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권 제4부
제4부
1
죽어 가는 동물을 볼 때 그 공포가 사람을 사로잡는다. 바로 그 자신인 것, 자신의 본질이 눈앞에서 확연히 소멸해 간다. 존재를 멈추는 것이다. 그러나 죽어 가는 것이 사람일 때, 하물며 사랑하는 사람일 때에는 생명의 소멸을 직면하는 데에서 오는 공포 외에도 육체의 상처와 똑같이 때로는 죽음을 야기하고 때로는 치유되기도 하지만 언제나 아프고, 외부의 자극적인 접촉을 두려워하는 정신적 상처 그리고 파열을 느끼게 된다.
안드레이 공작의 죽음 이후 나타샤와 마리야 공작 영애는 똑같이 그것을 느꼈다. 정신적으로 움츠러들고 자기들 위에 드리운 죽음이라는 무서운 구름에 눈을 감은 두 사람은 감히 삶의 얼굴을 응시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벌어진 상처를 모욕적이고 아픈 접촉으로부터 조심스럽게 보호했다. 특히 진실하지 않은 미약한 동정의 말이 상처를 아프게 자극했고, 모욕을 느끼게 했으며, 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고요함을 깨뜨렸다.
그러나 순수하고 완전한 기쁨이 불가능하듯 완전한 슬픔도 불가능하다. 마리야 공작 영애는 자기 운명의 유일하고 독립적인 주인이자 조카의 후견인이며 양육자라는 처지 때문에 처음 2주 동안 빠져 있던 슬픔의 세계에서 나타샤보다 먼저 삶으로 소환되었다. 니콜렌카가 지내는 방이 습해서 아이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알파티치가 업무를 보고하고 온전히 보존되어 조금만 손보면 되는 모스크바의 브즈드비젠카에 있는 저택으로 거처를 옮기자는 제안과 조언을 하러 야로슬라블에 왔다.
삶의 문제들이 그녀의 관심을 요구했으므로 마리야 공작 영애는 어쩔 수 없이 그에 굴복하고 말았다. 나타샤는 혼자가 되었고, 마리야 공작 영애가 떠날 준비로 바빠진 이후로는 그녀 역시 피했다. 마리야 공작 영애는 백작 부인에게 나타샤가 자신과 함께 모스크바에 가는 것을 제안했고, 나타샤의 부모는 그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는데, 장소의 변화와 모스크바 의사들의 도움이 딸에게 이로울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저는 아무 데도 안 가요.” 제안에 대해 나타샤는 이렇게 대답했다.
"부탁이예요. 절 좀 내버려 두세요." 그녀는 슬픔이라기 보다는 분노와 원망의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나타샤는 버림받아 슬픔 속에 홀로 남았다고 느낀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 방에서 지냈다. 그녀는 그가 떠난 곳, 생의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았고, 그의 목소리를 들었으며, 그의 말과 그에게 건넨 자신의 말을 되뇌었고, 때로 자신과 그를 위해 당시 할 수도 있었을 새로운 말들을 생각해 내곤 했다.
그가 죽기 나흘 전 그 무서운 저녁에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상상 속에서 그녀는 그때 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에야 하게 된 부드럽고 애정 어린 다른 말들을 그에게 건넸다.‘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해요, 사랑해요…….’그녀는 두 손을 잡고 이를 꽉 물면서 말했다.그러자 달콤한 슬픔이 그녀를 사로잡았고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 때, 순간, 문손잡이를 두들기는 커다란 소리가 그녀의 귀가 아프도록 충격을 주었다. 하녀 두냐샤가 나타샤의 표정을 살피지도 않는, 겁에 잔뜩 질린 얼굴로 경망스럽게 방으로 급히 들어왔다.
“아버지께 가 보세요, 빨리요.” 두냐샤가 특히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불행이, 표트르 일리이치에 대한…… 편지가…….” 그녀가 흐느끼며 말했다.
2
그녀가 홀에 들어섰을 때 아버지가 백작 부인의 방에서 황급히 나왔다. 그의 얼굴은 구겨지고 눈물에 젖어 있었다. 짐작하건대 그는 목을 메어 오는 흐느낌을 터뜨리기 위해 그 방에서 뛰쳐나온 것 같았다. 나타샤를 본 그는 두 손을 절망적으로 흔들며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발작적인 흐느낌을 고통스럽게 터뜨렸다.
“페…… 페탸가…… 가, 가 봐, 엄마가…… 엄마가…… 부른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문에 들어서다가 마치 자신과 싸우기라도 하듯 잠시 멈추고 나서는 어머니 곁으로 달려갔다. 백작 부인은 기이하고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안락의자에 몸을 쭉 뻗고 누워 머리로 벽을 찧고 있었다. 소냐와 하녀들이 그녀의 팔을 잡고 있었다. “나타샤! 나타샤를!” 백작 부인이 소리쳤다.“거짓말, 거짓말이야. 그가 거짓말을 한 거야……. 나타샤를 데려와!” 그녀는 주위 사람들을 밀치며 외쳤다. “전부 나가, 거짓말! 죽다니! 하하하하! 거짓말이야!”
나타샤는 안락의자에 무릎을 꿇고 어머니 위로 몸을 굽혀 끌어안고선 뜻밖의 힘으로 그녀를 일으켜 어머니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리고 어머니에게 꽉 안겼다.“엄마! 사랑하는 엄마! 저, 여기 있어요, 엄마!”그녀는 한순간도 말을 멈추지 않고 어머니에게 계속 속삭였다. 나타샤는 계속해서 어머니의 머리와 손과 얼굴에 입을 맞추었는데, 눈물이 그녀의 코와 뺨을 간질이면서 줄줄 흘러내렸다.
그녀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고, 나타샤를 보자 딸의 머리를 힘껏 움켜쥐었다. 그 후에는 아픔으로 일그러진 나타샤의 고개를 자기 쪽으로 돌리고 오랫동안 딸의 얼굴을 응시했다.
"나타샤, 너는 날 사랑해. 너는 날 속이지 않을 거지? 나에게 모든 진실을 말해 줄 거지?"
나타샤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는데 그녀의 얼굴에는 용서와 사랑에 대한 애원만 나타나 있을 뿐이었다.
나타샤는 그날의 낮과 밤이, 그다음 날의 낮과 밤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잠도 안 자고 어머니 곁을 지켰다. 설명이나 위로가 아닌 삶의 부름으로서의 나타샤의 끈기 있고 참을성 있는 사랑은 매 순간 사방에서 백작 부인을 감싸는 듯했다. 사흘째 밤, 백작 부인이 잠시 진정한 것을 보며 나타샤는 안락의자 손잡이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침대가 삐걱거렸다. 나타샤는 눈을 떴다.
백작 부인이 침대에 앉아 조용히 말했다.
“네가 돌아와서 너무 기쁘구나. 피곤하겠네. 차 좀 마시겠니?” 나타샤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멋있어지고 어른이 되었네.” 백작 부인은 딸의 손을 잡고 계속 말했다.
“엄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나타샤, 그 애는 없다. 이제 더 이상 없는 거야!” 딸을 포옹하며 백작 부인은 처음으로 울음을 터뜨렸다.
3
마리야 공작 영애는 출발을 연기했다. 소냐와 백작이 나타샤와 교대하려 애썼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은 나타샤 한 사람만 어머니를 광적인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할 수 있음을 보았다. 어머니의 정신적 상처는 치유될 수 없었다. 페탸의 죽음은 그녀의 생명 절반을 떼어 갔다. 그러나 백작 부인을 반쯤 죽인 그 상처, 그 새로운 상처가 나타샤를 삶으로 불러냈다. 그와 같이 나타샤의 상처 또한 치유되었다.
어머니 방에서 보낸 지난 몇 주는 나타샤의 체력을 바닥까지 떨어뜨렸다. 어느 날 마리야 공작 영애는 한낮에 나타샤가 오한으로 떠는 것을 알아채고 자기 방으로 데려가 침대에 눕혔다. 나타샤는 침대에 누웠으나 마리야 공작 영애가 커튼을 치고 방에서 나가려 하자 그녀를 불렀다.
“마샤.” 나타샤는 마리야 공작 영애의 손을 자기 쪽으로 수줍게 끌어당기며 말했다.“마샤, 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마. 알았지? 마샤, 내 소중한 사람. 우리, 영원한, 영원한 친구가 되자.”
그리고 나타샤는 마리야 공작 영애를 끌어안으며 손과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마리야 공작 영애는 나타샤의 그런 감정 표현에 부끄럽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그날 이후 마리야 공작 영애와 나타샤 사이에는 여자들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열렬하고 부드러운 우정이 굳게 형성되었다. 두 사람은 따로 있을 때보다 함께 있을 때 더더욱 일치된 감정을 느꼈다. 그들 사이에는 우정보다 더 강한 감정이 확립되었다. 그것은 서로가 존재할 때에만 삶이 가능하다는 특별한 감정이었다.
마리야 공작 영애는 어린 시절에 대해, 어머니에 대해, 아버지에 대해,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런 헌신과 순종의 삶을, 그리스도교의 자기희생의 아름다움을 이전에는 차가운 몰이해로 외면해 온 나타샤는 이제 자신이 마리야 공작 영애와 사랑으로 묶여 있다고 느끼면서 그녀의 과거도 사랑하게 되었고, 자신이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삶의 측면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타샤의 어린 시절과 사춘기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마리야 공작 영애에게도 그녀가 예전에 알지 못하던 삶의 측면 그리고 삶과 삶의 즐거움에 대한 믿음의 가능성이 열렸다. 두 사람은 자신들 안에 있는 지고의 감정을 말로 깨뜨리지 않기 위해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에 대해서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침묵이 그들 스스로는 믿지 않았지만 조금씩 그를 잊게 만들었다.
