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경 옮김 민음사
7장
알료샤
고인이 된 고행 수도사제 조시마 신부의 시신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매장 준비를 거쳤다. 수도사들과 고행 수도사들의 시신은 주지하다시피, 씻기지 않는다. (대성례기(大聖禮記)에 따르면) “수도사들 중 누군가가 주님에게로 떠날 때 일을 맡은(즉 이 소명을 위하여 지정된) 수도사는 우선 해면(즉 그리스제 해면)으로 고인의 이마, 가슴, 손발, 무릎 위로 십자가를 그리며 그 시신을 따뜻한 물로 닦되, 그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파이시 신부가 몸소 고인과 관련된 이 일을 맡아 했다. 고인의 몸을 닦은 뒤에는 수도사의 수도복을 입히고 시신에 망토를 감았다. 그다음에는 규칙에 따라 십자가 모양으로 감기 위해서 망토를 조금 잘랐다. 그의 머리에는 팔각형 십자가가 달린 두건을 씌웠다. 두건은 열어 두었지만, 고인의 얼굴은 검은 베일로 덮었다. 그의 손에는 구세주의 성화를 쥐여 주었다.
날이 환히 밝아 오자, 도시에서 아픈 식구들, 특히 아이들을 대동한 사람들도 조금씩 몰려들기 시작했으니 ─ 그들의 믿음에 따라 치유력이 즉각 드러날 수밖에 없을 거라는 기대에 사로잡힌 양, 꼭 그것을 위해 일부러 이 순간을 기다려 온 것 같았다. 이제야 비로소, 우리 도시의 모든 방문객들이 고(故) 장로를 그 생존 시부터 추호의 의심도 없이 얼마나 위대한 성자로 간주해 왔는지가 드러났던 것이다.
수도사들 중에서 동요에 휩싸인 자들을 만나자, 파이시 신부는 그들을 견책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당장 뭔가 위대한 일이 일어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오직 속세 사람들에게나 있을 법한 경솔한 일이지, 우리에게는 온당치 못한 것이오.” 하지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사실 파이시 신부는 사람들의 너무나 초조한 기대를 경솔하고 부질없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거의 똑같은 기대를 자기 영혼 깊은 곳에 몰래 감추고 있었으며 그 자신도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이시 신부는 갑자기 알료샤 생각이 났는데, 그러고 보니 거의 날이 새기 전부터 그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당장 그가 암자의 가장 구석진 곳인 텃밭 옆, 여러 위업으로 이름을 남기고 오래전에 잠든 어느 수도사의 묘석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암자로부터 등을 돌리고 얼굴을 텃밭 쪽으로 향한 채 앉아 있었는데, 꼭 비석 뒤에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그쪽으로 바투 다가선 파이시 신부는 그가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서럽게 우는 것을, 온몸이 들썩일 정도로 흐느껴 우는 것을 보았다. 파이시 신부는 그를 내려다보며 얼마간 서 있었다.
“됐다, 사랑스러운 아들아, 그만하면 됐단다, 얘야.” 그가 마침내 감정이 가득 담긴 어조로 말했다. “아니, 왜 그러느냐? 울 것이 아니라 기뻐해야지. 이날이 그분의 날들 중 가장 위대한 날이라는 것을 모르겠느냐? 지금, 이 순간에 그분이 어디에 계신지, 오직 이것만을 상기하도록 해라!”
아직 해가 밝기 전에 입관 대기 중인 장로의 시신을 관에 안치하여 이전의 접견실이었던 첫 번째 방으로 옮겼을 때, 관 옆에 있던 자들 사이에서 방의 창문을 열어야 되지 않을까? 하는 물음이 튀어나왔다. 이토록 위대한 고인의 시신이 부패해서 썩는 냄새가 진동하리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터무니없는 생각인지라, 이런 의문을 발설한 자의 옹색한 믿음과 경솔함은 차라리 동정을 받아 마땅하다는 의미에서였다. 왜냐면 다들 완전히 반대되는 일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자, 그렇게 정오가 지나자 곧 그 어떤 일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저마다 시나브로 생겨나는 생각을 누구에게 알리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오후 3시쯤 되자 그것이 이미 반박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도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에 이 소식은 일순간에 암자 전체로, 암자에 조문을 온 모든 신자들에게로 퍼져 나갔고 ─ 그 즉시 수도원으로도 침투하여 모든 수도원의 사람들을 놀랬으며, 끝으로, 아주 빠른 시간 내에 도시에까지 다다라서 신자, 비신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비신자들은 기뻐 날뛰었고, 신자들로 말할 것 같으면 그들 중에서도 비신자들보다 더 기뻐 날뛰는 자들이 나왔으니, 고(故) 조시마 장로가 설교 중에 말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의인의 몰락과 그의 치욕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문제는 관에서 시나브로 시체 썩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확연해지더니 오후 3시경에는 이미 누구라도 분명히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심해졌던 것이다.
물론, 전설에 따르면, 예부터 우리 수도원에도 고인들 중 유해에서 썩는 냄새를 내지 않은 이들이 있었고 이들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수도원에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어서, 수도사들에게 감동적이고 신비스러운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들의 기억 속에 뭔가 장엄하고 경이로운 것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시간이 오기만 한다면 미래에는 그들의 관에서 더 큰 영광이 나타날 것이라는 약속으로 남아 있었다.
어쨌거나 조시마 장로의 관 곁에서 이토록 경솔하고 터무니없고 악의에 찬 현상이 일어날 수 있었던 직접적인 원인을 설명하는 것은 어려울 듯하다. 사견으로는, 많은 다양한 원인들이 동시에 섞여 들어 한꺼번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이런 것들로 예를 들어, 장로제를 해로운 신제도로 간주해 온 해묵은 적대감을 들 수 있고, 그다음으로는, 물론, 무엇보다도, 고인의 성스러움에 대한 시기심을 들 수 있다.
부패의 징후가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하자, 고인의 방에 들어오는 수도사들의 얼굴 표정만 봐도 그들이 온 이유가 무엇인지 단정 지을 수 있을 지경이었다. 들어와서 잠깐 서 있다가 바깥에 무리 지어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소문이 사실이라는 걸 알려 주기 위해 얼른 나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기다리고 있던 자들 중에는 비애에 젖어 고개를 내젓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제는 악의에 찬 시선 속에서 명명백백하게 빛나는 자신의 기쁨을 숫제 감추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사서이자 고인의 총아였던 온순한 수도사제 이오시프 신부가 몇몇 독설가들에게 “어디서나 다 그런 건 아니다.”라고 반박을 해 보았다. 즉, 의인들의 시신이 반드시 부패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은 정교에서 무슨 도그마 같은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견해일 뿐이고, 오히려 그곳에서 영광스럽게 구원받은 자들의 주된 징표로 여겨지는 것은 시신이 부패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시신이 이미 수년 동안 땅속에 묻혀 썩었을 때 그들의 뼈의 색깔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뼈가 밀랍처럼 노랗게 변하면 주님이 의로운 고인에게 영광을 주었다는 가장 주된 표지이며, 만약 노랗지 않고 검게 변하면 주님이 그와 같은 영광을 주지 않았다는 뜻이니 ─ 예로부터 정교가 조금도 훼손되지 않고 가장 빛나는 순수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는 이 위대한 곳 아토스에서 바로 이런 식으로 생각되고 있다.”라고 이오시프 신부는 말을 끝맺었다. 하지만 겸손한 신부의 말은 무슨 감동을 불러일으키기는커녕 오히려 냉소적인 반격만 초래했다.
페라폰트 신부
‘그래, 어제 페라폰트 신부의 판단이 옳았던 것 같군.’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때마침 페라폰트 신부가 나타났다. 꼭 불난 데 부채질을 하러 나온 것 같았다. 조시마 장로를 페라폰트 신부가 굉장히 싫어했다는 건 이미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었다. 자,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그의 귓전까지, 그의 방까지 “하느님의 심판은 인간들의 심판과는 다른 법, 심지어 자연을 초월한 일이 일어났다.”라는 소식이 흘러들었던 것이다.
문이 활짝 열렸고, 문지방으로 페라폰트 신부가 나타난 것이다. 페라폰트 신부는 문지방에 멈추어 서서 두 팔을 쳐들었는데, “내쫓고 또 내쫓으리라!” 그러고는 곧장 사방을 차례로 돌아가면서 방의 벽과 네 구석을 향해 손으로 성호를 긋기 시작했다. “사탄아 물러가라, 사탄아 물러가라!” 성호를 그을 때마다 그는 되풀이했다.
“어인 일로 오셨소, 신부님? 어인 일로 법도를 이리 무너뜨리시는 거요? 어인 일로 이 온순한 양 떼를 흩뜨려 놓으시는 거요?” 마침내 그가 페라폰트 신부를 준엄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어인 일로 왔냐고? 무슨 용건이냐고? 네놈의 믿음은 어떤가?” 페라폰트 신부는 유로지브이처럼 굴면서 소리쳤다. “여기 네놈들의 손님들, 더러운 악마들을 쫓아내러 왔도다. 내가 없는 사이에 저놈들이 얼마나 많이 쌓였는지 어디 한번 보자. 자작나무 빗자루로 저놈들을 쓸어 내고 싶구나.”
