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경 옮김 민음사
스메르쟈코프는 그 무렵 이미 퇴원한 상태였다. 이반 표도로비치는 그의 새로운 거처를 알고 있었다. 바로, 현관을 사이에 두고 두 채의 오두막으로 나뉜 다 쓰러져 가는 그 작은 통나무집이었다. 한 오두막에는 마리야 콘드라치예브나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고, 다른 오두막에는 스메르쟈코프가 혼자 따로 살고 있었다. 뒤에 가서 사람들은 그가 마리야 콘드라치예브나의 약혼자 자격으로 이 집에 들어오게 됐으며 일단은 공짜로 살고 있으리라고 추정했다. 모녀는 공히 그를 존경하여 그를 자기들보다 한층 더 높은 사람으로 대했다.
노크를 한 뒤 현관으로 들어선 이반 표도로비치는 마리야 콘드라치예브나의 안내를 받아 곧장 스메르쟈코프가 거처하고 있는 왼쪽의 '하얀 오두막'으로 갔다. 양쪽 벽을 따라 벤치 두 개, 탁자 주위로 의자 두 개가 전부였다. 탁자는 그냥 나무로 만든 것이었지만 그래도 딴엔 장미 무늬가 그려진 식탁보가 씌워져 있었다. 두 개의 작은 창문에는 제라늄 화분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구석에는 성상이 든 성상갑(聖像匣)이 있었다. 탁자에는 심하게 우그러진 크지 않은 청동 사모바르, 두 개의 찻잔이 놓인 쟁반이 있었다.
이반 표도로비치는 스메르쟈코프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의 병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의 얼굴은 더 생기로워졌고 살도 통통 올랐으며 앞머리도 멋을 부려 빗어 올렸고 관자놀이께는 포마드가 발라져 있었다. 그는 또 알록달록한, 솜을 넣은 실내복을 입고 있었지만, 낡을 대로 낡아 몹시 해어진 옷이었다. 그의 콧잔등에는 안경이 얹혀 있었는데, 이반 표도로비치는 예전엔 그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이 시시콜콜한 정황이 이반 표도로비치를 심지어 두 배나 열받게 한 듯했다. ‘이놈 봐라, 주제에 안경까지 끼고 있네!’
"이봐, 좀 들어 봐. 그때 내가 병원에 있던 너를 보러 갔다 나올 때 무슨 헛소리를 했지?
내가 네가 간질 발작을 연기하는 데 도사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 너도 너와 내가 대문 곁에서 주고받은 말은 예심판사에서 일절 발설하지 않겠다고 했지? 그 일절이라는 게 뭐야? 그때 너는 뭘 염두에 뒀던 것이지?
나에게 협박이라도 한 건가, 그런 건가?
내가 너와 무슨 한패가 되어 음모라도 꾸몄고 그래서 너를 두려워한다, 이런 소린가?"
이반 표도로비치는 이 말을 하면서 완전히 격분했는데, 말을 빙빙 돌리거나 괜히 수작을 부리는 것은 경멸스러우니 아예 탁 터놓고 놀자는 것을 일부러 분명하게 알리려는 듯했다.
스메르쟈코프는 두 눈을 표독스럽게 번득이며 왼쪽 눈을 찡긋하더니, 예의 그 습관 대로 자제력을 발휘하여 침착하게 곧장 대답을 해 주었다. '네놈이 탈탈 털어놓고 싶다면, 나 역시 그렇게 대해 주지.'라는 투였다.
"그때 내가 그 말을 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 또 그런 말을 했던 까닭은 바로 이런 겁니다.
즉, 도련님은 '친아버님이 이렇게 살해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서도 그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내버려 두었고', 이 때문에 사람들이 당신의 감정이나 그 밖의 무슨 다른 일에 대해 고약한 결론을 내리지나 않을까 싶었던 겁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때 당국에는 발설하지 않겠노라고 약속한 거죠."
