그리고 당시 모스크바를 지배하던 반프랑스적 애국주의의 기류 때문에 니콜라이 안드레이치 공작은 이내 모스크바 사람들에게 특별한 존경의 대상이자 모스크바 반정부 세력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해 공작은 부쩍 늙었다. 그럼에도 노인이 특히 저녁에 모피 외투와 분 바른 가발 차림을 하고 차를 마시러 나가서는 누군가의 부추김으로 지난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띄엄띄엄 늘어놓거나 현재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한층 더 띄엄띄엄 개진하기 시작할 때면 모든 손님들에게 한결같이 정중한 경의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방문객들은 자신들의 주인 가족을 본 이 두세 시간 이외에도 그 집안의 은밀한 내적 삶이 흘러가던 스물두 시간의 밤낮이 더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 내적인 삶은 최근 모스크바에서 마리야 공작 영애에게 몹시 힘겨워졌다. 마리야 공작 영애는 결혼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내려놓았다. 마리야 공작 영애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모스크바에 와서 그녀는 가장 가까운 두 사람에게 환멸을 느꼈다. 예전에도 온전히 진솔하게는 대할 수 없었던 마드무아젤 부리엔은 이제 그녀에게 불쾌하게 느껴졌다.


모스크바에 있었고, 마리야 공작 영애가 5년 동안 계속 편지를 보냈던 줄리는 개인적으로 다시 만났을 때 그녀에게 완전히 낯선 느낌을 주었다. 그 무렵 줄리는 오빠들의 죽음으로 모스크바에서 가장 부유한 신붓감 중 한 명이 되면서 사교계의 즐거움에 한창 빠져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갑자기 그녀의 진가를 발견한 청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그사이 새로운 슬픔이 많이 늘었다. 안드레이 공작이 돌아와 결혼할 시기는 다가오는데, 아버지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그의 부탁은 실현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일이 더 엉망이 된 것 같았다. 늘 기분이 좋지 않던 노공작은 로스토바 백작 영애의 이름을 듣기만 해도 벌컥 화를 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슬픔은 언제나 딸에게로 향한, 최근에는 잔혹할 정도로 심해진 아버지의 불같은 성격이었다.


최근 그에게서 마리야 공작 영애를 무엇보다 괴롭히던 새로운 양상이 나타났다. 마드무아젤 부리엔을 훨씬 더 가까이 한다는 점이었다. 최근 들어 오직 딸을 모욕하기 위해 집요하게 마드무아젤 부리엔에게 특별한 총애를 보이고, 부리엔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것으로 딸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건 추악하고 저열하고 비인간적인 짓이에요. 약점을 이용해서……." "내 방에서 썩 나가요"그녀는 방에 들어온 마드무아젤 부리엔에게 소리를 지르고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3


1811년 모스크바에는 빠르게 인기를 얻은 프랑스인 의사가 살았다. 키가 매우 크고 잘생기고 프랑스인답게 친절하고, 모스크바의 모든 사람들이 말하던 대로 범상치 않은 의술을 지녔던 그 의사는 메티비에였다. 의학을 비웃던 니콜라이 안드레이치 공작은 최근 마드무아젤 부리엔의 조언을 받아들여 그 의사를 자기 집에 출입하도록 허락했고 그에게 익숙해졌다. 메티비에는 일주일에 두어 번 공작에게 다녀갔다.


공작의 명명일인 성 니콜라이의 날에 온 모스크바 사람들이 그의 집 현관 계단 입구에 모여들었지만 그는 누구도 맞아들이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자신이 마리야 공작 영애에게 건넨 명단 속의 소수의 사람들만 만찬에 부르도록 일렀다. 아침에 축하 인사를 하러 찾아온 메티비에는 억지로 지시를 거스르는 것이 의사로서의 예의라고 생각해 공작의 방에 들어갔다. 때마침 명명일 아침에 노공작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처음에는 메티비에의 목소리만 들렸고, 이어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다음엔 두 목소리가 동시에 말하기 시작하더니 문이 활짝 열렸다. 검은 앞머리를 볏처럼 세운 겁에 질린 메티비에의 잘생긴 형상과, 나이트캡과 할라트 차림에 얼굴을 광포하게 일그러뜨리고 눈동자를 내리깐 공작의 형상이 문지방에 나타났다.


“모른다고?” 공작이 소리쳤다. “난 알지! 프랑스 스파이! 보나파르트의 노예, 스파이, 내 집에서 꺼져. 당장 꺼지란 말이다!” 그러고는 문을 쾅 닫았다.

메티비에는 어깨를 으쓱하며 옆방의 고함 소리에 달려온 마드무아젤 부리엔에게 다가갔다.

“공작님은 지금 건강한 상태가 아닙니다. 담즙에 뇌 충혈(腦充血)이에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일 들르겠습니다.” 메티비에는 이렇게 말하고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허둥지둥 나갔다.


2시에 여섯 명의 선택받은 인물이 만찬에 모였다. 유명한 라스톱친 백작, 로푸힌 공작과 그 조카, 공작의 옛 전우인 차트로프 장군 그리고 젊은 사람으로는 피에르와 보리스 드루베츠코이였다. 그들은 응접실에서 노공작을 기다렸다. 식사 때 대화는 최근의 정치 소식, 올덴부르크 공작의 영토에 대한 나폴레옹의 침탈과 러시아가 유럽의 모든 궁정에 보낸 나폴레옹을 규탄하는 외교 문서에 관해 이루어졌다.


니콜라이 안드레이치 공작은 활기를 띠고 눈앞에 닥친 전쟁에 대한 자신의 사고방식을 토로했다.

우리가 독일인들과 동맹을 추구하고 틸지트 평화 조약에 얽매여 유럽의 정세에 계속 참견하면 보나파르트를 상대로 한 우리의 전쟁은 불행할 것이다. 오스트리아를 위해서도, 오스트리아에 맞서서도 우리는 싸울 필요가 없다. 우리의 모든 정책은 동쪽에 있고, 보나파르트에 대해서는 국경의 무장과 정책의 확고함만 있으면 된다. 그러면 그는 감히 1807년처럼 러시아 국경을 넘지는 못할 것이다.


4


응접실에 앉아 노인들의 뒷공론과 험담을 듣던 마리야 공작 영애는 자신이 들은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손님들 모두 그녀를 대하는 아버지의 적대적인 태도를 눈치채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심지어 식사하는 내내 드루베츠코이가 그녀에게 보여 준 특별한 관심과 친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가 그들의 집에 온 것은 벌써 세 번째였다.


마리야 공작 영애는 멍하니 묻는 듯한 눈길로 피에르를 돌아보았다. 그는 공작이 간 뒤, 손에 모자를 들고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손님들 가운데 맨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그들은 단둘이 응접실에 남았다.

“좀 더 앉아 있어도 될까요?” 그가 마리야 공작 영애 옆 안락의자에 뚱뚱한 몸을 푹 파묻으며 말했다.


“그 청년과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입니까, 공작 영애?” 그가 물었다. “드루베츠코이 말입니다.”

“아뇨, 얼마 안 됐어요……. 왜 내게 그런 걸 물으세요”

“내가 관찰한 게 있기 때문이지요. 대개 청년들은 오로지 부유한 신붓감과 결혼할 목적으로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휴가를 옵니다. 그 청년도 지금 그렇게 행동하고 있어요. 부유한 신붓감이 있는 곳에는 그도 있습니다. 난 책을 보듯 그 사람을 훤히 읽고 있어요. 지금 누굴 공략할지 망설이고 있습니다. 당신으로 할지, 마드무아젤 줄리 카라기나로 할지 말입니다. 그는 그녀를 꽤 눈여겨보고 있지요.”


“그와 결혼할 건가요?” 피에르가 물었다.

“아, 정말, 백작! 누구하고든 결혼해 버리고 싶은 순간들이 있어요.” 갑자기 스스로도 예상치 못한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마리야 공작 영애가 말했다. “아,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데 슬퍼하는 것 말고는 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없다고 느끼는 건 얼마나 힘든가요."