“썩 물러가시오, 신부님!” 파이시 신부가 명령조로 말했다. “심판을 하는 건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입니다. 어쩌면 여기서 신부님도, 나도,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계시’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물러가시오, 신부, 양 떼를 흩뜨려 놓지 마시오!” 그는 집요하게 반복했다.
“신부님의 단식과 고행은 가히 놀랍소만, 신부님의 경솔한 말씀은 속세의 젊은이처럼 변덕스럽고 유치한 것이오. 썩 물러가시오, 신부님, 명령이오.” 파이시 신부가 마무리를 짓겠다는 듯 고함을 질렀다.
“그래, 이 몸은 물러간다!” 이렇게 말할 때 페라폰트 신부는 좀 당혹스러워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악의만은 버리지 않았다. “네놈들 학식 있는 자들! 그 잘난 머리 덕분에 내 무식을 깔보고 있겠다, 이 말이지. 이리로 흘러들어 올 때만 해도 나는 일자무식이었지만, 또 여기 와서 기왕지사 알고 있던 것도 잊어버렸지만, 주 하느님께서 이 보잘것없는 나를 네놈들의 현명함으로부터 지켜 주셨느니라…….”
파이시 신부는 이오시프 신부에게 독경을 맡기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광신도들의 광란에 휩싸인 비명에 동요될 위인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갑자기 마음이 슬퍼졌고 뭔가 특수한 것이 그리워 괴로워졌으니, 이런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갑자기 자문해 보았다. ‘이토록 의기소침해질 만큼 슬픈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순간, 때마침 알료샤가 그의 곁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어디론가 서둘러 가는 듯했지만 사원 쪽은 아니었다. 그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알료샤는 얼른 시선을 돌려 땅바닥으로 떨어뜨렸는데, 이 젊은이의 태도만 봐도 파이시 신부는 이 순간 그의 내부에 아주 강렬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너도 유혹에 빠진 것이더냐?" 파이시 신부가 갑자기 소리쳤다. "정녕 너도 믿음이 부족한 자들과 한패란 말이냐!" 그가 괴로워하며 덧붙였다.
알료샤는 걸음을 멈추고서 왠지 모호한 시선으로 파이시 신부를 바라보았는데, 그러다가 다시금 얼른 시선을 돌려 또다시 땅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파이시 신부는 그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어디를 그리 급히 가는 게냐? 미사를 알리는 종이 울리고 있거늘." 알료샤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행여 암자를 떠나는 게냐? 아니, 허락도 구하지 않고 축복도 받지 않고서 말이냐?"
알료샤는 갑자기 일그러진 미소를 짓더니, 자신의 인도자요, 자신의 마음과 이성의 지배자요, 또 자기가 사랑했던 장로가 임종의 침상에서 알료샤 자신을 위임한 바로 그 신부를 향해 아주 이상한 시선을 던지고는 갑자기, 예의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한 손을 내더니, 암자의 출구 쪽으로 멀찍이 가 버렸다.
"다시 돌아오겠지!" 파이시 신부는 괴롭고도 놀라운 마음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파이시 신부가 그의 '귀여운 소년'이 다시 돌아오리라고 단정 지은 것은 물론 오판이 아니었으며, 어쩌면 (전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어쨌거나 예리한 통찰력으로) 알료샤의 영혼의 상태가 진정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간파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도 내가 이토록 사랑하고 이토록 어린, 내 이야기의 주인공의 삶에서 이 이상하고 모호한 순간이 정확히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은 아주 힘들 듯하다.
그는 의로운 이들 중에서도 가장 의로운 분이 그분보다 그토록 미천한 자리에 서 있는 경솔한 군중으로부터 그토록 냉소적이고 표독스러운 조롱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견딜 수가 없어 모욕감을 느꼈고 심지어 분한 마음마저 들었다. 설령 기적이 전혀 일어나지 않을지라도, 어떤 기적적인 현상도 나타나지 않고 기대했던 것이 즉시 증명되지는 않을지라도, 도대체 이 불명예는 무엇 때문이며, 이렇게 묵과된 치욕은 또 무엇 때문이며, 표독스러운 수도사들의 말대로 '자연을 초월한' 이 급속한 부패는 또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바로 이 때문에 알료샤의 마음은 피투성이가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여기에는 그가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사랑한 얼굴이 버티고 있었는데, 그것은 '치욕'과 '불명예'의 낙인이 찍힌 얼굴이었던 것이다! 나의 청년의 이 불평이 경솔하고 비논리적일지라도, 나는 나의 청년이 그 순간에 지나치게 논리적이지 않았던 것이 기쁜데, 왜냐면 사람이 멍청하지 않다면 사리 판단력이란 언제든지 찾아오게 마련이지만, 사랑이란 이렇게 예외적인 순간에 청년의 마음속에 생기지 않는다면 도대체 언제 찾아오겠는가?
라키친의 유혹
이미 땅 거미가 짙게 드리웠을 무렵, 소나무 숲을 지나 수도원으로 가던 라키친은 나무 밑에서 땅에 얼굴을 묻은 채 꼼짝도 않고 엎드려 있는 알료샤를 갑자기 발견했다. 그는 다가가면서 알료샤를 불렀다.
"너 여기 있었니. 알렉세이? 아니, 정말로 너도……." 깜짝 놀란 그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다가, 그냥 중간에서 멈추었다. 그는 '아니 정말로 너도 그 지경까지 간 거야?'라고 말하고 싶었었다. 알료샤가 자기를 쳐다본 건 아니었지만 그 몸놀림으로 보아 상대방이 자기 말을 듣고 있고 또 이해하고 있음을 라키친은 알아차렸다.
그나저나 그는 라키친이 아니라 어디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봐, 너 얼굴이 영 딴판이야. 누구한테 화라도 난 건가, 엉? 언짢은 일이라도 있었어?"
"저리 가, 좀!" 알료샤는 여전히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피곤하다는 듯 한 손을 내저었다.
"어라, 우리 수도사들도 정말 별수 없다니까! 알료쉬카, 나는 너한테 깜짝 놀랐어, 나는 줄곧 네가 교양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알료샤는 여전히 그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겠는지 어쩐지 멍한 표정이었다.
"아니, 정말로 너의 노인이 악취를 풍겼다고 이러는 거냐? 그럼 정말로 넌 그가 기적 나부랭이를 일으킬 거라고 진지하게 믿었단 말이야?" 라키친은 다시금 진짜 대경실색하면서 소리쳤다.
"그래, 그렇게 믿었고 그렇게 믿고 싶고 앞으로도 그렇게 믿을 거야!" 알료샤가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이봐. 젠장, 그런 건 열세 살 먹은 초등학생도 이젠 믿지 않는 거야. 뭐 어쨌거나, 젠장……. 지금 너는 너의 하느님한테 화가 나서 반역이랍시고 들고 일어났구먼. 에라, 하여간 너희들은!"
알료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왠지 오랫동안 라키친을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에서 갑자기 뭔가가 번득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라키친에 대한 분노는 아니었다.
"나는 나의 하느님에게 반역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아, 나는 그저 '그의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이야." 알료샤가 갑자기 비뚜름하게 웃었다.
"자, 헛소리는 그만두고, 이젠 본론으로 들어가자. 오늘 뭘 좀 먹었어?"
"기억이 안 나… 먹은 것 같기도 하고."
"안색을 보니 원기를 보충해야겠군. 너를 보고 있으면 안쓰러워진다. 밤에도 한잔 못 잤잖니, 줄곧 이 소동에 난리굿이니……. 고작해야 성병 쪼가리나 씹어 먹었겠지. 내 호주머니 안에 소시지가 있는데, 조금 전에 혹시나 싶어 여기 오면서 도시에서 가져왔어, 다만 네가 소시지 같은 건 먹지 않을 테지……."
"소시지 좀 줘."
"잠깐 내 방에 가자……. 나도 지금 보드카라도 한잔 했으면 싶었거든, 피곤해서 죽을 지경이야. 네가 보드카까지 마실 엄두야 못 내겠지만…… 아니, 혹시 마실래?"
"보드카도 줘."
"경사 났군! 기적이야, 친구!" 라키친이 의아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뭐 그렇다면, 이렇든 저렇든, 보드카든 소시지든 해로운 것이니,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자, 가자!"
알료샤는 말없이 땅바닥에서 일어나 라키친을 따라갔다.
"바네치카 형이 이걸 봤더라면 놀라서 까무러쳤을걸! 그나저나, 너의 형 이반 표도로비치는 오늘 아침 모스크바로 떠났다는데, 알고 있어?"
