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8-1)

김연경 옮김 민음사

by Andy강성
8장
미챠

1 쿠지마 삼소노프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그러니까 새로운 인생을 향해 날아가면서 그루셴카가 마지막 인사를 전해 주라고 ‘분부’했으며 자기가 사랑해 준 한 시간을 영원토록 기억하라고 부탁했던 그 상대인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는 이 순간 그녀에게 일어난 일은 전혀 모른 채, 역시나 무서운 혼돈에 빠져 부산을 떨고 있었다.


그는 요 이틀간, 훗날 그 자신이 표현한 바에 따르면 ‘자신의 운명과 싸우면서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문자 그대로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으며, 단 일 분이라도 그루셴카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하고 그냥 그렇게 자리를 뜨는 것이 무서웠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몇 시간이나 투자하여 한 가지 다급한 일 때문에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날아갔다 올 정도였다.


그루셴카는 비록 한 시간이긴 하지만 그를 진실로 성심성의껏 사랑했으며, 동시에 이따금씩 정말로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그를 괴롭히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녀의 의중을 도무지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그 당시 그녀 자신도 뭔가와 투쟁하고 있으며 어떤 예사롭지 않은 일 때문에 갈피를 못 잡고 있고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하지만 여전히 주저하고 있는 상태일 거라는 극히 그럴듯한 의혹에 빠져 있었다.


사실, 그를 괴롭혀 온 질문의 요지는 간단히,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항목으로 압축될 수 있었다. 즉, '그, 즉 미챠인가, 아니면 표도르 파블로비치인가'. 그나저나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지적해야겠다. 그러니까 그는 표도르 파블로비치가 그루셴카에게 반드시 합법적으로 청혼을 할 것이라고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었으며, 저 늙은 호색한이 그저 3000루블로 입을 싹 닦아 버릴 거라곤 단 한순간도 믿지 않았다.


이것은 미챠가 그루셴카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나온 결론이었다. 그러니까 그로서는 때때로 그루셴카가 저렇게 갈피를 못 잡고 괴로 워하는 것이 역시나 그들 중 누구를 고를 것인가, 그들 중 누가 더 이익이 될 것인가 를 스스로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고 생각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장교', 미챠는 그루셴카가 그와 같은 흥분과 두려움을 갖고서 와 주길 기다린, 그녀 인생의 저 숙명적인 사람이 곧 돌아오리라곤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무렵, 그루셴카는 어느 고약한 순간에 그에게 이 편지를 보여 주었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저 이 여인을 두고 친아버지와 싸우느라 이미 이보다 더 무섭고 위험한 것은 그 어떤 것도 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 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약혼자에 대해서라면 그는 숫제 믿질 않았고, 그가 곧 오리라는 것에 대해서는 특히나 더 그랬다.


그는 그저, 속을 끓이면서 매 순간 그루셴카의 결정을 기다렸고 그것이 어떻게든 느닷없이 영감에 따라 일어나리라고 줄곧 믿었다. 갑자기 그녀가 그에게 "나를 데려가 줘, 나는 영원토록 당신 거야." 라고 말한다면 - 그는 당장 그녀의 손을 잡고 세상 끝으로 데려갈 것이다. 오, 가능하면 당장, 가능하면 더 멀리, 세상 끝이 아니라면 러시아의 끝 어디로든 데려가서 거기서 그녀와 결혼하고, 이쪽이든 저쪽이든 좌우간 아무도 모르게 그야말로 몰래 그녀와 함께 살림을 차릴 것이다. 그때는, 오, 그때는 곧 전혀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식으로 해결될 수도 있었으니, 그건 다르되, 이미 무서운 출구이기도 했다. 갑자기 그녀가 그에게 "그만 가 봐, 나는 지금 표도르 파블로비치와 함께 결정을 내렸고 그에게 시집갈 거야, 당신 따위는 필요 없어."라고 말한다면 - 그때는……. 그나저나 미챠는 그때는 어떻게 될지를 몰랐고, 마지막 시각까지도 몰랐는 데, 이 점에 관한 한 그를 십분 이해해 주어야 한다. 그에게는 도대체 분명한 의도라는 것이 없었고, 범죄 따위는 숫제 생각에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미 완전히 다른 고뇌가 시작되었고, 전혀 새롭고 부차적이긴 하지만 역시나 숙명적이고 해결할 수 없는 정황이 생겨났다. 다름 아니라, 만약 그녀가 그에게 "나는 당신 거야, 나를 데려가 줘."라고 말한다 면, 어떻게 그녀를 데리고 갈 것인가? 이 일을 위한 비용, 그러니까 돈이 그에게 어디 있단 말인가? 물론 그루 셴카에게는 돈이 있었지만, 미챠는 이 부분에 관한 한 무서울 정도로 자존심을 내세웠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3000루블


이 모든 것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돈을 도둑처럼 슬쩍해 버린 것에 대한 그의 은밀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간접적으로, 어쩐지 무의식적으로 생겨난 것일 수도 있었다. '한 여자 앞에서 야비한 놈이 되었건만 그 즉시 다른 여자 앞에서도 또 야비한 놈이 될 것이다.' 이후 그가 자백한 바에 따르면 그 당시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게다가 그루셴카가 알게 된다면, 그녀가 먼저 이런 야비한 놈 따위는 싫다고 할 것이다.' 자, 그래서, 어디서 비용을 구할 것인가, 어디서 이 숙명적인 돈을 마련할 것인가?


먼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3000루블을 갚아야 했다 - 그러지 않으면 '나는 좀도둑이고 야비한 놈이다, 야비한 놈이 된 채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진 않다', 미챠는 이렇게 결심했고, 그렇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전 세계를 뒤집어 놓겠다고, 하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그 무엇보다도 이 3000만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돌려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의 이 결심이 최종적인 국면을 맞이한 것은, 말하자면, 그의 삶의 마지막 시간들, 다름 아니라 이틀 전 저녁, 길에서 알료샤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였다.


그때, 그날 밤, 동생과 헤어진 뒤 그는 미칠 정도로 흥분한 나머지 '차라리 아무 사람이나 죽이고 돈을 뺏더라도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진 빚은 갚아야 한다.'라고 느꼈다. "아무리 그래도 카챠에게 내가 그녀를 배반하고 그녀의 돈을 훔쳐서는 그 돈으로 그루셴카와 착한 삶을 시작하기 위해 도망을 쳤다고 말할 권리를 주는 것보다는 낫단 말이다! 그런 건 참을 수 없다!" 미챠는 이를 갈면서 이렇게 말했고 정말로 어떨 때는 이러다가 결국 뇌막염이라도 걸리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 무렵 이 3000을 구할 것이라고, 돈이란 놈이 어떻게든 제가 알아서 하늘에서라도 뚝딱 떨어질 것이라고 끝까지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일들이 드미트리 표도로비치처럼 유산을 받아 공짜로 손에 넣은 돈을 평생 동안 오로지 써 대고 뿌릴 줄만 아는 사람, 돈을 어떻게 버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개념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일어나곤 한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그는 가장 어처구니없는 작전에 돌입한 셈이 되었다. 그는 갑자기 상인 삼소노프, 즉 그루셴카의 후견인에게로 가서 그에게 한 가지 '계획'을 제시하고 이 '계획'을 조건으로 한 번에 필요한 돈을 전부 얻어 내기로 결심했다. 상업적인 측면에서라면 그는 자신의 계획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행여 당사자인 삼소노프가 상업적 측면 하나에서만 보려고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행동거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것만이 의심스러웠다.


무엇 때문인지 그의 내부에서는 심지어 이미 오래전부터, 만약 그루셴카가 어떻게 좀 성실한 삶을 살아 보겠다면서 '전도유망한 사람'에게 시집을 간다면 오늘내일하고 있는 이 늙은 방탕자도 이 순간에 와서는 절대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오히려 반대는커녕 그가 먼저 이것을 바라고 있으며 오로지 기회만 오면 그가 나서서 얼씨구나 일을 도와줄 것이다, 하는 거였다.