공작 영애는 채 말을 끝맺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로스토프가에 대해 들었나요?” 그녀가 화제를 바꾸려는 듯 물었다“그분들이 곧 온다는 말을 들었어요. 나 역시 앙드레를 매일같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들이 이곳에서 만나게 되면 좋을 텐데요.” 마리야 공작 영애가 말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오직 참된 진실만을 말해 주세요. 그녀는 어떤 아가씨인가요? 당신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단, 진실만요. 당신도 알다시피 안드레이가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이렇게 할 때는 대단히 많은 위험을 무릅쓰는 거니까요. 그래서 나도 알고 싶어요…….”


피에르가 말했다. “난 그녀가 어떤 아가씨인지 확실히는 모릅니다. 그녀는 도저히 분석이 안 됩니다. 그녀는 매혹적이에요. 하지만 왜 그런지는 모릅니다. 이게 그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마리야 공작 영애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표정이 말했다. ‘네, 나도 그럴 거라 예상했고, 그 점을 두려워했어요.’ 그리고 그녀는 로스토프가 사람들이 도착하면 미래의 올케와 친해지고, 노공작이 그녀에게 친숙함을 느끼도록 노력하겠다며 피에르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려 주었다.


5


보리스는 페테르부르크에서 부유한 신붓감과 결혼하는 데 실패했다. 그래서 같은 목적으로 모스크바에 왔다. 모스크바에서 보리스는 가장 부유한 신붓감인 줄리와 마리야 공작 영애 사이에서 망설였다. 그에게는 마리야 공작 영애가 비록 아름답지 않아도 줄리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왠지 볼콘스카야에게 구애하는 게 거북했다. 그와 반대로 줄리는 그녀만의 독특한 방식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그의 구애를 기꺼이 받아 주었다.


줄리는 스물일곱 살이었다. 오빠들이 죽은 후에 그녀는 아주 부유해졌다. 그녀는 이제 조금도 아름답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여전히 예쁠 뿐 아니라 예전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이런 착각에 계속 빠져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첫째로 그녀가 매우 부유한 신붓감이 되었기 때문이고, 둘째로 그녀가 점점 나이 들수록, 남자들에게 덜 위험한 존재가 될수록 남자들이 그녀를 좀 더 자유롭게 대했으며 아무런 의무도 떠맡지 않은 채 그녀의 집에서 열리는 저녁 식사와 야회와 활기찬 모임을 좀 더 자유롭게 즐겼기 때문이다.


그녀의 몸치장은 언제나 최신식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줄리는 모든 것에 환멸을 느낀 것처럼 보였고, 누구에게나 자신은 우정도 사랑도 삶의 어떤 기쁨도 믿지 않으며 오직 저곳에서의 평안을 기다릴 뿐이라고 말했다. 몇몇 젊은 사람들만 줄리의 멜랑콜리한 기분을 좀 더 깊이 파고들었다. 보리스도 그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줄리는 그들에게 슬픈 그림과 격언과 시로 가득한 자신의 앨범을 펼쳐 보이곤 했다.


줄리는 보리스에게 특히 상냥했다. 그녀는 자신도 삶의 괴로움을 너무나 많이 겪었기에 힘닿는 한 우정의 위로를 베풀며 그에게 자신의 앨범을 펼쳐 보였다. 줄리는 벌써 오래전부터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멜랑콜리한 숭배자의 청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결혼하고 싶어 하는 그녀의 열망에 대한, 그녀의 부자연스러움에 대한 은밀한 혐오감과 진정한 사랑의 가능성을 단념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여전히 보리스를 막았다.


보리스가 떠나기 얼마 전, 그녀는 과감한 계획에 착수했다. 보리스의 휴가 기간이 끝나 가던 바로 그때 모스크바에, 물론 카라긴가의 응접실에 아나톨 쿠라긴이 나타났다. 그러자 줄리는 돌연 멜랑콜리를 버리고 아주 명랑해져서 쿠라긴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 방 먹었다는, 줄리 옆에서 괴로운 멜랑콜리 근무로 한 달을 허비했다는, 자신이 상상 속에서 벌써 배분하고 적절히 사용하기까지 한 펜자 영지의 모든 수입이 다른 남자의 손에, 특히 멍청한 아나톨의 손안에 들어가는 꼴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보리스에게 모욕감을 안겼다.


보리스는 생각했다. ‘일단 시작된 일이니 이루어져야 해!’ 그는 얼굴을 확 붉히고 그녀에게 말했다.“당신은 당신을 향한 내 감정을 알지 않습니까!”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다. 줄리의 얼굴이 승리감과 자기만족으로 환하게 빛났다. 그러나 그녀는 보리스에게 이런 경우 나와야 할 말을 다 쏟아 내게 했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그녀보다 사랑한 여자는 결코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말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펜자의 영지와 니제고로드의 산림에 대한 대가로 이를 요구할 수 있다는 점을 알았고, 자신이 요구한 것을 받아 냈다.


6


일리야 안드레이치 백작은 1월 말에 나타샤와 소냐를 데리고 모스크바에 왔다. 백작 부인은 건강이 계속 좋지 않아 길을 나설 수 없었는데 그녀가 회복되기를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모스크바에서 매일같이 안드레이 공작을 기다렸다. 그 밖에도 혼수품을 사야 했고, 모스크바 근교의 영지를 매각해야 했으며, 노공작이 모스크바에 있을 때를 이용해 미래의 며느리를 소개해야 했다.


일리야 안드레이치는 모스크바에 있는 동안 오래전부터 따뜻이 맞아 주겠다고 제안한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아흐로시모바의 집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늦은 밤 로스토프가의 썰매 네 대가 스타라야 코뉴셴나야 거리에 있는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의 집 안마당에 들어섰다.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는 혼자 살고 있었다. 딸은 시집보냈고, 아들들은 모두 군대에 있었다.


다들 외투를 벗고 차를 마시러 오자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는 모두에게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자네들이 와서 내 집에 머물러 주니 진심으로 기쁘네.” 그녀가 말했다.“진작 왔어야지!” 그녀는 나타샤를 의미심장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자, 이제 얘기해 보자. 약혼자가 생긴 걸 축하한다. 훌륭한 젊은이를 손에 넣었어! 너 때문에 기쁘구나. 난 그 애를 이만할 때부터 (그녀는 바닥에서 1아르신 높이를 가리켰다) 알아.” 나타샤는 기쁨으로 얼굴을 붉혔다.


“난 그와 그의 가족 모두를 사랑해. 자, 잘 들어라. 니콜라이 공작 영감이 아들이 결혼하는 걸 몹시 달가워하지 않는 건 네가 잘 알지. 완고한 노인네야! 물론 안드레이 공작은 어린애가 아니니 그 문제야 아버지의 허락 없이도 잘 해결되겠지. 하지만 뜻을 거스르며 가족이 되는 것은 좋지 않아. 평화롭게 애정으로 해결해야 해. 넌 똑똑한 아이니까 바람직하게 잘해 나갈 게야. 똑똑하게 잘 풀어 나가거라. 그럼 다 잘될 게야.”


7


다음 날 일리야 안드레이치 백작은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의 조언에 따라 나타샤와 함께 니콜라이 안드레이치 공작을 찾아갔다. 백작은 즐겁지 않은 기분으로 이 방문을 준비했다. 두려운 마음이었다. 민병대를 편성할 때의 마지막 만남이 백작의 기억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때 백작은 만찬 초대에 대한 답으로 인원 부족을 나무라는 불같은 질책을 들었다. 그와 반대로 나타샤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기분에 젖어 있었다. ‘그 사람들이 날 사랑하지 않을 리 없어.’ 그녀는 생각했다.


마리야 공작 영애는 첫눈에 나타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나타샤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경박할 정도로 명랑하고 허영에 찬 것으로 보였다. 나타샤의 아름다움과 젊음과 행복에 대한 무의식적인 질투와 오빠의 사랑에 대한 시샘으로 자신이 미래의 올케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반감을 품었다는 것을, 마리야 공작 영애는 알지 못했다.