"알고 있어."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서는 드미트리 형의 형상이 어른거렸지만, 이 회상은 그에게 어떤 인상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그의 마음을 파고들지도 못한 채 바로 그 즉시 그 의 의식에서 날아가 버렸고 또 잊혔다.
"그나저나 나는 호흘라코바 부인 집에도 들러야 하는데, 그게 말이야. 내가 부인한테 모든 사건에 대해 쪽지를 써서 보고했더니, 부인은 나한테 그 즉시 연필로 '조시마 신부처럼 명예로운 장로님한테 그런 짓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라는 쪽지를 써서 답장을 보내온 거야. 정말로 '그런 짓'이라고 썼다니까! 역시나 열을 받은 거야. 잠깐만!" 그는 느닷없이 다시 소리를 치더니,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알료샤의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이봐, 알료쉬카." 그는 갑자기 머릿속에 번쩍 떠오른 느닷없는 새로운 생각에 혹해서는 알료샤의 눈을 시험하듯 들여다보았는데, 겉으론 웃고 있었지만 이 느닷없는 새로운 생각을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 두려운 듯했으니, 그에게는 알료샤의 지금의 기분 상태가 참으로 뜻밖의 기이한 일이라 믿기지가 않았던 것이다.
"알료쉬카,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이 제일 좋을까?" 그는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상관없어…… 어디든 너 좋을 대로."
"그루센카 집에 가자, 갈래?" 라키친이 이렇게 말했는데, 조심스러운 기대감에 넘쳐 온몸을 떨기까지 했다.
"그래, 그루셴카 집으로 가자." 알료샤가 곧바로 조용하게 대답했는데, 라키친은 이럴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렇게 빨리 또 조용하게 동의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거의 몸을 뒤로 움찔 뺄 정도였다.
"자……! 그럼, 가자!" 그는 깜짝 놀란 상태에서 이렇게 소리쳤지만, 여전히 상대방의 결심이 변하지나 않을까 염려스러워 죽겠는지, 갑자기 알료샤의 손을 꽉 잡더니 재빨리 그를 오솔길로 이끌었다. 둘 다 말없이 걷는 와중에, 라키친은 심지어 말을 꺼내는 것마 저도 두려워했다.
"그 여자가 얼마나 좋아할까, 좋아 죽을 거야……." 그는 이렇게 중얼대는가 싶더니, 곧 다시 입을 다물었다.
게다가 그가 알료샤를 그루센카 집으로 끌고 가는 건 그녀 하나 좋으라고 하는 일이 절대 아니었다. 그의 목적은 지금 두 가지였다. 첫째는 '의인'의 치욕을 봄으로써 복수심을 충족하는 것, 즉 벌써부터 음미하고 있는바, 알료샤가 '성자'에서 '죄인'으로 '전락'하는 모습을 똑똑히 봐 두는 것이었고, 둘째로 여기에는 그에게 아주 이득이 되는 다소간의 물질적인 목적이 깔려 있었으니, 이 얘기는 나중에 하게 될 것이다.
그루셴카는 소보르나야 광장 근처, 시내의 번화가에 살았는데, 상인 미망인 모로조바의 집 마당에 있는 크지 않은 목조 곁채를 빌려 쓰고 있었다. 모로조바의 집은 겉보기에는 아주 볼썽사납고 크기만 한 낡은 2층짜리 석조 건물이었다. 거기에는 늙은 노파인 여주인이 나이가 든 조카딸 둘을 데리고 외롭게 살고 있었다. 마당의 곁채를 세놓을 만큼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누구나 다 알고 있듯, (벌써 사 년쯤 전에) 오직 자신의 친척이자 그루셴카의 공개적인 후견인인 상인 삼소노프의 비위를 맞추려고 그루셴카를 자기 집에 들였던 것이다.
사실, 노인이 현의 어느 도시에서 열여덟 살짜리 소녀를, 곧잘 겁을 먹거나 수줍음을 타고 슬픈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가늘고 여원 소녀를 이 집으로 데려온 지도 벌써 사 년이 지났으니, 그때 이후로 많은 세월이 지난 셈이다. 하지만 이 소녀의 내력에 대해서라면 우리 도시에서는 아는 바가 없었고 말도 제각기 다 달랐다. 최근에 와서도 별달리 알아낸 것이 없었으며, 많은 이들이 사 년 만에 '뛰어난 미인'으로 변해 버린 이 아그라페나 알렉산드로브나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지금에 와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저, 열일곱 살짜리 소녀가 무슨 장교라는 어떤 사람에게 기만당하고 그러곤 그 즉시 그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소문만 나돌 뿐이었다. 장교는 그곳을 떠난 다음 어딘가에서 결혼을 했지만, 그루셴카는 치욕과 빈곤을 떠맡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재산도 상당히 모았다고 한다. 그리고 단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만은 다들 확신했다. 즉, 그루셴카에게 접근하는 것은 힘들다는 것, 그래서 사 년을 통틀어 그녀의 호감을 샀다고 자랑할 만한 위인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다리가 부어 몸이 편치 않았던 데다가 최근 일 년 동안 그 다리마저 영 못 쓰게 된 홀아비 삼소노프는 다 큰 아들들에겐 폭군이었고 어마어마한 백만장자에 인색하고 완고한 사람이었지만, 또한 자신의 피후견인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독설가들이 그 당시 떠들어 댄바 정조대와 족쇄를 채우고 '단식'을 시키며 사육했을 정도였건만 이제는 그 피후견인 앞에서 꼼짝 달싹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루셴카는 삼소노프에게 자신의 정조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심어 줌으로써 그에게서 해방될 수 있었다.
삼소노프는 그녀에게 푼돈을 떼 주곤 했는데, 이 일이 알려졌을 때는 다들 아연실색했다.
"너라는 여자가 완전 꽝은 아니니까."라고, 그는 그녀에게 8000 정도를 떼 주면서 말했다.
"네 손으로 한번 굴려 봐라, 하지만 예전과 마찬가지로 매년 받는 생활비 말고는 죽을 때까지 나한테서 땡전 한 푼 못 받을고, 게다가 유산도 너한테는 땡전 한 푼 안 줄거다." 그러고는 정말로 자기 말을 실천에 옮겼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루셴카가 자신의 노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만큼은 그와 알고 지낸 시간 내내 심지어 거의 진심으로 완전히 솔직했다는 점인데, 아주 최근에 갑자기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마저도 사랑에 빠졌노라고 하면서 나타나자, 노인은 비웃음을 멈추고, 오히려 그루카에게 진지하고 엄격한 충고를 했다.
"만약 아버지와 아들 둘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된다면, 영감을 골라라, 하지만 저 야비한 영감이 반드시 너와 결혼하고 사전에 미리 얼마간의 재산이라도 네 명의로 해 준다는 조건이어야 한다. 대위와는 놀지 마라, 미래가 없는 놈이니까."
바로 이것이 늙은 호색한이 그루셴카에게 친히 남겨 준 말이었으니, 그 당시 그는 이미 조만간 죽을 것을 예감하고 있었으며 이 충고를 남기고 다섯 달 후에 곧바로 죽었다.
여기서 살짝 지적해 둘 것은 비록 우리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그 당시 그루셴카를 상대로 한 카라마조프 부자의 터무니없고 기형적인 연적 관계를 알고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그들 둘, 즉 노인과 아들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지를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은 그 당시로는 극히 드물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루셴카의 두 하녀 마저도 훗날 재판장에서 아그라페나 알렉산드로브나가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를 집 안으로 받아들인 건 오직 '죽이겠다고 협박하니' 무서워서였기 때문이라고 증언했다.
그녀에게는 하녀가 둘이었는데, 한 명은 그녀의 생가에서 데려온 아주 늙은 식모로서 병들고 거의 귀머거리나 다름없었고, 그 손녀는 젊고 발랄한 스무 살 남짓한 처녀로서 그루셴카의 몸종 노릇을 했다. 그루셴카는 아주 인색한 생활을 했고 세간도 아주 초라한 편이었다. 라키친과 알료샤가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을 때는 이미 땅거미가 짙게 깔려 있었지만, 방에는 아직 불도 켜져 있지 않았다.
그루셴카는 자기 거실에, 등받이가 딸린 마호가니 소파에 누워 있었는데, 이미 오래전에 다 해지고 구멍이 뚫린 가죽을 씌운 딱딱하고 볼썽사나운 소파였다. 라키친과 알료샤가 나타나자마자, 작은 소동이 일어난 성싶었다. 그루셴카가 소파에서 잽싸게 일어나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누구일까?"라고 외치는 소리가 현관에서부터 들려왔다.
그루셴카는 아직도 놀라움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소파 옆에 서 있었다.
"아, 너였어, 라키트카? 너 때문에 깜짝 놀랐잖아. 같이 온 사람은 누구야? 누구와 함께 온 거야? 맙소사, 이게 누구야!" 알료샤를 뜯어보더니 그녀가 감탄을 내질렀다.
"자, 어서 촛불을 좀 밝히라고 해!" 라키친은 아주 막역하고 가까운 사이라도 되는 양 거리낌 없이 말했다.
