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경 옮김 민음사
정확히 십 분 뒤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는 표트르 일리치 페르호친, 즉 아까 돈을 빌리려고 권총을 맡겼던 젊은 관리의 집에 들어섰다. 미챠는 막 나가려는 그를 붙잡은 것이다. 상대방은 미챠를, 피범벅이 된 그의 얼굴을 보고서 소리를 질렀다. “맙소사! 아니, 어찌 된 일이십니까?”
“여기” 하고 미챠가 빨리 말했다. “내 권총을 찾으러 왔습니다, 돈도 가져왔고요. 감사합니다. 바빠서 그러니까, 표트르 일리치, 부디 서둘러 주십시오.”
표트르 일리치는 점점 더 놀라워했다. 미챠의 손에 돈다발이 들린 걸 갑자기 본 것인데, 돈다발을 이렇게 들고 다니거나 이런 상태로 남의 집을 들어오는 법은 없건만, 무엇보다도, 미챠는 돈다발을 든 채로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것도 모든 지폐를 오른손에 든 채 꼭 과시라도 하듯 손을 앞으로 쑥 내민 상태였다. 지폐는 전부 무지갯빛의 100루블짜리였고 그것을 그는 피 묻은 손가락으로 붙잡고 있었다.
“아니, 지금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표트르 일리치는 손님을 의아스럽다는 시선으로 뜯어보면서 다시 소리쳤다. “아니 어쩌다가 이렇게 피투성이가 됐습니까, 넘어지셨습니까, 좀 보십시오!”
그는 상대방의 팔꿈치를 붙잡아 거울 앞에 세웠다. 미챠는 피범벅이 된 자신의 얼굴을 보고서 몸을 부르르 떨더니 성난 듯 인상을 썼다.
“에이, 빌어먹을! 무슨 걸레 같은 것 좀 없습니까…… 좀 닦았으면 싶은데…….”
“그럼, 그냥 피가 묻은 겁니까, 어디 다친 게 아니라? 그렇다면 차라리 씻으시죠.” 표트르 일리치가 대답했다. “여기 세숫대야가 있으니, 갖다 드리죠.”
“세숫대야라고요? 그거 좋군요. 다만 이것을 도대체 어디다 치운다죠?”
“호주머니에 넣든지 아니면 여기 탁자에 두시죠, 없어지진 않을 테니까요.”
미챠는 돈뭉치에서 맨 위에 있는 100루블짜리를 꺼내 관리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거스름돈이 없을 텐데요.” 상대방이 지적했다. “잔돈은 없습니까?”
"잠깐만요, 내가 부리는 아이를 플로트니코프 상점에 보내도록 하죠. 그 집은 문을 늦게 닫으니까, 잔돈으로 바꿔 줄지도 모르겠군요. 에이, 미샤!” 그는 현관 쪽으로 소리쳤다.
“플로트니코프 상점에 간다니, 거참 멋진 일이군!”
“미샤.” 그는 방으로 들어온 소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봐, 플로트니코프한테 달려가서, 드미트리 표도로비치가 안부를 전하더라고 하고 내가 직접 지금 그리로 갈 거라고 말해 주렴……. 또 들어 보렴. 내가 도착할 때까지 샴페인을 한 세 상자쯤 준비해서 예전에 모크로예에 갔을 때처럼 챙겨 놓으라고 해 주렴. 그때 나는 그쪽에서 네 상자를 가져갔답니다.” 그는 갑자기 표트르 일리치를 보며 말했다.
“자, 이제 씻으러 갑시다.” 표트르 일리치가 준엄하게 말했다.
“돈은 탁자 위에 두시거나 호주머니에 넣으십시오. 예, 그렇게요, 그리고 갑시다. 프록코트도 벗으시고요.”
그러면서 그는 프록코트 벗는 것을 거들다가 갑자기 다시 소리를 질렀다.
“아니, 프록코트도 피투성이군요!”
씻는 일이 시작되었다. 표트르 일리치는 물주전자를 들고 물을 부어 주었다. 미챠는 서둘러 대느라 손을 제대로 씻지도 못했다. (그의 손은, 훗날 표트르 일리치가 회상한 바에 따르면, 벌벌 떨리고 있었다.) 표트르 일리치는 비누를 좀 더 많이 칠해서 좀 더 박박 문지르라고 했다. 이 순간 그는 꼭 미챠에게 어떤 지배력이라도 있는 듯한 태도였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그랬다. 이 젊은이는 겁이 없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도대체 무슨 건수를 잡은 겁니까, 누구와 싸움을 하긴 한 모양이군요. 제가 이러는 건 당신이란 분은 툭하면 아무에게나 시비를 거는 게 취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 2등 대위와도 참 시답잖은 일로 그랬잖습니까……. 싸움질을 하고 나서 이제는 또 한판을 벌이러 가다니 - 정말 당신답군요. 샴페인 세 상자라니 - 그렇게 많은 걸 어디다 쓰려고요?"
“이제 권총을 주십시오. 제발, 시간이 없습니다. 자네와 얘기를 좀 나눴으면 싶지만, 이보게, 시간이 정말 없다네. 아니, 전혀 그럴 필요도 없겠지, 말을 하기엔 너무 늦었으니까. 아! 돈은 어디 있지, 어디다 뒀더라?” 이렇게 소리치면서 그는 호주머니마다 손을 넣어 보기 시작했다.
“탁자에 뒀잖습니까…… 그것도 직접……. 저기 있군요. 잊으셨습니까? 정녕 당신의 돈을 쓰레기나 맹물 취급 하시는군요. 자, 여기 당신의 권총들입니다. 희한한 노릇이군요, 5시가 좀 지났을 무렵에도 10루블이 없어 권총들을 저당 잡히더니 지금은,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수천이나 있다니. 2000이나 3000쯤 되겠죠?”
“3000쯤 됩니다.” 미챠가 돈을 바지 옆 주머니에 넣으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가는 잃어버릴걸요. 금광이라도 찾은 겁니까, 예?"
"금광? 금광이라니!" 미는 있는 힘껏 이렇게 소리치더니 자지러지듯 웃어 댔다. "그러니까, 페르호친, 금광을 찾아가 볼 생각이시오? 떠나기만 한다면, 여기 사는 한 부인이 지금 당장 당신한테 3000을 보내 줄 거요. 나한테도 보내 줬는데, 그 정도로 금광을 좋아한다니까요! 호흘라코바라고 알고 있소?"
"모르는 사이지만, 얘기를 들은 적도, 본 적도 있습니다. 정말로 그 부인이 당신에게 3000을 줬단 말입니까? 그렇게 보내 주던가요?" 표트르 일리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바라보았다.
"당신은 내일, 태양이 떠오르자마자, 영원히 젊은 포이보스가 하느님을 찬양하고 기리면서 날아오르자마자, 내일 그 부인, 그러니까 호흘라코바한테로 가서 직접, 그녀가 내게 3000을 뿌려 댔는지 아닌지, 물어보시죠. 꼭 알아보시라고요."
"나는 두 분의 관계가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자신 있게 말씀하시는 절 보면, 정말로 주셨나 보군요…….
그런데도 당신은 그 돈을 손아귀에 꽉 움켜쥐고는 시베리아로 가기는커녕 물 쓰듯 마구 써 버릴 작정이시군요……. 아니, 정말로 지금 어딜 가는 겁니까, 예?”
“모크로예.”
“모크로예라고요? 이 밤에 말입니까! 지금 모크로예에는 왜 가는 겁니까?”
“여자가 거기 있어, 여자가, 자네에겐 이 정도면 충분해, 표트르 일리치, 자, 이젠 끝이야!”
“아니 지금, 권총을 장전하는 겁니까?”
“권총을 장전하고 있습니다.”
미챠는 정말로 권총들이 든 상자를 활짝 연 뒤 화약통의 뚜껑을 벗긴 다음, 화약을 뿌려 넣고 장전을 했다. 그다음에는 총알을 집어 들었는데, 끼워 넣기 전에 그것을 두 손가락으로 쥐고 촛불 위로 들어 올렸다.
“아니, 총알을 왜 그리 쳐다봅니까?” 표트르 일리치가 불안한 호기심을 품고 지켜보았다.
“그냥. 상상을 해 본달까. 자, 만약 자네가 이 총알을 자신의 뇌 속에 박아 넣을 생각을 했다면, 권총을 장전하면서 그것을 쳐다봤을까, 아닐까?”
“뭐 하러 쳐다본단 말입니까?”
“내 뇌 속으로 들어갈 놈인데, 한 번쯤 봐 두는 것도 재미있겠지……. 뭐, 어쨌거나 헛소리야, 어차피 다 끝난걸.” 그는 총알을 끼워 넣고서 아마(亞麻) 찌꺼기로 막은 뒤 이렇게 덧붙였다.
“이제 종이장 좀 줘 보게. 뭘 쓸 수 있는 매끈하고 깨끗한 걸로 말이야. 그래, 됐어.” 그러면서 미챠는 탁자에서 펜을 집어 재빨리 종이 위에 두 줄을 쓰고 종이를 네 번 접은 뒤 조끼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권총들은 상자에 담아 열쇠로 채운 뒤 상자째로 손에 들었다. 그러고는 표트르 일리치를 쳐다보면서 오랫동안 생각에 잠긴 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가 볼까.” 그가 말했다.
그때, 미샤가 잔돈으로 바꾼 돈뭉치를 들고서 황급하게 들어와서는, 플로트니코프 상점에서는 ‘다들 야단법석을 떨며’ 술병이며 생선이며 차며 모조리 다 내올 것이고 이제 모든 것이 준비될 것이라고 보고했다. 미챠는 10루블짜리 지폐를 집어서 표트르 일리치에게 주었고, 또 한 장은 미샤에게 던져 주었다.
“그런 건 안 됩니다!” 표트르 일리치가 소리쳤다. “내 집에선 안 됩니다, 애 버르장머리만 나빠지니까요. 그리고 왜 그리 돈을 물 쓰듯 하는 겁니까? 당장 내일만 돼도 돈이 필요할 텐데"
“이봐, 지금 당장 한 병 따면 어떻겠나, 삶을 위해서 마시는 거야! 술을 마시고 싶군, 특히, 자네와 한번 마셔 보고 싶어. 자네와 마신 적은 없었지, 엉?”
“술집에서라면 마실 수 있겠네요, 갑시다, 나도 지금 그리로 가려던 참이니.”
“술집에서 마실 시간은 없어, 플로트니코프의 상점 뒷방이 좋아. 시간이 없어, 가서 마시자고, 자, 출발!”