나타샤는 현관방에서 일어난 소동과, 아버지의 불안과, 그녀가 느끼기에 은혜를 베풀어 자신을 맞아 준 것 같은 공작 영애의 부자연스러운 태도에 모욕을 느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불쾌했다. 그녀는 마리야 공작 영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타샤가 보기에 그녀는 너무 못생기고 위선적이고 무뚝뚝한 것 같았다. 나타샤는 갑자기 정신적으로 움츠러들어 자기도 모르게 될 대로 되라는 태도를 취했고, 그 바람에 그녀와 마리야 공작 영애 사이가 더욱 벌어지고 말았다.


그때, 문이 열리고, 하얀 나이트캡과 할라트 차림을 한 공작이 들어왔다.

“아, 아가씨.” 그가 말을 시작했다. “아가씨, 백작 영애…… 내가 실수한 게 아니라면 로스토바 백작 영애구려……. 용서를 구하오, 용서를……. 난 몰랐다오, 아가씨. 하느님이 보시다시피 난 당신이 우리를 방문해 주신 줄도 모르고 이런 차림으로 딸에게 들렀소. 용서를 구하오……. 하느님이 보시다시피 난 몰랐소.”

노인은 우물우물 말하고는 나타샤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고 나서 방을 나갔다. 마드무아젤 부리엔이 이 출현 후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리고 공작의 좋지 않은 건강을 알려 주었다.



백작이 부근의 안나 세묘노바에게 잠깐 들린 뒤 돌아오자 나타샤는 무례할 정도로 그를 반기며 서둘러 떠날 채비를 했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을 그런 거북한 상황에 몰아넣으며 안드레이 공작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고 30분을 보낼 수 있었던 그 나이 많고 무뚝뚝한 공작 영애를 증오하다시피 했다.‘그 프랑스 여자 앞에서 내가 먼저 그에 대해 말을 꺼낼 수는 없는 거였잖아.’ 나타샤는 생각했다.한편 마리야 공작 영애 역시 똑같은 생각으로 괴로웠다. 그녀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날 사람들은 나타샤가 식사 자리에 나타나기를 오래도록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 방에 앉아 어린아이처럼 코를 풀며 흐느껴 울었다. 소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서서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다.

“나타샤, 왜 그래?” 그녀가 말했다. “뭣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 신경을 써? 다 지나갈 일이야, 나타샤.”

“아니, 얼마나 모욕적이었는지 네가 알면……. 마치 내가…….”

"말하지 마, 나타샤. 네 잘못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뭐 하러 신경을 써? 나에게 입 맞춰 줘.” 소냐가 말했다.


8


그날 밤 로스토프가 사람들은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가 표를 구해 준 오페라를 보러 갔다. 나타샤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가 특별히 자기를 위해 베푼 친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옷을 입고 홀로 나와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큰 거울에 비춰 본 자신의 모습이 아름다운 것, 그것도 아주 아름다운 것을 보고는 더한층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슬픔이었다.


나타샤는 너무도 부드럽고 감상적인 기분을 느꼈다. 사랑하고, 또 사랑받고 있음을 아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지금 당장,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안고 자신의 가슴을 가득 채운 사랑의 말을 전하고 또 그에게서 들어야 했다. 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카레타를 타고 가며 얼어붙은 유리창에 아른거리는 가로등 불빛을 수심에 잠겨 바라보는 동안, 그녀는 더 깊은 사랑에 빠진 더 슬픈 기분을 느꼈고 자신이 누구와 어디로 가는지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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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띄게 예쁜 두 아가씨 나타샤와 소냐는 오랫동안 모스크바에 모습을 보이지 않은 일리야 안드레이치 백작과 함께 모두의 관심을 끌었다. 게다가 다들 나타샤와 안드레이 공작의 약혼에 대해 어렴풋이 알았고 그 이후 로스토프가가 시골에서 지냈다는 것도 알고 있어, 러시아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신랑감 가운데 한 명의 약혼녀를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나타샤는 아버지가 보던 방향을 쳐다보고는 살진 붉은 목에 (나타샤는 목에 분을 덕지덕지 바른 것을 알았다) 진주 목걸이를 걸고 행복한 표정으로 어머니와 나란히 앉은 줄리를 발견했다. 그들 뒤에는 매끈하게 빗질한 보리스의 아름다운 머리가 보였다. 그는 미소 띤 얼굴로 줄리의 입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로스토프가 사람들을 힐끗거리며 빙그레 웃음을 띤 채 약혼녀에게 뭐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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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석 맨 앞 한가운데에 곱슬머리를 건초 더미처럼 빗어 올리고 페르시아 의상을 입은 돌로호프가 난간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어디서 느닷없이 나타난 거지?” 백작은 신신을 돌아보았다.“캅카스에 있다가 도망쳤습니다. 사람들 말이, 페르시아에서 어느 공후의 대신으로 있었는데 거기서 국왕의 남동생을 죽였답니다. 글쎄, 모스크바의 귀부인들이 전부 넋이 나가 있어요! 페르시아인 돌로호프. 그걸로 이야기는 끝입니다. 지금 우리들 사이에선 돌로호프라는 이름을 빼면 말 한마디 나오지 않아요."


옆 칸막이 특별석에 머리카락을 커다랗게 땋아 늘인 키가 크고 아름다운 귀부인이 들어왔다. 피에르의 아내, 베주호바 백작 부인이었다. 그때 서곡의 마지막 화음이 울렸고, 지휘자가 봉을 탁탁 두드렸다. 늦게 온 남자들이 일반석 자리로 갔고 막이 올라갔다. 막이 오르자마자 칸막이석과 일반석이 모두 조용해졌다. 늙고 젊은, 제복을 입고 연미복을 입은 모든 남자들과, 훤히 드러난 몸에 보석을 걸친 모든 여자들이 탐욕스러운 호기심을 품고 모든 주의를 무대로 돌렸다. 나타샤도 무대를 바라보았다.


9


아리아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무대 위의 모든 것이 잠잠해진 어느 한순간 출입구가 삐걱 소리를 냈다. 그리고 로스토프가의 칸막이석이 있는 방향의 일반석 양탄자 위로 늦게 도착한 남자들의 발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쿠라긴입니다!” 신신이 속삭였다. 베주호바 백작 부인이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타샤는 정중한 모습으로 자신만만하게 그들의 칸막이석 쪽으로 다가오는 대단히 잘생긴 부관을 보았다. 그녀가 오래전에 페테르부르크 무도회에서 보고 기억에 새겨 두었던 아나톨 쿠라긴이었다.


그는 나타샤를 흘깃 쳐다보고 누나에게 다가가 칸막이석의 난간 가장자리에 장갑 낀 손을 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몸을 숙이고 나타샤를 가리키며 수군거렸다.

“정말 매력적인데!” 그가 말했다. 나타샤를 두고 한 말인 듯싶었는데, 그녀는 그 말을 들었다기보다는 입술의 움직임으로 알아차렸다. 그러고 나서 그는 첫 번째 열로 가서 돌로호프 옆에 앉더니 다른 사람들이 그토록 아첨하며 대하던 돌로호프를 허물없이 다정하게 팔꿈치로 쿡 찔렀다.


휴식 시간 내내 쿠라긴은 앞쪽 무대 난간 옆에 돌로호프와 함께 서서 로스토프가의 칸막이석을 바라보았다. 나타샤는 그가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알았고, 그것은 그녀에게 커다란 만족감을 안겨 주었다. 심지어 그녀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가장 돋보이는 자세로 옆얼굴이 그에게 보이도록 몸을 돌리기까지 했다.


제2번 막이 진행되는 동안 나타샤는 일반석에 시선을 둘 때마다 매번 아나톨 쿠라긴을 보았다. 그는 좌석 등받이 너머로 한 팔을 넘긴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에게 사로잡힌 것을 보자 너무 기분이 좋아서, 그 속에 무언가 악한 것이 있다는 생각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두 번째 막이 끝나자 베주호바 백작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로스토프가의 칸막이석을 돌아보고는 (그녀의 가슴이 완전히 드러나 있었다) 장갑 낀 손가락으로 노백작을 손짓하여 불렀다. 그녀는 자신의 칸막이석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주지 않고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노백작과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10


휴식 시간에 엘렌의 칸막이석에 찬 기운이 느껴지고 문이 열리더니 몸을 숙인 채 다른 사람과 부딪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아나톨이 들어왔다.