"나를 무서워하지 말아요. 사랑스러운 알료샤, 당신이 와서 기뻐 죽겠는걸, 이렇게 뜻밖에 찾아와 줄 줄이야. 어쨌거나, 라키트카, 난 너 때문에 깜짝 놀랐어. 나는 미챠가 들이닥친 거라고 생각했지 뭐야."
"얼마 전에 그이에게 거짓말을 해 놓고선 내 말을 믿겠노라는 굳은 약속을 받았는데, 그러니까 간단히 내가 거짓말을 했거든. 그이에게 쿠지마 쿠지미치, 즉 나의 영감 집에 가서 저녁부터 밤까지 그와 함께 돈 계산을 할 거라고 말했거든. 미챠는 내가 또 거기 간 줄 알고 있지만 실은 이렇게 집에 틀어박혔어. 페냐! 대문으로 가서 문을 열고 주위를 둘러봐, 혹시 어딘가에 대위가 있지는 않은지? 어쩌면 몸을 숨기고서 살펴보고 있는지도 모르잖아, 무서워 죽겠어, 정말!”
"알료샤, 당신의 형 미챠가, 알료샤, 오늘은 정말 무서워.” 그루셴카는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는데, 불안에 떨면서도 왠지 어떤 희열이라도 맛보는 것 같았다.
"왜 하필 오늘 미첸카가 무섭다는 거지?" 라키친이 물어보았다. "그 사람한테 겁을 먹다니, 네가 피리를 불면 춤이라도 덩실덩실 출 양반을."
"나는 지금 황금같이 귀한 소식을 하나 기다리는 중이고, 따라서 미첸카는 지금 아예 필요가 없다니까. 게다가 필경, 지금쯤 표도르 파블로비치 집의 정원 뒤쪽에 죽치고 앉아 내가 오지나 않을까 망을 보고 있겠지."
"그런데 어딜 가려고 그렇게 차려입었대? 네가 쓰고 있는 그 모자 너무 괴상하지 않아?"
"너야말로 괴상한 놈이야, 라키친! 귀한 소식 하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잖아. 소식이 오면, 당장 일어나서 날아갈 건데, 그러니까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 위해 이렇게 차려입은 거라고."
"아니, 라키트카, 그런데 내가 왜 지금 너랑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여기에 이런 공작님이 있는데 말이야. 이쪽이야말로 진짜 손님이지! 알료샤, 이봐요, 이렇게 당신을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가 않아요. 맙소사, 어쩜 우리 집에 올 생각을 다 했대! 솔직히 말하자면, 기대는커녕 생각도 못 했어요, 이전에도 당신이 오리라곤 꿈도 못 꿨지. 비록 지금은 시간이 적절치 못하지만 그래도 당신을 만나서 기뻐 죽을 지경이 야! 소파에 앉아요"
그녀는 사뿐히 소파에 앉더니 알료샤 옆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서 정말 환희 작약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기뻐했으니,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의 눈은 타올랐고 입술에는 웃음이, 선량하고 즐거운 웃음이 가득했다. 알료샤는 그녀의 얼굴에서 이렇게 선량한 표정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녀의 모든 몸짓도 어제와는 완전히 딴판으로, 무척 좋아져 있었다. 어제처럼 말을 할 때 일부러 달착지근하게 구는 것도 전 혀 없었고 지나치게 나긋나긋하고 판에 박힌 듯한 몸동작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 모든 것이 단순하고 소박하며 그녀의 몸동작 또한 활발하고 믿음직스러웠지만, 어쨌거나 몹시 흥분해 있긴 했다.
"맙소사, 오늘은 모든 게 다 뒤죽박죽이네, 정말." 그녀가 다시 종알거렸다. "무엇 때문에 내가 당신을 보고 이렇게 기뻐하는지, 알료샤, 나도 모르겠어. 왜냐고 물어도 모르겠다니까."
"정말로 무엇 때문에 기쁜지 모르는 건가?" 라키친이 씩 웃었다. "전에는 무엇 때문인지 나를 붙잡고 이 사람을 데려오라고, 꼭 데려오라고 그렇게 졸라 댔으니, 무슨 목적이 있었던 거야."
"전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게 사라졌어, 아이, 우리 라키트카는 걸핏하면 삐친다니까!" 그루셴카가 웃기 시작했다. "성질부리지 마, 라키트카, 이제 나는 착한 여자거든. 아니, 당신은 왜 슬픈 모습으로 앉아 있어, 알료셰치카, 내가 무서워서 그래?" 즐겁게 웃으면서 그녀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쟤의 장로가 썩는 냄새를 풍겼어."
"썩는 냄새라고?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하여튼 더러운 소리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났군. 입 다물어, 바보 같으니. 나 말이야, 알료샤, 당신 무릎에 좀 앉게 해 줘, 자, 이 렇게!" 그러면서 그녀는 갑자기 냉큼 톡 튀듯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작은 응석꾸러기 고양이처럼 웃으면서 그의 무릎 위로 올라앉아 오른손으로 부드럽게 그의 목을 휘감았다.
"내가 당신을 즐겁게 해 줄게, 신앙심 돈독한 우리 꼬마 양반! 아니, 정말로 내가 당신 무릎 위에 좀 앉아 있어도 괜찮겠어, 아니면 화낼 거야? 명령만 하면 - 곧장 뛰어내릴게." 알료샤는 잠자코 있었다. 그는 사부작대는 것조차 두려워하며 가만히 앉아 있었고, "명령만 하면 - 곧장 뛰어내릴게."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꼭 얼어붙어 버린 양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예를 들어, 자기 자리에서 음탕하게 눈을 굴리고 있는 라키친이 기대하거나 상상할 수 있을 법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알료샤는 어쨌거나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마음속에 생겨난 하나의 새롭고 이상한 감각에 놀라고 있었다. 옛날 같으면 그의 마음 속에 번득이기만 했다면 공포를 낳았을 이 '무서운' 여자가 이제는 그를 놀라게 하지도 않았을뿐더러, 그의 무릎 위에 앉아 그를 껴안고 있는 이 여자가 지금은 갑자기 그의 내부에서 완전히 다른 뜻밖의 특수한 감각을 불러 일으켰으니, 그것은 그녀를 향한 아주 위대하고 아주 진정 어린, 예사롭지 않은 어떤 호기심의 감각이었고 이 모든 것에는 이미 어떤 두려움도, 예전과 같은 공포도 손톱만큼도 없었다.
"헛소리는 이제 그만 지껄여." 라키친이 소리쳤다. "차라리 샴페인이나 내와, 나한테 빚진 게 있잖아!"
"정말로 빚이 있긴 하지, 내가 저 사람한테, 알료샤, 당신을 데려오면 그 대가로 만사 제쳐 놓고 샴페인부터 내오겠다고 약속했거든. 나도 마실 거야! 페냐, 페냐, 샴페인을 가져와, 미챠가 두고 간 병이 있잖아, 냉큼 가져와. 하지만 라키트카, 너한테 내놓는 게 아니야, 너는 버섯이고 이 사람은 공작 도련님이거든! 지금 내 영혼은 딴 일로 가득 차 있지만, 어쩔 수 없지, 너희들과 함께 마시겠어, 한판 떠들썩하게 벌이고 싶거든!"
"아니, 도대체 지금이 어떤 순간이라는 거야, 저쪽에서 온다는 '소식'은 또 뭐고, 물어 봐도 될까, 아니면 비밀인가?" 라키친이 다시 호기심을 보이며 끼어들었다.
"에이, 비밀은 무슨, 너도 알고 있는 일이야. 장교가 오는 거야, 라키친, 나의 장교가 말이야! 지금 모크로예에 있는데 거기서 이쪽으로 급히 소식을 보낼 거래, 조금 전에 받은 편지에 직접 그렇게 썼던걸. 그래서 이렇게 앉아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지금 미첸카는 어라, 어라! 그 사람은 알고 있어. 아니면 몰라?"
"뭘 알겠어! 전혀 몰라! 만약 알게 된다면, 당장 죽여 버릴 거야. 사실 나는 지금 이런 건 전혀 무섭지 않아, 그의 칼도 지금은 무섭지 않단 말이야. 입 다물고 있어. 라키트카, 나한테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이름도 꺼내지 말라고. 그는 내 마음을 완전히 뭉개 버렸어. 이 순간에는 그런 건 조금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여기 알료셰치카에 대해서라면 생각해 볼 수 있지, 알료세치카를 보고 있으면……. 이봐, 날 보고 웃어 주고 즐거워해, 나의 어리석음과 나의 기쁨을 보고 웃어 달라고……. 정말로 미소를 짓네, 미소를! 어쩜이리도 눈길이 상냥할까. 난 말이야, 알료샤, 당신이 그저께 일 때문에, 그 아씨 때문에 나한테 화가 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나는 정말 개나 다름없었어…….