1월 말에 마리야 공작 영애는 모스크바로 떠났고, 백작은 나타샤가 의사와 상담할 수 있도록 마리야 공작 영애와 함께 그녀 역시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4
쿠투조프가 적을 섬멸하고 차단하길 원하는 아군의 바람을 막지 못해 벌어진 뱌지마에서의 충돌 이후로 도주하는 프랑스군과 그 뒤를 추격하는 러시아군의 이동은 크라스노예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 번의 전투 없이 계속되었다. 프랑스군이 너무 빨리 도주했기 때문에 그 뒤를 쫓는 러시아군은 미처 따라잡을 수 없었고, 기병대와 포병대의 말들은 자주 멈춰 섰으며 프랑스군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는 늘 부정확했다.
러시아군이 얼마나 지쳤는지를 이해하려면, 이동 기간 동안 겨우 5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 1백 명을 포로로 잃은 러시아군이 타루티노를 떠날 때만 해도 10만 명에 이르렀는데 크라스노예에 도착할 때는 5만 명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 프랑스군의 후퇴가 스스로에게 파괴적이었듯이 그 뒤를 쫓는 러시아군의 빠른 추격 역시 스스로에게 똑같이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쿠투조프의 활동은 타루티노와 뱌지마 부근에서 그랬듯이 프랑스군에 파괴적인 이 같은 이동을 가능한 한 중단하지 않고 (페테르부르크와 군 내부의 러시아 장군들은 그 이동을 멈추기를 원했다) 오히려 그 이동에 협조하며 아군의 이동을 더 수월하게 하는 데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뿐 아니라 속도와 계절의 측면에서 이 전례 없는 행군에 따를 모든 고통을 병사들과 함께 공동으로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공을 세우고 누군가를 놀라게 하고 무언가를 위해 대공이나 왕을 생포하길 바라는 장군들, 특히 러시아인이 아닌 외국인 장군들에게는 모든 전투가 추악하고 무의미한 지금이 바로 전투를 벌이고 누군가를 이길 때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리하여 이런 일이 러시아군이 프랑스군의 3개 종대 가운데 하나를 발견하리라 생각했는데 1만 6천 명을 거느린 나폴레옹 본인과 맞닥뜨렸던 크라스노예 부근에서 벌어졌다. 이런 파멸적인 충돌을 피하고, 자신의 군대를 지키기 위해 쿠투조프가 사용한 온갖 수단들에도 불구하고 크라스노예 부근에서 이미 지쳐 버린 러시아 병사들이 패배한 무리인 프랑스군을 완전히 격파하는 데 사흘이란 시간이 걸렸다.
톨은 '제1종대는 어디어디로 향할 것' (독일어) 등의 작전 명령을 썼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모든 것은 작전 명령대로 되지 않았다. 부대의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 말하고, 필요할 때 결코 나타난 적이 없으며, 스스로를 '두려움이 없고 나무랄 데 없는 기사'라 부르고, 프랑스군과의 회담 애호가였던 밀로라도비치는 항복을 요구하며 군사(軍使)를 보내 시간을 허비하였고, 명령은 수행하지 않았다.
크라스노예 부근에서 러시아군은 2만 6천 명의 포로와 대포 수백 문 그리고 '원수의 홀(忽)'이라 불리는 막대기를 취했고, 누가 거기서 공을 세웠는지 논쟁하는 데 만족했지만 나폴레옹이나 하다못해 어떤 영웅, 원수라도 잡지 못한 것을 매우 유감스러워하며 이에 대해 서로를, 특히 쿠투조프를 책망했다. 자기 욕망의 인도를 받은 이 사람들은 필연성이라는 가장 슬픈 법칙의 맹목적인 실행자들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영웅으로 여기고, 자신들이 한 일이 가장 가치있고 고귀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쿠투조프를 여러 면으로 비난했다.
자신의 욕망에 이끌린 동시대인들만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었다. 후손들과 역사도 나폴레옹은 위대하다고 인정한 반면 쿠투조프에 대해서는 외국인들은 교활하고 음탕하고 쇠약한 궁전 늙은이로, 러시아인들은 뭔가 정체를 알 수 없고 단지 러시아 이름을 가졌기 때문에 쓸모 있는 어떤 인형으로 생각했다.
5
1812년과 1813년에 사람들은 쿠투조프의 실책에 대해 공공연하게 직접적으로 비난했다. 군주는 그를 불만스러워했다. 그리고 군주의 명령으로 최근에 저술된 역사서에서 쿠투조프는 나폴레옹의 이름까지 두려워한, 크라스노예와 베레지나 부근에서는 그 실책으로 인해 프랑스군을 상대로 완전히 승리할 수 있는 영예를 러시아군으로부터 박탈한 교활하고 거짓말 잘하는 신하로 등장한다.
그것은 러시아의 지성이 인정하지 않는 위대한 인물, 즉 그랑 옴(grand homme)이 아닌 자들의 운명이 아니라 신의 의지를 깨달아 자신의 개인적인 의지를 그에 복종시키는 보기 드물고 언제나 고독한 자들의 운명이다. 군중의 질투와 멸시는 지고한 법칙을 깨달았다는 이유로 이런 사람들을 벌한다.
하지만 그 활동이 그처럼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의 똑같은 목적을 지향했던 어떤 역사적 인물을 생각해 내기란 어렵다. 더욱 가치 있고 전 국민의 의지에 더더욱 합치하는 목적을 상상해 내는 것 또한 어렵다. 역사상의 인물이 설정한 목표가 1812년에 쿠투조프의 모든 활동이 성취하려 했던 목적만큼 완전하게 성취된 예를 찾는 것은 더욱더 어렵다.
쿠투조프는 피라미드에서 내려다보는 4천 년에 대해, 조국을 위해 자신이 감수하는 희생에 대해, 자신이 완수하려는 계획이나 이미 완수한 것에 대해 결코 말하지 않았다. 대체로 그는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어떤 배역도 연기하지 않았다. 언제나 가장 소탈하고 평범한 사람으로 보였으며, 지극히 소탈하고 평범한 이야기를 했다.
인생의 경험을 통해 사상과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가 사람들을 움직이는 본질이 아니라는 확신에 도달한 이 노인은 이런 경우들뿐 아니라 전혀 무의미한 말들,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말들을 끊임없이 내뱉었다. 그러나 그렇게도 자기 말을 등한시하던 이 노인은 전쟁의 전 기간 동안 자신이 추구한 유일한 목적에 부합하지 않을 말은 자신이 활동하는 내내 단 한 마디도 한 적이 없었다.
분명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괴롭게 확신했음에도 온갖 다양한 상황에서 자신의 생각을 부지불식간에 여러 번 드러냈다. 보로디노 전투 때부터 그 한 사람만이 '보로디노 전투는 승리다'라고 말했고 그 한 사람만이 '모스크바를 잃는 것은 러시아를 잃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평화 조약을 제안하는 로리스통에게 '평화 조약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국민의 의지이기 때문이다'라고 응답했다.
프랑스군이 퇴각할 때 그 한 사람만이 '우리의 어떤 군사 행동도 필요 없다, 모든 것은 저절로 우리가 바라는 것 이상으로 잘될 것이다, 적에게 황금 다리를 넘겨야 한다, 나는 프랑스 군인 열 명을 위해 러시아 군인 한 명을 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단지 그 한 사람, 이 신하는 '국경 너머로 전쟁을 확장하는 것은 위험하고 무익하다'라고 빌나에서 말하여 군주의 신임을 잃는다.
그러나 말만으로는 그가 당시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음을 입증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행동들은 그 어떤 미미한 빗나감도 없이 다음의 세 가지 행동으로 표현되는 하나의 동일한 목적을 향했다.1) 프랑스군과의 충돌에서 전력을 다한다. 2) 프랑스군을 격파한다. 3) 힘닿는 한 국민과 군대의 불행을 경감시키면서 프랑스군을 러시아에서 몰아낸다.
그러나 당시에 어떻게 그 노인 혼자만 모두의 견해에 반대하면서 그 사건이 지니는 국민적 의미의 중요성을 올바르게 짐작하고, 자신의 활동 기간 내내 한 번도 그것을 뒤집지 않았을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의 의미를 통찰한 그 놀랄 만한 힘의 근원은 그가 자기 안에 가장 순수하고 힘 있게 품고 있던 민중의 감정이었다. 그에게서 이러한 감정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만이 국민이 그처럼 기이한 방법을 통해 차르의 눈 밖에 난 노인을 차르의 의지에 반하여 국민 전쟁의 대표자로 뽑게 만들었다.
그리고 오직 이 감정이 그를 인간의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르게 했고, 총사령관으로서의 그는 그 위치에서 사람을 죽이고 절멸하는 것이 아닌 사람을 구하고 아끼는 것에 전력을 다했다. 소탈하고 겸손한, 그래서 진정으로 위대한 이 인물은 역사가 고안해 낸 유럽적 영웅, 인간을 지배하는 그런 거짓된 영웅 형상에 이끌리지 않을 수 있었다. 노예에게 위대한 인간은 있을 수 없는바, 노예에게는 위대함에 대한 자신의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6~8 [크라스노예 전투]
11월 5일은 크라스노예 전투의 첫날이었다. 저녁 전, 지정된 곳이 아닌 다른 장소에 간 장군들이 숱한 말싸움을 벌이고 실책한 이후의 시점에, 서로 충돌하는 명령서를 가지고 부관들이 곳곳에 파견된 이후의 시점에, 적군이 사방으로 도주하여 전투가 벌어질 수도 없고 벌어질 리도 없음이 분명해진 시점에, 쿠투조프는 크라스노예에서 나와 그날 군사령부가 이전한 도브로예로 갔다.