“당신에게 동생을 소개할게요.” 엘렌은 나타샤에게서 아나톨에게로 불안한 시선을 옮기면서 말했다. 나타샤는 드러낸 어깨 너머로 미남을 향해 자그마한 예쁜 머리를 돌리고 생긋 웃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백작 영애.” 그는 불쑥 아주 오랜 지인을 대하듯 그녀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가장 회전목마 놀이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꼭 참석했으면 합니다. 아주 즐거울 겁니다. 다들 아르하로프 집에서 모일 거예요. 제발 와 주십시오, 정말로요, 네?” 그가 간청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아나톨이 불거진 눈으로 차분하고 집요하게 그녀를 바라보던 어느 한순간, 나타샤는 그 침묵을 깨기 위해 모스크바가 마음에 드느냐고 물었다. 나타샤는 질문을 하고 얼굴을 붉혔다. 그와 말하는 동안 자신이 뭔가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듯한 느낌이 계속 들었던 것이다. 아나톨이 그녀를 격려하듯 빙그레 웃었다.



다시 막이 올랐다. 아나톨은 침착하고 유쾌한 모습으로 칸막이석을 나섰다. 나타샤는 자신이 처한 세계에 이미 완전히 예속된 채 아버지의 칸막이석으로 돌아갔다. 눈앞에서 벌어지던 모든 일이 어느새 지극히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그 대신 약혼자에 대한, 마리야 공작 영애에 대한, 시골 생활에 대한 예전의 생각들은 모두 마치 오래전, 아주 오래전의 일인 양 한 번도 그녀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들이 극장을 나서자 아나톨이 다가와 그들의 카레타를 부르고 그들이 타는 것을 도왔다. 나타샤가 올라타는 것을 도우며 그는 그녀의 손목 위 팔을 꼭 잡았다. 흥분한 나타샤는 붉어진 행복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가 눈동자를 빛내고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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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샤가 자신이 생각한 모든 것을 밤에 침대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노백작 부인 한 사람뿐이었다. 엄격하고 건전한 시각을 가진 소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고백에 소스라치게 놀라리라는 것을 알았다. 나타샤는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를 혼자 해결하려고 애썼다.


‘안드레이 공작의 사랑을 받기에는 난 타락해 버린 걸까, 아니면 괜찮은 걸까?’ 그녀는 이렇게 묻고 마음을 달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스스로에게 대꾸했다.

'난 참 바보야. 어떻게 이런 걸 물어? 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데? 아무 일도 없었어.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어떤 식으로든 그런 일은 벌이지 않았어. 아무도 모를 거야. 이젠 그를 절대 만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다음에는 다시 어떤 본능이 그녀에게 말했다. ‘비록 그 모든 것이 사실이라 해도, 비록 아무 일 없었다 해도…….’ 본능은 그녀에게 안드레이 공작을 향한 그녀의 사랑이 예전에 지녔던 순수함은 모두 죽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녀는 다시 쿠라긴과 나눈 대화를 머릿속에서 되풀이하며 자신의 팔을 잡던 그 잘생기고 대담한 남자의 얼굴과 몸짓과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11


아나톨 쿠라긴은 모스크바에서 지내고 있었다. 아버지가 페테르부르크에서 쫓아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그는 한 해에 2만 루블이 넘는 돈을 쓴 데다 그만큼의 빚까지 져서 채권자들이 그 빚을 아버지에게 청구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그가 진 빚의 반을 갚아 주되, 모스크바에 가서 자신이 아들을 위해 애써 구한 총사령관 부관 직위를 수행하고 그곳에서 좋은 배필을 찾도록 노력한다는 조건으로 그렇게 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마리야 공작 영애와 줄리 카라기나를 가리켰다.


신신이 아나톨에 대해 공정하게 말했듯이, 아나톨은 모스크바에 온 이래로 모스크바의 모든 귀부인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특히 그가 그들을 무시하고 그들보다 집시 여인들이나 프랑스 여배우들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프랑스 여배우들 가운데서도 정상인 마드무아젤 조르주와 가까운 관계라고 했다.


그러나 아가씨들에게는, 특히 대부분 못생긴 부유한 신붓감들에게는 접근하지 않았다. 아나톨은 두 해 전 결혼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것은 가장 가까운 친구들 외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두 해 전 그의 연대가 폴란드에 주둔했을 때 부유하지 않은 어느 폴란드 지주가 아나톨을 딸과 강제로 결혼시켰다.

아나톨은 이내 아내를 버렸고, 장인에게 보내기로 약속한 돈을 대가로 독신자 행세를 할 권리를 얻어 냈다.


그는 노름꾼이 아니었다. 적어도 결코 돈을 따기를 바라지 않았고 심지어 돈을 잃어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허세를 부리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좋아한 것은 단 하나, 바로 흥청망청 노는 것과 여자들이었다. 아나톨은 돌로호프의 총명함과 용맹함 때문에 진심으로 그를 좋아했다. 부유한 청년들을 자신의 도박판에 끌어들일 미끼로 아나톨 쿠라긴의 이름, 가문, 인맥이 필요했던 돌로호프는 그런 느낌을 주지 않으면서 그를 이용하며 가지고 놀았다.


나타샤는 쿠라긴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극장에서 돌아와 밤참을 먹으며 그는 돌로호프 앞에서 전문가적인 태도로 그녀의 팔, 어깨, 다리, 머리칼의 가치를 분석하더니 그녀의 환심을 사고 말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아나톨은 그 구애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곰곰이 생각하지 않았다.

“넌 이미 한 번 처녀한테 발목을 잡힌 적이 있잖아. 조심해” 그의 결혼 사실을 알고 있던 돌로호프가 말했다.

“뭐, 두 번이나 그럴 리는 없지! 그렇지 않아?” 아나톨이 선량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12


극장에 다녀온 다음 날 로스토프가 사람들은 아무 데도 가지 않았고, 그들을 찾아온 사람도 없었다.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는 나타샤에게 숨긴 채 그녀의 아버지와 무언가를 상의했다. 나타샤는 그들이 노공작에 대해 말을 나누면서 무언가를 궁리하고 있다고 짐작하며, 그것에 불안감과 모멸감을 느꼈다. 그녀는 매 순간 안드레이 공작을 기다렸는데, 그날 두 번이나 문지기를 브즈드비젠카로 보내 그가 왔는지 알아보게 했다. 그는 오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모스크바에 온 처음 며칠보다 지금이 더 괴로웠다.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는 카레타가 준비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화려한 방문용 숄을 걸친 그녀는 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타샤에 대해 상의하러 니콜라이 안드레예비치 볼콘스키 공작에게 간다고 알렸다. 그때 응접실에서 아버지의 목소리와 활기찬 다른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나타샤는 그 여자의 목소리에 얼굴을 붉혔다. 엘렌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얼굴을 붉힌 나타샤에게 말했다. “모스크바에서 지내며 아무 데도 가지 않다니요! 오늘 저녁 우리 집에서 마드무아젤 조르주가 낭송을 할 거예요. 몇 사람 모일 거고요. 만일 마드무아젤 조르주보다 더 아름다운 당신의 미인들을 데려오지 않으시면 당신과 아는 척도 하고 싶지 않아요. 남편은 없어요. 트베리에 갔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을 모셔 오도록 남편을 보낼 텐데요. 꼭 오세요, 꼭요, 9시예요.”


엘렌도 나타샤에게 진심으로 감탄하며 그녀를 즐겁게 해 주려 했다. 아나톨이 자신과 나타샤를 맺어 달라 부탁했고, 그녀는 이를 위해 로스토프가 사람들에게 왔다. 남동생과 나타샤를 맺어 주려는 생각에서 재미를 느낀 것이다. 엘렌은 예전에 페테르부르크에서 보리스를 뺏긴 일로 나타샤에게 화가 났었지만 지금은 그때 일을 생각하지 않고 나름대로 온 마음을 다해 나타샤의 행복을 바랐다.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가 식사 시간에 맞춰 돌아왔다. 노공작의 집에서 패하고 온 듯 말이 없었다. 심각한 모습이었다. 차분히 상황을 이야기하기에는 앞서 있었던 충돌로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였다. 베주호바 백작 부인의 방문과 그녀의 야회 초대를 듣고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는 말했다.