어쨌거나 역시 그렇게 된 게 잘된 거야. 그건 물론 고약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잘됐어. 미챠 말로는 그 아씨가 '그년을 채찍으로 후려갈겨야 해요.'라고 외쳤다더군. 그때 나는 그 아씨에게 아주 심한 모욕을 주었지. 그 아씨가 나를 불러 놓고 초콜릿으로 살살 유혹하면서 나를 눌러 버리고 싶어 했으니까……. 어쨌든 그렇게 된 건 잘된 일이야."
그루셴카가 갑자 기 생각에 골몰한 듯 씩 웃었는데, 그 미소 속에는 갑자기 뭔가 잔인한 기운이 언뜻 스쳤다. "지금 무서운 건 당신이 화가 났으면 어쩌나, 하는 것뿐이야……."
갑자기 라키친이 놀라면서 끼어들었다. "아니, 이 여자는, 알료샤, 햇병아리 같은 네가 정말로 무서운가 봐."
"너한테는, 이 사람이 햇병아리겠지, 정말로…… 너한테는 양심이라는 게 없 으니까, 정말! 이봐, 난 이 사람이 진심으로 좋아, 정말이야! 알료샤, 내가 당신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거 믿을 수 있지?"
"그럼, 그 장교는? 모크로예에서 온다던 황금 같은 소식은?"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아하, 여자란 늘 이런 식이라니까!"
"나한테 성질부리지 마, 라키트카." 그루셴카가 발끈하며 말을 받아쳤다.
"내가 알료샤를 사랑하는 건 다른 방식으로야. 사실, 알료샤, 전에 너한테 교활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건 맞아, 난 말이야 난폭하고 저질스러운 여자이지만, 뭐 그래도 어떤 때는, 알료샤, 당신을 나의 양심처럼 바라보곤 해. 줄곧 '이제는 나같이 더러운 여자를 경멸하는 게 당연한 거야,'라는 생각이 들어. 알료샤, 미챠도 알고 있어, 그에게 말했으니까. 당신이 믿든 말든, 어떨 때는 정말로, 알료샤, 당신을 바라보면 부끄러워져, 줄곧 나 자신이 부끄러운 거야……."
페냐가 들어와서 탁자 위에 쟁반을 내려놨는데, 마개를 뽑은 술병과 술을 가득 따른 술 잔 세 개가 있었다.
"샴페인이 나왔군!" 라키친이 소리쳤다. "흥분해서 제정신이 아닌 거야, 아그라페나 알렉산드로브나. 술 한잔 들이켜면 춤이라도 추겠는걸. 어, 어라, 이런 것도 제대로 할 줄 모른다니."
그는 탁자 쪽으로 다가가서 술잔을 들더니 단숨에 쭉 들이켜고서 다음 잔을 따랐다.
그녀가 잔을 들었다. 알료사는 자기 잔을 들고 한 모금을 마신 뒤 다시 내려놓았다.
"역시 마시지 않는 게 낫겠어!" 그가 조용하게 미소를 지었다.
*뭐 그렇다면, 나도 안 마시겠어." 그루셴카가 말을 받았다.
"오냐오냐 응석 받아 주느라 신이 났군!" 라키친이 약을 올려 댔다. "쟤의 무릎 위에는 잘도 앉아서 말이야! 쟤는 슬퍼서 그런다 치고, 너는 왜 그래? 쟤는 하느님한테 반역한다고 소시지도 냉큼 먹어 치울 태세였지."
"그게 무슨 소리야?"
"오늘 저 친구의 장로가 죽었어, 조시마 장로, 그 성자 말이야."
"조시마 장로께서 돌아가셨다고!" 그루센카가 소리를 질렀다. "맙소사, 난 그것도 모르 고 있었어!" 그녀는 경건하게 성호를 그었다. "맙소사, 내 이게 무슨 짓이람, 지금 이 사람의 무릎에 앉아 있다니!" 그녀가 갑자기 깜짝 놀란 듯 소리를 지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무릎에서 내려와 소파로 옮겨 앉았다. 알료사는 놀라워하면서 오랫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이 어쩐지 환해진 것 같았다.
"라키친." 하고 그가 갑자기 큰 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나의 하느님한테 반역 한다 어쩐다 하면서 나를 놀리지는 말아 줘. 너한테 나쁜 마음을 품고 싶지도 않고, 너도 좀 착하게 굴었으면 해. 차라리 여기 이분을 봐. 이분이 나를 얼마나 가엾게 여겨 주는지 봤지? 나는 사악한 영혼을 찾기 위해 여기로 왔어, 하지만 정작 나는 여기서 진실한 누나를 발견했어 -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보물 같은 영혼을……. 이분은 지금 나를 가엾게 여겨 주었어……. 아그라페나 알렉산드로브나, 당신은 지금 내 영혼을 회복시켜 줬어." 알료샤는 입술이 떨렸고 숨이 가빠졌다. 그는 말을 멈추었다.
"꼭 너를 구원이라도 해 준 것 같군!" 라키친이 표독스럽게 웃었다. "저 여자는 너를 잡아먹을 생각이었어"
"그만둬, 라키트카!" 갑자기 그루셴카가 벌떡 일어났다. "알료샤, 당신도 입 다물어요. 왜냐하면 당신의 조용한 말을 들으면 부끄러워져서 미치겠고, 또 왜냐하면 나는 착하지 않고 못된 여자니까. 지금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지금은 전혀 그게 아니야……. 네 말을 정말 더 이상 듣고 싶지도 않아, 라키트카!" 그루셴카는 이 모 든 얘기를 하면서 예사롭지 않을 정도로 흥분하고 있었다.
"어렵쇼, 정말 둘 다 미쳐서 가관이군!" 라키친은 놀랍다는 듯 그들 둘을 유심히 보면서 씩씩거렸다.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야, 그야말로 정신 병원에 떨어진 것 같아. 둘 다 기진맥진해서 곧 울기 시작하겠군!"
"그래, 난 울기 시작할 거야, 울고말고!" 그루셴카가 말했다. "이 사람이 나를 누나라고 불렀어, 나는 앞으로도 이걸 절대 잊지 않을 거야! 내가 비록 못된 여자라고 하더라도 나는 양파 한 뿌리를 준 적이 있단 말이야."
양파 한 뿌리
"이봐, 알료셰치카." 하고 그루셴카가 갑자기 그를 보면서 초조하게 웃어 댔다. "라키트카에겐 내가 양파 한 뿌리를 준 적이 있다고 으스댔지만, 당신한테는 으스대지 않고 자랑하지도 않겠어, 당신한테는 다른 목적을 갖고 이 이야기를 해 줄까 해. 내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들은 거야. 봐, 이런 얘기야.
'옛날 옛적에 참 못되고도 정말 못된 아줌마 한 사람이 살았는데, 그만 죽었답니다. 죽고 나서 보니 아줌마는 그동안 착한 일을 단 한 가지도 하지 않았던 거예요. 악마들이 아줌마를 붙잡아서 불바다 속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러자, 아줌마의 수호천사가 가만히 서서 생각했지요. 하느님께 말씀드릴 만한 무슨 착한 일이 저 아줌마한테 없을까 하고요. 마침 기억나는 것이 있어서 하느님께, 저 아줌마는 텃밭에서 양파를 뽑아 거지 여인에게 준 적이 있답니다, 하고 말씀을 드렸지요.
그러자 하느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답니다. 너는 바로 그 양파를 들고 가서 불바다 속의 그녀에게 내밀되 그녀가 알아서 붙잡고 기어 나오도록 해라, 만약 그녀가 저기 불바다에서 나올 수 있다면 낙원으로 가도 좋지만, 만약 양파가 끊어진다면 그녀는 지금 있는 그곳에 남게 되리라. 천사는 아줌마한테로 달려가서 양파를 내밀었습니다. 자, 아줌마, 어서 붙잡고 올라와요. 그러면서 천사는 아줌마를 조심스럽게 잡아당겨서 마침내 거의 다 끌어 올렸는데, 그러자 호수에 있던 나머지 죄인들이 아줌마가 저리로 끌려 올라가는 것을 보고서는 다들 그녀와 함께 나가려고 그녀를 붙잡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아줌마는 참 못되고도 못됐기 때문에 그들을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끌어 올려 주는 거야, 너희들이 아니라, 이건 내 양파지, 너희들 게 아니야.' 그녀가 이 말을 하기가 무섭게 양파가 툭 끊어져 버렸답니다. 그러고 아줌마는 불바다 속으로 떨어져 오늘날까지 타고 있어요. 천사는 울면서 떠나갔답니다.