쿠지마 삼소노프에 관한 한, 그는 그 노인을 그루셴카의 망가진 저 과거 인생에서 숙명적인 사람으로 간주하긴 했으되, 그녀가 그를 사랑한 것도 절대 아니고 이렇든 저렇든 중요한 것은 역시나 이미 '지나간 사람, 볼 장 다 본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 그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이제 이자는 그저 병든 쭈그렁바가지에 지나지 않아서 그루셴카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해 봤자 부녀지간 같은 것이지, 이미 오래전, 그러니까 거의 일 년도 더 전에 끝장난 그런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이 일에 관한 한 미챠 쪽에서는 순진무구한 구석이 많았는데, 많은 죄악을 했음에도 그는 아주 순진무구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이 순진무구함 때문에 그는 늙은 쿠지마가 저세상으로 떠날 채비를 하는 처지이니만큼 그루셴카와의 과거를 진정으로 뉘우치고 있노라고, 이제 그녀 곁에는 이렇게 안전한 늙은이와 같은 후견인도, 헌신적인 벗도 없으리라 생각할 거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삼소노프 집으로


들판에서 알료샤와 이야기를 나눈 다음 날, 미챠는 밤새도록 거의 잠도 자지 못하고 아침 10시경에 삼소노프의 집에 나타나서 자기가 왔다고 아뢰라고 분부했다. 이 집은 낡고 음울하고 아주 넓은, 마당에 여러 건물들과 곁채가 딸린 2층짜리 건물이었다. 아래층에는 삼소노프의 결혼한 두 아들이 자신의 가족들, 그리고 아주 늙은 그의 누이와 시집가지 않은 딸 하나와 함께 살고 있었다.


노인은 다리가 부어올라 이미 거의 걸어 다닐 수도 없는 상태였고 그저 이따금씩 자신의 가죽 안락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든지 노파의 부축을 받아 가며 한두 번 정도 방을 산책하는 게 전부였다. 그는 심지어 이 노파에게도 엄격하게 대했고 말도 별로 하지 않았다. '대위'가 왔다는 보고를 듣자, 그는 당장 거절하라고 분부했다. 하지만 미챠가 한 번만 더 말해 달라고 고집을 부렸다.


쿠지마 쿠지미치는 꼬마 녀석에게 꼬치꼬치 캐물었다. 꼬락서니가 어떻더냐, 취한 것 같진 않더냐? 소란을 부릴 것 같지는 않더냐? 그러곤 "맨 정신이지만, 떠나려고 하질 않습니다."라는 대답을 들었다. 노인은 다시 거절하라고 분부했다. 그러자 이 모든 것을 예상했던 터라 만일을 대비하여 일부러 종이와 연필을 갖고 왔던 미치는 종잇조각에 "아그라페나 알렉산드로브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아주 긴요한 일로 왔습니다."라는 한 줄의 말을 또박또박 쓴 뒤 - 그것을 노인에게 보냈다.


잠시 생각을 한 뒤 노인은 꼬마 녀석에게 방문객을 홀 안으로 들이라고 분부했고, 노파를 보내 작은아들을 지금 당장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게 했다. 이 작은아들은 12베르쇼크나 되는 키에 엄청난 힘을 지닌, 얼굴 수염을 다 밀고 독일식 옷차림을 한 남자였는데 군말 없이 즉각 나타났다. 아버지가 이 장사를 부른 것은, 겁이라곤 없는 성격이었던 만큼, 대위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증인을 확보해 두기 위해서였다.


노인이 미챠에게서 10사전 정도 떨어진 반대편 입구에서 나타나자,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예의 그 절도 있는 군대식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노인을 맞이하러 걸어갔다. 미챠는 단추를 다 채운 프록코트를 점잖게 차려입고 검은 장갑을 낀 손에는 둥근 모자를 들고 있었는데, 사흘쯤 전 표도르 파블로비치 및 동생들과의 가족 회동을 위해 장로의 수도원에 나타났을 때와 똑같았다.


"그래, 나리, 무슨 일로 날 찾아오셨소?" 자리를 잡고서 노인이 천천히, 엄격하지만 예의 바르게 말했다.

"고귀하기 그지없는 쿠지마 쿠지미치, 필경 이미 여러 번에 걸쳐 저와 저의 아버지, 즉 저의 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저의 유산을 착복한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와의 충돌에 대해 들으셨겠지요…… 온 도시가 이미 이 일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외에도 그루셴카를 통해서도…… 이런,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아그라페나 알렉산드로브나를 통해서도 들으셨을 줄 압니다."

이렇게 말문을 열었지만 미챠는 첫마디부터 말이 막혔다.


문제는, 그러니까 그, 즉 미챠가 석 달 전에 고의로(그는 ‘일부러’가 아니라 ‘고의로’라고 말했다.) 현 도시의 변호사, 그것도 ‘저명한 변호사’와 상의를 했다는 것이다. "쿠지마 쿠지미치, 파벨 파블로비치 코르네플로도프라는 변호사인데, 아마 들어 보셨겠지요? 이마가 널찍하고 거의 국가적인 지성을 갖춘 인물로서…… 당신을 알고 있을뿐더러…… 아주 훌륭하게 평했는데……." 이러다가 미챠는 또 한 번 말이 탁 막혔다. 하지만 말이 이렇게 자꾸 막혀도 멈추기는커녕 그 즉시 훌쩍 뛰어넘어 더 멀리멀리 질주했다.


바로 이 코르네플로도프가 미챠가 제시한 서류를 검토하고 상세하게 물어본 뒤 말하길, 체르마쉬냐 마을은 어머니의 유산으로서 그의 소유가 되어야 마땅하므로 정말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고 이로써 그 추악한 영감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표도르 파블로비치한테서 심지어 6000 정도, 아니 7000까지의 추가금도 기대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체르마쉬냐의 가격이 어쨌거나 최소한 2만 5000, 아니 아마 2만 8000은 족히 되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3만, 3만은 된다는 소리인데, 쿠지마 쿠지미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이 잔인한 사람한테서 1만 7000을 못 받았다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나, 그러니까 미챠는 그 당시엔 법률적인 문제를 잘 몰랐기 때문에 이 일을 그냥 내팽개쳤지만, 여기 와서 보니 오히려 저쪽에서 소송을 제기해 온 터라 기가 막혀 죽겠다는 것이었다.

자 그래서, 고귀하기 그지없는 쿠지마 쿠지미치, 이 불한당에 대한 저의 권리를 당신이 취하실 의향은 없으신지, 대신 저한테는 그저 3000만 주시면 된다…… 당신은 어떤 경우에라도 패소할 리가 없다, 이 점에 관해선 명예를, 명예를 걸고 맹세한다, 오히려 당신은 3000 대신 6000, 아니 7000을 벌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일을 '심지어 오늘 당장' 끝내야 된다…….

저는 저기 당신의 공증인인가 뭐라더라…… 하여튼 거기에도 갔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저는 모든 것을 할 준비가 되어 있고 필요한 서류는 모두 제출하겠으며 모든 것에 서명하겠으며…… 우리가 지금 당장 이 서류를 작성하기만 하면, 가능하면, 가능하기만 하다면 오늘 아침에 당장……. 그러니까 저에게 이 3000을 내주신다면…… 이 도시를 통틀어 감히 당신에게 맞설 자본가가 누가 있겠습니까…….

이로써 저를 구해 주시고…… 한마디로 말해서, 고귀하기 그지없는 일, 드높기 그지없는 일을 위해 저의 이 부실한 머리를 구해 주시고, 그러니까 저는 당신이 너무도 잘 알고 계시며 아버지처럼 돌봐 주고 계시는 저 유명한 부인을 향해 고귀하기 그지없는 감정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같은 사랑이 아니었더라면, 저는 아예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말이 또 뒤죽박죽이 되었지만, 이해해 주시겠지요……. 당신의 점잖은 눈을 보니 이해해 주셨다는 걸 알겠습니다…… 만약 이해하지 못하셨다면, 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물속에 뛰어들 겁니다, 진짭니다!"


하지만 마지막 "진짭니다"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그는 갑자기,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음을, 무엇보다도 참 말도 안 되는 흰소리를 잔뜩 늘어놨음을 직감하곤 절망에 빠졌다.

‘이상한 일이야, 이리로 올 때만 해도 모든 것이 훌륭하게 여겨졌는데, 이제 보니 완전히 허튼 장광설이잖아!’

미챠를 일 분 정도 기다리도록 해 놓고선 마침내 쿠지마 쿠지미치가 아주 단호하고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우리는 그런 일은 하지 않습니다."


미챠는 갑자기 다리의 힘이 쫙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쿠지마 쿠지미치." 하고 창백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가 중얼거렸다.

"이보십시오, 나리, 우리로서는 그런 일은 곤란합니다. 재판이니 변호사니, 이런 건 딱 질색이니까요! 하지만 정 그러시다면,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로 가 보시지요……."