플로트니코프의 상점은 표트르 일리치의 집에서 겨우 한 집만 건너다시피 하면 되는 곳, 길모퉁이에 있었다. 이것은 우리 도시의 부유한 상인들이 경영하는, 가장 주된 식료품상이었는데, 상점 자체도 아주 훌륭했다. 수도의 웬만한 상점에 있는 것이라면 없는 게 없어서, ‘옐리세예프 형제 상사(商社)’의 포도주, 과일, 시가, 차, 설탕, 커피 등 모든 식료품도 다 있었다. 늘 세 명의 지배인이 앉아 있었고 배달하는 아이들 두 명이 뛰어다녔다. 상점에서는 목이 빠져라 미챠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챠와 표트르 일리치가 상점에 도착해서 보니, 입구 곁에는 이미 양탄자를 깐 짐칸이 딸린, 종과 방울까지 단 트로이카가 대기 중이었고 마부 안드레이는 미챠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점에서는 미챠만 나타나면 곧 상자에 못질을 해서 마차에 실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표트르 일리치는 깜짝 놀랐다.
“아니, 자네 어느 틈에 트로이카까지 준비를 시켰나?” 그가 미챠에게 물었다.
“자네한테 달려가는 길에 여기 안드레이를 만났는데, 이 사람더러 곧장 여기 상점으로 오라고 해 놨지."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서둘러야 되지 않을까요?” 갑자기 상점의 문 곁에서 안드레이가 소리쳤다.
“준비됐나? 가세!” 미챠가 요란스럽게 소리쳤다.
안드레이는 지금 막 코냑을 들이켠 탓에 꺽 트림을 한 뒤 마부석으로 뛰어올랐다. 그런데 미챠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전혀 뜻밖에도 갑자기 페냐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그의 앞에서 두 손을 모으더니 그의 발아래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나리,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제발 우리 아씨를 해치지 말아 주세요! 제가 나리한테 모든 걸 이야기해 줬잖아요……! 그분도 해치지 마세요, 그분은 옛날부터 아씨 사람이었는걸요! 지금 아그라페나 알렉산드로브나한테 장가를 들려고 하시는 거예요, 그 때문에 시베리아에서 오신 거고요……. 나리,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남의 인생을 망치지 말아 주세요!”
“쯧쯧, 이거구먼! 뭐, 이제 거기 가서 잔뜩 일을 저지르겠군!” 표트르 일리치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제야 모든 것을 알겠네, 이제는 모를 수가 없군.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사람다워지고 싶다면 지금 당장 권총을 내놓게.” 그가 큰 소리로 미챠에게 소리쳤다. “듣고 있나, 드미트리!”
"권총이라고? 잠깐만 기다려, 이봐, 그건 도중에 웅덩이에다 던져 버릴 거야." 미챠가 대답했다.
"페냐, 일어나, 미챠는 사람을 파멸시키지 않을 거야, 아무리 멍청한 인간이어도 앞으로는 아무도 파멸시키지 않을 거야. 정말이야, 페냐.” 그는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서 페냐에게 소리쳤다. “아까 내가 너를 못살게 굴었지만, 나를 용서하고 불쌍히 여겨줘, 이 비열한 놈을 용서해 다오…….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해도 상관없지만! 어차피 이제는 다 상관없으니까! 자, 출발, 안드레이, 씽씽 달려 보자고!”
안드레이는 출발했다. 방울이 짤랑거리기 시작했다.
“잘 있게, 표트르 일리치! 내 마지막 눈물을 자네에게……!”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거야!’ 표트르 일리치는 그를 지켜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람은 좋은데 바보야…….” 그가 길을 가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기분이 영 찜찜한 상태로 술집에 도착한 표트르 일리치는 곧장 당구 판을 벌였다. 당구를 치다 보니 즐거워졌다. 다음 판도 이긴 뒤에, 갑자기 한 파트너에게 드미트리 카라마조프에게 다시 돈이 생겼다, 3000 정도 된다,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 그루셴카와 함께 한바탕 벌이기 위해 다시 모크로예로 갔다, 하는 말을 시작했다. 이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거의 뜻밖의 호기심을 보였다. 더욱이 다들 웃지도 않았을뿐더러 어쩐지 이상할 정도로 심각하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당구 게임마저 중단될 정도였다.
“3000이라고? 아니, 그자가 어디서 3000을 구했단 말이야?”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호흘라코바 부인 얘기는 다들 미심쩍어했다.
“영감한테 강도 짓을 한 건 아닐까, 정말로?”
“3000이라! 왠지 심상치 않은걸.”
“아버지를 죽인다고 큰 소리로 호언장담했잖아,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 들었다고. 특히, 3000 어쩌고 하는 말을 했단 말이야…….”
표트르 일리치는 이런 말을 들으면서, 갑자기 질문들에 대해 딱딱하게 건성으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미챠의 얼굴과 손이 피범벅이었다는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세 번째 판이 시작되자, 미챠 얘기는 시나브로 시들해졌다. 하지만 세 번째 판이 끝나자 표트르 일리치는 더 이상 게임을 하고 싶지 않아서 큐를 내려놓고 계획했던 저녁도 생략한 채 술집을 나왔다.
기분이 영 찜찜한 상태에서 그는 곧장 자기 집으로 향했는데, 갑자기 페냐가 떠올랐다. ‘에잇, 젠장, 아까 그 하녀한테 물어볼걸.’ 그는 신경질을 내면서 생각했다. ‘그랬으면 전부 알 수 있었을 텐데.’ 갑자기 그 정도로까지 그의 내부에서는 그녀와 얘기를 해 보고서 뭘 알아내고 싶은 아주 초조하고 집요한 욕망이 불타올랐으며, 그리하여 그는 반쯤 길을 가다가 그루셴카가 사는 모로조바의 집 쪽으로 획 방향을 돌렸다.
대문까지 가서 문을 두드렸는데, 밤의 적막 속으로 울려 퍼지는 노크 소리에 그는 다시금 정신이 번쩍 들었고 열이 받쳤다. 게다가 집안사람들이 다들 자는지, 대답도 없었다. ‘이제 어쩔 수 없어, 계속 두드려야겠어, 계속!’ 이렇게 중얼거리는 그는 한 번 문을 두드려 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스스로에게 분기탱천할 만큼 성질이 났지만, 그럴수록 더욱더 세게 문을 두드리게 됐다.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는 날듯이 길을 달리고 있었다. 모크로예까지는 20베르스타 남짓 되었지만, 안드레이의 트로이카가 워낙 빨리 달려서 한 시간 십오 분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공기는 신선하고도 선선했으며 깨끗한 하늘에는 큰 별들이 반짝였다. 하지만 미챠의 영혼은 흐릿했고, 정말 너무도 흐릿했고 또 지금 많은 것이 그의 영혼을 괴롭혔지만, 이 순간만은 이제 마지막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하여 날아가고 있는 만큼, 그의 전 존재가 억누를 수 없는 힘으로 오직 그녀, 즉 그의 황녀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는 단 일 분도 심적 갈등을 느끼지 않았다. 이렇게 질투심이 강한 자가 이 새로운 사람, 땅 밑에서 불쑥 솟은 새로운 경쟁자인 이 '장교'에게 손톱만큼의 질투도 느끼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내 말을 곧이듣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실 아직 그를 본 적도 없긴 했지만.
'이건 확고부동한 사실이다, 이건 그녀와 그의 권리니까. 이건 그녀가 오 년 동안 잊지 못한 그녀의 첫사랑이니까. 그렇다면 그녀는 이 오 년간 그를 사랑해 온 것인데, 나, 나란 놈은 도대체 왜 여기에 끼어들었을까? 여기서 나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물러서라, 미챠, 길을 내주어라! 정말이지 난 지금 뭘 하는 건가? 어차피 이제는 장교가 아니더라도 모든 것이 다 끝 장나 버렸건만, 그가 아예 나타나지 않았을지라도 어쨌거나 끝장나 버린 것을…….'
바로 이런 말로 그는 자신의 느낌을 대략 서술할 수 있었을 것인데, 그나마도 무슨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상태였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때 이미 판단 정지 상태였다. 결단을 내렸음에도, 그의 영혼은 혼란스러웠다, 정말이지 이미 자기 손으로 펜을 들고 종이 위에 '스스로를 응징하노라, 내 일평생을 벌하노라!'라는 선고문을 쓰지 않았던가. 그렇게 준비된 종이는 여기, 그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지 않은가.
이렇게 달린 지 이미 거의 한 시간이 다 되었다. 미챠는 말이 없었고, 안드레이는 원래 수다스러운 농군이었지만 말을 꺼내기가 두려운 양 역시나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열심히, 자신의 '늙다리 말들', 말라빠지긴 했지만 쏜살같이 달리는 밤색 말들 이 이끄는 트로이카를 몰아 댈 뿐이었다. 미챠가 갑자기 무서운 불안을 느끼면서 소리쳤다. “안드레이! 자고 있으면 어떡하지?"
"어쩌면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안드레이가 잠시 말이 없다가 이런 판단을 내놓았다.
"아까 치모페이 말이 플라스투노프 여관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는 걸 보면…….”
"치모페이 말로는 하나같이 양반들이랍니다. 그러니까 치모페이 말만 들어 봐서는 이곳 양반이 둘, 또 외지에서 온 양반이 둘이고, 그러고도 누군가가 더 있는데, 카드놀이를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모크로예입니다!" 안드레이가 채찍으로 앞을 가리키면서 소리쳤다.
밤의 창백한 암흑 사이로 갑자기 광활한 공간에 흩어져 있는, 견고한 건물들이 거뭇거뭇 보이기 시작했다. 모크로예 마을에는 2000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지만 이 시각에는 마을 전체가 이미 잠들어서 암흑 가운데 오직 몇 군데서만 드문드문 등불이 깜박이고 있을 뿐이었다.
"몰아라, 몰아, 안드레이, 내가 간다!" 미챠가 열병이라도 앓는 양 소리를 질렀다.
"자지 않고 있습니다!" 안드레이는 플라스투노프 여관을 가리키면서 다시 말했다.
"그래, 자지 않고 있어!" 미챠가 기쁨에 차서 말을 받았다.
"쩌렁쩌렁 소리를 울려라, 안드레이, 방울 소리를 내며 몰아라, 온 동네가 떠나갈세라 요란스럽게 들어가는 거야. 누가 왔는지를 다들 알 수 있도록! 내가 간다! 이 몸이 납신다!" 미챠가 미친 듯이 소리쳤다.
미챠는 마차에서 뛰어내렸고, 바로 그때, 진짜로 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여관 주인이 도대체 누가 이렇게 요란하게 마차를 몰고 왔는지 궁 금해서 현관 층계참에서 내려다보았다.
"트리폰 보리스이치, 자넨가?"