"자, 이런 우화야, 알료샤, 평생 동안 기껏해야 무슨 양파 한 뿌리를 주었을 뿐이고, 이게 내가 한 착한 일의 전부다, 하고. 그러니 나를 칭찬하지도 말고, 알료샤, 나를 착한 여자라고 생각하지도 말아 줘, 나는 사악한 여자, 참 못되고도 못된 여자야, 그런데도 칭찬을 하면 부끄러워지니까. 에이, 내친김에 완전히 고백을 해야겠네. 들어 봐, 알료샤. 나는 당신을 우리 집에 너무 불러들이고 싶어서 라키트카에게 당신을 나한테 데려오라고 몹시 졸랐고 그러면 25루블을 주겠다고 약속했어. 잠깐만, 라키트카, 있어 봐!" 그녀는 재빠른 걸음으로 탁자 쪽으로 다가가 서랍을 열더니 지갑을 꺼냈고 이어 거기서 25루블 짜리 지폐를 꺼냈다.
"수당을 받으란 말이야, 라키트카, 설마 거절하진 않겠지." 그녀는 그에게 지폐를 획 집어 던졌다.
"거절할 리가 있나." 라키친은 씩씩하게 부끄러움을 감추면서, 목소리를 깔고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게 수지맞는 일인걸, 바보는 똑똑한 사람한테 이익을 주라고 존재하는 거야."
라키친은 이제 더 이상 분함을 감추지도 않고 툭툭 쏘아 댔다. 25루블짜리 지폐는 호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는데, 알료샤 앞에서 이러는 게 정말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루셴카의 첫 사랑
"입 다물어, 라키트카, 지금은 알료샤, 당신 한 사람한테만 모든 걸 솔직히 말해 줄까 해. 내가 어떤 년인지 당신이 알도록! 나는 당신을 파멸시키고 싶었어. 알료샤, 이건 정말 사실이야, 그러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니까. 얼마나 그러고 싶었으면 당신을 데려오라고 라키트카를 돈으로 매수해 버리기까지 했겠어.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하고 싶었을까?
알료샤, 당신은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나한테 몸을 돌려 눈을 내리깔고 지나가곤 했지만 당신의 얼굴이 내 마음속에 남아 있었거든. '저 사람은 나를 경멸해,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겠지.'라고 생각했지. 결국 이런 감정마저 들자, 스스로도 놀랍더라고. 아니, 내가 왜 저런 꼬마 녀석을 무서워하는 거지? 싶어서. 그놈을 콱 잡아먹고 비웃어 줄 테다, 했던 거야. 열을 받아도 톡톡히 받았던 거야. 이봐, 내가 얼마나 사악한 개인지, 이런 년을 당신은 누나라고 부른 거야!
그런데 지금 나를 모욕했던 사람이 왔어, 나는 앉아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 나를 모욕한 그 사람이 나한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아? 오 년 전 쿠지마가 나를 여기로 데려왔을 때, 바싹 여위고 어리석었던 나는 이렇게 앉아서 흐느끼느라 몇 날 밤을 잠도 못 자고 생각에 골몰했던 거야. '나를 모욕한 그 사람, 그 사람은 지금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분명히 다른 여자와 함께 나를 비웃고 있겠지. 그를 보기만 하면, 언제든 만나기만 하면, 정말로 톡톡히 복수해 줄 테다, 그 사람에게 꼭 복수를 하고 말 테다! 라고.
그다음엔 어떻게 됐을 것 같아? 나는 밑천을 모으기 시작했고, 인정머리 없는 여자가 되었고,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똑똑해지고 - 뭐, 이랬을 것 같지, 응? 천만의 말씀, 온 우주를 통틀어 아무도 보는 사람 없고 아는 사람 없지만, 밤의 어둠이 내리면 여전히 오 년 전 계집아이처럼 이따금씩 쓰러져 이를 갈며 밤새도록 우는 거야. '두고 보자, 내 톡톡히 갚아 주고 말 테다! 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런데 한 달 전 나에게 갑자기 바로 이 편지가 왔는데, 홀아비가 된 몸으로 오고 있다, 나를 보고 싶다는 거야. 그때 숨이 탁 멎더니, 맙소사,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더군. 그가 와서 내게 휘파람만 획 불면서 나를 부르면, 그러면 나는 강아지처럼 그에게로 기어가겠구나, 얻어맞은 죄인인 양!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나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는 거야. '나는 비열한 년인가, 아닌가, 그에게 달려갈 것인가, 아닌가?' 그러자 요 한 달 내내 얼마나 분했던 지, 상태가 오 년 전보다 더 나빠졌어.
알료샤, 나는 그 사람에게 달려가지 않기 위해서 미챠를 갖고 놀았어. 나는 지금 너희들이 오기 전까지 여기 누워 기다리 면서 생각했고 나의 운명을 전부 결정했지만, 너희들은 내 마음속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 지 결코 모를 거야. 그러니까, 알료샤, 당신의 아씨한테 그저께 일로 화를 내지 말아 달라고 말해 줘……! 세상을 통틀어 그 누구도 지금 내가 어떤 상태인지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어……. 그래서 나는 오늘 그리로 갈 때 칼을 품고 있을지도 몰라, 이건 아직도 결정을 못 했어……."
이렇게 '애처로운' 말을 늘어놓고서 그루셴카는 갑자기 참지 못해 말을 채 다 끝내지도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소파 위의 베개로 몸을 돌려 어린아이처럼 흐느끼기 시작했다. 알료샤는 자리에서 일어나 라키친에게로 다가갔다. "미샤." 하고 그가 말했다. "화내지 마, 이분 때문에 기분이 상했어도 화는 내지 마. 지 금 이분의 말 들었지? 인간의 영혼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면 안 되는 법이야, 좀 더 자비로워야 된다고…”
알료샤는 마음속 깊이 참을 수 없는 걱정을 느끼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뭐든 말을 해 야 했기 때문에 라키친을 그 대상으로 삼은 것이었다. 만약 라키친이 없었다면, 혼자서라도 외치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라키친의 냉소적인 시선을 보자, 알료샤는 갑자기 멈칫했다. "아까 사람들이 너를 네 장로라는 실탄으로 장전해 놨더니, 이제는 네가 네 장로라는 실탄을 나한테 발사하는 거로군, 하느님의 사람 알료센카." 라키친이 증오에 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웃지 마, 라키친, 비웃지 말라고, 고인에 대해선 말하지 마. 그분은 이 땅에 존재했던 그 누구보다도 드높은 존재였어!" 이렇게 외칠 때 알료샤는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나는 파멸하기 위해 이리로 왔고 '까짓 것 될 대로 돼라, 쳇! 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 이건 내가 속 좁은 놈이라서 그런 거야, 하지만 이분은 오 년 동안 괴로워하면서도 그 첫 사람이라는 분이 찾아와 진실된 말을 하자 마자 - 모든 것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잊고 울고 있는 거야! 이분을 모욕한 사람이 돌아 와 이분을 부르고 있고, 이분은 그 사람이 한 모든 일을 용서하고 기쁨에 차서 서둘러 그 사람에게 갈 준비를 하고 있으니, 칼은 품고 가지 않을 거야, 절대로!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해. 네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미샤, 나란 놈은 정말 그렇지 못하다고! 나는 오늘, 지금 이 교훈을 얻었어……. 이분의 사랑은 우리보다 더 높은 경지에 있는 거야……. 그저께 모욕을 당한 다른 여인, 그 여인도 이 여인을 용서할 거야! 사정을 알기만 하면 용서할 거야…… 알기만 하면…… 이분은 아직 영혼의 안정을 찾지 못했으니까 안타깝게 여길 줄 알아야 해…… 어쩌면 이 영혼 속에 보물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알료샤가 여기서 입을 다문 건 숨이 막혀 왔기 때문이다. 라키친은 열에 받쳐 어쩔 줄 몰랐지만, 그는 이토록 조용한 알료샤가 이런 장광 설을 늘어놓으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 여기 변호사 나리 납셨다! 그러니까 너는 이 여자한테 반한 거야, 그렇지? 아그라페나 알렉산드로브나, 우리의 단식수도사 양반이 너한테 홀딱 반해 버렸다는군, 너의 승리야!" 그가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그루셴카는 베개에서 고개를 들고 알료샤를 바라보았는데, 지금 흘린 눈물 때문에 갑자기 부어오른 듯도 싶은 얼굴에 감동에 젖은 미소가 빛나고 있었다. "쟤는 신경 쓰지 마, 알료샤, 당신은 나의 게루빔이지만, 쟤가 당신한테 말하는 꼬락서니 좀 봐, 가관이라니까. 미하일 오시포비치." 하고 그녀가 라키친을 불렀다.
"너한테 욕설을 퍼부은 것은 사과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다시금 그러기가 싫어졌어. 알료샤, 여기 내 쪽으로 와서 앉아." 그녀는 기쁜 미소를 지으면서 그에게 손짓했다.
"자, 이렇게, 여기 앉아, 나한테 말해 줘.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디 한번 말해 봐,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걸까, 아닌 걸까? 나를 모욕한 그를 사랑하는 걸 까, 아닌 걸까? 나는 너희들이 오기 전까지 여기 어둠 속에 누워서 줄곧 내 마음을 향해 캐묻고 있었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걸까, 아닌 걸까? 알료샤, 당신이 나 대신 결정을 내려 줘, 난 그를 용서해야 될까, 말아야 될까?"