“난 베주호바와 교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권하지 않겠다. 뭐, 그래도 이미 약속했다면 다녀오려무나. 기분 전환이라도 해.” 그녀는 나타샤를 돌아보며 이렇게 덧붙였다.


13


일리야 안드레이치 백작은 아가씨들을 데리고 베주호바 백작 부인의 집을 찾았다. 야회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러나 대부분 나타샤가 모르는 이들이었다. 일리야 안드레이치 백작은 모임이 경박한 언동으로 유명한 남자들과 부인들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불만을 느꼈다. 일리야 안드레이치 백작은 카드놀이판에 끼지 말고 딸들 옆을 떠나지 않고 있다가 조르주의 낭송이 끝나는 대로 즉시 떠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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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은 분명 문가에서 로스토프가 사람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린 듯했다. 그는 백작과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나타샤에게 다가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를 보자마자 나타샤는 극장에서처럼 그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허영에 찬 만족감과 그와 자기 사이에 도덕적 장벽이 없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아나톨은 나타샤에게 왈츠를 청했다. 왈츠를 추는 동안 그는 그녀의 허리와 손을 잡으며 그녀가 매혹적이라고, 그리고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에코세즈를 출 때 나타샤는 다시 쿠라긴과 춤을 추었다. 단둘이 남았을 때 아나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나타샤는 그가 왈츠를 출 때 한 말이 꿈이 아니었을까 의심했다.


첫 번째 피겨가 끝날 무렵 그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 말은 하지 말아 주세요. 난 약혼한 몸이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녀는 서둘러 말하고는 그를 흘깃 쳐다보았다. 아나톨은 그녀의 말에 당황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내게 그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그가 말했다. “나는 미치도록, 미치도록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당신이 매혹적인 게 내 잘못입니까……?


작은 소파 방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 남자의 빛나는 큰 눈동자가 그녀의 눈동자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녀는 그 눈동자 외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나탈리?” 그의 목소리가 묻는 듯 속삭였고, 누군가가 그녀의 두 손을 아프게 꼭 쥐었다. “나탈리?”

‘난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난 할 말이 없어요.’ 그녀의 눈빛이 말했다.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눌렀다. 순간 그녀는 또다시 자유로운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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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온 나타샤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해결되지 않는 질문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는 누굴 사랑한 것인가, 아나톨인가, 아니면 안드레이 공작인가? 그녀는 안드레이 공작을 사랑했다. 자신이 그를 얼마나 열렬히 사랑했는지 또렷이 기억했다. 그러나 아나톨도 사랑했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과연 이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었겠어?’ 그녀는 생각했다.


14


아침 식사 후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는 (이 시간이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때였다) 안락의자에 앉아서 나타샤와 노백작을 가까이 불렀다.

“자, 나의 친구들, 모든 문제를 곰곰이 다 생각해 봤네. 이것이 자네들에게 주는 나의 충고야.” 그녀가 말을 시작했다. “자네들이 알다시피 어제 난 니콜라이 공작을 찾아갔었네. 그와 말을 나누었지……."


"그래, 그분은 어떻던가요?” 백작이 물었다.

“그 인간이 어떠냐고? 미치광이야……. 들으려고 하질 않아. 그러니 무슨 말을 하겠나, 우리가 가여운 애를 너무 들들 볶았어.”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가 말했다.“내가 자네들에게 하려는 충고는 볼일을 끝내고 오트라드노예로 가라는 거야. 그곳에서 기다리는 게…….”

“아, 안 돼요!” 나타샤가 소리쳤다.


그녀는 찾던 것을 손가방에서 발견하고 나타샤에게 건넸다. 마리야 공작 영애의 편지였다.“그 애가 너에게 편지를 썼더구나. 가여운 것,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그 애는 자기가 널 좋아하지 않는다고 네가 생각할까 봐 걱정하고 있어.”

"그래요, 그녀는 날 좋아하지 않아요.” 나타샤가 말했다.

“아무도 믿지 않아요. 전 그녀가 절 좋아하지 않는 걸 알아요.” 나타샤는 편지를 쥐고 주저 없이 말했다.


마리야 공작 영애는 이렇게 썼다.“그래도 우리 아버지가 당신에게 반감을 품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말아 줘요. 아버지는 병든 노인이세요. 이해해야 해요. 아버지는 선하고 관대한 분이니 아들을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을 사랑하게 되실 거예요.” 마리야 공작 영애는 이어 나타샤에게 자신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시간을 정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가씨.” 하녀가 방에 들어오며 은밀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어떤 남자분이 전해 드리라고 하셨어요.” 하녀는 편지를 건넸다. 그녀는 편지를 단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오직 한 가지, 이 편지가 그 사람에게서, 사랑하는 남자에게서 온 것이라는 점만은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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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이후 내 운명은 결정되었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받든가 아니면 죽든가 둘 중 하나입니다. 나에게 다른 출구는 없습니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다음에 그녀의 가족이 그녀를 자기에게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고, 여기에는 그가 그녀에게만 털어놓을 수 있는 비밀스러운 이유들이 있다고, 하지만 그녀가 자기를 사랑한다면 '네'라는 한마디만 해 주면 되고, 그러면 인간의 어떤 힘도 자신들의 천상의 행복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썼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길 것이다. 그는 그녀를 납치하여 세상 끝으로 데려갈 것이다.


15


밤늦게 돌아온 소냐는 나타샤의 방에 들렀다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소파에서 잠든 나타샤를 보고 놀랐다. 그녀의 옆 테이블에는 아나톨의 편지가 펼쳐져 있었다. 소냐는 편지를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그녀는 편지를 읽다가 잠든 나타샤를 흘깃거리며 그녀의 얼굴에서 자신이 읽고 있던 내용에 대한 설명을 구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고요하고 온화하고 행복한 얼굴이었다. 소냐는 숨이 막힐 것 같아 가슴을 움켜쥐고 하얗게 질려 두려움과 흥분으로 바들바들 떨며 안락의자에 앉아 눈물을 쏟았다.


“소냐, 편지 읽었구나?” 그녀가 말했다.

“그래.” 소냐가 조용히 말했다.

“아니, 소냐, 나도 더 이상 못하겠어!” 나타샤가 말했다. “더 이상 너에게 숨길 수가 없어. 있잖아, 우린 서로 사랑해! 사랑하는 소냐, 그가 편지에…… 소냐…….”

“그럼 볼콘스키는?” 그녀가 말했다.

“아, 소냐, 아,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네가 안다면!” 나타샤가 말했다. “넌 사랑이 뭔지 몰라…….”



"난 이제야 그런 사랑을 경험한 거야. 이건 예전의 사랑과 달라. 그를 보자마자 느꼈어. 그는 나의 지배자이고, 나는 그의 노예야.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 그래, 노예야! 그가 나에게 어떤 명령을 내리든 난 할 거야. 넌 이걸 이해하지 못하지. 내가 어떻게 해야 해? 도대체 난 어떻게 해야 하니, 소냐?” 나타샤는 행복과 두려움이 동시에 깃든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왜 이런 비밀을? 그 사람은 도대체 왜 집으로 오지 않는 거야?” 소냐가 물었다. “그 사람은 왜 직접 청혼하지 않아? 상황이 이미 그렇다면 안드레이 공작이 너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었잖아. 난 그런 걸 믿지 않지만 말이야. 나타샤, 넌 비밀스러운 이유라는 게 어떤 것일지 생각해 봤어?”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 하지만, 그러니까, 이유가 있는 거야!”