주인은 몸을 구부려 자세히 살펴보더니, 부리나케 현관에서 뛰어내려 기쁜 표정으로 손님에게로 달려들었다.
"나리, 드미트리 표도르이치! 나리를 다시 뵙게 되다니요?"
트리폰 보리스이치라는 사람은 체격이 탄탄하고 건장한 중키의 농군으로서 다소 간 살이 찐 얼굴에 엄격하고 호락호락하지 않아 보였지만, 또한 특히 모크로예 농군들에게는 정말로 그랬지만, 이득이 될 거라는 냄새만 맡으면 재빨리 그야말로 알랑 거리는 표정으로 바꿀 줄 아는 재능이 있었다. 그는 홀아비였고 네 명의 장성한 딸들이 있었다.
이 미 수천을 손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트리폰 보리스이치는 방탕을 일삼는 투숙객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걸 아주 좋아하는 데다가, 아직 한 달도 안 된 지난번에 드미트 리 표도로비치가 그루카와 한판을 벌이는 동안 딱 하루 만에 그에게서 300까지는 아니더라도 200루블 남짓한 돈을 우려먹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챠가 자기 여관의 현관 층계참으로 마차를 몰고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다시금 먹이가 걸려들었다는 냄새를 맡고서 지금 그를 반갑고도 요란스럽게 맞이한 것이다.
"우선 가장 중요한 건 말이지, 아씨는 어디 있나?"
"아그라페나 알렉산드로브나 말씀입니까?" 주인은 예리한 시선으로 미챠의 얼굴을 살펴보곤 금방 알아챘다. "예, 그분도…… 여기와 계십니다……."
"누구, 누구와 함께?
"외지에서 오신 손님들인데…… 한 분은 관리인데, 말하는 걸 보면 폴란드 사람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분이 아씨를 위해 이쪽에서 말을 보내 드렸지요. 그분과 함께 있는 다른 분은 동료인지 그냥 동행인지 통 모르겠지만, 문관 복장을 하고 있던데요……."
"그럼, 다른 자들은?"
"우리 도시에서 온 분들이 둘인데…… 두 분 다 체르니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냥 묵게 된 겁니다. 한 분은 젊고, 미우소프 씨의 친척이 분명한데, 그만 이름을 잊어버렸군요……. 다른 한 분은 지주 막시모프라고 나리도 아시는 분인데, 기도를 드리러 저기 나리 동네의 수도원에 갔다가 미우소프의 이 젊은 친척분과 함께 오는 길이라고 하시던데요……."
"잠깐만, 트리폰 보리스이치, 이제 가장 중요한 건데, 아씨는, 아씨는 어떤가? 즐거워하던가? 웃던가?"
"아니요, 별로 웃는 것 같지 않던걸요……. 숫제 아주 지루해하면서 젊은이의 머리카락을 빗겨 주더군요."
"천만에요, 나리, 그 사람이 아니라 이 미우소프의 조카, 이 젊은이 말인데…… 이름을 그만 잊었군요."
"칼가노프 아닌가?"
"맞아요, 칼가노프."
"이보게 잠깐만, 내 직접 결정하겠네. 이제 가장 중요한 걸 얘기해 주게. 집시들은 없나?"
"요즘은 집시들 숨소리도 못 들었습니다, 당국에서 다 내쫓아서 지금 여기 있는 자들은 유대인들로, 탬버린을 치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데, 로쥐제스트벤스카야에 있으니까 지금이라도 사람을 보내 불러올 수 있습니다."
"처자들도 그때처럼 불러 모을 수 있겠지, 합창 값으론 200루블을 주겠네!"
"그만한 돈이라면 마을 전체를 나리 앞에 불러다 놓을 수 있겠는걸요."
"트리폰 보리스이치, 한 시간 뒤면 술이며 안주며 피로그며 사탕이 올 거야. 모든 것을 당장 저기 위층으로 올려 보내게. 안드레이가 갖고 있는 이 상자도 지금 당장 저기 위층으로 갖고 올라가서 활짝 열도록 하고 샴페인도 얼른 내오도록……. 그리고 무엇보다도 처자들, 처자들을 꼭 데려와, 마리야는 꼭 빼먹지 말고……."
그는 마차 쪽으로 몸을 돌려 좌석 밑에서 권총 상자를 꺼냈다.
"안드레이, 삯을 받아 가야지! 자, 트로이카 삯은 15루블이고, 여기 50루블은 보드카나 사 마시게…… 일을 성의껏 처리해 주고 나를 사랑해 준 대가로……. 카라마조프 나리를 기억해 주게!"
"이제, 트리폰 보리스이치, 우선은 저들 모르게 저들이 모두 함께 있는 걸 슬쩍 봐야겠네."
트리폰 보리스이치는 미챠를 조심스럽게 현관으로 데려간 뒤, 그 자신은 손님들이 있는 방과 이웃해 있는 첫 번째 커다란 방으로 들어가 촛불을 꺼내 왔다. 그러고는 살그머니 미챠를 안으로 데려간 다음 캄캄한 구석 한쪽에 세웠는데, 거기라면 눈에 띄지도 않으면서 그들을 자유분방하게 관찰할 수 있을 법했다.
그녀는 탁자 앞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고 그녀 옆 소파에는 아직 몹시 젊고 잘생긴 칼가노프가 있었다. 그루셴카는 그의 손을 잡고서 웃고 있는 것 같았지만, 상대방은 그녀 쪽은 보지도 않고 탁자 너머로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막시모프에게 신경질이 난 듯 큰 소리로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막시모프는 뭐가 우스운지 열심히 웃고 있었다. 소파에는 그가 앉아 있었고, 소파 곁 의자에는 누군가 낯선,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는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단 일 분도 더 서 있을 수가 없어서, 상자를 장롱 위에 곧장 올려놓고 몸이 싸늘해지고 숨이 잦아들 것 같은 상태에서, 노닥거리고 있는 푸른 방의 사람들 쪽으로 향했다.
"어머나!" 그를 제일 먼저 발견한 그루셴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째지는 듯한 소리를 질렀다.
미챠는 자신의 예의 그 큰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그리고 빠르게 식탁 바로 곁으로 다가갔다. "여러분." 하고서 그는 거의 고함을 치듯 큰 소리로 말을 꺼냈지만 말을 할 때마다 계속 더듬거렸다. "저는…….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저도 여행 중입니다. 아침까지만 있겠습니다. 여러분, 길 떠나는 여행객을 위해…… 그러니까 아침까지 함께 있어도 되겠습니까?"
이 말을 끝냈을 때 그는 파이프 담배를 들고 소파에 앉아 있는 뚱뚱한 사람 쪽을 보고 있었다. 상대방은 파이프를 근엄하게 입에서 떼 내더니 엄숙하게 말했다.
"파네,* 여기는 우리가 따로 빌린 방입니다. 다른 방들도 있을 텐데요."
* 폴란드어로서, 판(sir), 파니(lady), 파노베(gentlemen).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아니십니까" 칼가노프가 갑자기 한마디 했다. "여기 앉으시지요, 잘 지내셨습니까!"
"안녕하시오, 정말로 친절하고…… 훌륭한 사람이군요! 나는 언제나 당신을 존경해 왔소……."
미챠는 기쁨에 넘쳐 얼른 이렇게 대꾸하고는 그 즉시 탁자 너머에 있는 그에게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아이고, 힘도 좋아라! 너무 세게 쥐어서 손가락 부러지겠는걸요." 칼가노프가 웃었다.
"저 사람은 악수를 할 땐 늘 그렇게 세게 쥐어요, 늘 그렇다니까요!" 그루셴카는 즐겁게 자기 생각을 말하면서도 여전히 겁먹은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미챠의 표정을 보고서 갑자기 난동을 부리지는 않겠다는 확신은 들었지만 미칠 것 같은 호기심이 치밀어 여전히 불안한 마음으로 그를 살펴보고 있었던 것이다.
"안녕하십니까요." 지주 막시모프도 달착지근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 미차는 그에게로도 달려들었다.
"안녕하십니까, 당신도 여기 있군요, 당신도 여기 있다니 정말 기쁩니다! 여러분, 여러분, 내가 이렇게 달려온 것…… 그러니까 나는 나의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을 이 방에서 보내고 싶었습니다, 바로 이 방에서…… 내가 나의 황녀를…… 숭배했던 바로 이 방에서……! 미안합니다, 파네!" 그는 미친 듯 소리를 질렀다.
하고 싶은 말은 많고도 많았지만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은 희한한 절규뿐이었다. 폴란드 신사는 꼼짝도 않고 그와 그의 지폐 다발을 바라보다가 그루셴카를 바라보자 의혹에 젖는 기색이 역력했다.
"당신이 말하는 걸 보면 웃겨 죽겠어요. 앉아, 미챠, 그런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야? 제발 겁은 주지 마. 겁을 주진 않을 테지, 안 그럴 테지? 그렇게만 안 한다면, 당신이 와서 나도 너무 기뻐……."
"내가, 내가 겁을 준다고?" 두 팔을 높이 쳐들면서 갑자기 미챠가 소리쳤다. 그러면서 갑자기 의자에 몸을 던지더니 머리를 반대편 벽 쪽으로 돌리고 엉엉 눈물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이렇다니까, 그래 이렇다니까, 누가 당신 아니랄까 봐!" 그루셴카가 소리를 질렀다.
"이 사람은 우리 집에 올 때도 이랬어요 - 갑자기 뭔 말을 하긴 하는데 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니까요."
"당신이 와서 나는 정말로 기쁘다고, 미챠, 듣고 있어? 나는 이 사람이 우리와 자리를 같이했으면 좋겠어요. 만약 이 사람이 떠나면 나도 떠나겠어요, 정말로!" 그녀는 갑자기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덧붙였다.
"나의 황녀가 명령하는 것, 그것은 법칙이로다!" 폴란드 신사가 아주 정중하게 그루셴카의 손에 입을 맞추면서 말했다. "우리 모임이 끝날 때까지 계시지요." 그는 미챠를 향해 상냥하게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한판 벌이러 온 거지, 돈은 호주머니에 감춰, 어디서 그렇게 많은 돈을 손에 넣은 거야?"
미챠는 지금까지 줄곧 손으로 움켜쥐고 있던, 모든 사람들, 특히 폴란드 신사들이 눈여겨보고 있던 지폐들을 당혹스러워하면서 재빨리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는 얼굴이 발개졌다. 바로 그 순간, 주인이 병마개를 딴 샴페인과 컵을 쟁반에 담아 가져왔다. 칼가노프가 그에게서 병을 빼앗아 그를 대신하여 술을 따랐다.