"그건 누구입니까……! 당신 덕분에 부활하게 되나 봅니다." 미챠가 갑자기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이곳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농군 출신으로 숲을 취급하는데, 별명은 랴가브이입니다. 표도르 파블로비치가 그러니까 벌써 일 년째 말씀하신 그 체르마쉬냐의 숲을 두고 흥정을 해 왔지만 가격 때문에 틀어졌지요, 때마침 그가 다시 와서 지금 볼로비야 역에서 12베르스타쯤 떨어진 곳에 있는 일린스코예 마을에, 그러니까 일린스키 신부의 집에 머물고 있다던가, 그렇다죠, 만약 당신이 표도르 파블로비치보다 먼저 랴가브이를 찾아가서 저에게 말한 것을 제안한다면, 얘기가 잘될지도 모르겠군요……."


"천재적인 생각입니다!" 미챠가 열광하면서 말을 가로막았다. "그 사람이야말로 제격입니다! 사고는 싶은데 저쪽에서 너무 비싼 값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대뜸 그에게 소유권을 이전하는 문서를 내놓는다니, 하하하!"

그러면서 미챠는 갑자기 아둔한 너털웃음을 터뜨렸는데, 삼소노프마저도 흠칫 고개를 떨 정도였다.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쿠지마 쿠지미치. 당신은 잘 모르시겠지만, 저를 구원하신 겁니다, 오, 제가 여기 온 것도 어떤 예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럼, 이 신부에게로!"


그는 너무 황홀해서 떨고 있었다. 그야말로 끝장이 날 판이었는데, 수호천사가 구원을 해 준 거야. 라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 노인처럼 수완 있는 사업가가(고귀하기 그지없는 노인이야, 몸가짐은 또 어떤가!) 이런 길을 가르쳐 주었으니…… 이건 물론, 승산이 있는 길인 거야. 지금 당장 날아가야 돼. 밤까지는 돌아올 거야, 어쨌거나 일은 다 된 거나 마찬가지야. 설마 노인이 나를 갖고 놀았을 리야 있나?' 미챠는 자기의 집으로 걸어가면서 이렇게 감탄을 연발했다.


훗날,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이미 파국이 일어난 뒤에 삼소노프 노인은 그때 ‘대위’를 갖고 놀았던 것이라고 웃으면서 자인했다. 이 노인은 표독스럽고 차갑고 냉소적인 데다가 병적일 정도의 반감을 품은 사람이었다. 미챠가 노인 앞에 서서 다리의 힘이 쫙 빠지는 것을 느끼고 자기는 끝장이 났다고 실없이 외친 그 순간 ─ 바로 그 순간 노인은 한없는 분함을 느끼며 그를 쳐다보면서 그를 골려 줄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챠가 나갔을 때, 쿠지마 쿠지미치는 너무 분해서 하얗게 질려 가지고는 아들한테 앞으로는 이 건달이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라고, 아예 집 안에 들이지도 말라고 명령했는데, 만약 그렇게 하지 않을 시에는……. 꼬박 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노인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만, 저녁 무렵엔 아예 몸져누워 ‘의원’을 부르러 사람을 보냈다.


2 랴가브이


그리하여 당장 ‘달려가야’ 했건만 말을 빌릴 돈이라곤 땡전 한 푼 없었으니, 다시 말해 가진 거라곤 20코페이카짜리 은화 두 닢이 전부였으니 ─ 이것이 그 옛날 떵떵거리고 살던 시절 끝에 남은 전부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집에는 이미 오래전에 멎어 버린 낡은 은시계가 있었다. 그는 그것을 집어 들고 시장에 자기 가게를 갖고 있는 유대인 시계방을 찾아갔다. 그는 시계 값으로 6루블을 쳐주었다.


그리고 집에서 그는 주인들에게 3루블을 빌려서 경비를 채웠는데, 그들이 지갑을 탈탈 털어서라도 기꺼이 그에게 돈을 빌려 주었으니, 그 정도로 그를 사랑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모종의 사건이 있기 전날, 정오까지만 해도 미챠에게는 땡전 한 푼 없었으며, 돈을 마련하기 위해 그는 시계를 팔고 주인에게서 3루블을 빌렸으며, 이 모든 일이 증인이 보는 앞에서 이루어졌다.’라는 사실이 기억되고 확인되었다.


볼로비야 역으로 달려간 뒤 미챠는 기어코 ‘이 모든 일들’을 해결하고 끝을 보리라는 기쁜 예감이 들어 반짝반짝 빛이 나긴 했지만 그럼에도 너무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 지금 자기가 없는 동안 그루셴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바로 이 때문에 그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왔으며 또 집주인들에게도 누가 와서 그를 찾더라도 그의 행방을 털어놓지 말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반드시, 반드시 오늘 저녁 무렵에는 돌아가야 한다.” 그는 마차에 앉아서 몸을 떨며 이렇게 되뇌었다.


미챠가 그곳에 도착한 후에 일린스키 신부를 찾아내는 동안 이미 밤이 찾아와 버렸다. 신부는 수줍고 상냥해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그 즉시 설명해 준 바에 따르면, 이 랴가브이라는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 집에 머물렀지만 지금은 수호이 포숄로크 마을에 있으며 역시나 숲을 흥정하느라 그곳 산지기의 오두막에서 오늘 밤을 보낼 거라는 것이었다.


미챠가 지금 당장 자기를 랴가브이한테 데려다 달라, ‘이로써 말하자면 자기를 구원해 달라.’라고 열심히 사정을 하자, 처음에는 망설였던 신부도 호기심이 동한 탓인지 그를 수호이 포숄로크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 무슨 참변인지, 어차피 1베르스타 ‘남짓’밖에 안 되는 거리니까 ‘살짝 걸어서’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조언을 하는 것이었다.


가는 도중 미챠가 유산 문제로 인해 아버지와 충돌했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신부는 소스라치게 놀라기까지 했는데, 이는 그가 표도르 파블로비치와 모종의 의존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놀란 상태에서도 왜 이 농군 출신 장사치 고르스트킨을 '랴가브이'라고 부르는지 물어보았고, 그러고 나서 미챠에게 신신당부하길, 이 사람은 영락없는 랴가브이지만 이 이름을 들으면 죽도록 모욕감을 느끼는 만큼 랴가브이가 아니기도 하니까 반드시 고르스트킨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랴가브이의 오두막으로


그들은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신부의 지인인 산지기는 오두막의 방 한 칸을 쓰고 있었고, 현관 너머 또 다른 깨끗한 방에는 고르스트킨이 있었다. 이 깨끗한 오두막으로 들어간 뒤 수지(獸脂) 양초를 밝혔다. 오두막은 불을 너무 많이 땐 상태여서 후끈거렸다. 정작 손님은 베개 대신 윗옷을 둘둘 말아 베고는 벤치에 몸을 쭉 뻗고 누워서 코를 드렁드렁 골고 있었다.


image.png


미챠는 그에게 다가가 제 손으로 깨우기 시작했지만, 그것도 아주 열심히 깨워 봤지만, 잠에 곯아떨어진 자는 깨어날 생각도 안 했다. ‘술에 취했어.’ 미챠는 결론을 내렸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맙소사, 정말 어쩌면 좋지!’ 그렇게 오랫동안 노력을 기울이고서 얻은 결과라곤 상대방의 영문 모를 웅얼거림, 지독한 욕설뿐이었다.


"아침까지 좀 기다리는 편이 낫겠습니다." 신부가 제안했다.

"그럼, 신부님, 저는 양초를 켜 놓고 여기 남아서 기회를 포착해 보겠습니다. 잠이 깨면 곧장 얘기를 시작하도록 하고……. 자네한테 양초 값은 지불하겠네." 그가 산지기를 보며 말했다. "숙박료도 지불하고, 드미트리 표도로비치의 이름값은 해야지. 그리고 신부님, 신부님은 이제 어떻게 해야 될지, 어디서 주무시겠습니까?"

"아니요, 저는 집으로 갑니다. 이 사람의 암말을 타고 가면 되니까요." 그러면서 산지기를 가리켰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일이 잘되길 빌겠습니다." 다들 그렇게 결정을 봤다.


신부는 암말을 타고 떠났는데, 마침내 해방이 돼서 기뻤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곰곰 생각에 잠겼다. 즉, 내일 기회를 봐서 자신의 은인인 표도르 파블로비치에게 이 흥미진진한 사건을 알려야 하지 않을까, '그러지 않았다가 좋지 않은 때에 알게 돼서 골이 나면 더 이상 돌봐 주지 않을지도 몰라.'라 는 거였다.