소냐가 탄식을 터뜨리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타샤는 책상으로 다가가 오전 내내 쓸 수 없었던 마리야 공작 영애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단 1분도 생각하지 않고 써 내려갔다. 편지에서 그녀는 둘 사이의 모든 오해는 끝났다고, 마리야 공작 영애가 모든 것을 잊고 또 자기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용서해 주기 바란다고, 하지만 자기는 그의 아내가 될 수 없다고 짤막하게 썼다. 그 순간에는 그 모든 것이 너무 쉽고 간단하고 분명하게 여겨졌다.


백작이 떠나던 날 소냐와 나타샤는 쿠라긴가의 큰 만찬에 초대받았고,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가 그들을 데려갔다. 그 만찬에서 나타샤는 다시 아나톨을 만났다. 소냐는 나타샤가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그와 무언가 이야기하고, 만찬 내내 전보다 훨씬 더 흥분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백작이 돌아오기로 한 전날, 소냐는 나타샤가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오전 내내 응접실 창가에 앉아 있다가 지나가던 군인에게 무언가 신호를 보내는 것을 알아차렸다. 소냐는 그 군인이 아나톨이라고 생각했다.

소냐는 더욱더 주의 깊게 친구를 관찰하던 중에 나타샤가 식사 시간과 저녁 내내 이상하게 부자연스러운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차 모임 후 소냐는 나타샤의 방 문가에서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며 쭈뼛거리는 하녀를 보았다. 소냐는 그녀를 들여보내고 문가에서 엿듣다가 또다시 편지가 전달된 것을 알았다. 불현듯 나타샤가 오늘 밤 무서운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이 소냐에게 명확하게 다가왔다. 소냐는 방문을 두들겼다. 그러나 나타샤는 그녀를 들이지 않았다. ‘그 사람과 달아나려는 거야!’ 소냐는 생각했다.


나타샤를 그토록 믿고 있는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에게 말하는 것은 소냐에겐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소냐는 어두운 복도에 서서 생각했다.‘지금이야말로 내가 이 가족의 은혜를 기억하고 니콜라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입증할 순간이야. 아니, 난 사흘 밤을 새우는 한이 있더라도 이 복도를 떠나지 않고 완력을 써서라도 그 애를 붙잡을 거야. 그들의 가족이 수치를 겪게 하지 않겠어.’ 그녀는 생각했다.


16


아나톨은 최근 돌로호프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돌로호프는 이미 여러 날에 걸쳐 로스토바를 납치할 계획을 세우고 준비해 왔다. 소냐가 나타샤의 방 문가에서 엿듣고 그녀를 지키기로 결심한 날은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길 예정이었다. 나타샤는 밤 10시에 쿠라긴이 기다리는 뒷문 계단으로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쿠라긴은 준비된 트로이카에 그녀를 태우고 모스크바에서 60베르스타를 달려 카멘카 마을로 갈 예정이었다. 그곳에 두 사람의 결혼식을 올려 줄 파문당한 사제가 대기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을 바르샤바 가도로 태우고 갈 역마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역마차를 타고 외국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아나톨에게는 여권도, 역마권도, 누나에게 받은 1만 루블도, 돌로호프의 주선으로 빌린 1만 루블도 있었다.


돌로호프가 책상을 쾅 닫고는 조소를 머금고 아나톨을 돌아보았다.

“이봐, 다 집어치워. 아직 시간 있어!” 그가 말했다.

“멍청하긴!” 아나톨이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좀 집어치워. 자네가 안다면……. 이게 뭔지 악마나 알겠지!”

“정말이지 그만둬.” 돌로호프가 말했다. “난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자네가 꾸민 일이 정말 장난 같아?”

“아, 또, 또 놀려야겠어? 악마한테나 꺼져 버려! 어……?” 아나톨이 인상을 쓰고 말했다.


그는 돌로호프의 손을 잡아 자기 가슴에 댔다. “아! 사랑하는 친구, 그 작은 발, 그 시선! 그야말로 여신이지!”

돌로호프가 싸늘한 미소를 띤 채 아름답고도 뻔뻔한 눈을 빛내며 좀 더 놀리고 싶은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돈이 떨어지면 그땐 어떻게 할 건데?”

“그땐 어떻게 하냐고?” 아나톨은 미래에 대한 얘기 앞에서 주저하는 빛을 보이며 돌로호프의 말을 되받았다. “그땐 어떻게 하냐고? 그 부분에서는 나도 어떻게 할지 몰라……. 뭣 하러 그런 바보 같은 소릴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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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아나톨이 방에서 나갔다가 몇 분 후에 은제 허리띠를 두른 외투 차림으로 돌아왔다. 흑담비 털모자를 늠름하게 비스듬히 쓴 것이 그의 잘생긴 얼굴에 아주 잘 어울렸다. 그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거울 앞에서 취한 자세 그대로 돌로호프 앞에 서서 술잔을 들었다.

"동지들, 친구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 젊은 날의…… 안녕." 그는 마카린과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아나톨은 무언가 감동적이고 엄숙한 분위기를 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외투는 어디 있어?" 돌로호프가 말했다. "어이, 이그나시카! 마트료나 마트베예브나에게 가서 외투를 달라고 해. 부인용 흑담비 털외투 말이야. 사람들이 어떻게 유괴를 하는지 들었지." 돌로호프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그녀는 혼비백산해서 집에서 입고 있던 차림 그대로 뛰쳐나올 거야. 조금이라도 우물쭈물하면 당장 징징거리며 아빠 찾고 엄마 찾가 금방 몸이 얼고, 되돌아가려고 해. 자넨 곧바로 외투로 싸서 썰매에 태워."


스타라야 코뉴센나야 거리의 교차로에 도착하자 마부가 말의 굴레를 잡으려고 껑충 뛰어내렸다. 아나톨과 돌로호는 복도를 따라 걸었다. 대문 근처에 이르자 돌로호프가 휘파람을 불었다. 다른 휘파람 소리가 화답했고, 뒤이어 하녀가 달려 나왔다.

"안마당으로 들어가세요. 안 그러면 눈에 띄어요. 곧 나오실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돌로호프는 대문 옆에 남았다. 아나톨은 안마당으로 들어가서 모퉁이를 돈 다음 현관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마님께 가시지요."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의 덩치 큰 수행하인이 문 앞에서 길을 막으며 저음으로 말해다."어느 마님? 넌 누구냐" 아나톨은 숨을 헐떡이며 소곤소곤 물었다."쿠라긴! 돌아와!" 돌로호프가 소리쳤다. "배신이야! 돌아와!"쪽문 옆에 서 있던 돌로호프는 안으로 들어간 아나톨 뒤에서 쪽문을 닫으려 하던 문지기와 싸우고 있었더. 돌로호프는 안간힘을 다해 문지기를 밀쳤고, 달려 나온 아나톨의 팔을 잡고 쪽문 밖으로 빼낸 뒤 함께 트로이카 쪽으로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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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는 복도에서 흐느끼는 소냐를 보고 모든 것을 털어놓게 했다. 그러고는 나타샤의 편지를 빼앗아 읽은 뒤 편지를 손에 들고 나타샤의 방으로 들어갔다.

“파렴치하고 뻔뻔스러운 것.” 그녀가 나타샤에게 말했다.“아무 말도 듣기 싫다!” 그녀는 놀라움과 태연함이 뒤섞인 눈길로 바라보는 나타샤를 떠밀어 방에 가두고 열쇠로 잠갔다. 그러고는 하인에게는 그 사람들을 자기에게 데려오라고 했다. 가블릴로가 와서 사람들이 달아났다고 보고하자 그녀는 나타냐의 방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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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한다, 아주 잘하는 짓이다!"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가 말했다."내 집에서 애인과 만날 약속을 하다니! 속이려 해 봤자 소용없다. 내가 말할 때는 들어라."

"넌 스스로를 밑바닥 계집같이 치욕에 빠뜨렸다. 너 같은 애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안다만, 네 아비가 딱해 이 일을 덮겠다." 나타샤는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목을 죄던 소리 없는 발작적인 흐느낌에 온몸이 들썩였다.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는 소냐를 돌아보고는 나타샤 곁의 소파에 앉았다.


"내 손에서 벗어나다니 운이 좋았지. 하지만 꼭 찾아 내고 말겠다." 그녀는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아버지도 알게 될 거다. 네 오빠도, 약혼자도!"