화창하고 몹시 추운 날이었다. 그 뒤를 따르며 숙덕거리는 장군들로 이루어진 대규모 수행원을 거느리고 쿠투조프는 살진 백마를 타고서 도브로예로 향했다. 도로는 모닥불 가에서 몸을 녹이는, 이날 생포된 프랑스인 포로들의 무리로 (이날 7천 명의 포로가 잡혔다) 붐볐다.
프랑스인 한 무리가 길가 가까이 서 있었고, 그중 두 병사는 (한 명은 얼굴이 종기로 뒤덮여 있었다) 손으로 날고기 조각을 찢고 있었다. 그들이 말을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흘깃 던진 시선에는, 그리고 종기 난 병사가 쿠투조프를 쳐다본 후 바로 고개를 돌리고 하던 일을 계속할 때의 악의에 찬 표정에는 무섭고 동물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모든 제군들에게 감사한다!” 그는 병사들을 향해, 그리고 장교들을 향해 다시 한번 말했다. 주변에 내려앉은 정적 속에서 그가 느리게 발음하는 말들이 명확히 들렸다. “어려운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 주어 모두에게 감사하는 바이다. 우린 완전히 승리했고, 러시아는 제군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제군들에게 영원히 영광이 함께하길!”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잠시 침묵했다.
"이보게, 형제들. 나도 그대들이 힘들다는 걸 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는가! 참아주게. 얼마 남지 않았다. 손님들을 보내고 나면 그때는 쉬게 될 것이다. 그대들의 노고를 차르께선 잊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이 힘들겠지만, 어쨌든 제 집에 있지 않은가. 하지만 저들은, 보라,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 그는 포로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상거지보다 못하자. 이제 우리는 저들을 동정할 수 있다. 저들 또한 사람이지 않은가, 제군들?"
그는 잠시 침묵했고 의혹에 잠긴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저들을 우리에게로 부른 자는 결국 누구인가? 자업자득이야. 개……자식들…….”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러고는 채찍을 휘두른 후 이번 전쟁 기간 동안 처음으로 말을 전속력으로 몰아 흐트러진 대열 속에서 소리 내어 웃으며 “우라!”라고 외치는 병사들의 곁을 떠났다.
쿠투조프의 말은 아마도 병사들에게 거의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누구도 엄숙한 말로 시작하여 선량한 노인의 말로 끝나는 원수의 연설 내용을 전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연설의 진정한 의미는 이해되었을 뿐 아니라 적에 대한 연민과 자신의 정당성에 대한 자각과 결합된 위대하고 엄숙한 감정 자체, 노인의 선량한 욕설로 표현된 바로 그 감정은 병사 개개인의 영혼 속에 자리 잡아 오랫동안 그치지 않는 기쁨의 함성으로 나타났다.
11월 8일, 크라스노예 전투의 마지막 날이었다. 부대가 야영지로 귀환했을 때는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하루 종일 고요했고 몹시 추웠으며 이따금 가벼운 눈발이 흩날렸다. 저녁쯤 날이 개기 시작했다. 눈발 사이로 별이 빛나는 검보라색 하늘이 보였고 추위는 그 강도를 더해 갔다.
타루티노에서 출발할 때는 3천 명이던 라이플총 연대가 앞장선 부대들 중 하나로서 큰 도로에 위치한 마을의 야영지에 도착했을 때는 9백 명으로 줄었다. 연대를 맞이한 숙영계 장교들은 모든 농가가 병들거나 죽은 프랑스인, 기병, 참모 들로 꽉 찼다고 알렸다. 연장을 만드는 농가 하나만 남았을 뿐이었다. 일부 병사들은 마을로 흩어져 농가마다 놓여 있는 프랑스군의 시체를 처리하고, 모닥불을 피울 판자와 마른 장작들을 운반했다.
병사들이 지나쳐 간 농가 안에서는 최고 수뇌부가 모여 차를 마시며 지나간 하루와 향후 예정된 군사 행동에 대해 활발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왼쪽으로 측면 이동을 하여 부왕의 퇴로를 차단한 후 그를 사로잡을 예정이었다. 병사들이 바자울을 끌고 왔을 때는 이미 여러 곳에서 음식을 만들기 위한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제8중대가 운반한 바자울은 북쪽에서 반원 모양으로 총가(銃架)를 버팀목 삼아 세워졌고, 그 앞에 모닥불이 지펴졌다. 점호를 알리는 북이 울리면서 점호가 이루어졌고, 사람들은 저녁을 먹은 뒤 밤을 보내기 위해 모닥불 주위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러시아 병사들이 처한 거의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생존 조건에서 (영하 18도의 눈 더미 속에 따뜻한 부츠도, 반외투도, 머리 위 지붕도 없고 식량 보급대가 군대 뒤를 항상 잘 따라온 것은 아니어서 식량조차 충분하지 않은) 병사들은 매우 비참하고 음울한 광경을 보여 주었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최상의 물질적 조건을 가진 군대도 결코 이보다 더 유쾌하고 활기찬 광경을 보여 준 적은 없었다. 이는 낙심하고 쇠약해진 사람들이 매일같이 군대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바자울을 둘러친 제8중대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상사 둘이 그들 곁에 앉았고, 그들의 모닥불은 다른 데보다 더 선명하게 불타올랐다. 그들은 바자울 안쪽에 앉을 권리를 얻으려면 장작을 가져오라고 요구했다. 사람들이 장작을 쪼개 불 속에 밀어 넣고 입과 외투 자락으로 바람을 불어 대자 불꽃이 쉭쉭 탁탁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그런데 3중대에서는 어제 하루 동안에만 아홉 명이 없어졌다던데.”
“생각해 봐, 발에 동상을 입었는데 어디를 가겠어?”
“아이고,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네!” 상사가 말했다.
“아니면 너도 똑같은 걸 바라는 거냐?” 늙은 병사가 동상을 입었다고 말한 사람을 책망하듯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 프랑스군을 꽤 많이 잡았잖아.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신발이라고 부를 만한 진짜 신발이 하나 없어. 죄다 이름뿐이야.” 병사들 가운데 한 명이 새로운 주제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형제들, 정말 기묘하다니까. 모자이스크 부근의 농부들이 그러는데 말이야, 전투가 있었던 곳에서 시체를 치우게 되었는데 대략 한 달이 지나도록 그곳에 프랑스인들의 시체들이 누워 있었다는 거야. 농부들이 말하길, 그자들이 깨끗한 백지장처럼 누워 있었고 냄새도 전혀 나지 않았대.”
“틀림없이 음식 때문일 거야.” 상사가 말했다. “귀족들의 음식을 처먹어서 그래.”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대화가 그치고 병사들은 잠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내려앉은 침묵 속에 잠든 사람들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깨어 있는 사람들은 이따금 말을 주고받으며 이리저리 몸을 돌려 가며 불을 쬐었다.
멀리서, 1백 발짝 정도 떨어진 모닥불 가에서 다정하고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봐, 5중대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네.” 한 병사가 말했다. “사람들도 엄청 많아. 대단하군!”
한 병사가 일어나 제5중대로 다가갔다.
“다들 웃느라 난리가 났네.” 그가 돌아와서 말했다. “프랑스인 둘이 합류했어. 한 명은 완전 얼었고, 다른 한 명은 아주 건방지던데. 그자가 노래를 부르고 있어.”
“그래? 보러 가자…….” 몇몇 병사들이 제5중대로 향했다.
9
제5중대는 숲 바로 옆에 있었다. 쌓인 눈 한가운데서 거대한 모닥불이 서리가 무겁게 내려앉은 나뭇가지들을 비추며 밝고 선명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한밤중에 제5중대 병사들은 숲속에서 눈을 밟는 발소리와 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어, 곰이다.” 한 병사가 말했다. 다들 고개를 들어 귀를 기울였는데 서로를 붙잡은, 이상한 옷차림을 한 두 인간의 형체가 숲에서 모닥불의 밝은 빛 속으로 나왔다.
이들은 숲속에 숨어 있던 프랑스인이었다. 그들은 모닥불 옆으로 다가왔다. 키가 좀 더 크고 장교 모자를 쓴 한 명은 완전히 쇠약해진 것 같았다. 작고 다부진 체격의, 손수건으로 양 볼을 싸맨 다른 병사는 좀 더 기운 있어 보였다. 병사들은 프랑스인들 주위에 모여들어 병자에게 외투를 깔아 주고 두 사람에게 죽과 보드카를 가져다주었다. 쇠약한 프랑스 장교는 랑발이었다. 손수건으로 얼굴을 싸맨 남자는 그의 종졸 모렐이었다.
모렐은 보드카를 다 마시고 솥의 죽을 해치우고 나서 갑자기 병적으로 유쾌해져 자기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병사들에게 쉼 없이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랑발은 음식을 거부했고, 충혈된 눈으로 러시아 병사들을 멍하니 쳐다보며 말없이 모닥불 옆에 팔꿈치를 괴고 누워 있었다.
모닥불로 다가간 러시아 장교가 프랑스 장교를 보더니 몸을 따듯하게 해 줄 수 없는지 연대장에게 물어보려고 사람을 보냈다. 연대장에게 갔다가 돌아온 사람은 연대장이 장교를 데려오도록 지시했다고 말했다. 랑발은 그쪽으로 가라는 말을 전달받았다. 그는 일어나서 걸으려 했지만 비틀거렸고, 옆에 서 있던 병사가 잡아 주지 않았다면 넘어질 뻔했다.
랑발은 병사들의 목을 팔로 감쌌고, 병사들이 그를 옮기자 애처롭게 말했다.
“오, 좋은 젊은이들이야! 오, 선하고 착한 나의 친구들! 이게 바로 인간이지! 아, 나의 선한 친구들이여!” 그러고는 아이처럼 한 병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한편 모렐은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마도 술에 취해서인지 그는 옆에 앉은 병사에게 팔을 두르고 끊어지는 쉰 목소리로 프랑스 노래를 불렀다. 병사들은 그를 구경했다.