미챠는 또 조금씩 두 명의 폴란드 신사들도 살펴보았는데, 아직은 이들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파의 폴란드 신사는 예의 그 태도, 폴란드식 악센트 - 무엇 보다도 파이프 담배 덕분에 그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미 거의 마흔은 된 폴란드 신사의 살이 다소 처진 얼굴, 아주 작은 코, 그 밑으로 보이는 극히 가늘고 뾰족하고 뻔뻔스러워 보이는 두 가닥의 염색된 콧수염, 심지어 너무도 볼썽사납게 관자놀이 앞으로 빗어 올린 시베리아제의 그야말로 후줄근한 가발도 미챠에게 딱히 충격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벽 옆에 앉아 있는 폴란드 신사는 소파에 앉아 있는 폴란드 신사보다 더 젊었음에도 좌중을 뻔뻔스럽고 도전적인 태도로 바라보면서 말없이 경멸감을 갖고 좌중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 키 큰 폴란드 신사가 필경 소파에 앉아 있는 신사의 친구이자 앞잡이, 그러니까 무슨 경호원쯤 될 테고, 따라서 파이프를 든 키 작은 신사가 물론 키 큰 신사를 지휘하는 사이일 거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렇든 저렇든 미챠는 논쟁의 여지도 없이 만사가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 경쟁심 따위는 작은 강아지의 마음속에서 완전히 잠잠해져 버렸다. 그루셴카의 태도에서도, 그녀가 몇 마디 내뱉을 때의 수수께끼 같은 어조에서도 그는 여전히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온 마음으로 전율하며 이해한 것은 오직, 그녀가 자기에게 상냥하게 대해 주고 자기를 '용서'하여 그 곁에 앉혔다는 것뿐이었다.
지주 막시모프 이야기
그는 그녀가 술잔을 홀짝거리는 것을 보고 너무 황홀해서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좌중의 침묵에 갑자기 충 격을 받았는지, 뭔가 기대하는 듯한 시선으로 모든 사람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여기 이분이 줄곧 거짓말을 늘어놔서 우리는 줄곧 웃고 있었답니다." 갑자기 칼가노프가 꼭 미챠의 생각을 읽은 듯 막시모프를 가리키며 말을 시작했다.
미챠는 저돌적으로 칼가노프를 응시하다가, 그다음엔 곧 막시모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짓말이라니요?" 그는 그 즉시 뭐가 그리 기쁜지 예의 그 짧은 나무토막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하- 하!"
"예. 생각해 보십시오, 이분은 우리 기병대 전체가 20년대에 폴란드 여자들과 결혼을 했다는 식의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건 터무니없는 헛소리죠, 안 그렇습니까?"
"폴란드 여자라고요?" 미챠가 또다시 말을 받긴 했지만, 이젠 그야말로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벌써 나흘째 이분을 모시고 다니고 있습니다. 기억하시겠죠, 당신의 동생분이 그때 이분을 마차에서 걷어차 서 나가떨어지게 한 뒤로 말입니다. 그때의 일 덕분에 나는 이분에게 많은 관심을 갖게 되어 시골로 데려갔는데, 지금 보시다시피 입만 열면 다 거짓말이니, 이분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부끄럽군요. 해서, 다시 이분을 데리고 가는 중입니다……."
"판은 폴란드 파니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파이프를 문 폴란드 신사가 막시모프에게 한마디 했다. 그는 러시아어를 최소한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잘했다.
"나 자신이 폴란드 파니와 결혼했던 몸이오." 이런 대답을 내놓곤 막시모프가 킥킥거렸다.
"아니, 그러면 기병대에서 근무했단 말입니까? 진짜로 기병 장교였단 말인가요?" 칼가노프가 끼어들었다.
"그게 아니라 저곳의 저 폴란드 파니들은…… 예쁘장한 데다가……. 우리네 창기병과 마주르카를 추는 모양새가 또 일품이고…… 마주르카가 끝나기가 무섭게 고양이처럼 냉큼 창기병의 무릎 위로 뛰어올라 앉는데…… 그런데 그 폴란드 파니들의 아비, 어미도 뻔히 보면서 다 허락하는 거죠…… 그러면 창기병은 이튿날 그 집을 찾아가 청혼을 하는 거죠…… 바로 이 말이죠, 히 - 히!" 말을 끝맺고서 막시모프는 히히거렸다.
"막시모프는 폴란드에 가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폴란드 운운할 수 있는 거죠? 설마 폴란드에서 결혼을 한 건 아니겠죠, 그렇죠?" 칼가노프는 다시 열을 올렸다.
"예, 결혼은 스몰렌스크 현에서 했습니다. 다만, 이 일이 있기 전에 창기병이 그녀, 그러니까 미래에 내 아내 될 사람을 그 어머니, 이모, 또 장성한 아들을 동반한 어느 여자 친척 한 명과 함께 데리고 왔지요, 바로 폴란드에서 말이죠…… 그러곤 나한테 양보해 준 거요. 그 창기병은 우리네 중위였는데 아주 훌륭한 젊은이였죠. 처음에는 그가 결혼하고 싶어 했지만 그러지 않았는데, 왜냐면 그녀가 절름발이였거든요……."
"그럼, 당신은 절름발이 여자와 결혼한 겁니까?" 칼가노프가 소리쳤다.
"절름발이였지요. 그건 그때 두 사람이 모두 나한테 슬쩍 속임수를 써서 숨겼기 때문이랍니다. 그녀는 늘 폴 짝폴짝 뛰어다녔는데 나는 즐거워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지 뭡니까……."
"당신한테 시집가는 게 기뻐서라고 말이죠?" 칼가노프가 어쩐지 어린아이와 같이 낭랑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맞아요, 기뻐서 그러는 줄 알았죠. 그다음, 결혼을 했을 때 식이 끝난 바로 그날 밤, 나에게 고백을 하면서 제발 용서해 달라고 호소하더군요, 언젠가 어린 시절에 웅덩이를 뛰어 건너다가 다리를 다쳤다나요, 히 - 히!"
칼가노프는 이 말이 너무 웃겨 그야말로 어린아이처럼 자지러지며 거의 소파로 쓰러지다시피 했다. 그루셴카도 웃음보를 터뜨렸다. 미챠는 행복의 최정상에 올라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금 이 사람 말은 사실입니다, 이번만은 거짓말은 아니라고요!" 칼가노프는 미챠 쪽을 돌아보며 이렇게 소리쳤다. "그러니까 그는 결혼을 두 번 했는데 지금 말한 건 첫 아내이고, 두 번째 아내는 도망을 치긴 했지만 지금까지 살아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까?"
"정말입니까?" 미챠가 얼굴에 예사롭지 않을 만큼 놀라움을 드러내면서 막시모프 쪽으로 재빨리 몸을 돌렸다.
"예, 도망쳤지요,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답니다." 막시모프가 얌전하게 시인했다. "한 므시외와 함께 말이죠. 중요한 건 그녀가 내 마을 하나를 통째로 애초부터 자기 명의로 돌려놨다는 겁니다. 당신은 교육을 받았으니까 제 밥벌이는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거였죠. 한 번은 어느 점잖은 대주교님이 나한테 이런 말을 해 주더군요. 한 마누라는 발을 절어서 탈이었고, 다른 마누라는 발이 지나치게 가벼워서 탈이었군, 히- 히!"
"들어 봐요, 좀 들어 보세요!" 칼가노프는 무척이나 열을 올렸다. "이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면 - 정말로 자주 거짓말을 하긴 하거든요 - 오로지 모두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거랍니다. 이걸 두고 비열하다고 할 순 없잖습니까, 비열하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나는 이 사람이 좋아질 때가 더러 있어요. 이 사람은 아주 비열하지만, 그래도 자연스럽게 비열하죠, 예?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른 자는 뭐든 이익을 노리고 비열한 짓을 하지만 이 사람은 그냥 천성이 그렇거든요…….
"에이, 그만들 해요, 죄다 지저분한 얘기분이야, 더 듣고 싶지도 않아요, 무슨 즐거운 이야기인 줄 알았네." 그루셴카가 갑자기 말을 가로막았다. 미챠는 흠칫 놀라더니 곧장 웃음을 멈추었다. 키 큰 폴란드 신사는 영 지루해 죽겠다는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진 채 방을 이 구석 저 구석으로 거닐기 시작했다.
"어라, 방을 거닐기 시작했군!" 그루셴카가 경멸스럽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미챠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한 데다가, 소파의 폴란드 신사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자기를 쳐다보는 걸 알아챘던 것이다.
"판." 하고 미챠가 소리쳤다. "마십시다, 파네! 다른 판들도 함께 마시죠, 파노베!" 그는 순식간에 잔 세 개를 갖고 와서 샴페인을 따랐다.
"파노베, 여러분의 폴란드를 위하여 마시겠습니다, 폴란드 지역을 위하여!" 미챠가 소리쳤다.
"바르드 미 토 밀로, 파네, 브이피.(나로서도 참 유쾌한 일이올시다, 파네, 마십시다.)"
소파의 폴란드 신사가 근엄하고도 우호적으로 말하면서 자신의 잔을 집었다.
"이제 러시아를 위하여, 파노베, 형제처럼 지냅시다!"
"우리한테도 술을 따라 줘." 그루셴카가 말했다. "러시아를 위해서라면 나도 마시고 싶어."
"나도요." 칼가노프가 말했다.
"나도 마셨으면 싶은데……. 쭈그렁바가지 할머니를 위해서라면." 막시모프가 히히거렸다.
"그럼 다 함께, 함께! 주인장, 술 더 가져오게!" 주인은 미챠가 가져온 술 중 남아 있던 세 병을 전부 내왔다.
"러시아를 위하여, 만세!" 그는 다시 건배를 외쳤다. 폴란드 신사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마셨고, 그루셴카도 단숨에 잔을 싹 비웠다. 하지만 폴란드 신사들은 잔에 손도 대지 않았다.
"1772년 이전까지의 러시아를 위해서!" 판 브루블레프스키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토 바르드조 펜크네!(그거 정말 좋군)" 다른 폴란드 신사가 소리쳤고, 두 사람은 단숨에 잔을 비웠다.
"바보군요, 파노베!" 미챠의 입에서 갑자기 이런 소리가 튀어나왔다.
"파- 네!" 두 폴란드 신사는 수탉처럼 미챠를 쏘아보면서 위협적으로 소리쳤다.
"입 다물어요! 싸우지 말라고요! 싸움 따윈 안 돼요!" 그루셴카가 명령조로 소리치면서 한쪽 발로 마룻바닥을 쾅 쳤다. 그녀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고 눈은 번득였다.