"제겐 약혼자가 없어요. 제가 거절했어요." 나타샤가 소리쳤다.

"그들이 알게 되면, 그래, 그들이 이대로 내버려 둘 것 같으냐?

분명 그는, 네 아버지는, 내가 그를 알지, 그는 틀림없이 그자에게 결투를 신청할 게다. 그것이 잘된 일이냐?"


"도대체 뭘 원한 거야?"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가 다시 흥분하여 고함을 질렀다. "아니, 누가 널 가두어 두기라도 했냐? 아니면 누가 그자를 이 집에 드나들지 못하게 방해라도 했냐? 어째서 그자는 널 집시 여자같이 유괴하려 든 것이야? 그래, 그 자가 널 유괴했다고 하자. 도대체 넌 그들이 그자를 찾아내지 못 할 거라고 생각한 게냐? 네 아버지나 오빠나 약혼자가? 그자는 정말로 악당이고 불한당이란 말이다!"


"그 사람은 당신들 그 누구보다도 훌륭해요." 나타샤가 몸을 좀 더 일으키며 소리쳤다."당신이 방해하지만 않았으면……. 아, 맙소사,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소냐, 왜 그랬어? 나가요!" 그리고 그녀는 사람들이 스스로가 원인이라고 느끼는 불행을 애 달파 할 때만 보이는 절망적인 모습으로 흐느껴 울었다.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는 얼마 동안 더 나타샤에게 훈계를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백작에게 숨겨야 하며, 만약 나타샤가 모든 것을 잊고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기색을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으면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그녀에게 불어넣었다. 나타샤는 대꾸하지 않았다. 더 이상 흐느끼지도 않았지만, 오한으로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19


아내가 모스크바에 온 날 이후로 피에르는 그녀와 함께 있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어디든 떠나려고 했다. 로스토프가 사람들이 모스크바에 도착하고 곧 그는 나타샤가 불러일으킨 느낌 때문에 부득이 자신의 계획을 서둘러 실행에 옮겼다. 그는 이오시프 알렉세예비치의 문서를 건네주겠다고 오래전부터 약속한 고인의 미망인을 만나기 위해 트베리로 갔다.


모스크바에 돌아온 피에르는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과 그의 약혼녀에 관한 매우 중요한 일로 방문을 청한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의 편지를 받았다. 피에르는 나타샤를 피해 왔다. 자신이 그녀에게 품은 감정이 기혼자가 친구의 약혼녀에게 마땅히 가져야 했던 감정 그 이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그런데 어떤 운명이 계속해서 그와 그녀를 하나로 엮고 있었다.


아흐로시모바의 집으로 가는 중에 트베르스코이 가로수 길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피에르! 온지 한참 됐나?"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에게 소리쳤다. 피에르는 고개를 들었다. 회색 경주마 두 마리가 앞부분에 눈을 끼얹으며 달리는 2인승 썰매에 탄 아나톨과 그를 따라 다니는 마카린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래, 정말이지 진정한 현자가 저기 있군!' 피에르는 생각 했다. '현재의 만족 외에 앞날에 놓인 것은 아무것도 보지 않아. 무엇에도 불안을 느끼지 않지. 그러니 늘 쾌활하고 불만도 없고 태평한 거지. 저 인간처럼 될 수 있다면 뭐든 내줄 텐데.' 피에르는 질투를 느끼며 생각했다.


아흐로시모바의 집에 도착하자 현관방에서 하인이 피에르의 외 투를 벗겨 주며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가 침실로 와 주기를 청했다고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피에르는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의 방에 들어서며 물었다.

"58년을 살아오면서 이런 남부끄러운 일은 본 적이 없네." 그리고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는 피에르에게서 앞으로 알게 될 모든 것에 대해 입을 다물겠다는 맹세를 받은 후 나타샤가 부모 모르게 파혼했고, 그 원인이 아나톨 쿠라긴이며, 그와 그녀를 연결해 준 것이 피에르의 아내이고, 아버지가 없는 동안 나타샤가 비밀 결혼을 하기 위해 그와 달아나려 했다는 것을 알렸다.


피에르는 어깨를 움츠리고 입을 벌린 채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가 하는 말을 들었다. 그토록 열렬한 사랑을 받던 안드레이 공작의 약혼녀가, 예전의 그 사랑스럽던 나타샤 로스토바가 볼콘스키 대신에 이미 결혼까지 한 멍청이 아나톨을 (피에르는 그의 결혼에 대한 비밀을 알았다) 선택하고 또 함께 도망가는데 동의할 만큼 그를 사랑하게 되다니! 피에르는 그 사실을 납득할 수 없었고, 상상할 수도 없었다.


피에르는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에게 말했다. "그자는 결혼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결혼한 몸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더 심각해지는구나."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가 말했다. "참말로 불한당이야! 그런데도 저 애는 기다리고 있어. 이틀째 저러고 있네. 말해 줘야 해. 그러면 적어도 기다리는 짓은 그만두겠지."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는 백작이나 볼콘스키가 쿠라긴에게 결투를 청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래서 피에르에게 처남더러 모스크바를 떠나라고, 감히 자기 눈에 띄지 말라고 요구해 줄 것을 부탁했다.


20


피에르는 남아서 식사를 하지 않고 즉시 방에서 나와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아나톨 쿠라긴을 찾기 위해 시내로 갔다. 지금 그는 아나톨 생각만 하면 피가 전부 심장으로 쏠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피에르는 클럽으로 갔다. 피에르의 지인 가운데 한 사람이 날씨에 관한 대화를 나누다가 도시에 소문이 나도는 쿠라긴의 로스토바 유괴 사건에 대해 들었느냐고, 그것이 사실이냐고 그에게 물었다. 피에르는 웃음을 터뜨리며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왜냐하면 자신이 방금 로스토프가에서 오는 길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나톨은 그날 돌로호프의 집에서 식사를 하며 실패로 돌아간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지에 대해 그와 의논했다. 그는 로스토바를 반드시 만나야 할 것 같았다. 저녁에 그는 이 만남을 성사시킬 방법을 상의하기 위해 누나를 찾았다. 피에르가 모스크바 전체를 부질없이 쏘다니다 집에 돌아왔을 때 시종이 아나톨 바실리예비치 공작이 백작 부인의 방에 있다고 보고했다.


그는 돌아와서 처음 보는 아내에게 인사도 없이 응접실로 들어갔고, 아나톨을 발견하자 그에게 다가갔다.

"아, 피에르" 백작 부인이 남편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당신은 우리 아나톨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모르죠?" 엘렌은 남편의 떨구어진 머리에서, 얼굴에서, 빛나는 눈에서, 단호한 걸음에서 자신이 알고 있던, 그리고 돌로호프와의 결투 이후 몸소 겪은 적이 있던 그 광기와 힘의 무시무시한 표출을 보고 말을 멈췄다.


"당신들은 어디에나 타락과 악을 몰고 다니는군." 피에르가 아내에게 말했다."아나톨, 같이 갑시다. 당신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프랑스어로 말했다.

아나톨은 평소처럼 씩씩한 걸음으로 그를 뒤따랐다. 그러나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뚜렷했다.

자기 서재로 들어간 피에르는 문을 닫고 아나톨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로스토바 백작 영애에게 결혼하겠다고 약속했습니까? 그녀를 유괴하려 한 겁니까?


"당신은 당신의 만족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행복과 평온이 있다는 것을, 당신은 지금 즐기고 싶은 욕망 때문에 인생 전부를 망치고 있다는 것을 결국은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아내 같은 여자들하고나 어울려 놀아요. 그러나 아가씨에게 결혼을 약속하고·…… 속이고 유괴하는 것은……. 어떻게 당신은 그것이 노인이나 아이를 구타하는 것과 같은 비열한 짓이라는 사실을 모릅니까……!"


"뭡니까, 보상을 원해요?" 피에르가 비웃듯 말했다.

피에르는 뜯겨 나간 단추를 흘깃 쳐다보았다. “돈도 주지요. 여비가 필요하다면요." 아나톨이 빙긋 웃었다.