“어이, 어이, 가르쳐 줘, 어떻게 부르는 거야? 내가 똑같이 흉내 낼게. 어떻게 해?” 모렐이 껴안고 있던 익살꾼 가수가 말했다.
앙리 4세 만세,
용감한 왕 만세!
그 4중의 악마……
모렐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노래를 불렀다.
“자, 계속해, 계속!”
세 가지 재능을 가진 자,
마시고 싸우고
호색한이 되는 재능……
“이자에게 죽 좀 더 줘. 잔뜩 굶은 뒤라서 금방 배를 채울 수는 없지.”
사람들은 다시 모렐에게 죽을 주었다. 모렐을 바라보는 젊은 병사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쓸데없는 짓을 무례한 행동으로 생각하는 늙은 병사들은 모닥불 맞은편에 누워 있었지만 이따금 팔꿈치를 짚고 몸을 살짝 일으켜 미소 지으며 모렐을 쳐다보았다.
“저자들 또한 인간이야.” 한 명이 외투로 몸을 감싸며 말했다. “쑥도 제 뿌리 위에서 자라는 법이지.”
10
프랑스군은 수학적으로 규칙적인 수열에서의 균등한 비율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꽤 많은 기록이 남아 있는 ‘베레지나 도하(度河)’는 단지 프랑스군이 소멸하는 과정의 중간 단계 중 하나였을 뿐 결코 전쟁에서 결정적인 사건은 아니었다. 모든 이들이 계획대로 전부 실현되리라 확신했고 그런 이유로 베레지나 도하가 프랑스군을 파멸시킨 사건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상 베레지나 도하의 결과는 수치가 보여 주듯 프랑스군 쪽에서 볼 때 무기와 포로의 손실이라는 면에서 크라스노예 전투보다 훨씬 덜 치명적이었다.
베레지나 도하의 유일한 의의는 모든 차단 작전이 잘못되었음을, 그리고 쿠투조프와 군대 전체(대중)가 요구한, 실현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행동 방식, 즉 적을 추격하는 것만이 옳은 길이었음을 명명백백 확실하게 증명했다는 점이다. 프랑스군 무리는 목표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여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달아났다. 그 무리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도망치고 있었고, 도중에 멈추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를 증명한 것은 도하라는 상황보다는 다리 위에서 보여 준 행동이었다. 다리들이 붕괴했을 때 무기가 없는 병사들, 모스크바 주민들, 자식들과 함께 프랑스군의 수송 대열에 합류했던 여자들, 이 모든 사람들은 관성의 힘의 영향을 받아 상황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보트 안으로, 얼어붙을 듯이 차가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이 같은 돌진은 현명한 것이었다. 달아나는 자들이나 쫓는 자들이나 그 상황이 좋지 않았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러시아군에 투항하는 사람은 비록 러시아인들과 똑같은 곤경을 겪긴 했지만 생명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면에 있어서는 가장 낮은 부류가 되었다. 러시아인들이 포로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고, 구하고자 했으나 포로 절반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었다는 사실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프랑스인들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다. 한없는 동정심을 가진 러시아 지휘관들도, 프랑스인들을 매우 좋아하는 러시아인들도, 러시아군에서 복무하는 프랑스인들도 포로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
프랑스군이 멀리 도주할수록, 남아 있는 프랑스인들의 처지가 더욱 가련해질수록, 특히 페테르부르크에서 내린 작전이어서 특별히 기대했던 베레지나 전투 이후로 서로를, 특히 쿠투조프를 비난하는 러시아 지휘관들의 열기는 더욱 거세게 불타올랐다. 베레지나에서 페테르부르크의 작전이 실패한 것이 쿠투조프 때문이라고 여긴 그들은 그에 대한 불만과 경멸과 야유를 점점 더 강하게 표현했다.
특히 탁월한 해군 제독이자 페테르부르크의 영웅인 비트겐시테인이 합류한 이후 그러한 분위기와 참모들의 중상은 극에 달했다. 쿠투조프는 그것을 보고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하기만 했다. 딱 한 번, 베레지나 전투 후 그는 단독으로 군주에게 보고한 베니히센에게 분노하여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귀관에게 병적인 발작 증세가 있으니 부디 이 편지를 받는 즉시 칼루가로 떠나 그곳에서 황제 폐하의 이후 명령과 임명을 기다리시오.
그러나 베니히센이 전출된 후 전쟁 초기에 참가했다가 쿠투조프로 인해 군대에서 밀려났던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이 군대로 왔다. 그리고 이해 8월, 군주의 의지에 반하여 총사령관으로 선출되어 후계자이자 대공인 사람을 군에서 축출했고 군주의 의지에 반하여 자신의 권한으로 모스크바 포기를 명령한, 전쟁만큼이나 궁정 일에 경험이 풍부한 노인인 쿠투조프, 바로 이 쿠투조프는 이제 자신의 시대가 끝났고, 자신의 역할이 다했으며, 자신이 더 이상 허울뿐인 권력조차 가질 수 없음을 깨달았다.
11월 29일, 쿠투조프는 빌나에, 그가 말한 바에 따르면 자신의 친애하는 빌나에 입성했다. 쿠투조프는 복무하는 동안 빌나의 총독을 두 번 역임했다. 가장 열렬한 분단론자이자 강공론자들 중 한 명인 치차고프, 처음에 그리스로, 그다음에 바르샤바로 교란 작전을 떠나길 원할 뿐 자신이 명령받은 곳으로는 절대 가려 하지 않던 치차고프, 바로 이 치차고프가 쿠투조프가 묵기로 되어 있는 빌나의 성에서 쿠투조프를 맨 처음 맞았다.
군주는 톨스토이 백작, 볼콘스키 공작, 아락체예프 등의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12월 7일 페테르부르크를 출발하여 12월 11일 빌나에 도착한 뒤 여행용 썰매를 타고 곧장 성으로 왔다. 혹한에도 불구하고 성에는 예복을 완전히 갖춰 입은 1백여 명의 장군들과 참모 장교들 그리고 세묘놉스키 연대의 의장병들이 서 있었다.
분주히 돌아다니는 소리, 수군거리는 소리와 함께 날 듯이 트로이카가 질주해 왔고, 모든 시선이 다가오는 썰매에 쏠렸다. 썰매 안으로 군주와 볼콘스키가 벌써부터 보였다. 50년 된 습관 때문에 그 모든 것이 늙은 장군에게 육체적으로 불안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걱정스럽고 초조하게 자신의 옷매무새를 만져 대며 모자를 고쳐 썼고, 썰매에서 내린 군주가 그를 올려다본 순간 즉시 기운 내어 몸을 꼿꼿이 세워 보고서를 건넸다.
군주는 장교들과 세묘놉스키 연대의 위병들과 인사한 후 다시 한번 노인과 악수를 하고는 함께 성으로 들어갔다. 원수와 단둘이 남게 되자 군주는 프랑스군의 추격이 지체된 것에 대해, 그리고 크라스노예와 베레지나에서의 실책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고, 향후 국외 원정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쿠투조프는 어떤 반박이나 언급도 하지 않았다.
쿠투조프가 집무실에서 나와 고개를 숙인 채 무거운 걸음으로 절룩거리며 홀을 지나고 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를 불러 세웠다. “대공작 각하.” 누군가가 말했다.
쿠투조프는 고개를 들어 작은 물건이 담긴 은쟁반을 들고 자기 앞에 서 있는 톨스토이 백작의 눈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돌연 기억이 난 듯 그의 살진 얼굴에 퍼뜩 미소가 스쳤고, 그는 공손하게 몸을 숙여 쟁반 위에 놓인 물건을 집었다. 그것은 게오르기 일등 훈장이었다.
11
다음 날 원수의 집에서는 군주가 참석하여 그 가치를 인정받은 만찬과 무도회가 열렸다. 쿠투조프는 게오르기 일등 훈장을 받았다. 군주는 그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원수에 대한 군주의 불만은 모든 이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예의는 지켜졌고, 군주가 첫 번째로 그 모범을 보였다. 하지만 노인이 잘못을 했고 이제 그 어디에도 쓸모없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군주가 그의 거처에 모인 장교들에게 “그대들은 러시아만 구한 것이 아니오. 그대들은 유럽을 구했소”라고 말했을 때 이미 사람들은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쿠투조프 한 사람만이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새로운 전쟁은 상황을 개선시키지도 러시아의 영광을 증대시키지도 못하며, 다만 러시아의 상황을 악화시키고 러시아가 누리고 있는 최고의 영광을 축소시킬 뿐이라는 의견을 노골적으로 피력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원수는 당연히 향후 있을 전쟁의 장애물이자 방해물로만 보였다. 노인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한 출구는 저절로 나타났는데 그것은 아우스터리츠 전투 때처럼, 바르클라이가 지휘하던 전쟁 초기처럼, 총사령관을 동요하게 하지 않고, 또 그에게 통보 없이 그가 서 있던 권력의 토대를 군주에게 넘기는 것이었다.
1812년 전쟁은 러시아인의 마음에 소중한 국민적 의의 외에도 다른 의의, 즉 유럽적 의의를 가져야 했다. 쿠투조프가 러시아의 구원과 영광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듯이 알렉산드르 1세 또한 동에서 서로의 민족 이동을 위해, 여러 민족들이 국경을 회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쿠투조프는 유럽, 균형 그리고 나폴레옹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지 못했다. 그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적이 섬멸되고 러시아가 해방되어 그 영광의 최고 수준에 오른 후 러시아 민족의 대표자가 된 이 러시아인에게는 러시아인으로서 더 이상 할 것이 없었다. 국민 전쟁의 대표자에게 죽음 외에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12
상당히 빈번한 일이지만 포로 시절의 피에르는 육체적인 결핍과 긴장감이 지나고 나서야 그 모든 고통을 느꼈다. 포로 신분에서 벗어난 뒤 그는 오룔로 갔고, 도착한 지 사흘째 되는 날 키예프로 출발하려는 순간 병이 나서 석 달 동안을 앓아누워 있었다. 의사들의 말에 따르면, 담낭염이 생겼다고 했다. 의사들이 그를 치료하고 피를 뽑고 물약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건강을 회복했다.