"벌써 용서했잖아." 알료샤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용서야 하긴 했지." 그루셴카가 생각에 잠긴 듯 이렇게 말했다. "정말이지 야비한 마음이야! 나의 야비한 마음을 위하여!" 그녀는 갑자기 식탁에서 술잔을 집어 단숨에 쭉 들이켜더니 잔을 마룻바닥으로 내팽개쳤다.
"아니, 어쩌면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지도 몰라. 어쩌면 마음은 그저 이제 막 용서할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몰라. 나는 아직도 이 마음과 싸우고 있는 거야. 지난 오 년간의 내 눈물을 무서울 정도로 사랑해 버린 거야……. 어쩌면 내가 사랑한 건 오직 나의 모욕일 뿐, 그 사람은 전혀 사랑하지 않았는지도 몰라!"
"그럼, 뭣 하러 그렇게 빼입었대?" 라키친이 표독스럽게 약을 올렸다.
"옷차림 갖고 나무라지 마, 라키트카, 네가 내 마음을 다 아는 것도 아니잖아! 그가 나를 버렸을 때 나는 열일곱 살의 바싹 여위고 병약한 울보에 불과했어. 그래, 그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아서 그를 유혹하고 완전히 태워 버릴 거야. 그러기 위해 이렇게 차려입은 건지도 몰라." 그루셴카가 표독스럽게 웃으면서 말을 끝맺었다.
"시간이 다 됐군." 그가 말했다. "늦었어, 수도원에 못 들어갈지도 몰라."
"아니, 정말 당신도 갈 생각이야, 알료샤!" 그녀는 깜짝 놀라 괴로워하면서 소리쳤다.
"그렇다고 해서 저 녀석이 너의 집에서 밤을 보낼 순 없는 노릇이잖아? 뭐 저 녀석이 원한다면 할 수 없지만!" "입 다물어, 사악한 영혼 같으니." 그루센카가 분에 못 이겨 라키친에게 소리쳤다.
"너는 저 사람이 내게 와서 해 준 것과 같은 말을 해 준 적이 결코 없었어."
"대체 저 녀석이 너한테 무슨 말을 했는데?" 라키친이 짜증을 내면서 툴툴댔다.
"모르겠어, 몰라, 저 사람이 나한테 무슨 말을 해 주었는지는 정말 모르겠지만, 마음이 반응을 했어, 그가 내 마음을 뒤집어 놓은 거야……. 그는 나를 안쓰러워해 준 첫 번째 사람, 유일한 사람이야, 정말로! 이렇게 게루빔 같은 사람이 전에는 왜 오지 않았던 걸까?" 그녀는 갑자기 미친 듯 흥분하여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평생 동안 당신 같은 사람을 기다렸고, 누군가 그런 사람이 와서 나를 용서해 줄 줄 알고 있었어. 누군가가 나같이 더러운 여자도 사랑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거야, 그 야비한 욕망을 떠나서라도……!"
"내가 당신한테 그런 일을 해 주었다고?" 알료샤가 그녀에게로 몸을 구부리고 상냥하 게 그녀의 손을 쥔 뒤 감동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당신에게 양파, 그것도 가장 작은 양파 하나를 주었을 뿐인데, 그뿐인데……!" 이 말을 하면서 그 자신도 울기 시작했다. 이 순간, 갑자기 현관에서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누군가가 현관으로 들어왔다. 그루셴카는 소스라치게 놀란 듯 벌떡 일어났다. 방 안 으로 페냐가 요란스럽게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 들어왔다.
"아씨, 아씨, 사람이 왔어요!" 그녀가 숨을 헐떡이면서 즐겁게 소리쳤다. "모크로예에서 아씨를 위해 마차를 보내왔어요. 이 트로이카의 마부 치모페이가 지금 새 말들을 매고 있어요…… 편지, 편지도 있어요. 아씨, 여기 편지요!" 편지는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는데, 소리를 지르는 내내 그녀는 그것을 허공에다 흔들 어 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루셴카는 그녀에게서 편지를 낚아채서 촛불 쪽으로 가져갔다. 그것은 몇 줄로 된 쪽지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녀는 한순간에 다 읽었다.
"오라고 부르는군요!" 그녀가 온통 창백해진 채로, 병적인 미소로 인해 얼굴을 일그러 뜨리면서 소리쳤다. "휘파람을 불었어! 그럼, 기어가야지, 이 강아지!" 하지만 그야말로 잠깐 그녀는 망설이듯 서 있었다. 갑자기 피가 그녀의 머리로 솟구쳐 그녀의 뺨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간다!" 그녀가 갑자기 소리쳤다. "나의 오 년! 이젠 안녕이다! 알료샤, 잘 가, 운명은 결정되었어……. 어서 가 봐, 이제 다들 나를 떠나라고, 더 이상 내 얼굴을 볼 일은 없을 거야……! 그루셴카는 새로운 인생 속으로 날아갔어……. 나를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 줘, 라키트카. 어쩌면 나는 죽으러 가는지도 몰라! 아아! 꼭 술에 취한 것 같군!" 그녀는 갑자기 그들을 내버려 두고 침실로 달려갔다.
"뭐, 지금 저 여자한테 우리는 안중에도 없군!" 라키친이 툴툴댔다. "가자, 자칫하면 또 다시 저 여자의 비명이 시작될 테니까, 눈물 찔찔 짜는 비명은 이제 넌덜머리가 났어……."
알료샤는 자기를 기계적으로 끌어내는데도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알료샤와 라키친이 현관 계단에서 내려서자 마자 갑자기 그루셴카의 침실 창문이 열렸고, 그녀는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알료셰치카, 미첸카 형에게 안부를 전해 주고, 이 못된 년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 달라고 말해 줘. 그리고 역시나 내가 이렇게 말하더라고 전해 줘. '그루셴카는 당신같이 점잖은 사람을 버리고 비열한 놈한테 몸을 맡겼노라!'라고. 그루셴카는 그를 한 시간, 고작 해야 한 시간을 사랑했을 뿐이라는 것도 덧붙여 줘 - 이 한 시간을 그가 지금부터 평생 기억하도록 말이야, 그루셴카가 평생소원으로 당신한테 부탁하는 거라고 말이야……." 그녀는 흐느낌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말을 끝맺었다. 창문이 쾅 닫혔다.
"음, 음!? 라키친이 웃으면서 소처럼 음매, 음매 했다. "너의 형 미첸카를 찔러 죽여 놓 고선 평생 기억하라고 부탁하다니, 독충처럼 잔인하군!"
알료샤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양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라키친과 나란히 바빠 죽겠다는 듯 다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꼭 망아지경에라도 빠진 듯한 기계적인 걸음이었다.
"그는 폴란드 사람이야, 그녀가 말한 그 장교 말이야." 그가 제법 자제를 하면서 다시 말을 꺼냈다.
"아니, 지금은 장교도 뭣도 아니야, 시베리아 어디, 중국과 맞닿은 국경 지대에 있는 세관에서 관리로 근무했다니까 뭐 말라비틀어진 폴란드 놈쯤 되겠지. 일자리를 잃었다는 소문이 들리더군. 이제 그루셴카가 돈을 좀 모았다는 소리를 듣고서 돌아온 거야 - 바로 이게 기적의 전부야."
알료샤는 이번에도 아무 소리도 못 들은 것 같았다. 라키친도 더 이상 참지 못했다.
"뭐야 이거, 죄 많은 여자를 전향이라도 시킨 건가?" 그가 알료샤에게 표독스럽게 웃기 시작했다. "탕녀를 진리의 길로 인도했다, 이건가? 일곱 마리의 악귀를 쫓았다, 이 말씀?"
"지금 그러니까 아까 25루블 때문에 나를 '경멸'하는 거지? 참된 친구를 팔았다, 이런 거겠지. 하지만 너도 그리스도가 아니고 나도 유다가 아니야."
"아이, 라키친, 나는 그 일은 아예 잊었어, 진심이야." 알료샤가 소리쳤다. "네가 지금 나서서 상기시켰지…"
"젠장, 네놈들 하나에서 열까지 죄다 귀신한테 잡혀가 버려라!" 갑자기 그가 울부짖었다.
"뭣 하러, 젠장, 내가 너와 한패가 되었다! 앞으로 더 이상 네가 어떤 놈인지 알고 싶지도 않아. 혼자 가!"
그러고서 그는 알료샤를 암흑 속에 혼자 내버려 두고 몸을 획 돌려 다른 거리 쪽으로 가 버렸다. 알료샤는 도시에서 나와 들판을 가로질러 수도원으로 갔다.