스메르쟈코프는 이렇게 말하면서 서두르지도 않고 자제력도 제법 발휘했지만, 그의 목소리에서는 어떤 확고하고 끈덕지고 표독스럽고 뻔뻔스러울 정도로 도전적인 울림이 들려왔다. 그는 이반 표도로비치를 무례하게 빤히 쳐다보았고, 그래서 상대방은 처음엔 순간 눈이 아찔해질 정도였다.
"뭐라고? 뭐가 어째? 그래, 네놈 지금 제정신이냐, 아니냐?"
"정신은 정말로 말짱합죠."
"아니, 그럼 내가 그때 살인 사건이 일어날 걸 알고 있었단 말이냐?" 마침내 이반 표도로비치가 소리를 지르면서 주먹으로 탁자를 쾅 쳤다. '그 밖의 무슨 다른 일'은 또 무슨 소리냐? 썩 말하지 못할까, 이 야비한 놈아!"
스메르쟈코프는 아무 말도 않고 여전히 예의 그 뻔뻔스러운 눈초리로 계속 이반 표도로비치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말하면서 염두에 둔 것은 '도련님도 그때 부친의 죽음을 바랐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반 표도로비치는 벌떡 일어나 주먹으로 있는 힘껏 그의 어깨를 내리쳤고, 덕택에 상대방은 벽 쪽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는 "몸도 약한 사람을 때리다니, 도련님,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라고 말한 뒤 갑자기, 콧물 범벅이 된 푸른 격자무늬 손수건으로 눈을 가리곤 조용히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 분 정도가 지났다.
"됐어! 그만해!" 이반 표도로비치가 다시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내 인내력을 바닥내지 말란 말이다."
스메르코프의 주름투성이 얼굴 곳곳에 이제 막 감수해야 했던 모욕이 알알이 배어 있었다.
"네놈은 그때 내가 드미트리와 한패가 돼서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 하는 줄 알았단 말이냐?"
"그때 대문 안에서 도련님을 멈춰 세운 것도 바로 그 부분에 대한 도련님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서였습죠."
"떠보다니? 뭘?"
"바로 이런 정황이죠. 즉, 도련님은 자기 부친이 어서 빨리 살해되었으면 하는가, 아닌가? 하는 거요."
이반 표도로비치의 속을 제일 심하게 뒤집어 놓은 것은 이 집요하고도 뻔뻔스러운 어조였는데, 스메르쟈코프는 계속 그 어조를 바꾸려 들지 않았다.
"이놈, 네놈이 아버지를 죽였구나!" 그가 갑자기 소리쳤다.
스메르쟈코프는 경멸스럽다는 듯 히죽 웃었다.
"내가 안 죽였다는 건 도련님이 더 잘 알고 있으면서. 게다가 영리한 사람이라면 이런 일은 다시는 입에 담지 않을 줄 알았는데요."
"아니, 이놈이 정말! 대답을 해라. 정확히 무엇 때문에, 정확히 내가 무슨 짓을 했기에 그때 네놈이 네놈의 그 야비한 영혼 속에 내 눈엔 그토록 저질스러워 보이는 의심을 품을 수 있었던 거냐?"
"죽인다는 것은 말이죠 - 도련님은 제 손으론 절대 그럴 수가 없었을 테고 게다가 그러고 싶지도 않았을 테지만, 하지만 다른 누군가가 죽여 주길 바라는 것이라면, 예, 도련님은 이걸 원한 거죠."
"참 차분하게 잘도 떠드는구나, 어찌나 차분한지! 그래 내가 무엇 때문에 그런 걸 원한다는 거냐, 어떤 연유로 내가 그런 걸 원했다는 거냐고?"
"어떤 연유라뇨? 유산이 있잖습니까요?" 스메르쟈코프는 독살스럽게 말을 받았다. 그 당시 부친이 돌아가시면 세 형제에게 에누리 없이 4만씩 돌아갈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표도르 파블로비치가 바로 그 부인, 즉 아그라페나 알렉산드로브나와 결혼을 할 경우엔 워낙 똑똑한 여자이다 보니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즉시 모든 재산을 자기 명의로 바꾸었을 테고, 따라서 도련님 세 형제는 단돈 2루블도 얻지 못했을 테죠. 그런데 그때는 결혼식이 그야말로 코앞으로 다가오지 않았습니까?" 이반 표도로비치는 고통스러워하면서 스스로를 억눌렀다.