자유로운 몸이 되었던 날, 그는 페탸 로스토프의 시신을 보았다. 바로 그날 그는 안드레이 공작이 보로디노 전투 후 한 달가량을 더 살다가 바로 얼마 전 야로슬라블의 로스토프가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데니소프는 피에르에게 그 소식을 전해 주는 와중에, 피에르가 오래전에 알았으리라 짐작하고 엘렌의 죽음을 언급했다. 그때 피에르에게는 이 모든 것이 그냥 기이하게만 여겨졌다.
오룔에 도착하자마자 병이 났다. 병상에서 의식을 회복한 피에르는 모스크바에서 온 두 하인 테렌티와 바시카가 자기 옆에 있는 것을, 그리고 피에르의 영지인 옐레츠에서 지내다가 피에르의 석방과 병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를 돌보러 달려온 첫째 공작 영애를 보았다.
인간으로부터 떼어 낼 수 없는, 천부적으로 주어진 충만한 자유, 그 자유에 대한 즐거운 자각, 그가 모스크바를 떠나 첫 번째 휴식지에서 처음으로 겪었던 자유에 대한 자각이 회복기 동안 피에르의 영혼을 가득 채웠다. 그는 외적 상황과 상관없는 그 내적 자유가 이제는 넘치도록 풍부하고 호화로운 외적 자유에 둘러싸인 것 같아 놀랐다.
예전에 그를 괴롭히던 것, 그가 부단히 찾던 것, 삶의 목표들은 이제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찾던 삶의 목적이 지금 이 순간에만 우연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는 그 목적이 존재하지도 않고 또 존재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런 목적의 부재가 그 무렵 그의 행복을 이루던 자유에 대한 충만하고 기쁜 자각을 그에게 주었다.
이제 그가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는 목적을 가질 수 없었다. 그것은 어떤 규율이나 말이나 사상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언제나 감지되는 살아 있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것은 하느님은 바로 이곳에, 그리고 어디에나 계신다는 것이었다. 포로로 있을 때 그는 카라타예프 안에 있는 하느님이 프리메이슨들이 인정하는 우주의 건설자 속에 있는 하느님보다 더 위대하고 무한하고 불가해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눈을 긴장시켜 멀리 바라보다가 자신의 발 근처에서 자신이 찾던 것을 발견한 사람의 기분을 느꼈다.
이전에 그의 모든 지적 건축물을 파괴하던 무서운 질문, ‘왜’는 이제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왜’라는 그 질문에 대해 그의 마음속에는 다음과 같은 단순한 답이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느님의 의지 없이는 사람의 머리에서 머리카락 하나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13
피에르의 외적인 면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외관상 그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얼이 빠져 있었고,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특별한 무언가에 몰두해 있는 듯했다. 지금도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눈앞에 무엇이 있는지 잊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필시 전혀 다른 무언가를 보고 듣는 게 분명했지만, 마치 조롱하는 듯한 희미한 미소를 띤 채 눈앞에 있는 것을 주시하고 사람들이 자신에게 하는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피에르를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었던, 특히 노백작의 죽음 이후 자신이 피에르에게 신세 진 것을 알고 난 이후 그에게 증오를 품었던 공작 영애는 피에르가 은혜를 저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간호를 자신의 의무로 생각한다는 것을 그에게 증명하고자 오룔로 찾아왔고, 거기서 머무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분하고 놀랍게도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바로 지각했다. 피에르는 결코 공작 영애의 환심을 사려 하지 않았다. 호기심을 갖고 그녀를 주시했을 뿐이었다.
예전에 공작 영애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무관심과 조소가 담겨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제 그녀가 느끼는바 그는 그녀 삶의 가장 내밀한 부분까지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의심하면서, 그다음에는 감사히 자신의 성격 가운데 감춰진 좋은 면들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그래, 그는 무척, 무척 좋은 사람이야. 나쁜 사람들의 영향을 받지 않고 나 같은 사람들의 영향을 받으면…….” 공작 영애는 이렇게 혼잣말하곤 했다.
피에르의 오룔 체류 마지막 시기에 프리메이슨인 옛 지인 빌라르스키 백작이, 1807년에 피에르를 프리메이슨 지부로 데려간 그 백작이 찾아왔다. 그는 오룔에 큰 영지를 가지고 있는 부유한 러시아 여자와 결혼했고, 도시에서 식량 부서의 임시직을 맡고 있었다. 베주호프가 오룔에 있다는 걸 안 빌라르스키는 가까이 지낸 적이 전혀 없는데도 그를 찾아와 황야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서로에게 통상 그러듯이 우정과 친밀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빌라르스키는 피에르가 현실 생활에서 매우 뒤처졌으며, 자기 혼자서 피에르를 정의한 바에 의하면 그가 무기력과 에고이즘에 빠져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놀랐다.
“스스로를 방치하고 있군요, 친구.” 빌라르스키는 피에르에게 말했다.
피에르는 빌라르스키를 보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이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와 똑같은 인간이었다는 생각에 믿기지 않을 만큼 놀랍고 이상야릇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의 삶과 타인들의 시각 사이에, 혹은 자신과 타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 그리고 때로 절대적인 대립은 피에르를 기쁘게 만들었고 그로 하여금 온화한 조소를 짓게 했다. 실제적인 문제들에서도 이제 피에르는 예기치 않게 예전에 없던 무게 중심이 자신에게 생긴 것을 느꼈다. 이제 그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그 모든 문제에서 더 이상 의혹이나 망설임을 느끼지 않았다. 이제 그의 안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법에 따라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결정하는 심판관이 나타났다.
빌라르스키가 모스크바로 떠날 예정이어서 그들은 함께 떠나기로 약속했다. 피에르는 오룔에서 건강을 회복하는 내내 기쁨과 자유와 생명의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여행하는 동안 자신이 자유의 세계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한편, 수백 명의 새로운 얼굴들을 보았을 때 이러한 감정은 훨씬 더 강해졌다. 빌라르스키가 죽음과도 같은 것을 본 곳에서 피에르는 놀랄 만큼 강인한 생명력을, 눈 덮인 광활한 공간에서 전체적이면서 특별하고 유일한 사람들의 삶을 지탱하는 힘을 보았다.
14
개미들이 무너진 개미총에서 무엇을 위해 어디로 서둘러 가는지, 어떤 개미들은 개미총에서 티끌과 알과 시체를 끌고 나오는 데 반해 또 다른 개미들은 개미총으로 되돌아오는지, 무엇을 위해 개미들이 서로 충돌하고 서로를 쫓고 싸우는지 설명하기 어렵듯, 프랑스군이 떠난 후 러시아 사람들을 이전에 모스크바라 불리던 장소로 서둘러 가게 한 원인 역시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파괴된 개미총 주위에 흩어진 개미들을 보면 개미총이 완전히 붕괴되어도 우글거리는 수많은 곤충들의 끈기와 힘, 무수한 수로 인해 개미총의 전체 힘을 형성하는 견고하고 비물질적인 어떤 것은 예외적으로 파괴될 수 없듯이, 10월의 모스크바 역시 관청과 교회와 성물과 풍부한 물자와 집들이 없어도 8월의 모스크바와 똑같았다. 모든 것이 파괴되었지만 비물질적인, 그러나 강력하고 견고한 무언가는 예외였다.
모든 사람에게 단 하나의 공통적인 동기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그곳으로, 이전에 모스크바라고 불리던 곳으로 가겠다는 갈망이었다. 일주일 후 모스크바의 주민은 이미 1만 5천 명이었고, 2주일 후에는 2만 5천 명이었다. 수는 계속 증가하여 1813년 가을 무렵에는 1812년의 주민 수를 넘어설 정도가 되었다.
프랑스군의 약탈이 지속될수록 그것은 모스크바의 부(富)뿐만 아니라 약탈자들의 힘까지 점점 더 파괴했다. 러시아인들이 수도를 차지하게 된 동기가 되는 러시아인들의 약탈이 오래 지속될수록, 그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모스크바의 부와 도시의 균형 잡힌 생활은 더욱 빨리 복구되었다.
일주일 후에는 물건을 실어 가기 위해 빈 수레들을 끌고 온 농민들이 관청의 저지를 받았고, 도시 밖으로 시체를 운반하도록 강제 동원되었다. 목수 조합은 높은 임금을 기대하며 매일 모스크바에 들어와 사방에서 나무로 새집을 짓고 불에 탄 집들을 수리했다. 노점상들은 장사를 개시했다.
상급 관청과 경찰은 프랑스군이 남긴 재물을 분배하도록 지시했다. 다른 집에서 가져온 물건들이 많이 남아 있던 집의 주인들은 그라노비타야 궁전으로 그 물건들을 실어 가는 것이 부당하다고 불평했다. 사람들은 경찰을 욕했다. 그리고 경찰을 매수하기도 했다. 불에 탄 국유 재산에 대한 견적이 열 배로 부풀려 기록되었다. 원조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자 라스톱친 백작은 선언문을 작성했다.
15
1월 말에 피에르는 모스크바로 와서 온전한 곁채에 자리 잡았다. 그는 라스톱친 백작과 모스크바에 돌아온 몇몇 지인들을 방문하고 사흘째 되는 날, 페테르부르크로 떠날 작정이었다. 모든 이들이 승리를 축하했다. 황폐해졌다가 되살아나고 있는 수도에서는 모든 것이 생명력으로 들썩였다. 모두가 피에르를 보고 기뻐했다. 피에르는 자신이 만난 사람들에게 특별한 친밀감을 느꼈다. 그러나 무언가에 매이지 않기 위해 이제는 무의식중에 사람들을 조심스럽게 대했다.