미챠는 자신이 쓴 표현대로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의자에 앉았다. 깊은 우수가 짙은 안개처럼 자욱하게 그의 영혼을 뒤덮었다. 깊고도 무서운 우수가 말이다! 그는 앉아서 생각에 잠겼지만 뭐 하나 제대로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양초는 타오르고 귀뚜라미는 울고 불을 너무 많이 땐 방은 참을 수 없이 갑갑했다. 갑자기 그의 머릿속으로 정원이, 정원 뒤의 통로가 떠오르더니, 아버지의 집 문이 은밀하게 열리면서 그루셴카가 문 안으로 뛰어 들어 간다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비극이다!"


그는 이를 갈면서 말한 뒤 기계적으로 잠에 곯아떨어진 사람 곁으로 다가 가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유난히도 긴 얼굴에 아마빛 곱슬머리, 불그죽죽한 색의 길고 가는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나사지로 된 루바시카와 검은 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조끼의 호주머니에서 은시계 줄이 삐져나와 있었다. 미챠는 무서울 정도의 증오감을 품고 이 얼굴을 뜯어보았는데, 무 엇 때문인지 그가 곱슬머리인 것이 특히나 증오스러웠다. 미챠는 갑자기 완전히 이성을 잃고 다시금 술에 취한 농군을 깨웠건 만, 그렇게 오 분가량이나 난리를 쳤건만 이번에도 아무 소득이 없자, 완전히 자포자기하고 자기 의자로 돌아와 앉았다.


'차라리 집 어치울까? 그냥 획 가 버릴까?'라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안 돼, 그래도 아침 까지는 있자. 그래, 오기로라도 버텨 보자, 오기로라도! 그냥 갈 거면 뭣 하러 왔냐고. 게다가 타고 갈 마차도 없으니, 이제 와서 어떻게 여기서 떠난단 말인가, 오, 정말로 어이가 없군!'

하지만 두통은 점점 더 심해졌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자기도 모르는 새에 갑자기 잠이 들어 버렸다. 아마 두 시간 혹은 그 이상 잔 것 같았다.


비명이 터져 나올 만큼 참을 수 없는 두통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관자놀이 주위가 지끈거리고 정수리가 아팠다. 정신이 번쩍 든 뒤에도 오랫동안 완전히 이성을 회복할 수 없어서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방에 불을 너무 많이 때는 바람에 지독한 탄산가스가 가득 차서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도 술 취한 농군은 여전히 누워서 코를 드렁드렁 골고 있었다. 양초는 다 타서 곧 꺼질 태세였다.


미챠는 소리를 질렀고 비틀거리면서 오두막의 현관 건너편, 산지기의 방으로 돌진했다. 그는 곧 눈을 뜨긴 했지만, 그리고 오두막의 맞은편 방에 탄산가스가 찼다는 말을 듣고서 조치를 취하러 오긴 했지만 그 사실을 이상할 정도로 무심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미챠는 놀라다 못해 화까지 났다.

"저 사람이 죽었다면, 정말 죽었다면, 그때는…… 그때는 어쩌란 말이야?" 미챠가 흥분하여 소리쳤다.


그들은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창문도 열고 굴뚝도 열었고, 또 미챠는 현관에서 물통을 끌고 와서 일단은 자기 머리부터 적시고 그다음엔 무슨 걸레 쪽을 찾아서 물에 적신 뒤 랴가브이의 머리에 갖다 댔다. 하지만 산지기는 여전히 이 모든 사건에 어쩐지 경멸스러 운 태도를 취했고 창문을 열어 놓고는 무뚝뚝하게 "그 정도면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곤 미챠에게 불이 켜진 철제 등불을 남겨 두고 다시 잠을 자러 갔다. 미챠는 너무 지쳤기 때문에 잠깐 숨을 좀 돌리다가 금세 눈을 감았고 그다음엔 곧장 죽은 듯 잠들고 말았다.


그가 잠에서 깬 건 끔찍할 정도로 늦게였다. 이미 아침 9시는 족히 됐으니 말이다. 오두막의 두 창문에서 햇살이 밝게 비치고 있었다. 어제의 곱슬머리 농군은 벌써 코트까지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새 사모바르와 새 술병이 놓여 있었다. 그는 눈알을 부라리면서 상대방을 일 분 정도 바라보았다. 농군은 농군대로 말없이 미챠를 간특하게 힐끔힐끔 바라보았는데, 미챠의 느낌으론 상대가 어쩐지 모욕적일 정도의 태연함, 심지어 어떤 경멸적인 오만불손함마저 내비치는 것 같았다. 미챠는 그에게로 돌진했다.


“저어기, 실례합니다만…… 그러니까 이곳, 저쪽 오두막의 산지기에게서 들으셨을 줄 압니다만……. 그러니까 저는 드미트리 카라마조프라고 하는 육군 중위로서, 당신이 사려고 하는 숲의 주인인 카라마조프 노인의 아들인데……. 숲을, 아버지한테서 숲을 사려고 하신다면서요. 잠 좀 깨시고 정신 좀 차리십시오. 파벨 일린스키 신부가 저를 여기로 데려와 줬습니다……. 당신은 삼소노프한테 편지를 썼고, 그 삼소노프가 나를 당신에게로 보낸 건데…….” 미챠는 숨을 헐떡였다.


image.png


“거 ─ 거짓말이야!” 랴가브이는 다시 딱 잘라 말했다.

“네놈은 칠장이야! 네놈은 물건 납품을 청탁받더니 비열한 놈이 돼 버렸어. 이 비열한 놈!”

"정말이지, 그건 오해입니다!" 미챠가 절망에 가득 차서 손을 비벼댔다. 농군은 턱수염을 쓰다듬다가 갑자기 간특하게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야, 네놈은 차라리 말이야. 그러니까 남한테 이런 더러운 짓을 해도 된다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나, 있으면 그거나 한번 제시해 봐, 네놈은 비열한 놈이야, 내 말을 알아듯겠냐?"


미챠는 음울하게 물러섰는데 갑자기, 훗날 그 자신의 표현대로 ‘뭔가로 이마를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한순간에 그의 머릿속이 환하게 밝아졌으니 ‘횃불이 확 타올랐고 나는 모든 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서서 그는 어쨌거나 자기처럼 영리한 사람이 어떻게 이런 멍청한 일에 빠져들 수 있었으며 이런 기막힌 모험에 걸려들어 거의 꼬박 하루를 이 랴가브이라는 작자와 생난리를 떨 수 있었단 말인가 하는 의혹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는 조용히 의자로 다가가서 외투를 집어 들고 말없이 걸친 뒤 오두막에서 나왔다. 오두막을 나온 뒤 보니, 주위에는 오직 숲뿐,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심지어 오두막에서 오른쪽 혹은 왼쪽 어느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될지도 기억이 안 났고 ─ 해서, 되는대로 마구 걷기 시작했다. “완전히 절망이다, 어딜 보나 완전히 죽음이다!” 그는 이렇게 되뇌면서 여전히 앞으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세 시간쯤 뒤 목적지에 다다랐다. 볼로비야 역에서 미챠는 즉각 시내로 가는 역마차를 주문했는데, 말을 매는 동안 식사를 하고 힘이 나자, 용기가 샘솟았고 영혼 속이 다시금 훤히 밝아졌다. 그는 마부를 재촉하면서 날듯이 길을 달렸고, 그 와중에 갑자기 오늘 저녁까지 어떻게 당장 ‘이 빌어먹을 돈’을 구할 것인가에 대한 새롭고도 이미 ‘확고부동한’ 계획을 세웠다. “오늘 당장 해결을 보고야 말겠다!” 마침내 시내에 도착한 미챠는 당장 그루셴카에게도 달려갔다.


3 금광


이것이 바로, 그루셴카가 무서워 벌벌 떨면서 라키친에게 이야기해 주었던 미챠의 그 방문이었다. 그녀는 그 당시 ‘급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가 들이닥친 것이다. 그다음의 일은 우리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를 따돌리기 위해 그녀는 ‘돈 계산’ 때문에 곧 죽어도 가야 되니까 자기를 쿠지마 삼소노프에게 바래다 달라고 했고, 미챠는 즉시 그녀를 바래다주었고, 그녀는 쿠지마의 대문 옆에서 그와 헤어질 때 12시에 그녀를 다시 집으로 바래다주기 위해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쿠지마 집에 앉아 있을 테니, 표도르 파블로비치한테 가지는 않을 거란 소리다…….' 아무래도 그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다름 아니라 질투심이 많은 족속에 속했는데 - 그러니까 사랑하는 여인과 떨어져 있으면 그 즉시 자기를 '배반'하지나 않을까 하는 온갖 무서운 일들을 잔뜩 생각해 낸 끝에 기어코 그녀가 자기를 배반해 버렸다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확신이 들어 거의 죽을 지경으로 그녀에게로 달려갔다가, 그녀의 웃고 있는 즐겁고 상냥한 얼굴을 보면 그 즉시 기분을 회복하여 의심이고 뭐고 당장 다 떨쳐 버리고 기쁜 수치심을 느끼며 자신의 질투를 탓하는 그런 족속 말이다.