방금 들이 술이 오르는 거였다. 미챠는 소스라치게 놀라 간이 콩알만 해졌다.
"파노베, 잘못했소! 내 잘못이오, 이젠 안 그러겠소. 판 브루블레프스키, 안 그러겠다니까요……!"
"당신이야말로 좀 가만히 앉아 있어, 정말 바보 천치라니까!" 그루셴카가 성질을 내면서 톡 쏘아붙였다.
다들 자리에 앉았고 다들 입을 다물었고 다들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여러분, 다 내 잘못입니다!" 미챠가 그루셴카가 뭐라고 외쳤는지 통 감도 못 잡고 서 다시 말을 시작했다. "자, 우리는 왜 이렇게 멍하니 앉아 있는 겁니까? 뭘 해야 좋을지…… 다시 즐거워지려면 말이죠?"
"아까처럼 은행 놀이라도 할까나……." 갑자기 막시모프가 히히거렸다.
"은행 놀이라고요? 훌륭합니다!" 미챠가 말을 받았다. "다만 파노베들이……"
"푸지노, 파네!" 소파의 폴란드 신사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대꾸했다.
"푸지노? 푸지노가 무슨 말이에요?" 그루셴카가 물었다.
"늦었다는 뜻입니다, 파니, 늦었어요, 늦은 시각이라고요." 소파의 폴란드 신사가 설명했다.
"이 사람들은 늘 늦었고 그래서 늘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식이라니까요!" 그루셴카는 신경질을 내면서 거의 째질 듯이 소리를 질러 댔다. 자기들이 지루하게 앉아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까지도 지루해야 된다는 식이죠. 당신이 오기 전에도, 미챠, 이 작자들은 줄곧 이렇게 입을 다문 채 뾰로통해 있었다니까……."
"나의 여신이여!" 소파의 폴란드 신사가 소리쳤다. "초 무비쉬, 토 세니 스타네.(말만 하면 그리하겠소.) 비드 네라스켄, 이 에스템 스무트니. (당신이 상냥하게 굴지 않으니 까, 나도 우울한 거요.) 에스템 고투프, 파네.(형씨, 시작하시죠.)" 그가 미챠를 향하며 말을 끝맺었다.
"시작합시다, 파네!" 미챠는 호주머니에서 지폐 뭉치를 꺼내 100루블짜리 두 장을 탁자 위에 내놓았다.
"이봐, 판, 내 당신한테 많이 잃어 주도록 하지. 카드를 쥐고, 은행을 까시오!"
"카드는 주인장한테 갖다 달라고 하시죠, 파네." 작은 폴란드 신사가 심각하고 집요하게 말했다.
"토 나이레프쉬 스포수브.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군)" 판 브루블레프스키가 장단을 맞 추었다.
"주인장이라고요? 좋소, 알겠어, 파노베! 이봐, 카드를 내오게!" 미챠가 주인장에게 명령했다.
폴란드 신사들은 이미 자리를 잡고서 카드 포장을 뜯었다. 바라보는 눈빛이 훨씬 더 정겨워지다 못해 거의 상냥하기까지 했다. 소파의 폴란드 신사는 어느새 새 파이프를 피우면서 카드 패를 돌릴 준비를 했다. 그의 얼굴에는 심지어 어떤 웅장함마저 감돌고 있었다.
"각자 자기 자리로, 파노베!" 판 브루블레프스키가 선언했다.
"아니요, 나는 더 이상 하지 않겠어요." 칼가노프가 대꾸했다. "아까 저들에게 50루블을 잃었어요."
"그건 선생이 운이 없어서 그런 거지, 이번에는 운이 트일지도 몰라요." 폴란드 신사가 한마디 했다.
"나는 1루블을 한테, 하트 퀸, 예쁘장한 여왕님한테 걸죠, 히 - 히!" 막시모프가 자신의 퀸을 뽑아 탁자 쪽으로 바싹 붙더니 재빨리 탁자 밑에서 성호를 그었다. 미챠와 1루블을 건 쪽이 이겼다.
"나는 이번에도 1루블을 걸겠어요, 생플로, 살짝살짝 나가는 생플 스타일이라서." 막시모프는 1루블을 번 것이 기쁘고 행복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이렇게 중얼거렸다.
"죽었군!" 미챠가 소리쳤다. 7에 두 배를 건다!" 두 배 건 것도 죽고 말았다.
"두 배, 두 배."라며 미챠는 무엇에다 두 배를 걸든 죄다 죽어 갔다. 하지만 1루블을 건 쪽은 계속 이겼다.
"두 배!” 미챠가 격분해서 소리쳤다.
"200을 잃었군요, 파네. 200을 더 걸 테요?" 소파의 폴란드 신사가 물었다.
"뭐라고, 200을 잃었다고? 그럼, 200 더! 200을 전부 두 배로!" 그러고서 미챠는 호주머니에서 200루블을 꺼내 에게 던지려고 했는데, 바로 그때 갑자기 칼가노프 가 퀸을 한 손으로 덮었다.
"됐어요!" 그가 예의 그 낭랑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니, 왜 그러시오?" 미챠가 그를 응시했다.
"됐어요, 정말 딱 질색입니다! 그냥요. 더 이상은 카드를 하는 꼴을 지켜볼 수가 없군요!"
"그만둬, 미챠, 이 사람 말이 맞을지도 몰라." 그루셴카의 목소리에서는 이상한 음조가 배어 나왔다.
두 폴란드 신사는 갑자기 정말로 기분을 잡쳤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쟈르투예쉬(농담이시겠지), 파네?" 작은 폴란드 신사가 엄격하게 칼가노프를 훑어 보면서 말했다.
"야크 센 포바쟈쉬 토 로비치(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파네!" 판 브루블레프스키도 소리쳤다.
"여기가 어디라고, 정말 어디라고 감히 소리를 지르는 거야!" 그루셴카가 소리쳤다.
미챠의 제안
미챠가 갑자기 그 곁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탁 쳤다. "폴란드 양반, 잠깐 할 말이 좀 있소."
"체고 흐체쉬(무슨 일이요), 파네?"
"저 방으로, 저기 안쪽 방으로 갑시다, 잠깐 할 말이 있어서 그런데, 점잖은 말로, 아주 점잖은 말로 끝내 주겠소, 당신도 만족하게 될 거요." 작은 폴란드 신사는 깜짝 놀란 나머지, 흠칫흠칫 겁을 내며 미챠를 쳐다보았다. 그러면서도 즉시 동의를 하긴 했지만 판 브루블레프스키도 꼭 그와 함께 가야 된다는 조건을 붙였다.
"어디들 가시는 거예요?" 그루셴카가 불안하게 물었다.
"우리는 금방 돌아올 거야." 미챠가 대답했다. 그의 얼굴에는 어쩐지 대범하고 뜻밖의 원기 왕성한 기운이 감돌았다. 한 시간쯤 전 이 방으로 들어설 때의 얼굴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던 것이다. 그는 폴란드 신사들을 오른쪽 방 침실로 데려갔는데, 거기에는 궤짝들, 짐짝들이 널려 있었다.
폴란드 신사와 미챠는 바로 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고, 거대한 판 브루블레프스키는 뒷짐을 진 채 그들 곁에 비스듬히 앉았다. 폴란드 신사들의 시선에는 엄격함이 감돌았지만, 호기심도 역력히 보였다.
"다름 아니라, 파네, 긴 얘기는 하지 않겠소. 자, 여기 돈이 있소." 그는 지폐를 꺼냈다. 3000인데, 이걸 가지고 어디로든 떠나 줬으면 좋겠어." 폴란드 신사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미챠를 바라보았다.
"3000이라고요, 파네?" 그는 브루블레프스키와 눈짓을 주고받았다.
"3000, 파노베, 3000이오! 이봐요, 파노베, 보아하니 당신들은 똑똑한 사람들인 것 같소. 이 3000을 갖고 어디로든 썩 꺼져 주면 좋겠다, 이 말씀이오, 듣고 있나? 그것도 바로 지금 당장, 그리고 한번 가면 영원히 못 돌아오는 거야, 알겠나, 파네, 바로 이 문으로 영원히 나가 달라는 거야. 어때?" 미챠는 확신에 차서 대답을 기다렸다. 그로선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뭔가 굉장히 단호한 것이 폴란드 신사의 얼굴에서 번득였다.
"그럼, 루블은, 파네?"
"루블은 이렇게 해 주지, 파네. 500루블은 마차인데 지금 당장 선불로 주지, 2300은 내일 시내로 가서 주도록 하지 - 명예를 걸고 맹세하건대 땅을 파서라도 마련해 주지!” 미챠가 소리쳤다.
폴란드인들은 다시 눈짓을 주고받았다. 폴란드 신사의 얼굴은 나쁜 쪽으로 바뀌었 다.
"700, 그래 700을 준다, 500이 아니라, 지금, 지금 당장 손에 쥐여 준다!" 미챠가 뭔가 좋지 않은 느낌이 들어 이렇게 금액을 올렸다. "왜 그러나, 판? 못 믿겠다는 건가? 어쨌거나 3000을 즉시 줄 순 없는 노릇이야. 꼭 주긴 할 테니까, 당신이 내일 그 루카셴카 집으로 오면 그때……. 지금은 3000을 전부 갖고 있지는 않아, 나의 시내 집에 있단 말이다." 미치는 말 한마디를 할 때마다 겁을 집어먹고 의기소침해지면서 중얼거렸다.
"더 할 말은 없소?" 그가 반어적으로 물었다. "프페! 아 프페(나 참 이거 더럽고 아니 꼬워서, 원)" 그러면서 그는 침을 탁 뱉었다. 판 브루블레프스키도 침을 뱉었다.
"지금 침을 뱉는 건, 파네. 그루셴카한테서 더 많은 돈을 우려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테지. 네놈 둘 다 불알을 발라낸 수탉들이다, 정말!" "라며 미챠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에 차서 말했다.
"예스템 도 쥐베고 도트크넨트느임!(아무리 그래도 나를 이렇게까지 모욕하다니!)" 작은 폴란드 신사는 갑자기 홍당무처럼 새빨개지더니 화가 치밀어 미치겠다는 듯 씩씩대며 방에서 나갔다.
그는 그루셴카가 무서웠으니, 폴란드 신사가 곧 동네방네 떠들어 댈 거라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정말로 그랬다. 폴란드 신사는 홀로 들어가더니 연극이라도 하는 양 그루셴카 앞에 섰다.
"파니 아그리피나, 예스템 도 쥐베고 도트크넨트느임!" 그가 이렇게 소리를 질렀지만, 그루셴카는 꼭 자기의 가장 아픈 곳을 찔리기라도 한 듯 갑자기 인내심을 잃어버 렸다.