로스토프가에 대해서는 그들이 코스트로마에 있다는 말을 들었고, 나타샤를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설령 그녀에 대한 생각이 든다 해도 오래전의 즐거운 추억으로서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생활 조건들로부터 자유로울 뿐 아니라 의도적으로 스스로에게 부과했다고 생각되는 그 감정으로부터도 자유롭다고 느꼈다.
모스크바 도착 후 사흘째 되는 날, 그는 드루베츠코이가 사람들로부터 마리야 공작 영애가 모스크바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안드레이 공작의 죽음과 고통, 마지막 나날이 피에르의 생각을 자주 차지하곤 했는데 이제 그것들이 새로운 생생함을 띠고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식사 중에 마리야 공작 영애가 모스크바에 있고 브즈드비젠카 거리의 불타지 않은 자택에서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된 피에르는 그날 저녁 그녀에게 향했다.
초 한 자루가 비추는 천장이 낮은 방에는 마리야 공작 영애가 앉아 있었고, 검은 옷을 입은 누군가도 함께 있었다. 피에르는 공작 영애의 옆에 항상 말벗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들이 누구였는지,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피에르는 몰랐고 기억하지도 못했다. ‘말벗들 가운데 한 사람이로군.’ 그는 검은 옷을 입은 귀부인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군요. 오빠도 마지막 나날에 당신 이야기를 자주 했어요.”
“당신이 구출되었다는 소식에 무척 기뻤어요. 우리가 오랫동안 받은 소식들 중에서 유일하게 기쁜 소식이었어요.” 공작 영애가 다시 더욱 불안하게 말벗을 돌아보더니 무언가 말하려 했다. 그러나 피에르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내가 안드레이 공작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걸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말했다. “나는 그가 전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제삼자를 통해 알게 된 것입니다. 내가 아는 건, 그가 로스토프가에 갔다는 것뿐입니다……. 정말 기이한 운명이죠!” 피에르는 생기에 차 빠르게 말했다.
그는 말벗의 얼굴에 힐긋 시선을 던졌고 자신을 향한 호기심 어린 다정한 눈길을 보았으며 대화 도중 종종 그러듯이 그는 왠지 몰라도 검은 옷을 입은 말벗이 자신과 마리야 공작 영애의 친밀한 대화를 방해하지 않는 사랑스럽고 선하고 훌륭한 존재임을 느꼈다.
그러나 그가 로스토프가에 대해 마지막 말을 할 때 마리야 공작 영애의 얼굴에 더더욱 강한 당혹감이 나타났다. 그녀는 다시 피에르의 얼굴에서 검은 옷을 입은 귀부인의 얼굴로 빠르게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당신, 정말 모르겠어요?”
피에르는 검은 눈과 기묘한 입매를 지닌, 말벗 여인의 창백하고 갸름한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사랑스러움 이상의 친밀한 무언가가 그 주의 깊은 눈을 통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냐, 그럴 리 없어.’ 그는 생각했다. ‘이 엄숙하고 야위고 창백하고 나이 든 얼굴이? 이 사람이 그녀일 리 없어. 그냥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얼굴일 뿐이야.’
하지만 그때 마리야 공작 영애가 말했다. “나타샤예요.” 그러자 주의 깊은 눈의 얼굴이 마치 녹슨 문이 열리듯 힘겹게 애써 미소를 지었고, 그 열린 문으로부터 갑자기 오랫동안 잊고 있던, 특히 그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행복이 불어 나와 그를 채웠다. 그것은 훅 불어와 그를 사로잡았고 그의 온 존재를 삼켜 버렸다. 그녀가 미소 지었을 때 이미 더 이상의 의혹은 없었다. 그녀는 나타샤였고,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 첫 순간, 피에르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와 마리야 공작 영애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스스로도 알지 못하던 비밀을 말했다. 그는 얼굴을 붉혔는데 기쁘기도 하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아프기도 한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흥분이 감추어지길 바랐다. 하지만 흥분이 감추어지길 바라면 바랄수록 자신과 그녀와 마리야 공작 영애에게 자신이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그 어떤 확실한 말보다 더 명확히 드러날 뿐이었다.
그가 방에 들어선 첫 순간에 그녀를 알아보기란 불가능했는데 왜냐하면 이전에는 삶의 기쁨을 품은 미소로 빛났던 그 얼굴과 눈에 지금, 그가 방에 들어와 그녀를 처음 봤을 때에는 미소의 그림자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오직 슬프게 뭔가를 묻는 듯한 주의 깊고 선한 눈만 있을 뿐이었다. 피에르의 동요는 나타샤에게 동요가 아니라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얼굴 전체를 밝히는 기쁨으로 투영되었다.
16
“나타샤는 우리 집에 손님으로 와 있어요.” 마리야 공작 영애가 말했다. “백작님과 백작 부인도 이제 곧 오실 거예요. 백작 부인의 병세가 심각한 상태예요. 하지만 나타샤도 진찰을 받아야 해요. 두 분이 나타샤를 억지로 저와 함께 보내셨어요.”
“그렇죠, 슬픔을 겪지 않은 가족이 있겠습니까?” 피에르가 나타샤를 돌아보며 말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그 일은 우리가 구출된 바로 그날 일어났습니다. 난 페탸를 보았습니다. 정말 훌륭한 소년이었어요.”
“어떤 말이나 생각이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까요?” 피에르가 말했다. “아무것도 없지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훌륭하고 생기 넘치는 소년이 죽어야 했을까요?”
“왜요?” 나타샤가 피에르의 눈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며 물었다.
피에르는 서둘러 고개를 돌리고 마리야 공작 영애를 향해 친구가 살아 있을 때의 마지막에 관하여 물었다.
“그가 당신을 만날 수 있어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피에르는 갑자기 나타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타샤의 얼굴이 흠칫 떨렸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고 순간 시선을 떨구었다. 잠시 망설였다.
“네, 그건 행복이었어요.” 그녀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게 그건 분명 행복이었어요.”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그가 말했어요. 내가 그를 찾아간 순간, 그도 그것을 바랐다고요…….”
피에르는 입을 벌린 채 눈물이 가득 고인 눈을 떼지 않으면서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녀의 말을 듣는 동안 그는 안드레이 공작에 대해서도, 죽음에 대해서도, 그녀가 하는 말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그저 그녀가 지금 이야기하며 겪을 고통을 안쓰럽게 여길 뿐이었다.
문 뒤에서 니콜루시카가 밤 인사를 하러 들어가도 되냐고 묻는 데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그게 전부예요, 전부…….” 나타샤가 말했다. 니콜루시카가 들어오자 그녀는 재빨리 일어나 문 쪽으로 거의 뛰듯이 가다가 두꺼운 커튼으로 덮인 문에 머리를 부딪혔고, 아파서인지 슬퍼서인지 모를 신음 소리를 내며 방에서 뛰쳐나갔다.
피에르는 니콜루시카에게 입을 맞추고는 마리야 공작 영애에게 작별 인사를 하길 원했지만 그녀가 말렸다.
“아니에요, 나와 나타샤는 가끔 2시가 넘어도 안 잘 때가 있어요. 제발 좀 더 계셔 주세요. 밤참을 차리라고 지시할게요. 아래층으로 가세요. 우리도 곧 갈게요.”
피에르가 방에서 나가기 전, 공작 영애가 말했다.
“나타샤가 오빠에 대해 이야기한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17
하인들은 불이 환하게 켜진 큰 식당으로 피에르를 데리고 갔다. 몇 분 후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서 공작 영애와 나타샤가 식당에 들어왔다. 나타샤는 다시 미소 없는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차분했다.
“당신 이야기를 해 줘요.” 마리야 공작 영애가 말했다.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 너무도 믿기 힘든 기적들이에요.”
“네.” 피에르는 이제 습관이 된 온화한 조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사람들은 심지어 나에게도 내가 꿈에서도 본 적이 없는 그런 기적 같은 일들을 이야기합니다. 마리야 아브라모브나는 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내게 일어났거나 일어났음에 틀림없는 일에 대해 계속 이야기했어요. 스 테판 스테파니치도 내가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를 가르쳤죠. 대체로 내가 깨닫게 된 것은 흥미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매우 편하다는 거예요. (난 지금 흥미로운 인간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날 초대해서 내게 이야기를 들려주니까요."
"당신이 모스크바에서 2백만 루블의 돈을 잃어버리셨다고요. 정말인가요?”
"하지만 난 세 배나 더 부유해졌어요." 피에르가 말했다. 아내의 빚을 갚아야 하고 집을 다시 지어야 해서 상황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자신이 세 배나 더 부유해졌다고 말했다.
"내가 의심할 여지 없이 얻게 된 것은…… 자유입니다……." 그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말해 주세요, 당신은 모스크바에 남았을 때 백작 부인에 대해 알지 못했나요?" 마리야 공작 영애는 이 말을 하는 즉시 얼굴을 붉혔다. 자유롭다는 그의 말 뒤에 이런 질문을 하면 그의 말에는 없었던 의미를 자신이 부가하는 게 될 수도 있다고 느껴서였다.
"몰랐습니다." 피에르는 자유에 대한 자신의 언급에 마리야 공작 영애가 부가한 해석이 조금도 불편하지 않은 듯 대답했다. "난 오룔에서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 소식이 내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 당신은 상상도 못할 거예요. 우리는 모범적인 부부가 아니었죠."
그는 나타샤를 쳐다보고 그녀의 얼굴에서 그가 자신의 아내를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한 호기심을 눈치채고는 재빨리 말했다. "하지만 그 죽음은 저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두 사람이 싸울 때는 항상 두 사람 다 잘못한 거예요.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죄는 갑자기 끔찍할 정도로 무거워집니다. 게다가 친구도 위로도 없이 그렇게 죽다니…… 그녀가 너무, 너무나 불쌍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을 맺은 후 나타샤의 얼굴에서 나타난 기쁨 어린 동조를 알아채고 내심 기뻐했다.