"그래, 좋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네 생각으론 내가 형이 그런 짓을 저지르도록 미리 정해 놓고 형한테 그걸 기대했단 말이냐?"
"어떻게 그분한테 그런 걸 기대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요. 일단 죽이기만 하면 그땐 그분은 귀족으로서의 권리, 지위, 재산 등 모든 걸 박탈당하고 유형에 처해질 텐데요. 그렇게 되면 부친이 돌아가신 후 그분의 몫으로 남겨질 유산은 도련님과 동생 알렉세이 표 도로비치에게로 돌아오니까 둘이서 절반씩 나눌 테고, 그 말인즉 도련님들 각각은 이미 4만이 아니라 6만을 손에 넣게 되는 것입죠."
"그래, 네놈이 무슨 소리를 지껄이든, 일단 참아 주지! 들어 봐라, 개망나니 같은 놈아.
내가 그때 누군가에게 기대를 걸었다면, 그건 물론 드미트리가 아니라 네놈이었고, 또 맹세코, 네놈이라면 얼마든지 추잡한 짓도 저지를 거라는 예감이 들었어…… 그때…… 내가 받은 인상이 똑똑히 기억난단 말이다!"
"그때 잠시나마 도련님이 나한테도 역시 기대를 걸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스메르쟈코프가 이를 드러내고 비아냥거리듯 웃었다. 왜냐면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 거라는 예감이 들었으면서도 동시에 떠났다면, 그 말인즉, '네가 아버지를 죽여도 좋으니 나는 방해하지 않겠다.'하고 말한 것과 다름없는 거죠."
"이런 야비한 놈! 네놈은 그렇게 알아먹었구나!"
"전부 다 바로 이 체르마쉬냐 덕분입죠. 아니, 여부가 있나요, 어디! 모스크바에 갈 참이라고 체르마쉬냐에 좀 가 달라는 부친의 간청을 거절하다니요! 그래 놓고선 오직 나의 어리석은 말 한마디에 갑자기 가겠다고 하다니요! 무엇을 위해서 그때 그 체르마쉬냐에 가겠다고 선뜻 나섰던 걸까요? 오직 내 말 한마디에 별 이유도 없이 모스크바가 아니라 체르마쉬냐로 떠났다면, 다시 말해서 나에게서 뭔가를 기대했다는 소리죠."
"아니야, 맹세코 그렇지 않아!" 이반은 이를 갈면서 울부짖었다.
"뭐가 그렇지 않다는 겁니까요? 사실, 정반대가 되었어야 옳지요. 즉, 아들 된 도리로 보건대 도련님은 그때 그런 말을 지껄인 나를 당장에 경찰서로 끌고 가서 찢어발겨 놓든가…… 최소한 바로 그 자리에서 내 낯짝이라도 후려갈겼어야 옳지만, 정작 도련님은 얼씨구나 곧장 길을 떠났으니, 이건 참으로 터무니없는 일이었습죠. 자, 이런 상황이니 내가 어떻게 그런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반은 눈을 번득이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들어봐. 나는 네놈의 고발 따윈 무섭지 않아, 나에 대해 무슨 증언을 하든 상관없어. 내가 지금 네놈을 죽도록 때리지 않은 건, 그건 오로지 네놈이 이 사건의 범인이 아닐까 의심스럽기 때문이야, 네놈을 법정으로 끌고 갈 테니까. 네놈의 정체를 낱낱이 밝혀 놓겠다!"