"러시아어, 러시아어로 말해요, 폴란드 말은 한마디도 하지 말란 말이야!" 그녀가 그에게 소리쳤다.
"전에는 러시아어로 말했잖아, 정말 오 년만에 다 잊어버렸어!" 그녀는 얼굴이 온통 새빨개졌다.
"파니 아그리피나……."
"나는 아그라페나야, 나는 그루셴카라고, 러시아어로 말하지 않으면 듣지 않겠어!"
폴란드 신사는 고노르에 손상을 입어 숨을 몰아쉬더니, 일부러 엉터리 러시아어를 쓰고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파니 아그라페나, 나는 옛일을 다 잊고 용서를 하러 왔소, 오늘날까지 있었던 일은 다 잊자고....."
"용서를 한다고? 지금 나를 용서하러 왔단 소리야?" 그루셴카가 말을 가로막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타크 예스치(그렇다니까요), 파니, 나는 속이 좁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관대한 사람이오. 하지만 당신의 두 명의 정부를 보았을 때 나는 브일렘 즈드지보느이.(놀라고 말았소.) 판 미는 나더러 손 떼라고 하면서 저 안쪽 방에서 3000을 준다더군. 나는 그 판의 낯짝에 침을 뱉어 주었지."
"뭐라고? 저 사람이 당신한테 내 몸값으로 돈을 준다고 했다고?" 그루셴카가 히스테릭하게 외쳤다.
"정말이야, 미챠?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아니, 내가 몸 파는 여자란 말이야?"
"파네, 파네." 하고 미챠가 고함을 질러 댔다. "이 여자는 너무도 순결해서 빛이 날 지경이야, 나는 결코 그녀의 정부였던 적이 없어! 거짓말을 해도 유분수지……."
"당신이 뭔데 이런 작자 앞에서 나를 변호할 생각을 하는 거야."라며 그루셴카가 고함을 질렀다.
"내가 순결했던 건 덕망이 넘쳐 나서도 아니고, 쿠지마가 무서워서도 아니야, 이 작자를 만났을 때 비열한 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해서였어. 아니 그래, 이 작자가 당신한테서 돈을 받았어?"
"받았어, 받으려고 했어! 다만 3000을 한꺼번에 전부 받고 싶어 했는데, 내가 일단 700만 내놓았던 거지."
"그렇다면 알 만하군. 나한테 돈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결혼을 하러 온 거야!"
"파니 아그리피나." 하고 폴란드 신사가 소리쳤다. "나는 날건달이 아니라 기사에 귀족이란 말이오! 내가 온 것은 당신을 부인으로 맞이하기 위해서였는데, 와서 보니 완전히 새로운 파니가 되었군, 예전의 그 여자가 아니라 우파르투 이 베즈 프스트이 두. (변덕스럽고 후안무치한 여자가 다 됐군.)"
"당신이 있던 곳으로 썩 꺼져 버려!" 그루셴카가 미친 듯 흥분하여 소리쳤다.
"바보, 나는 바보였어, 오 년간 스스로를 괴롭혔다니! 아니, 이 사람 때문이 아니라 너무도 분해서 스스로를 괴롭혔던 거야! 이 봐, 그 가발은 도대체 어디서 주문한 거야? 그때 그 사람은 매였지만, 이 작자는 물오리야. 그 사람은 웃으면서 나에게 노래를 불러 주곤 했는데……. 내가 오 년 동안 눈물을 흘리다니, 정말 쪼다에 바보였어, 후안무치한 년이라고!" 그녀는 안락의자에 몸을 던지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순간 갑자기 옆방에서 마침내 다 모인 모크로예의 처녀들의 합창이 울려 퍼졌다. 격정적인 춤곡이었다.
"그야말로 소돔이로군!" 판 브루블레프스키가 으르렁거렸다. "주인장, 이 후안무치한 놈들을 쫓아내게!"
주인은 문을 엿보다가 고함 소리를 듣자 손님들이 싸우고 있다는 낌새를 채고는 즉각 방에 나타났다.
"형씨, 왜 소리를 지르는 거요, 기차 화통이라도 삶아 먹었나?" 그는 왠지 무례하게 굴면서 말했다.
"짐승만도 못한 놈!" 판 브루블레프스키가 호통을 쳤다.
"지금 짐승이라고 했나? 아니, 당신이 지금 갖고 논 카드는 어떤 거였어? 나는 당신에게 카드 패를 갖다 줬는데 당신은 내 것을 숨겼어! 당신은 가짜 카드로 놀았던 거야! 그건 위조지폐나 다를 바가 없거든……."
그러면서 그는 소파 곁으로 다가가 소파의 등받이와 쿠션 사이에서 아직 뜯지 않은 카드 패를 꺼냈다.
"나는 저 작자가 내 카드 패를 틈바구니에 숨겨 놓고 자기 패로 바꾸는 것을 봤어요 - 순 사기꾼 주제에!"
"아이, 창피스러워라, 웬 창피야, 이게!" 그루셴카가 손바닥을 탁 치면서 이렇게 소리쳤고, 정말로 어찌나 창피스러웠는지 얼굴을 붉혔다. "맙소사, 어쩌다 이런, 이런 인간이 됐을까!"
그러자 성질이 치밀어 오른 판 브루블레프스키가 주먹으로 그녀를 위협하면서 소리쳤다.
"갈보년 같으니!" 하지만 그가 미처 다 외치기도 전에, 미챠가 그에게로 달려들더니 두 손으로 그를 거머쥐고 공중으로 들어 올려 금세 그를 지금 막 그들 둘을 데려갔던 오른쪽 방에 내놓았다.
"순 양아치 같은 놈, 그래도 덤벼들긴 하더군, 아마 저기서 나오진 못할걸……!"
"나리" 하고 트리폰 보리스이치가 큰 소리로 말했다. "저놈들한테 잃은 돈을 다시 뺏으세요!"
"내 50루블을 돌려받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갑자기 칼가노프가 대꾸했다.
"나도 내 돈 200을 돌려받고 싶지 않아!" 미챠가 소리쳤다.
"돌려받을 이유가 없어, 저놈들은 그런 낙이라도 있어야 된다니까."
"멋져, 미챠! 잘했어, 미챠!" 그루셴카의 외침 속에는 이가 갈릴 정도의 증오의 기운이 감돌았다.
작은 폴란드 신사는 너무 분해서 얼굴이 불그죽죽해졌지만 걸음을 멈추고서 그루셴카를 향해 갑자기 말했다.
"파니, 예젤리, 흐체시 이시치 자 노유, 이드즈이므이, 예슬리 네 - 브이바이 즈 도로바!(나를 따라오고 싶으면 같이 가고 아니라면 잘 있으시오!)" 자존심이 상한 탓에 너무 화가 나 씩씩대면서도 여전히 근엄한 척 굴며 문을 나갔다. 제법 성깔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파니가 자기를 따라오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으니 말이다 - 그 정도로까지 자기가 참 대단 한 인간인 줄 알았던 것이다.
미챠는 그의 등 뒤에서 문을 쾅 닫았다.
"열쇠로 잠가서 저자들을 가둬 버려요." 칼가노프가 말했다. 하지만 자물쇠는 그들 쪽에서 쩔렁거렸으니, 그들이 알아서 문을 잠근 것이었다.
"멋져!" 그루셴카가 다시금 독기 어린 어조로 소리쳤다.
"정말 멋진 일이야! 저작자들은 저기가 제격이야!"
거의 디오니소스의 향연에 가까운, 온 세상을 뒤흔들 만한 잔치가 시작되었다. 그루셴카가 먼저 자기한테 술을 달라고 소리쳤다. “마시고 싶어, 지난번처럼 완전히 취하도록 마시고 싶어, 기억나지, 미챠, 그때 우리가 여기서 어떻게 서로 사귀게 됐는지 말이야!” 정작 미챠는 미망에 빠진 듯한 상태에서 ‘자신의 행복’을 예감했다. 하지만 그루셴카는 그를 자꾸만 멀리하려고 했다.
옆방에는 합창단이 모여 있었다. 유대인들도 바이올린과 치터를 들고 왔고, 끝으로 목이 빠져라 기다려 온 술 과 식료품을 실은 트로이카도 왔다. 미는 부산을 떨었다. 전혀 상관없는 농군들과 아낙네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들은 이미 자고 있었지만 한 달 전처럼 유례없이 융숭한 대접을 받을 거라는 낌새를 채고는 일어나 온 것이었다. 미챠는 낯익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고 얼굴을 상기하며 술병을 따서 닥치는 대로 아무한테나 술을 따랐다.
뭔가 무질서하고 어이없는 것이 시작되었지만, 미챠는 이제야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신이 나서 점점 더 원기 왕성해져 갔다. 만약 이 순간 그에게 돈을 부탁했다면, 그 즉시 자신의 돈뭉치를 통째로 꺼내서 세 보지도 않고 나누어 주었을 것이다. 분명히 이 때문에 주인장 트리폰 보리스이치는 미챠를 감시하려고 그 옆을 거의 떠나지 않고 주위를 맴돌면서 자기 나름대로 눈에 불을 켜고 미챠의 동태를 관찰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갑자기 그의 손을 꽉 쥐더니 자기 쪽으로 힘껏 가져갔다.
"아까 당신이 어떤 모습으로 들어왔는지 알아, 응? 정말 들어올 때의 그 모습이란……! 어찌나 놀랐는지 간이 콩알만 해졌어. 아니, 어떻게 나를 그 사람한테 양보할 생각을 다 한 거야, 응? 정말 그럴 생각이었던 거야?"
"당신의 행복을 망치고 싶지 않았거든!" 미챠가 행복에 젖어 속삭였다.
"왜 그렇게 인상을 쓰는 거야?" 그녀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환자 한 명을 거기에 그냥 내버려 두고 왔어. 낫는다면, 나을 거라는 확신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내 인생의 십 년을 바칠 텐데!"
"환자라면, 그래, 하느님의 가호가 함께하길. 그런데 당신은 정말로 내일 자살하려고 했던 거야, 에이, 바보 같은 사람,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난 바로 당신같이 무분별한 사람들이 좋아. 안 돼, 일단은 기다려 봐, 내일 내가 당신한테 어쩌면 한마디를 해 줄지도 몰라…… 안 돼, 오늘은 싫어……."
미챠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현관 쪽에 있는 위층 목조 발코니로 나갔다. 신선한 공기를 쐬니 상쾌해졌다. 그는 캄캄한 구석에 혼자 서 있다가 갑자기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갑자기 흩어져 있던 생각들이 결합되고 감정들이 하나로 합쳐지더니 모든 것이 빛을 받은 양 환해졌다. 무섭고도 끔찍한 빛이었다!