"그렇군요. 이제 당신은 다시 독신자 신랑감이 되었네요." 마리야 공작 영애가 말했다.
피에르는 갑자기 얼굴이 벌게져서 오랫동안 나타샤를 쳐다보지 않으려 고 애썼다. 그가 그녀를 보기로 결심했을 때 그녀의 얼굴 표정은 차갑고 엄했으며 심지어 그가 보기에 경멸하는 듯했다.
"그런데 당신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했듯이 정말 나폴레옹을 만나 그와 이야기를 나눴나요?" 마리야 공작 영애가 말했다. 피에르는 웃음을 터뜨렸다.
"한 번도, 전혀 없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 있는 것이 곧 나 폴레옹의 손님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난 그를 본 적도 없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해 들은 적도 없어요. 난 훨씬 더 아랫사람 들과 같이 있었어요."
"하지만 당신이 나폴레옹을 죽이기 위해 살아남았다는 건 사실이지 않아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나타샤가 물었다. “우리가 수하레바 탑에 서 만났을 때, 그때 난 그렇게 추측했어요. 기억하세요?" 피에르는 그것이 사실임을 인정했고, 그리고 그 질문부터 시작해서 마리야 공작 영애, 특히 나타샤가 던지는 질문들에 이끌려 조금씩 자신의 편력을 상세히 이야기하는 것에 몰두했다.
마리야 공작 영애는 온화하게 웃으며 피에르를 보다가 나타샤를 보다가 했다. 피에르의 이야기에서 그녀가 본 것은 피에르 자신과 그의 선량함이었다. 나타샤는 팔꿈치를 괸 채 이야기를 듣는 동안 계속 표정을 바꾸며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오롯이 피에르를 바라보았는데 마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와 함께 체험하고 있는 듯했다.
피에르는 처형당하던 일을 이야기할 때 그는 끔찍한 광경을 세세히 이야기하지 않고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나타샤가 하나도 빠뜨리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피에르는 카라타예프 이야기를 시작했다가 말을 멈췄다.
"아뇨, 당신은 내가 문맹인 그 사람, 바보나 다름없는 사람에게서 무엇을 배웠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아뇨, 아뇨, 말하세요." 나타샤가 말했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나요?"
"거의 내가 보는 앞에서 그를 죽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피에르는 퇴각의 마지막 시기와 카라타예프의 병, (그의 목소리는 계속 떨렸다) 그리고 그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피에르는 아직 그 누구에게 결코 이야기해 본 적이 없고, 스스로 한 번도 회상해 본 적이 없다는 듯 자신의 편력을 이야기했다. 그는 이제 자신 이 경험한 모든 것에서 새로운 의미를 보는 듯했다. 나타샤에게 그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지금, 그는 여자들이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선사하는 보기 드문 기쁨을 맛보고 있었다. 그것은 남자들의 표현 속에만 있는 모든 최고의 것들을 선택하여 자기 안에 흡수하는 능력을 지닌 진실 한 여자들이 주는 기쁨이었다. 나타샤는 자신도 모르게 계속 집중하고 있었다.
마리야 공작 영애는 피에르의 이야기를 이해했고 그에게 공감했지만 지금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주의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나타샤와 피에르 사이에서 사랑과 행복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든 이 생각이 그녀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웠다.
새벽 3시였다. 슬프고 엄숙한 표정의 하인들이 다 타들어 가는 초를 갈기 위해 들어왔지만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피에르가 이야기를 끝냈다. 나타샤는 피에르가 말하지 않은 나머지 것들도 알고 싶은 듯 생기 띤 눈을 반짝이며 집요하게 피에르를 계속 쳐다보았다. 피에르는 부끄러우면서도 행복한 당혹감을 느끼며 그 녀에게 이따금 시선을 던지고는 다른 화제로 대화를 옮기기 위해 이제 무 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사람들은 불행하다, 고통스럽다는 말들을 하죠." 피에르가 말문을 열었다.
"지금, 바로 이 순간 사람들이 내게 포로가 되기 전의 상태로 남고 싶은가, 아니면 그 모든 것을 처음부터 겪고 싶은가, 라고 묻는다면 제 대 답은 다시 한번 포로가 되어 말고기를 먹겠다는 거예요. 익숙한 길로부터 내던져지면 우리는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새롭고 좋은 것이 시작되는 곳은 오직 거기예요. 살아 숨 쉬는 한, 행복도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많은 것이, 많은 것이 있어요.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것입니다." 그는 나타샤를 향해 말했다.
마리야 공작 영애와 나타샤는 늘 그렇듯이 함께 침실로 갔다. 그들은 피에르가 해 준 이야기에 관해 말했다. "그런데 말이지, 우리가 자신의 감정을 업신여기는 걸 두려워하듯이 우리가 그(안드레이 공작)에 대해 말하지 않아서 그를 잊을까 봐 난 두려워." 마리야 공작 영애는 무겁게 탄식했고, 이런 탄식을 함으로써 나타샤의 말이 옳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말로는 동의하지 않았다. "정말 잊는 게 가능할까?" 그녀가 말했다.
"난 오늘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 괴롭고 아픈 이야기지만 정말 좋아." 나타샤가 말했다.
“난 그 사람이 정말로 그이를 사랑했다고 확신해. 그래서 나도 그 사람에게 말한 거야……. 그 사람에게 말해도 괜찮겠지?" 갑자기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피에르에게? 당연하지!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마리야 공작 영애가 말했다.
"그런데 말이지, 마리." 나타샤는 갑자기 마리야 공작 영애가 그녀의 얼굴에서 오랫동안 보지 못한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 사람은 왠지 깔끔하고 단정하고 산뜻해졌어. 꼭 욕조에서 나온 것처럼 말이야. 무 슨 말인지 이해하지? 정신적으로 욕조에서 나온 것 같아. 그렇지?"
"짧은 프록코트하며 짧게 깎은 머리하며. 정말, 정말 욕조에서 나온 것 같아……. 아빠는 종종……."
그 장난스러운 미소는 그녀의 얼굴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18
그날 피에르는 한동안 잠들 수가 없었다. 그는 안드레이 공작에 대해, 나타샤에 대해, 그들의 사랑에 대해 생각하며 그녀의 과거를 질투하는가 하면 질투하는 자신을 책망하다가 스스로를 용서하기도 했다. 벌써 새벽 6시였지만 그는 여전히 방 안을 서성였다.
'어쩔 수 없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해야 해. '해야 해. 이런 행복이 아무리 이상하고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그녀와 부부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걸 해야 해.' 그는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아침을 먹으면서 피에르는 공작 영애에게 전날 마리야 공작 영애의 집에 다녀왔으며, 그곳에서 만난 사람이 (누구를 만났는지 상상할 수 있겠어요?) 나탈리 로스토바라고 말했다. 공작 영애는 그 얘기를 들으며 피에르가 안나 세묘노브나를 만났다는 소식보다 더 특별한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 척했다.
같은 날 경찰서장이 원래 소유주들에게 곧 돌려줄 물건들을 수령하기 위해 그라노비타야 궁전으로 대리인을 보내자고 제안하러 피에르를 찾아 왔다.'이 사람도 똑같아.' 피에르는 경찰서의 얼굴을 쳐다보며 생각했 다. '얼마나 훌륭하고 잘생기고, 또 얼마나 착한 경찰인가! 이런 때에 이런 하찮은 일을 하다니. 그런데 사람들은 경찰서장이 정직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위해 일을 처리한다고 말들 해. 정말 헛소리지! 이렇게 기분 좋고 선량한 얼굴이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어.'
피에르는 마리야 공작 영애의 집으로 식사를 하러 갔다. 마리야 공작 영애의 저택에 들어설 때 피에르는 자신이 어제 이곳에 있었고, 나타샤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이 확실한지에 대한 의심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상상한 것일 수도 있어. 들어가서 아무도 못 만날 수도 있어.' 그러나 방에 들어가는 순간, 자신의 모든 존재에서 순식간에 자유를 잃어버리면서 그녀가 있음을 감지했다.
그녀는 어제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으나 전날과는 완전히 달랐다. 만약 어제 그녀가 그런 모습이었다면 그가 방에 들어섰을 때 한순간이라도 알아보지 못했을 리 없었다. 나타샤는 그가 그녀를 어린아이로, 이후에는 안드레이 공작의 약혼녀로 알던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질문하고 싶은 듯한 쾌활한 광채가 그녀의 눈동자에서 빛났다. 얼굴에는 다정하면서 기이하게 장난스러운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피에르는 식사를 했고 어쩌면 저녁 내내 앉아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리야 공작 영애가 저녁 기도에 가는 바람에 피에르도 그들과 함께 떠났다. 다음 날 피에르는 일찍 가서 식사를 하고 저녁 내내 앉아 있었다. 마리 야 공작 영애와 나타샤는 분명 손님을 반가워했고, 피에르는 삶의 모든 관심을 지금 이 집에 쏟고 있었다. 이날 저녁 피에르가 너무 늦게까지 머물러 있어서 마리야 공작 영애와 나타샤는 그가 얼른 가기를 기다리며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피에르도 그것을 알아차렸으나 떠날 수가 없었다.
마리야 공작 영애는 이런 상태라면 끝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듯 편두통을 하소연하면서 작별을 고했다.
"그럼 내일 페테르부르크로 가시는 건가요?" 그녀가 말했다.
"아뇨, 가지 않습니다." 피에르는 깜짝 놀라 마치 화가 난 듯 서둘러 말했다."아, 아닙니다, 페테르부르크로요? 내일이군요. 하지만 작별 인사는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맡길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 들르겠습니다." 그는 떠나지 않고 마리야 공작 영애 앞에 얼굴을 붉히고 서서 말했다.