그루셴카를 바래다준 뒤 그는 자기 집으로 돌진했다. 오, 오늘 중으로 꼭 완수해야 하는 일이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마음은 한결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어서 빨리 스메르쟈코프를 족쳐서 어제 저녁에 저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만 알아내면 되는데, 행여나 그녀가 표도르 파블로치를 찾아갔다면, 에잇, 정말!' 이런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하여, 미 처 자기 자신의 집에 다다르기도 전에 다시금 질투가 지칠 줄 모르는 그의 마음속에서 들끓기 시작했다.


질투심이 많은 자


질투심이 많은 자는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으면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온갖 치욕과 도덕적 타락을 일삼는 법이다. 하지만 이런 자들이 한결같이 속물적이고 더러운 영혼의 소유자란 소리는 아니다. 오히려 드높은 마음, 자기희생으로 가득 찬 순수한 사랑을 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탁자 밑에 몸을 숨기고 아주 비열한 사람들을 매수하여 감시와 엿듣기라는 가장 추악하고 더러운 짓을 일삼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토록 엿보기만 해야 하는 사랑이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일까? 하지만 바로 이것을 진정으로 질투심 강한 사람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법이며, 어쨌든 정말로 이런 자들 중에도 드높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더러 있다. 또 놀랄 만한 것은, 바로 이 드높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그렇게 엿듣고 감시를 할 때 자기 스스로 기어 들어온 이 치욕을 예의 그 '드높은 마음으로' 분명히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최소한 이 골방 안에 버티고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루셴카를 보자 미챠는 질투심도 금세 사라졌을뿐더러 남의 말을 잘 믿고 고상한 사람으로 변했고, 고약한 감정들을 품은 자신을 경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이 여성을 향한 그의 사랑 속에 깃든 것이 '몸의 곡선'이나 그저 열정 하나만이 아님을 의미할 뿐이었으니, 그 자신이 가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무엇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대신 그루셴카가 사라지자, 당장에 미챠는 다시금 그녀가 배반이라는 온갖 저열하고 교활한 짓을 저지르지나 않을까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의 내부에서는 질투가 새롭게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서둘러야 했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일에 필요한 돈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에게는 무척 아끼는, 총알이 장전된 훌륭한 결투용 권총이 한 세트 있었는데, 그는 오래전에 '수도'라는 술집에서 안면을 튼 한 젊은 관리에게 당장 달려가서 이 권총을 담보로 10루블을 빌려 주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관리는 기뻐하면서 기왕이면 자기한테 아주 팔아 버리라고 설득하기 시작했지만 미챠는 동의하지 않았고, 그러자 상대방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이자는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10루블을 내주었다.


마리야 콘드라치예브나(표도르 파블로비치의 이웃 여자)의 집에서는 스메르쟈코프가 병이 났다는 소식이 미챠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는 굉장한 충격과 혼란에 휩싸였다. '이제 어떡한담, 누가 감시를 하고 누가 나한테 정보를 흘려 준단 말인가?' 그는 이웃집 모녀를 붙잡고 어제 저녁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느냐고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고 이반 표도로비치는 집에서 밤을 보냈고 '모든 것이 정말로 원만했다.'라고 하면서 그의 의심을 불식시켜 주었다.


미챠는 일단 아까 달구지를 타고 올 때부터 곰곰 생각해 둔 '계획'이, 새롭고도 이미 확실한 계획이 지금 그의 앞에 버티고 있으며 그 실행은 더 이상 연기할 수 없었고 이 일을 위해 한 시간을 할애하기로 결정했다. '한 시간 안에 모든 것을 해결 짓고 모든 것을 알아내고, 그러고 나서는 첫째, 삼소노프의 집으로 가서 그루셴카가 거기 있는지를 알아보고 눈 깜짝할 새에 여기로 되돌아온 뒤, 11시까지 여기에 있다가 그다음엔 그녀를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다시 삼소노프한테로 간다.' 자, 그는 이렇게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홀라코바 부인 집으로


그는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가, 씻고 머리를 빗고 옷을 손질해서 차려입은 뒤 홀라코바 부인 집으로 향했다. 아, 안타깝게도 그의 '계획'이란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이 부인에게서 3000을 빌리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갑자기, 어쩐지 느닷없이 부인이라면 그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으리라는 괴상한 확신이 생겨났다. 이 부인은 미챠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약혼자라는 것 때문에 처음부터 그냥 그를 싫어했고, 미챠는 또 그 나름으로 그녀를 비웃었는데, 아까 아침, 그 달구지에서 다음과 같이 환한 생각이 번득였던 것이다.


'내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와 결혼하는 게 거의 히스테리를 일으킬 정도까지 싫다면, 지금 내가 부탁할 이 3000을 부인이 왜 거절하겠는가, 그 돈만 있으면 카챠를 단념하고 영원히 이곳을 떠나 버릴 텐데? 호강에 겨운 이 상류층 부인들은 변덕이 발동해서 뭘 하고 싶어지면, 자기들이 원하는 식으로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아무것도 아까워하지 않는 법이다. 게다가 그녀는 돈이 남아돌지 않는가. 그리고 체르마쉬냐는 그저 빛에 대한 점잖은 담보물로서 제안하면 되지 않을까.'


그리하여 그가 초인종을 눌렀을 때는 7시 반 정도였다. 처음에는 상황이 우호적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가 부인을 만나고 싶다고 말하자마자, 그 즉시 예사롭지 않을 정도로 빨리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꼭 내가 와 주길 기다린 것 같군.' 이런 생각이 미의 머릿속에서 스쳐 갔고, 그다음에는 그가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여주인이 거의 뛰다시피 들어오더니 마침 기다리고 있었노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하는 것이었다.


"기다렸어요, 기다렸어! 당신이 우리 집을 찾아 주리라곤 생각도 할 수 없었는데, 그렇지 않나요, 그런데도 저는 당신을 기다렸어요, 제 본능에 놀라실 테죠,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정말 놀라운 일이군요, 부인." 미챠가 엉거주춤 자리를 잡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제가 온 것은 굉장히 중대한 일 때문입니다…… 중대하고도 아주 중대한, 부인, 사정이 아주 급합니다……."


"아주 중대한 일 때문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이건 무슨 예감도,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는 반동적인 소망도 아니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그런 일이 있었는데, 당신이 오지 않을 리가 있겠어요,"

"부인." 하고서 미치가 말을 끊었다. 제가 생각하는 건 오직 제가 아주 절망적인 상태에 있다는 점뿐이며, 만약 부인이 저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모든 것이 나가떨어질 것이며 그것도 제가 제일 먼저 나가떨어질 거라는 점뿐입니다. 표현이 저속해서 죄송합니다만, 저는 지금 열에 들떠 있습니다, 거의 열병이죠……."


"얘기하실 필요도 없어요, 그건 부차적인 문제니까요. 남을 돕는 일이라면, 당신이 처음도 아니에요,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아마 저의 사촌 벨메소바에 대해 들으셨겠지만, 그녀의 남편이 파멸했는데, 아니, 당신이 제대로 표현했듯, 나가떨어졌는데,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말이죠, 제가 그에게 양마업에 손을 대 보라고 일러 주었고, 지금은 번창 일로에 있답니다.


미챠는 신경질적이고 초조하게 소리쳤는데, 심지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다시피 했다.

"제발 부탁이니, 부인, 제 얘기를 좀 들어 주시고, 자유롭게 말을 할 수 있도록 딱 이 분만 주시면, 일단 제가 생각한 계획을 전부, 모두 부인에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저에겐 지금 시간이 금쪽같습니다, 앞을 다투는 일이 한두 개가 아니거든요……! 제가 여기에 온 것은 부인에게 3000이라는 돈을 빌리고자, 빌리긴 하되 믿을 만한, 아주 믿을 만한 담보물을 갖고서 말입니다! 그저 말만 좀 하게 해 주시면......"