'자살을 할 거라면, 바로 지금이 그때가 아니겠는가?' 그의 머릿속에서 이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가서 권총을 갖고 와서, 이 더럽고 캄캄한 어두운 구석에서 끝장을 보는 거다.'
그러고도 거의 일 분간 그는 망설이며 서 있었다. 아까 이곳으로 달렸을 때는 그의 뒤에 치욕이, 자기가 저지르고 자행하고 만 도둑질이 도사리고 있었고 또 피, 그 피마저도……! 하지만 그때는 차라리 더 가분했다, 오, 가뿐하고말고! 정말이지 그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 장난 상태가 아니었던가. 그는 그녀를 잃었고 또 양보했으므로 그녀는 그에게 있어 없는 거나, 사라진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이 그때와 같단 말인가? 이제 최소한 하나의 환영, 하나의 괴물과는 끝장을 보았다. 그녀의 틀림없는 이 '옛 사람', 그 치명적인 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까. 부끄러워하는 그녀의 눈을 보면 지금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다. 정말 이제야말로 오직 살기만 하면 되는데…… 그런데도 살 수 없다, 그럴 수가 없다, 오, 정말 미칠 노릇이다! 주여, 담장 곁에 쓰러져 있는 자를 소생시켜 주시옵소서! 이 무서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시옵소서!
'자 그래, 만약 노인이 살아 있다면, 그때는? 오, 그때는 내 나머지 치욕의 수치를 씻어 버릴 테다, 내 훔친 돈을 갚아 줄 테다, 내 그 돈을 돌려줄 테다, 땅을 파서라도 구하고야 말 테다…… 그러면 치욕의 흔적일랑은 내 마음속을 제외하면 영원토록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안 돼, 아니야, 오, 이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옹졸한 꿈에 불과해! 오, 정말 미칠 노릇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어떤 밝은 희망의 햇살이 암흑에 빠진 그를 비추었다.
그는 벌떡 그 자리를 떠나 다시 그녀가 있는 방으로 - 그의 영원한 황녀에게로 돌진했다! 비록 치욕의 고통 속에서 허덕일지라도, 그녀와의 한 시간, 단 일 분의 사랑이 정녕, 나머지 전 인생을 걸 만한 가치도 없단 말인가?' 이 해괴망측한 질문이 그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아 버렸다. '그녀한테로 가자, 그녀 하나면 된다, 그 얼굴을 보고 그 말을 들으며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모든 것을 잊는 거다, 오늘 밤만이라도, 아니 한 시간, 한 순간만이라도!'
그런데 발코니와 이어진 현관의 입구 바로 앞에서 그는 주인장인 트리폰 보리스이치와 마주쳤다. 미챠의 눈엔 상대방이 왠지 음울하고 수심에 가득 차 있는 듯 보였고, 자기를 찾으러 나온 성싶었다.
"무슨 일인가, 보리스이치, 나를 찾고 있었나?"
"아닙니다요, 나리를 찾다니요." 주인장은 갑자기 당혹스러워하는 듯했다. "제가 뭣 하러 나리를 찾겠습니까요? 그런데 나리는…… 어디에 계셨습니까요?"
"아니, 자네 좀 심심한가? 아니면 화라도 난 건가? 그나저나, 몇 시나 됐나?"
"그럭저럭 3시는 됐을 걸요. 아니, 3시도 넘었겠네요."
"끝내세, 끝내자고."
"천만의 말씀입니다요, 괜찮습니다요. 원하시는 대로 얼마든지……."
미챠는 '이 사람이 왜 이럴까?' 잠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처자들이 춤을 추던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거기에 없었다. 푸른 방에도 역시 없었다. 오직 칼가노프만이 혼자서 소파에서 졸고 있을 따름이었다. 커튼 뒤를 살펴보니 - 그녀는 거기 있었다. 그녀는 구석의 트렁크 위에 앉아 곁에 있는 침대에 두 팔과 고개를 기울인 채, 우는 소리가 들릴까 봐 목소리를 죽이느라 안간힘을 쓰면서 서럽게 울고 있었다.
미챠를 보자 그녀는 자기 곁으로 오라고 손짓을 했고, 그가 다가오자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미챠, 미챠, 난 그 사람을 정말로 사랑했어! 오 년 내내 줄곧, 그 세월 동안 줄곧! 하지만 내가 사랑한 게 정말로 그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나의 원한이었을까? 아니야, 그를 사랑한 거야! 오, 그를! 내가 사랑한 건 그가 아니라 그저 나의 원한이었다고 한 건 정말이지 거짓말이었어! 미챠, 그때 나는 겨우 열일곱 살이었는데, 그때 그는 나한테 너무나 상냥하고 명랑하게 대해 주고 노래를 불러 주곤 했어.
하지만 지금, 맙소사, 이건 그 사람이 아니야, 그 사람일 리가 없어. 얼굴도 완전히 딴판이야, 오는 내내 '어떻게 그를 맞이할까, 무슨 말을 할까, 서로를 어떻게 바라볼까……?'를 생각했어. 그러느라 가슴이 죄어드는 기분이었는데, 바로 이런 나에게 그는 목욕통의 구정물을 퍼부은 격이었어. 말하는 폼이 꼭 무슨 학교 선생 같지 뭐야. 죄다 유식하고 근엄한 말만 하고 나를 맞이하면서도 그렇게 근엄을 떠는 바람에, 나는 완전히 막다른 골목에 부딪친 기분이었어. 차마 무슨 말도 할 수 없었다니까.
처음에는 그가 자기가 데려온 꺽다리 폴란드인이 부끄러워해서 그런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가만히 앉아 그들을 보면서 생각했지. 왜 나는 지금 저 사람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걸까? 아무래도 그건 그의 아내가 그를 다 망쳐 놓았기 때문이야, 그는 그때 나를 버리고 결혼을 했거든…… 그러니까 그 여자가 그를 완전히 바꿔 놓았기 때문이라니까. 미챠, 난 창피해 죽겠어! 아, 정말 창피하고 또 창피해, 미챠, 평생 동안 창피할 거야! 이 오 년은 저주나 받아라, 저주, 저주받아라!"
그러고서 그녀는 다시 눈물을 쏟아 냈지만, 미챠의 손은 놓지 않고 오히려 더 꽉 쥐었다.
"미챠, 있잖아, 당신한테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어. 있잖아, 한 번 말해 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일 것 같아? 아까 매 한 마리가 들어왔을 때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어. '요 바보 천치야, 네가 정말로 사랑하는 건 이 사람이야.'라고 내 마음이 그 즉시 속삭여 주더군. 당신이 들어서자 모든 것이 환해진 거야. 미챠, 당신이 이렇게 있는데 어떻게 나는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걸까, 정말 바보 천치였어! 용서해 주는 거지, 미챠? "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미챠는 어찌나 황홀한 지 벙어리가 되어 갑자기 그녀를 꼭 껴안고는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럼, 내가 그렇게 괴롭혔어도 용서해 주는 거지? 뭐야! 자, 어서 키스를 해 줘, 좀 더 강하게, 그래, 바로 이렇게. 사랑을 할 거면 이렇게 해야지! 이제 당신의 노예가 될 거야, 평생 동안 노예가 되는 거야! 노예가 된다는 건 달콤한 일이라니까……! 키스해 줘! 나를 때리고 나를 괴롭히고 나한테 무슨 짓을 해도 좋아……. 잠깐만! 조금만 기다려 줘, 나중에 하자, 이렇게는 싫어……." 그녀가 갑자기 그를 밀어냈다.
"저리로 가 봐, 미치카, 나도 곧 가서 흠뻑 취하도록 마실 거야, 당장 술에 취해 춤을 출 거야, 정말로!"
그녀는 그에게서 쏙 빠져나와 커튼 너머로 나갔다. 미챠는 술에 취한 양 그녀를 따라 나갔다.
'아무렴 어때,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 한순간을 위해서 온 세상을 바쳐도 좋아.' 그의 머릿속에서 이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루셴카는 정말로 샴페인을 한 잔 더 단숨에 들이켜는 바람에 갑자기 몹시 취해 버렸다. 그녀는 아까 앉았던 그 안락의자에 앉아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의 뺨이 붉게 상기되고 입술은 불타올랐으며, 빛나던 두 눈은 몽롱해진 채 열정적인 시선으로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칼가노프마저도 마음 한구석을 물린 양 놀라서 그녀한테로 다가갔다. "난 지금 술에 취해 버렸어, 정말 이렇게 말야……. 당신은 안 취했어? 그런데 미챠는 왜 술을 안 마시는 거야? 미챠, 나는 마셨는데 당신은 안 마시고……" "나도 취했어! 그것도 심하게 취했어…… 당신 때문에 취한 거지만, 지금은 술에도 취하고 싶군." 그러면서 그는 한 잔을 더 들이켰고 - 그 자신에게도 이상하게 여겨졌지만 똑똑히 기억하건대 지금까지 쭉 멀쩡했는데 오직 이 마지막 한 잔 때문에 취기가 확 돌면서 갑자기 취해 버린 것이었다.
이 순간부터 꼭 미망에 들뜬 양 모든 것이 그의 주위를 빙빙 맴돌기 시작했다. 걷고 웃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말을 걸고 하는 동안, 내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오직 집요하게 타오르는 감정 하나만이 그의 내부에서 시시각각 그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가 훗날 회상한 바에 따르면, '꼭 영혼 속에 뜨거운 석탄 덩어리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자꾸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 곁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녀는 끔찍할 정도로 수다스러워져서 아무나 자기 곁으로 불러들이더니, 갑자기 합창단의 처자 하나를 자기 쪽으로 손짓해서 불렀고 상대방이 다가오자 입을 맞추고 다시 보내기도 하고 이따금씩 한 손으로 그녀에게 성호를 그어 주기도 했다. 금방이라도 그녀는 울음을 터뜨릴 기세였다. 그녀 말마따나 '영감쟁이', 그러니 까 막시모프도 그녀를 아주 즐겁게 해 주었다. 그는 시시각각 달려와 그녀의 손에,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었고, 끝에 가서는 직접 무슨 옛날 노래를 부르며 그것에 맞춰 춤을 하나 더 추었다. 특히, 다음과 같은 후렴구가 나올 때는 더 신나게 춤을 추었다.
새끼 돼지는 꿀꿀, 꿀꿀, 새끼 암소는 음매, 음매, 새끼 오리는 꽥꽥, 꽥꽥 새끼 거위는 꺽꺽, 꺽꺽
암탉은 헛간을 돌아다니며, 꼬꼬댁 꼬꼬댁, 구구, 말을 한다네, 아이, 아이, 말을 한다네!