알료샤가 암자에 도착한 것은 수도원의 시간으로는 이미 아주 늦은 때였다. 문지기는 그를 특별 통로로 들여보내 주었다. 알료샤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서 지금은 장로의 관이 놓여 있는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관 앞에서 홀로 복음서를 읽는 파이시 신부, 그리고 어젯밤의 담화와 오늘의 소란으로 완전히 기진맥진하여 다른 방의 마룻바닥에서 젊은이다운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어린 견습 수도사 포르피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파이시 신부는 알료샤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지만 아예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알료샤는 문에서 오른쪽 구석으로 간 뒤 무릎을 꿇고 서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금 자기 앞에 놓인 관을, 사방이 가려진, 그에게 귀중한 고인을 보고 있었지만, 아까 아침처럼 울음이 터져 나오고 가슴을 에는 고통스러운 애처로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방의 창문 하나가 열려 있어서 '결국 냄새가 더 심해졌나 보다.'라고 알료샤는 생각했다. 하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그토록 끔찍하고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던 썩는 냄새에 대한 생각도 지금은 그의 내부에서 아까와 같은 우수와 분노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지만, 곧 그 기도가 기계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신 갈증을 풀어 주는 것 같은 뭔가 완전하고 확고한 것이 영혼을 가득 채웠으니, 그는 이것을 직접 의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도를 시작할라치면 갑자기 뭔가 다른 생각이 들어 몰두하게 되었고, 그러면 기도도, 또 기도를 중단시킨 뭔가도 잊어버리곤 했다. 파이시 신부가 읽는 것에 귀를 기울였지만, 기진맥진한 상태라 시나브로 졸음이 밀려왔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갈릴래아의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라고 파이시 신부가 읽었다.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도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
‘혼인 잔치? 무슨 혼인 잔치일까…….’ 이런 생각이 알료샤의 머릿속에서 폭풍우처럼 스쳐 갔다.
‘그녀에게도 행복이…… 그녀는 연회에 갔다……. 하지만 칼은 가져가지 않았어, 칼을 가져가지는 않았다고……. 이건 그저 ‘애처로운’ 넋두리에 불과했어……. 뭐……. 애처로운 넋두리는 용서해 주어야지, 그것이 없다면 사람들은 너무도 큰 슬픔에 시달리겠지. 라키친은 자신의 모욕을 생각하는 한 늘 골목으로 빠져 버릴 것이다……. 하지만 길이란 크고 곧고 밝고 수정과 같고 그 길의 끝에는 태양이……. 지금 읽는 건 뭘까?’
“……그런데 포도주가 부족했고,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말했다. 포도주가 없구나…….”
‘아, 그래, 나는 이 부분을 놓쳤군, 놓치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좋아하는 부분이니까. 이건 갈릴래아의 카나야, 첫 번째 기적……. 그리스도는 첫 기적을 행함에 있어 사람들의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 있는 곳을 방문하셨고, 사람들의 기쁨을 더 크게 해 주셨다……. ‘사람들을 사랑하는 자는 그들의 기쁨도 사랑하느니…….’ 고인은 이 말씀을 반복하곤 하셨지, 기쁨이 없이는 살 수도 없노라고 미챠가 말하곤 한다……. 그래, 미챠. 참되고 아름다운 것은 모두 언제나, 모든 것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노라고, 이것도 그분의 말씀이었군…….’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그의 하인들에게 말했다. 무엇이든지 저분이 너희들에게 일러 주는 대로 하여라.”
‘행하라……. 기쁨, 누구든 가난한 자들, 아주 가난한 자들의 기쁨을 창조하라…….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또 다른 위대한 존재, 즉 그리스도의 어머니는, 그를 자신들의 초라한 결혼식에 상냥하게 초대한, 무지하고도 또 무지한 저 순진한 존재들의 순박하고 질박한 즐거움이 그의 마음을 동하게 할 수 있을 것임을 알고 있었어. 아니, 정말로 그가 가난한 자들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를 늘려 주려고 이 땅에 내려온 것이었을까? 어쨌거나 그는 이렇게 와서 어머니의 부탁대로 행했던 것이다……. 아, 신부님이 또 읽고 계시는군.’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워라, 하고 말씀하신즉, 그들이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신즉, 그러자 그들은 그것을 날라 갔다. 과방장은 물로 만든 포도주를 맛보고 그것이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다. 하지만 물을 퍼 간 하인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과방장은 신랑을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누구든지 처음에는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그다음에 나쁜 것을 내놓는 법인데,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아껴 두셨군요.”
‘하지만 이건 뭘까, 왜 이런 걸까? 방이 왜 넓어지는 걸까……. 아 그래…… 이건 결혼식, 혼인 잔치가 아닌가…… 그래, 물론 그렇지. 여기 손님들도, 젊은이들도 앉아 있고 군중들은 즐거워하고……. 현명한 과방장은 어디에 있는 걸까? 아니, 저게 누구야? 누군 거야? 또 방이 넓어졌다……. 저기 커다란 탁자 뒤에서 누가 일어나는 걸까? 저런……. 그러니까 그분이 여기 계시는 건가? 그분은 관 속에 계신데…… 하지만 그분은 여기에도 계신걸…… 일어나셔서 나를 보시고 이리로 오시는군……. 주여……!’
그렇다, 그에게로, 그에게로 다가온 사람은 그분, 얼굴이 자잘한 주름으로 뒤덮인, 기쁨에 차서 조용히 웃고 있는 여윈 노인이었다. 관은 있지도 않고, 그분은 어제 손님들이 모여들어 함께 앉아 있을 때 입은 옷을 입고 있다. 얼굴은 무척 환하고, 눈은 빛나고 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러니까 그분도 연회에 온 것일까, 역시나 갈릴래아의 카나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것일까…….
“나도, 얘야, 나도 초대받았단다, 초대를 받고 부름을 받았지.” 그의 위로 조용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왜 여기에 숨어 있느냐, 보이지 않게 말이다……. 너도 우리가 있는 곳으로 가자꾸나.”
그분의 목소리, 조시마 장로님의 목소리다……. 그분이 아니라면 이렇게 부르실 리가 없지 않은가? 장로는 알료샤를 손으로 일으켰고, 그는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즐거워하자꾸나.” 여윈 노인이 계속했다. “새 포도주를, 새롭고 위대한 기쁨의 포도주를 마시자꾸나. 이곳의 많은 사람들이 그저 양파 한 뿌리를, 그것도 작은 양파 한 뿌리를 내놓았을 뿐이란다……. 그래, 우리 일은 어떠냐? 너도, 조용하고 온순한 나의 소년이여, 너도 오늘 갈증에 허덕이는 여인에게 양파 한 뿌리를 주지 않았느냐. 시작해라, 얘야, 온순한 아이야, 너 자신의 일을 시작해야지……!"
뭔가가 알료샤의 마음속에서 불타오르더니 갑자기 뭔가가 그를 고통스러울 정도로 가득 채웠고, 환희의 눈물이 그의 영혼 속에서 솟구쳤다……. 그는 두 팔을 뻗어서 소리치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이상하게도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잠이 들었는데 지금은 두 발로 서 있었으니, 그는 갑자기 꼭 자리에서 떨어져 나온 양 다급하고 확고한 걸음걸이로 세 발짝을 떼어 관 바로 곁으로 다가갔다. 알료샤는 삼십 초 정도 미동도 없이 관 속에 갇혀 누워 있는 고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몸을 획 돌려 방에서 나와 빨리 아래로 내려갔다.
환희로 가득 찬 그의 영혼은 자유를, 공간을, 드넓음을 갈망했다. 그의 위로 조용하게 빛나는 별들로 가득 찬, 둥근 지붕 같은 하늘이 드넓게, 아득하게 펼쳐졌다. 땅의 고요함이 하늘의 고요함과 뒤섞이는 듯했으며, 땅의 비밀이 별들의 비밀과 접촉하는 듯했다……. 알료샤는 그 자리에 선 채로 바라보다가 갑자기 다리라도 꺾인 양 땅으로 몸을 던졌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땅을 끌어안고 있는지 몰랐으며, 왜 그가 이토록 억누를 수 없을 만큼 땅에 입을 맞추고 싶은지 구태여 해명하려 들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울면서, 흐느끼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땅에 입을 맞추었고 그것을 사랑하겠노라고, 영원토록 사랑하겠노라고 미친 듯이 흥분에 휩싸여 맹세했다.
"땅을 너의 기쁨의 눈물로 적시고 너의 그 눈물을 사랑하라……"라는 말이 그의 영혼 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어떤 상념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듯했으니 ─ 이제 평생 동안, 영원토록 그럴 것이다. 땅으로 몸을 던질 때의 그는 연약한 청년이었지만 일어섰을 때는 한평생 흔들리지 않을 투사가 되어 있었으며, 이것을 바로 이 환희의 순간에 갑자기 의식하고 예감했다. 그리고 이후 알료샤는 이 순간을 평생 동안 결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 시각, 누군가가 내 영혼을 찾아 주었던 것이다.” 훗날 그는 자신의 말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이렇게 말하곤 했다……. 사흘 뒤 그는 수도원에서 나왔으니, 이것은 그에게 “속세에 머물라.”라고 명령한 그의 고(故) 장로의 말씀을 따른 것이었다.
<제7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