"그런 얘기는 전부 나중에, 나중에 하세요!" 호흘라코바 부인은 또 선수를 치고서 한 손을 내저었다. "아니 당신이 무슨 말을 하시든 저는 미리 다 알고 있다니까요, 얼마간의 돈이, 그러니까 3000이 필요하신 모양인데, 하지만 저는 당신에게 더 많은 돈을, 얼마든지 더 많은 돈을 드리고 당신을 구해 주겠어요,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하지만 우선은 제 말부터 잘 들으셔야 해요!" 그러자 미챠는 다시 자리에서 튕겨 일어났다.


"부인, 정말 선량하시군요!" 그는 굉장한 감정을 담아 소리쳤다. "맙소사,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한 인간이 횡사하지 않도록, 권총으로 자살해 버리지 않도록 구해 주시는군요, 부인…… 백골난망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당신에게 3000보다 더 많은 돈을, 얼마든지, 정말 얼마든지 더 많은 돈을 드리겠어요!" 호흘라코바 부인은 미챠가 기뻐 날뛰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빛나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소리쳤다.


"제 입으로 당신을 구해 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꼭 구해 드리겠어요. 저는 당신을 벨메소프처럼 구해 주겠어요.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금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금광이라뇨, 부인! 저는 그런 건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벌써 한 달 내내 이 목적을 갖고서 당신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어요. 당신이 제 곁을 지나갈 때면 백번도 더 당신을 뜯어보면서, '그래 저 사람이야말로 금광에 걸맞은 정력가이다'하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답니다."


"하지만 부인, 그 3000은, 그토록 관대하게 저에게 빌려 주시기로 약속하셨잖습니까......."

"설마 그 돈이 당신을 피해 가겠어요,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하고서 호흘라코바 부인이 즉각 말을 잘랐다. "이 3000은 어쨌거나 당신의 호주머니에 있을 거예요, 3000이 아니라 300만은 될걸요,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그것도 아주 단시일 내에! 당신은 금광을 찾아내 수백만을 벌어서 돌아온 뒤 활동가가 되어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실 거예요. 그리고 당신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그들은 당신을 축복하겠지요. 지금은 철도 시대가 아닙니까, 당신은 곧 유명세를 타서 지금 재정부에 죽도록 필요한 약의 감초가 될 거예요."


"부인, 부인!"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는 어떤 불안한 예감을 느끼면서 말을 끊었다.

"저는 부인의 충고를, 부인의 극히, 극히 현명한 충고를 따르겠습니다, 부인, 떠나도록 하지요, 거기로…… 저 금광을 찾아…… 그건 그렇고 지금은 그 3000, 부인이 그토록 관대하게 약속하신…… 오, 그 돈만 있으면 저는 모든 굴레서 해방되는 겁니다, 특히 오늘 가능하다면…… 그러니까 저는 지금 시간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간청입니다만, 부인이 약속하신 돈을 오늘 중으로 받을 수 있을지요? 만약 아니라면, 정확히 언제 그 돈을 받으러 오면 되겠습니까?"

"돈이라고요,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부인이 약속하신 3000……. 그토록 관대하게……."

"3000이라고요? 그건 루블을 말하는 건가요?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저한테 3000이 어디 있어요, 정말."

호흘라코바 부인은 태연스럽게 놀라는 기색을 보이며 이렇게 내뱉었다. 미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어머나, 저런, 제 말을 잘못 이해하셨군요,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잘못 이해하신 거예요. 저는 금광 얘기를 했던 거예요……, 사실, 제가 당신에게 3000보다 더 많은 돈을, 얼마든지 더 많은 돈을 준다고 약속하긴 했죠, 이제야 모두 기억이 나긴 하지만, 그건 오직 금광을 염두에 두고 한 얘기인걸요."

"그럼, 돈은요? 3000은요?" 드미트리 표도로비치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소리쳤 다.

"오, 저런, 당신이 돈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셨다면, 저한텐 없어요. 지금 저한테는 돈이 전혀 없거든요"


"때마침 지금 제 관리인들과 틀어져서 며칠 전에는 미우소프한테서 500루블을 빌렸을 정도예요. 가진 돈이라곤 한 푼도 없어요. 그리고 말이죠, 설사 저한테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저는 그 누구에게도 돈은 빌려 주지 않아요. 돈을 빌려 주면 싸움이 일어나니까요. 더구나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당신을 구해 주기 위해 안 빌려 주는 거예요, 암, 그렇고말고요, 당신에게 필요한 건 오직 하나, 바로 금광, 금광, 금광뿐이에요…….”

"에잇, 빌어먹을……!" 갑자기 미챠가 으르렁거리며 주먹으로 있는 힘껏 탁자를 내리쳤다.

"어머나!" 호흘라코바는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지르더니, 거실의 다른 쪽 끝까지 달아나 버렸다.


미치는 침을 탁 뱉고는 빠른 걸음으로 방에서 나왔으며, 이어 집에서 나와 거리로, 어둠 속으로 나와 버렸다!

미친 사람처럼 걸어가면서 그는 자신의 가슴을 쳐 댔는데, 그곳은 이틀 전 알료샤 앞에서 그렇게 가슴을 쳐 댔던 바로 그 자리였다. 그 당시로선 심지어 알료샤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비밀이었지만, 이 비밀 속에 그에게 있어 치욕 이상의 어떤 것이 감추어져 있었으니,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갚아야 되는 저 3000을 구하지 못하면, 그러니까 그의 양심을 이토록 짓누르는 치욕을 걷어 내지 못하면, 남는 건 파멸과 자살뿐이라고 결정했다.


어쨌거나,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지금, 육체적으로 그토록 강인한 이 사람이 호흘라코바의 집에서 불과 몇 걸음을 떼 놓기가 무섭게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펑펑 눈물을 쏟아 냈다. 그는 정신없이 걸어가면서 주먹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렇게 광장으로 나온 그는, 갑자기 온몸으로 뭔가에 탁 부딪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순간, 그로 인해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 어떤 노파가 째질 듯 비명을 질렀다.


"맙소사, 사람 잡겠네그려! 눈은 어디다 두고 걷는 거야, 이 불한당 같은 놈아!"

"이런, 이건 그 할멈이 아니오?" 미챠가 어둠 속에서 노파를 알아보고서 소리쳤다.

쿠지마 삼소노프의 시중을 들어 주는, 어제 미챠가 무척이나 눈여겨봐 두었던 바로 그 노파였던 것이다.

"쿠지마 쿠지미치 댁에 사시죠, 그의 시중을 드시면서요?"

"그렇긴 한데, 나리, 그건 그렇고 아무래도 나리가 누구신지 알아볼 수가 없는걸요?"


"그럼, 저어기, 할멈, 아그라페나 알렉산드로브나가 지금 당신 댁에 있소?" 미챠는 조바심이 나서 거의 미칠 지경이 되어 이렇게 말했다. “아까 내가 직접 바래다주고 왔는데."

"왔지요, 나리, 그러니까 다녀갔죠, 잠깐 앉아 있다가 떠났으니까요."

"뭐라고요? 떠났다고요?" 미챠가 소리쳤다. "언제 떠났소?"

"그러고 바로 떠났지요, 우리 집엔 한 일 분 앉아 있었나, 그랬어요. 쿠지마 쿠지미치한테 옛날 얘기 하나를 들려주고 그분을 실컷 웃겨 놓고는 냉큼 달아나 버렸으니 까요."


"거짓말이야, 빌어먹을 년!" 미챠가 울부짖었다.

"아이구!" 노파가 이렇게 소리를 질렀지만, 미챠는 이미 쥐도 새도 모르게 그 자리를 떠 버렸다. 있는 힘껏 모로조바의 집을 향해 달려갔던 것이다. 그것은 그루셴카가 모크로예로 떠난 그 시각으로서, 그녀가 출발한 지 아직 십오 분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페냐는 식모 일을 하는 할머니 마트료냐와 함께 부엌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대위'가 뛰어 들어왔다. 그를 보자, 페냐는 온 집이 떠나갈세라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비명은 왜 질러?" 미챠가 고함을 질러 댔다. "아씨는 어디에 있느냐?" 하지만 너무 무서워서 간이 콩알만 해진 페냐가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는 갑자기 그녀의 발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페냐, 제발 부탁이다, 우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해 다오, 아씨는 어디 있는 거야?"

"나리, 아무것도 모릅니다,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나리, 아무것도 몰라요, 정말 때려죽인다고 해도 몰라요." 페냐는 맹세하고 또 맹세했다.


"아까 나리께서 몸소 아씨와 나가셨잖아요……."

"다시 돌아왔단 말이다……."