피에르가 아내에게서 익히 본, 소심하면서도 비열한 미소가 그를 격분하게 했다.

“오, 이런 비열하고 냉혹한 족속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서재에서 나가 버렸다.

다음 날 아나톨은 페테르부르크로 떠났다.



21


피에르는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의 부탁을 수행했다는, 즉 쿠라긴을 모스크바에서 쫓아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그녀를 찾아갔다. 집 전체가 두려움과 동요에 싸여 있었다. 나타샤가 심하게 앓고 있었다.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가 그에게 은밀히 말한 바에 따르면, 아나톨이 유부남이라는 얘기를 들은 바로 그날 밤에 그녀는 남몰래 구한 비소를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


피에르는 이날 클럽에서 식사를 하다가 사방에서 로스토바의 유괴를 기도한 사건에 대해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그런 이야기를 완강하게 반박하면서 처남이 로스토바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것 말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사람들에게 단언했다. 피에르는 사건의 전말을 숨기고 로스토바의 평판을 회복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느꼈다.


그는 두려운 심정으로 안드레이 공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그에 대한 소식을 듣기 위해 노공작의 집을 날마다 찾아갔다. 니콜라이 안드레이치 공작은 마드무아젤 부리엔을 통해 도시에 나돌던 소문을 알았고, 나타샤가 마리야 공작 영애에게 보낸 파혼 편지도 읽었다. 그는 평소보다 더욱 쾌활해 보였고 몹시 초조하게 아들을 기다렸다. 아나톨이 떠난 지 며칠 뒤에 피에르는 자신의 도착을 알리며 자신에게 들를 것을 청한 안드레이 공작의 편지를 받았다.


안드레이 공작은 전날 밤에 도착했다. 피에르는 그다음 날 아침에 그를 찾아갔다. 안드레이 공작이 나타샤와 거의 같은 상태일 것이라고 예상했던 피에르는 응접실에 들어서다가 페테르부르크의 어떤 음모 사건에 대해 활기차게 말하는 안드레이 공작의 우렁찬 목소리가 서재에서 들려오자 놀랐다. 그는 문관 제복 차림으로 아버지와 메셰르스키 공작 맞은편에 서서 열정적인 몸짓을 해 가며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스페란스키에 관한 대화가 진행 중이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유형과 반역 혐의에 대한 소식이 막 모스크바에 닿았던 것이다.

“지금은 모두가 그(스페란스키)를 비난합니다.” 안드레이 공작이 말했다. “한 달 전만 해도 그에게 열광하던 사람들이건 그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던 사람들이건 모두요. 하지만 저는 지금의 치세에서 무언가 좋은 것이 행해진 게 있다면 그것은 모두 그가, 그 한 사람이 한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후세가 그를 정당하게 인정할 겁니다.” 그는 말을 마무리하고 피에르를 돌아보았다.


메셰르스키 공작이 떠나자 안드레이 공작은 피에르의 팔을 잡고 자신에게 마련된 방으로 가자고 했다.

"난 로스토바 백작 영애로부터 파혼 편지를 받았네. 그리고 자네 처남이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던가 하는 그 비슷한 소문이 내 귀에까지 들려오더군. 사실인가?”

“사실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피에르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안드레이 공작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결국 쿠라긴 씨는 로스토바 백작 영애에게 청혼을 하지 않았군?” 안드레이 공작이 말했다.

“유부남이라 결혼할 수 없었습니다.” 피에르가 말했다.

“그는 지금 어디 있나? 자네 처남 말일세. 내가 알 수 없을까?” 그가 말했다.

“그는 떠났습니다, 페테르……. 하지만 나도 모릅니다.” 피에르가 말했다.

“그래, 뭐 상관없어.” 안드레이 공작이 말했다. “로스토바 백작 영애에게 전해 줘. 그녀는 예나 지금이나 완전히 자유롭다고, 내가 행복을 바란다고 말이야.”


“들어 봐요. 우리가 페테르부르크에서 한 논쟁을 기억합니까?” 피에르가 말했다. “기억해요……?”

“다시 그녀에게 청혼하고 관대함을 보여라, 뭐 그런 말인가……? 그래, 대단히 고결한 행동이지. 하지만 난 그 신사의 자취를 따를 수 없어. 자네가 내 친구로 남기를 바란다면 나에게 절대로 이…… 이 모든 것에 대해 말하지 말아 줘. 그럼 잘 가게. 자네가 전해 줄 거지……?”



피에르는 방을 나와 노공작과 마리야 공작 영애에게 갔다. 노인은 평소보다 더 활기차 보였고, 마리야 공작 영애는 여느 때와 똑같았다. 그러나 피에르는 그녀 안에서 오빠에 대한 연민을 넘어 오빠의 결혼이 깨진 데 대한 기쁨을 보았다. 그들을 보며 피에르는 두 사람 다 로스토프가에 대해 얼마나 경멸과 적의를 품었던가를 깨달았고, 그들 앞에서는 안드레이 공작을 어떤 사람으로도 바꿀 수 있었을 그 이름을 상기시키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2


그날 밤 피에르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로스토프가 사람들을 찾아갔다. 나타샤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백작은 클럽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피에르는 소냐에게 편지들을 건넨 뒤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에게 갔다. 10분 후 소냐가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의 방에 들어왔다.“나타샤가 표트르 키릴로비치 백작님을 꼭 만나고 싶어 해요.” 그녀가 말했다.


해쓱하게 야윈 나타샤가 딱딱하게 굳은 창백한 얼굴로 (피에르가 예상했던 부끄러워하는 얼굴은 전혀 아니었다) 응접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표트르 키릴리치.” 그녀는 빠르게 말하기 시작했다.“볼콘스키 공작은 당신의 친구였죠. 지금도 당신의 친구죠.” 그녀는 고쳐 말했다.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과거의 일일 뿐 이제는 전부 달라진 것처럼 여겨졌다.) “그가 그때 당신과 의논하라고 말했었는데…….”


나타샤는 피에르의 머릿속에 떠올랐을지 모를 생각에 놀란 듯했다.

“아뇨, 난 알아요. 모든 게 끝났어요.” 그녀는 서둘러 말했다.“아뇨,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다만 내가 그에게 안긴 불행이 날 고통스럽게 하고 있어요. 그에게 이렇게만 전해 주세요. 내가 용서를, 용서를 구한다고요. 날 용서하라고요…….” 그녀는 온몸을 떨며 의자에 앉았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맙시다, 나의 친구.” 피에르가 말했다.

그의 온화하고 부드럽고 진심 어린 목소리가 나타샤에게 불현듯 너무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더 이상 말하지 맙시다, 나의 친구. 내가 그에게 전부 말하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 부탁하겠습니다. 날 당신의 친구로 여겨 주세요. 만약 당신에게 도움이, 조언이 필요하거든, 그저 누군가에게 마음을 털어놓아야 하거든, 지금이 아니라 마음이 맑아지게 되거든 날 떠올려 주십시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나타샤는 지난 많은 날들 이후 처음으로 감사와 애정의 눈물을 흘리며 피에르를 쳐다보고는 방에서 나갔다.

피에르도 그녀를 뒤따라 현관방으로 뛰어가다시피 했다.

"집으로 가세.” 영하 10도의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피에르는 기쁨에 차서 호흡하고 있던 넓은 가슴의 곰 가죽 외투를 활짝 열어젖히며 마부에게 말했다.


아르바트 광장 입구에 들어서자 별이 빛나는 어두운 하늘의 광대한 공간이 피에르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 한가운데에 프레치스텐스키 가로수 길 위쪽으로 1812년의 거대하고 찬란한 혜성이 떠 있었다. 그것은 사방에 흩뿌려진 별들에 둘러싸였지만 지상과의 가까움으로, 하얀빛과 위로 솟은 긴 꼬리로 다른 모든 별들과 구별되었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세상의 온갖 공포와 종말을 예언하던 바로 그 혜성이었다. 피에르에게는 이 별이 새로운 삶을 향해 피어난, 부드러워지고 고무된 그의 영혼에 깃들어 있던 것에 온전히 화답하는 듯 여겨졌다.



<제2권 제5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