나타샤는 그에게 손을 내밀고 밖으로 나갔다. 나타샤가 방에서 나가자 피에르는 재빨리 마리야 공작 영애 쪽으로 안락의자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공작 영애, 저 좀 도와주십시오. 난 어떻게 해야 할까요? 희망을 가져도 될까요? 나는 다 압니다. 내가 그녀에게 맞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또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난 그녀에게 오빠가 되어 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럴 수가 없어요……." 그는 말을 멈추고 두 손으로 얼굴과 눈을 비볐다.
그는 말을 이어 갔는데 조리 있게 말하기 위해 자제하는 듯했다.“내가 언제부터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직 그녀 하나만을, 내 모든 삶에서 그녀 한 사람만을 사랑했고, 그녀 없는 인생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사랑합니다. 지금은 그녀에게 청혼하려고 결심한 상태가 아닙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녀가 나의 것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내가 그 기회를…… 놓칠 수도 있 다는 생각에 무섭습니다. 말해 주십시오. 내가 희망을 가져도 될까요? 공작 영애."
"지금 그녀에게 고백하는 것은...... 절대 안 돼요." 마리야 공작 영애는 이렇게 말했다.
"이 문제는 나에게 맡겨 줘요. 난 알아요. 그녀는 당신을 사랑해요……. 아니, 사랑하게 될 거예요." 마리야 공작 영애는 자신의 말을 수정했다.
그녀가 그 말을 끝내기도 전에 피에르는 펄쩍 뛰었고 놀란 얼굴을 하며 마리야 공작 영애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부모님께 편지를 써요. 그리고 나에게 맡겨요. 때가 되면 내가 그녀에게 말할게요. 나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도 그렇게 될 거라고 느껴요."
"아뇨, 그럴 리 없습니다! 너무나 행복해! 하지만 그럴 리 없어요……." 피에르가 말했다.
"당신은 페테르부르크로 가요. 그게 더 좋아요. 내가 당신에게 편지할게요." 그녀가 말했다.
다음 날 피에르는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나타샤는 지난 며칠보다 약간 생기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날 가끔 그녀의 눈에 시선을 던지던 피에르는 자신이 사라지고 있음을, 그도 그녀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행복감 하나만 존재함을 느꼈다. '정말로? 아냐, 그럴 리 없어.' 그는 자신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우는 그녀의 시선과 동작과 말을 보며 속으로 혼잣 말을 했다.
피에르가 나타샤와 작별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그는 무의식중에 그녀의 손을 더 오래 잡고 있었다.
'정말, 이 손이, 이 얼굴이, 이 눈이, 나에게는 낯선, 여성적 매력을 지닌 이 모든 보물이, 정말 이 모든 것이 영원히 나의 것, 나 자신만큼이나 나에게 익숙한 것이 될까? 아냐, 그건 불가능해!'
"잘 가요, 백작." 나타샤가 큰 소리로 말했다."난 당신을 몹시도 기다릴 거예요." 그녀는 속살거리듯 덧붙였다.
그 단순한 말, 그리고 그 말에 같이 따라온 눈빛과 표정은 그 후 두 달동안 피에르의 지치지 않는 회상과 해석과 행복한 공상의 대상이 되었다.
19
지금 피에르의 마음속에서는 엘렌과 약혼할 당시 현재와 비슷한 상황들에서 그의 마음속에 일어났던 것들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처럼 수치심으로 마음 아파하며 자신이 한 말을 반복하지도 않았고, '아, 무엇 때문에 난 그 말을 하지 않았을까? 어째서, 어째서 그때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했던가?' 하고 속으로 혼잣말을 하지도 않았다.
반면 지금 그는 그녀의 얼굴과 미소 하나하나 빠짐없이 상세히 상상하면서 그 무엇 하나 더하거나 빼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다. 그저 계속 되풀이하고 싶을 뿐이었다. 다만 한 가지 무서운 의심스러운 생각이 가끔 들었을 뿐이었다. '이 모든 게 꿈은 아닐까? 마리야 공작 영애가 착각한 건 아닐까? 내가 너무 오만하고 자신만만한 게 아닐까?' 종종 이러한 의심만 피에르에게 떠올랐다.
그는 이제 어떤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눈앞의 행복이 너무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일이 일어나야 하지만 그 후로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고 여긴, 예상치 못한 기쁜 광기가 그를 사로잡았다. 그 한 사람뿐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에게도 인생의 의미는 오직 그의 사랑과 그녀가 그를 사랑할 가능성에 귀결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그에게 공직을 제안하거나 또는 모든 사람들의 행복이 어떤 사건들의 이런저런 결과에 달렸다고 전제하며 어떤 공통의 문제들, 즉 국정과 전쟁 같은 것을 논의할 때, 그는 동정 어린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경청하다가 특유의 기이한 의견으로 대화 상대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 당시 그의 내면에서 환히 빛나는 감정을 통해 그의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에, 피에르는 그 누구를 만나든 간에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즉시 그 사람 안에서 좋은 점과 사랑받을 만한 모든 것을 발견했다.
업무와 죽은 아내와 관련된 서류를 검토하면서 그는 자신이 지금 알게 된 행복을 그녀가 몰랐다는 것에 동정을 느꼈을 뿐, 아내에 관한 기억에선 그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이제 새 직위와 훈장을 받아 특히나 거만해진 바실리 공작은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선량하고 불쌍한 노인으로 보였다.
이후 피에르는 이 행복한 광기의 시간을 자주 떠올렸다. 이 시기 동안 그가 사람과 상황에 대해 수립하게 된 모든 견해는 그에게 평생 믿을 만한 것으로 남았고, 그 시각은 언제나 옳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아마도 난 그때 이상하고 웃기게 보였을 거야. 하지만 그때 난 사람들 눈에 보이는 것처럼 미쳐 있는 게 아니었어. 반대로 그때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현명하고 명철했어. 삶에서 이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전부 이해했고, 왜냐하면…… 난 행복했으니까.' 그는 생각했다.
20
피에르가 떠난 후 나타샤가 놀리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피에르의 짧은 프록코트와 짧게 자른 머리카락, 진짜 욕조에서 나온 듯한 모습에 대해 마리야 공작 영애에게 말했던 그 첫날 저녁, 바로 그 순간부터 나타샤의 마음속에서는 감춰져 있어서 그녀 자신도 몰랐던, 그녀로서는 이겨 낼 수 없는 무언가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가 예상치 않았던 생명력과 행복에 대한 소망이 표면으로 떠오르며 충족을 요구했다.
첫날 저녁부터 나타샤는 마치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전부 잊은 듯했다. 그 이후로 그녀는 한 번도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지 않았고, 과거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미래의 즐거운 계획을 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피에르에 대해 별말이 없었지만 마리야 공작 영애가 그를 언급하면 오랫동안 꺼져 있던 광채가 그녀의 눈동자에서 타올랐고, 묘한 미소를 짓느라 입가엔 주름이 생겼다.
나타샤에게 생긴 변화들은 처음에 마리야 공작 영애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마리야 공작 영애가 그 의미를 깨달았을 때 그 변화들은 그녀를 슬프게 했다. '나타샤는 정말 오빠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렇게 빨리 오빠를 잊을 수 있었던 건 아닐까?' 마리야 공작 영애는 나타샤에게 일어난 변화를 혼자 곰곰이 떠올리며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타샤와 있을 때는 그녀에게 화를 내지도, 그녀를 비난하지도 않았다.
잠에서 깨어 나타샤를 사로잡은 생명력은 너무도 억제하기 힘들고 예상치 못한 것이었기에 나타샤와 함께 있을 때 마리야 공작 영애는 마음속으로라도 그녀를 비난할 권리가 자신에겐 없다고 느꼈다. 나타샤는 새로운 감정에 진심으로 푹 빠져 있었기 때문에 이제 자신이 슬픔이 아닌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날 밤, 마리야 공작 영애가 피에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자기 방으로 돌 아왔을 때 나타샤가 문지방에서 그녀를 맞았다. "그 사람이 말했어? 응? 그가 말했어?" 그녀는 질문을 반복했다. 나타샤의 말은 한순간 마리야 공작 영애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그녀는 오빠와, 오빠에 대한 사랑을 떠올렸다. '하지만 어쩌겠어! 나타샤도 달리 어쩔 수 없는데.' 마리야 공작 영애는 생각했다. 그녀는 슬프고 약간 엄격한 얼굴로 피에르가 한 말을 나 타샤에게 모두 전했다. 그가 페테르부르크로 떠나려 한다는 말에 나타샤는 놀랐다.
"페테르부르크로?" 그녀는 이해하지 못한 듯 되풀이해서 말했다. 하지만 마리야 공작 영애의 슬픈 표정을 본 그녀는 그 슬픔의 이유를 추측하고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마리." 그녀가 말했다. "내가 무얼 하면 좋을지 가르쳐 줘. 난 나쁜 여자가 될까 두려워. 네가 말한 대로 할게. 가르쳐 줘……."
"그를 사랑해?" "응." 나타샤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런데 왜 우는 거야? 난 너로 인해 행복해." 그 눈물 때문에 나타샤의 기쁨을 완전히 용서한 마리야 공작 영애가 말했다.
"빨리는 아니겠지만 언젠가 그렇게 될 거야. 생각해 봐. 내가 그의 아내가 되고, 네가 니콜라와 결혼하면 얼마나 행복할지!"
"나타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고 부탁했잖아. 네 이야기를 하자."
두사람은 잠시 잠자코 있었다.
"그런데 페테르부르크에는 뭐 하러 가는 거지!" 나타샤가 별안간 말하고는 얼른 자기에게 대답했다."아냐, 아냐, 그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렇죠, 마리? 그렇게 할 수밖에 없죠……?"
<제4권 제4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