"나리, 안 오셨어요, 하느님께 맹세코 안 오셨어요!"

"거짓말이야. 네가 이렇게 무서워하는 꼴만 봐도 그년이 어디에 있는지 똑똑히 알겠다!"

미챠는 그렇게 소리치고서 밖으로 내달렸다.


image.png


그런데, 미챠는 그 집을 떠나면서 어쨌거나 아주 예기치 못한 짓을 하나 저질러서 페냐와 마트료나 노파를 놀라게 했다. 그러니까 탁자 위에는 놋쇠로 된 절구가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크지 않은 놋쇠 공이가 들어 있었는데 고작해야 4분의 1 아르신 정도 되는 길이였다. 미챠는 달려 나가는 길에 벌써 한 손으로 문을 연 상태에서 다른 손으로 갑자기 절구에서 공이를 획 낚아채서 옆쪽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그대로 싹 사라져 버렸다. "아, 저런, 누굴 죽일 작정이야!" 페냐가 손바닥을 탁 쳤다.


image.png


4 어둠 속에서


그는 어디로 달려갔을까?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표도르 파블로비치의 집이 아니라면, 그년이 도대체 어디로 갔겠어? 삼소노프한테서 곧장 아버지한테로 달려간 거다, 이제야 분명해졌군. 모든 계략과 모든 기만이 이제야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런 생각들이 그의 머릿속을 회오리처럼 훑고 지나갔다. 마리야 콘드라치예브나도 음모에 동참한 게 분명해, 스메르쟈코프 놈도 마찬가지다, 다들 매수당한 거다!’


그는 다리를 건너 텅 빈 외진 골목길에 도착했는데, 그 한 쪽에는 표도르 파블로비치의 정원을 빙 둘러싸고 있는 높고 견고한 담장이 있었다. 여기서 그는 한 장소를 골랐는데, 그가 알고 있는 전설에 따르면, 리자베타 스메르쟈쉬야가 언젠가 표도르 파블로비치 집의 담장을 넘은 바로 그 지점인 듯했다. ‘그 여자도 넘어갈 수 있었다는데 내가 못 넘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고는 정말로 껑충 뛰어올라 단숨에 용케 담장의 꼭대기 면에 한 손을 걸친 다음 정력적으로 몸을 끌어 올려 단번에 담장 벽에 올라앉게 되었다. 그러니까 정원에는 여기서 가까운 곳에 목욕탕이 있었고, 담장 위에 있으니까 안채의 불이 밝혀진 창문들도 잘 보였다. ‘그럼, 그렇지, 영감의 침실에 불이 켜진 걸 보니, 저기 있는 거야!’ 그는 담장에서 훌쩍 뛰어내려 정원으로 들어섰다.


image.png


오 분 정도 만에 그는 불 켜진 창문 앞에 다다랐다. 저기 바로 창문 아래에 몇 그루의 커다랗고 높고 무성한 접골목과 까마귀밥나무가 관목 숲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기억났다. 마침내, 관목 숲에 다다랐고 그는 그 뒤로 몸을 숨겼다. 숨도 쉬지 않았다. ‘이제 때를 기다려야 한다.’라고 그가 생각했다. 그는 이 분 정도를 기다렸는데, 심장이 무섭도록 쾅쾅 뛰어서 순간순간 숨이 막힐 정도였다.


그는 창문 곁으로 다가가 까치발을 하고 섰다. 그의 눈앞으로 표도르 파블로비치의 침실 전체가 자기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펼쳐졌다. ‘혼자 있는 거다.’라고 미챠는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혼자 있는 게 분명해.’ 표도르 파블로비치는 거울에서 물러나 갑자기 창문 쪽으로 몸을 돌려 바깥을 내다보았다. 미챠는 냉큼 어두운 그늘 속으로 숨어 버렸다.


“혼자다, 혼자야!” 그는 다시 되뇌었다. “만약 그루셴카가 여기 있다면, 아버지의 얼굴이 좀 달랐겠지.”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가 여기 없다는 사실에, 갑자기 그의 마음속에서는 왠지 터무니없고 기묘한 신경질이 끓어올랐다. ‘그녀가 여기 없기 때문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해 보고서 미챠는 당장 스스로에게 이런 답을 내렸다. ‘그녀가 여기 있는지 아닌지를 도무지 정확하게 알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결단을 내리고서, 한 손을 뻗어 창틀을 살포시 두들겨 봤다. 영감과 스메르쟈코프 사이에 정해진 신호 그대로 두드린 것이다. 그러니까 처음 두 번은 조용하게, 나중에 세 번은 좀 더 빨리, 툭툭툭. 이건 ‘그루셴카가 왔다.’라는 의미의 신호였다. 노인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고개를 쳐들더니 재빨리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달려왔다.


“그루셴카, 너냐? 네가 온 거냐, 응?” 그는 어쩐지 떨리는 목소리로 반쯤 속삭이듯 말했다. “어디 있니, 얘야, 어디 있느냐, 요 아기 천사야?” 어찌나 흥분을 했는지, 노인은 숨마저 헐떡였다.

“자, 이리 오렴, 내가 널 주려고 선물도 준비해 놨단다, 이리 오면 보여 주마……!”

‘저건 3000이 들어 있다는 돈 봉투 얘기구나.’ 미챠의 머릿속에선 이런 생각이 번득였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 혹시 문 옆에 있는 거냐? 지금 당장 열어 주마…….”


image.png


미챠는 옆에서 지켜보면서 꿈쩍도 않고 있었다. 욕지기가 치밀 만큼 혐오스러운 영감의 옆얼굴, 축 늘어진 목살, 달콤한 기대감에 가득 차서 미소를 흘리는 입술, 이 모든 것이 방의 왼쪽에서 비스듬하게 새어 나오는 램프 불빛을 받아 환하게 보였다. 무섭고도 광포한 악의가 갑자기 미챠의 마음속에서 들끓었다. ‘바로 저놈이다, 나의 연적, 나를 괴롭히는 놈, 내 인생을 괴롭히는 놈!’ 이렇게 가장 느닷없고 복수에 가득 찬 광포한 악의가 터져 나왔다. 미챠는 이미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갑자기 놋쇠 공이를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 * *


훗날 미챠는 직접 말했다. “하느님께서 그때 이 몸을 지켜 주셨다.” 그 시각 병상에 누워 있던 병든 그리고리 바실리예비치가 때마침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바로 이날 저녁 무렵 그는 스메르쟈코프가 이반 표도로비치에게 이야기해 준, 익히 알려진 치료를 시행했는데, 정말 뜻밖에도 그리고리가 한밤중에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으니, 그는 잠깐 생각을 정리한 뒤 그 즉시 다시금 허리가 타는 듯 아팠지만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때마침 갑자기, 어제 저녁부터 정원으로 통하는 쪽문에 자물쇠를 채우지 않고 열어 뒀다는 것이 기억났다. 이자는 아주 꼼꼼하고 정확한 사람, 한번 굳어진 질서와 수많은 세월 동안의 습관을 준수하는 사람이었다. 통증이 심해서 몸을 비틀고 다리를 절면서도 그는 층계참에서 내려가 정원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쪽문은 완전히 활짝 열려 있었다. 기계적으로 그는 정원으로 발을 내딛었다.


왼쪽을 보니 주인 나리 방의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는데, 그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는 사람 없이 휑뎅그렁했다. ‘아니, 창문이 왜 열려 있을까, 여름도 아닌데!’ 그리고리가 이렇게 생각한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때마침, 바로 그의 눈앞, 정원에서 뭔가 예사롭지 않은 것이 획 어른거렸다. 그에게서 사십 보쯤 떨어진 곳, 어둠 속을 사람이 달려가는 것 같았는데, 꼭 무슨 그림자가 아주 빨리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리는 그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면서 앞뒤를 잃고 마구 달리면서 추적했다. 그리하여 도망자가 이미 담장을 넘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에 딱 맞추어 담장 앞에 도달했다.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그리고리는 고함을 질러 댔고 상대에게 달려들어 두 손으로 한쪽 발을 붙잡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상대의 정체를 확인했으니, 그건 그놈, ‘저 불한당 같은 놈, 제 아비를 죽일 놈’이었던 것이다!


“이런, 제 아비를 죽일 놈!” 노인은 온 동네가 떠나갈세라 소리쳤지만, 그가 외칠 수 있는 건 오직 이 말뿐이었다. 그는 갑자기 벼락이라도 맞은 양 꼬꾸라져 버렸다. 미챠는 다시 정원 아래로 뛰어내려 쓰러진 자 위로 몸을 굽혔다. 미챠의 손에는 놋쇠 공이가 들려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기계적으로 풀밭에 던져 버렸다. 노인의 머리는 온통 피투성이였다.