"저 사람한테 뭘 좀 줘, 미챠." 하고 그루셴카가 말했다. "무슨 선물이라도 줘, 가난한 사람이잖아. 아, 가난한 사람들, 수모를 겪은 사람들……!"
"있잖아, 미챠, 나는 수도원에 갈 거야. 아니, 정말로 언젠가는 갈 거야. 오늘 알료샤가 내게 평생 잊지 못할 말을 해 주었어……. 하지만 오늘만은 춤을 좀 추면 어때. 내일은 수도원에 가더라도 오늘은 우리 춤을 추는 거야. 나는 애처럼 놀고 싶어, 마음씨 좋은 여러분, 뭐 어때요, 하느님도 용서하실 거예요. 내가 만약 하느님이라면, 모든 사람들을 용서할 거야. '나의 사랑스러운 죄인들이여, 이날부터 내 모든 이들을 용서하노라.'라고. 그나저나, 나도 가서 용서를 구해야겠어.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여, 이 어리석은 여자를 용서해 주세요. 정말로요.라고. 나는 짐승이나 다름없어, 정말로 그래. 하지만 기도하고 싶어. 나도 양파 한 뿌리를 적선한 적이 있으니까. 나같이 못 돼먹은 년도 기도를 하고 싶다니까! 미챠, 사람들 이 춤을 추도록 내버려 둬, 방해하지 말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훌륭해, 하나에서 열 까지다. 이 세상은 참 좋은 곳이야. 비록 우리는 고약하지만 세상은 좋은 곳이라고. 추악한 우리들도 다 좋은 사람들이야, 추악하면서도 좋은 사람들이지……. 아니, 여러분, 말해 주세요, 모두에게 묻겠어요, 다들 이리로 다가와요. 내 질문은 말이죠, 이런 거니까 다들 대답해 주세요.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여자일까요? 정말이지 나는 좋은 여자예요, 그것도 아주 좋은 여자……. 정말 그렇다니까요. 그러니까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여자냔 말이에요?"
그루셴카는 갈수록 술이 올라서 혀 꼬인 소리로 이렇게 옹알거리더니, 마침내는 이제 자기도 춤을 추고 싶다고 대놓고 말했다. 그러곤 안락의자에서 일어났는데, 몸도 제대로 못 가누고 비틀거렸다. "미챠, 이젠 나한테 술을 주지 마, 정말 부탁이야, 주지 마……. 술을 마시면 안정이 안 되거든. 모든 것이 빙빙 돌아, 페치카도 빙빙, 모든 것이 빙빙 돈다고. 춤추고 싶다. 다들 내 춤 솜씨를 구경하시라……"
그녀는 호주머니에서 하얀 가제 손수건을 꺼내더니, 춤출 때 흔들려 고 오른손으로 그 끄트머리를 잡았다. 미는 부산을 떨며 시중을 들었고, 처자들은 손짓만 하면 다 같이 춤곡을 부를 준비를 하고 조용히 있었다. 막시모프는 그루셴카가 직접 춤을 추고 싶다고 하자 너무 황홀하여 째질 듯 소리를 질러 댔으며 그녀 앞으로 나가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우리 아씨가 좀 거나하게 마셨지, 우리 예쁜 아씨가 말이야." 이런 목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저분은 술이 너무 과했어." 막시모프가 히히거리면서 처녀들에게 설명했다.
"미챠, 나를 데려가 줘……. 나를 가져가, 미챠." 그루셴카가 힘없이 말했다. 미챠는 그녀에게 달려들어 두 손을 잡고는 이 소중한 포획물과 함께 커튼 뒤로 달려갔다.
미챠는 그루셴카를 침대에 눕히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날 건드리지 마……." 그녀가 애원하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아직은 당신 것이 아니잖아…… 나는 당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건드리지 말아 줘, 이해해 줄 거지…… 저 사람들이 있는 데서는, 저 사람들 옆에서는 안 돼. 그 사람이 여기 있잖아. 여긴 더러워……. 이건 떳떳하게 해야 해…… 앞으로는 떳떳하게…… 우리 둘 다 떳떳한 사람, 착한 사람이 되는 거야, 나를 데려가 줘, 나는 여기가 싫어, 멀리, 멀리 가고 싶어……."
"오 그래, 그래, 반드시!" 미챠가 그녀를 꼭 껴안았다. "당신을 멀리 데려갈 거야, 우리 멀리 떠나자……. 오, 그 피가 어떻게 됐는지 알 수만 있다면, 일 년을 위해 내 평생을 바치겠건만!"
"피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루셴카는 의혹에 차서 되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미챠가 이를 갈았다. 그루샤, 너는 떳떳해지고 싶어 하지만, 나는 도둑놈이야. 카치카에게서 돈을 훔쳤거든……. 치욕, 치욕이야!"
"카치카라면? 그 귀족 아가씨를 말하는 거야? 아니야, 당신은 훔치지 않았어. 그녀한테 돈을 돌려줘, 내 돈을 가져가면 되잖아……. 이제부터 내 것은 모두 다 당신 거야. 우리한테 돈이 무슨 소용이야? 당신과 나는 차라리 어디 가서 땅을 가는 편이 나아. 일을 해야 된다고, 듣고 있어? 그 귀족 아가씨한테 가서 우리 둘 다 몸을 조아리고 용서해 달라고 빈 다음 떠나는 거야. 앞으로는 그 여자를 사랑하지 마. 만약 그렇게 되면, 내가 그 여자를 목 졸라 죽일 거야. 그 여자의 두 눈을 바늘로 찔러 버릴 테야……."
"당신을 사랑해, 당신 하나만을, 시베리아에서도 사랑할 거야……."
"왜 하필 시베리아 얘기가 나오는 거야? 아니, 정 그렇다면 시베리아면 어때, 이러나저러나 매한가지인걸…… 함께 일을 하게 될 테고…… 시베리아에는 눈이 쌓여 있을 테니까……. 나는 눈밭을 따라 달리는 게 좋아…… 방울 소리도 울리게 하고……. 어, 방울 소리가 들린다…… 아니, 어디서 이런 방울 소리가 들리는 걸까? 사람들이 오고 있어…… 이젠 소리가 멎었어." 그녀는 힘없이 눈을 감더니, 순식간에 갑자기 잠이 든 듯했다.
그루셴카가 눈을 떴다.
"어머나, 나 잠들었던 거야? 그래…… 방울 소리가 들렸어……. 자면서 꿈을 꾸었나 봐. 내가 마차를 타고 눈밭을 달리고 있는데, 사랑스러운 사람과, 당신과 함께 가고 있었던 것 같아. 그것도 멀리, 아주 멀리……. 당신에게 키스를 하고 당신 몸에 바싹 붙어 있어, 밤에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달빛이 비치면 나는 꼭 이 지상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아……. 눈을 떠 보니,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는 거야, 얼마나 좋은지 몰라……."
"곁에 있고말고." 미챠가 그녀의 원피스에, 가슴에, 손에 입을 맞추면서 중얼거렸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바로 앞을 보고 있긴 하지만 그가 아니라, 그의 얼굴이 아니라, 그의 머리 너머를 꼼짝도 않고 이상할 정도로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갑자기 놀라움이, 심지어 경악이 배어 나왔다.
"미챠, 저기서 이쪽의 우리를 보고 있는 건 누구야?" 그녀가 갑자기 속삭였다. 미챠가 몸을 돌려서 보니, 정말로 누군가가 커튼을 걷어 젖히고 그들을 엿보고 있는 것이었다. 더욱이 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이쪽, 이쪽, 우리 쪽으로 오시죠." 크지는 않지만 확고하고 집요하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에게 말했다.
미챠는 커튼 뒤에서 나와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방 전체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아까 그 사람들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사람들이었다. 순간적으로 오한이 일어 등골이 오싹했고, 몸이 부르르 떨렸다.
외투를 입고 모표가 달린 모자를 쓴, 키가 큰 이 뚱보 - 이자는 경찰서장 미하일 마카르이치였다. '언제나 반짝반짝 광이 나는 구두를 신고 다니는', '폐병쟁이 같이 말쑥한 이 멋쟁이' - 이자는 검사 시보였다. 그리고 젊고 작은 안경을 낀 이자…… 여기서 미챠는 그만 그의 성을 잊어버렸지만, 이자는 예심판사, 법원의 예심판사로서 '법률 학교'를 마치고 최근에 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 이 사람은 - 지서장 마브리키 마브리키치인데, 그도 역시 미가 아는, 눈에 익은 사람이었다.'
"여러분…….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미챠는 갑자기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목청껏 소리쳤다.
"알- 만 - 합니다!" 안경을 쓴 젊은이가 갑자기 앞으로 걸어 나와 미챠에게로 다가가더니, 위엄이 넘치긴 하지만 그래도 다소간 다그치듯 말을 시작했다.
"노인 때문이다! 미챠가 미친 듯 소리쳤다. "노인과 그의 피……! 알-만-합니다!"
그러고는 낫에 발목이라도 베인 듯 쓰러지다시피, 곁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알 만하다고? 알아들었군! 아비를 죽인 불한당 같은 놈, 네놈의 늙은 아버지의 피가 네 뒤에서 울부짖고 있다!" 늙은 경찰서장이 미챠에게 다가서면서 갑자기 이렇게 호통을 쳤다.
"아무리 그래도 이러시면 안 됩니다!" 작은 젊은이가 소리쳤다.
"미하일 마카르이치, 미하일 마카르이치! 이건 안 됩니다, 이러시면 안 돼요……! 저 혼자 얘기를 하도록 해 주십시오……. 당신이 이런 일을 저지를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으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미망입니다, 여러분, 미망이요!" 경찰서장이 소리쳤다.
"저 놈을 한번 보시오. 밤에 술이 떡이 된 채 방탕한 계집년과 함께, 자기 아버지의 피로 범벅이 돼서는……."
"제발 부탁이니, 친애하는 미하일 마카르이치, 이번에는 감정을 좀 자제해 주십시오."
검사 시보가 빠른 말투로 속삭였다. "자꾸 이러시면 저도 어쩔 수 없이 무슨 조치를……."
하지만 키 작은 예심판사는 그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미챠를 향해 확고하고 큰 소리로 근엄하게 말했다.
"퇴역 중위 카라마조프 씨, 당신이 간밤에 일어난 당신의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 살해 사건의 용의자로 고소되었음을 알려 드리는 바입니다." 그는 그 밖에도 무슨 말을 더 했고, 검사도 무슨 말을 하며 끼어든 것 같았지만, 미챠는 그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이미 뭐가 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해괴망측한 시선으로 그들 모두를 둘러볼 뿐이었다…….
<8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