미챠는 한 손을 뻗어 그 머리를 만져 보기 시작했다. 그는 훗날, 자신이 그 순간에 노인의 두개골을 박살 낸 건지 아니면 그저 공이로 정수리를 때려 ‘한 방 먹였을’ 뿐인지를 ‘완전히 확인’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음을 분명하게 기억했다. 그나저나 피가 흘러내려, 그것도 무자비하게 흘러내려 미챠의 손가락은 어느새 뜨거운 핏줄기로 젖어 버렸다.


‘맙소사, 어쩌자고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걸까?’ 미챠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필 노인이 걸려들다니, 이렇게 누워 있으랄밖에!” 그는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한 뒤 갑자기 담장을 넘어 골목길로 뛰어내린 뒤 쏜살같이 줄행랑을 쳤다. 어두운 도시의 거리에서 그와 마주친 몇 안 되는 행인들은 훗날 이날 밤 미친 듯 질주하는 사람을 보았음을 기억해 냈다. 미챠는 모로조바의 집으로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미챠는 대문 앞까지 다다랐고 문을 두드렸다. 수위장의 조카로 얼마 전 시골에서 올라온 스무 살쯤 된 청년은 그가 누구인지를 금방 알아보았다. 미챠가 그에게 차나 마시라면서 돈을 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즉시 문을 열고 미챠를 안으로 들이면서 청년은 즐겁게 웃기까지 하며 “그런데 아그라페나 알렉산드로브나는 지금 집에 안 계십니다요.”라고 서둘러서 미리 언질을 주었다.


“그럼 아씨는 어디에 있느냐, 프로호르?” 갑자기 미챠가 걸음을 멈추었다.

“조금 전에 떠났습죠, 두 시간쯤 전에 치모페이와 함께 모크로예로요.”

“뭣 하러?” 미챠가 소리쳤다.

“그거야 알 수가 있습니까요, 무슨 장교라고 하던데요, 누가 아씨를 그리로 불렀고 말까지 보내왔는데…….”

미챠는 그를 내버려 두고 반쯤 실성한 사람처럼 페냐한테로 뛰어 들어갔다.


5 갑작스러운 결정


페냐는 부엌에 할머니와 함께 앉아 있었고, 둘 다 잠자리에 들 채비를 하고 있었다. 미챠는 안으로 뛰어 들어가자마자 페냐에게 덤벼들어 멱살을 움켜쥐고 미친 듯 흥분하여 고함을 질러 댔다.

“냉큼 말하지 못할까, 그년은 어디에 있어, 지금 모크로예에 같이 있는 작자는 누구야?”


“아이고, 말씀드릴게요, 아이고,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나리, 지금 모두 다 말씀드릴게요, 아무것도 안 숨기고요.” 죽도록 겁에 질린 페냐가 빠른 말투로 소리쳤다. “아씨는 장교님을 만나러 모크로예에 갔어요.”

“장교라니?” 미챠가 고함을 질렀다.

“옛날 그 장교님, 그러니까 오 년 전 그분, 아씨를 버리고 떠나 버린 옛 사람한테로.” 하고 페냐는 역시나 빠른 말투로 말을 늘어놓았다.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는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 있던 두 손을 풀었다.


image.png


그는 페냐 앞에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로 할 말을 잃고 서 있었지만, 그의 눈을 보면 단번에 모든 것을 이해했음을, 그야말로 모든 것을 속속들이 단번에 이해했고 또 모든 것을 알아챘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이 순간, 가엾은 페냐는 그가 이해 했는지 어떤지를 살피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뛰어 들어왔을 때나 지금이 나 궤짝 위에 앉아 온몸을 벌벌 떨며 꼭 자기 몸을 지키겠다는 듯 두 손을 앞으로 내민 채, 그 상태 그대로 얼어붙은 듯했다.


그러고 보니 상대방의 두 손이 온통 피투성이였던 것이다. 달려오는 도중에 그는 필경 그 손으로 얼굴의 땀을 닦아 내느라 이마를 만졌을 터이니, 이마도 오른쪽 뺨도 붉은 핏자국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페냐는 당장 히스테리 발작이라도 일으킬 것 같았고, 늙은 식모는 벌떡 일어나서 거의 이성을 잃은 미친 사람처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는 일 분 가량 그렇게 서 있다가 갑자기 기계적으로 페냐 옆 의자에 주저앉았다. 앉긴 했지만 무슨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꼭 소스라치게 놀란 나머지 어안이 벙 벙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대낮처럼 환했다. 이 장교라면 그는 물론 알고 있었고, 그것도 당사자인 그루셴카한테서 직접 들어서 모든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 한 달 전 그가 편지를 보내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까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을 수 있었단 말인가? 왜 그때 이 장교 일을 까맣게 잊었을까, 왜 그에 대한 얘기를 듣자마자 곧장 잊어버렸을까? 바로 이것이 무슨 괴물처럼 그의 앞에 떡 버티고 선 질문이었다. 그러자 그는 이 괴물을 그야말로 경악에 차서 관조했으며 너무 경악한 나머지 온몸이 오싹해졌다.


하지만 갑자기 그는 조용하고 온순하게, 조용하고 상냥한 어린아이처럼 페냐에게 말을 걸었는데, 조금 전에 그녀를 죽도록 놀래고 모욕하고 괴롭혔다는 건 까맣게 잊은 것 같았다. 그는 갑자기, 지금 그가 처한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굉장히 놀라울 정도로 꼼 꼼하게 페냐에게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 페나는 그의 피투성이 손을 의아하게 바라 보긴 했지만, 그 못지않게 놀랄 만큼 담담한 어조로, 흡사 그에게 그야말로 진실'을 모조리 털어놓기 위해 안달이라도 난 듯 그가 던지는 질문 하나하나에 허겁지겁 대답하기 시 작했다.


시나브로 어떤 기쁨마저 느껴 가며 그녀는 모든 일들을 세세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이는 그를 괴롭히고 싶어서가 절대 아니고 오히려 성심성의껏 서둘러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오늘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하나도 빼 놓지 않고 속속들이 얘기해 주었으니, 라키친과 알료샤가 찾아왔던 일, 그녀, 즉 페냐가 망을 본 일, 아씨가 떠난 일, 아씨가 창문에서 알료샤를 향해 그, 즉 미첸카에게 고개 숙여 안부를 전한다고, "딱 한 시간 그를 사랑해 준 것을 영원히 기억하라고 해 주세요."라고 외친 일 등이었다.


안부라는 말을 듣고서 미는 갑자기 씩 웃었는데, 그의 창백한 뺨 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페냐는 그 순간 이렇게 꼬치꼬치 캐물어도 더 이상 손톱만큼도 무섭지 않았는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쩜,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나리의 손이 온통 피투성이군요!"

"그래." 미치는 기계적으로 대답한 뒤 멍하게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더니 곧 그 손도, 페냐의 질문도 잊어버렸다. 그러곤 다시 침묵에 빠졌다.


그가 여기로 달려온 지 벌써 이 십여 분은 지났다. 아까의 경악은 사라졌지만, 이미 어떤 새로운 불굴의 결의가 완전히 그를 장악한 듯했다.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생각에 잠긴 듯한 미소를 지었다.

"나리,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페냐가 다시금 그의 손을 가리키며 말했는 데, 그 말 속에는 꼭 지금은 자기가 그의 슬픔을 가장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가까운 존재라도 되는 듯 동정이 담겨 있었다.

미챠는 다시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피야, 페냐."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건 사람의 피야, 맙소사, 어쩌자고 이렇게 피가 흘렀을까……! 내일 새벽녘에 '태양이 솟아오를' 때면 미첸카는 담장을 뛰어넘을 거야…… 어쨌거나 지금은 영원히 안녕이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곱게 물러나 주지, 물러날 줄은 아니까. 잘 살아라, 나의 기쁨이여…… 나를 딱 한 시간 사랑했으니 그걸로 미첸카 카라마조프를 영원토록 기억하라…… 어쨌거나 그녀는 나를 미첸카라고 불렀어, 너도 기억하지?"

이 말을 하면서 그는 갑자기 부엌에서 나갔다. 페냐는 그가 조금 전에 달려 들어와 자기에게 덤벼들었을 때보다 이렇게 획 떠나는 것이 거의 더 놀랍기까지 했다.


<8장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