"내 생각으론 차라리 입 다물고 계시는 편이 낫겠습니다. 왜냐면 완전히 무고한 나를 도련님이 고발한다고 해도 누가 도련님 말을 믿어 주겠습니까? 다만, 도련님이 정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모든 것을 얘기할 수밖에 없습죠, 나도 어떻게든 제 몸 하나는 보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지금 도련님한테 한 이 말을 법정에서는 전혀 믿어 주지 않겠지만, 그 대신 일반 사람들은 믿어 줄 테고, 그러면 도련님은 이만저만 창피한 게 아닐 테죠."
"이건 이번에도 '영리한 사람과는 얘기를 나누는 것도 흥미롭다."인가, 엉?" 이반이 이를 갈았다.
"정확히 핵심을 찌르셨군요. 그럼, 좀 영리해지십죠."
이반 표도로비치는 너무 분해서 온몸을 부르르 떨며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입더니, 스메르쟈코프에겐 더 이상 대답도 하지 않고 심지어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황급히 오두막을 나왔다. 신선한 저녁 공기를 쐬니 상쾌해졌다. 하늘에는 달이 휘영청 밝았다. 상념들과 감각들의 끔찍한 악몽이 그의 영혼 속에서 들끓었다.
'지금 바로 가서 스메르쟈코프를 고발해 버릴까? 하지만 뭘 고발한단 말인가. 어쨌거나 녀석은 무죄다. 오히려, 그 녀석이 나를 고발할 거다. 아닌 게 아니라, 그때 나는 무엇을 위해서 체르마쉬냐로 갔을까?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이반 표도로비치는 자문해 보았다.
'그래, 물론, 나는 뭔가를 기대했던 거야, 그놈 말이 옳다…… 그러자 다시금 아버지의 집에서 보낸 마지막 날 밤 계단에서 아버지의 방에서 나는 소리를 엿들었던 것이 백 번째로 떠올랐는데, 이제는 이렇게 떠오른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심지어 뭔가에 찔리기라도 한 듯 그 자리에 서 걸음을 멈추기까지 했다. '그래, 나는 그때 바로 살인이 일어나길 바랐던 거다! 스메르쟈코프를 죽여야 해……! 내가 지금 스메르쟈코프를 죽일 용기가 없다면, 나는 아예 살 가치도 없는 놈이다…….
수학적 증거
이반 표도로비치는 곧장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를 찾아갔는데, 그렇게 불쑥 나타나서 그녀를 놀라게 했다. 꼭 미친 사람 같았던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스메르쟈코프와 나눈 대화를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전했다. 그는 그녀가 아무리 설득을 해도 진정할 수가 없어서 줄곧 방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탁탁 끊기는, 이상한 말투로 말을 늘어놓았다. 마침내 탁자 앞에 앉아 팔꿈치를 굽혀 두 손으로 머리를 괴고 이상한 아포리즘을 내뱉었다.
"만약 살인을 저지른 것이 드미트리가 아니라 스메르쟈코프라면, 물론 나도 그때 그놈과 공범이야, 내가 그놈을 교사했으니까. 드미트리가 아니라 그놈이 죽인 것이 맞다면, 물론 나도 살인자야."
이 말을 듣고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책상으로 가더니 그 위에 있던 조그만 함을 열고 무슨 종이를 꺼내 와 이반 앞에 내놓았다. 이 종이가 바로, 이반 표도로비치가 나중에 알료샤에게 드미트리 형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수학적 증거'라고 했던 그 서류였다. 이것은 미챠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쓴 편지로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 집에서 그루셴카가 그녀를 모욕한 장면이 연출된 이후, 미챠가 수도원으로 돌아가고 있던 알료샤와 들판에서 만난 바로 그날 저녁에 쓴 것이었다.
그때 알료샤와 헤어지고서 미챠는 곧장 그루카 집으로 돌진했다. 그녀를 만났는지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날 밤 술집 '수도'에 나타나서는 당연히 술을 잔뜩 퍼마셨던 것이다. 이렇게 술에 취한 상태에서 그는 펜과 종이를 달라고 한 뒤 스스로에게 대단히 불리하게 작용할 서류를 작성해 버린 것이다. 그것은 아무런 두서도 없고 장황하게 말만 많은, 미친 듯 흥분에 가득 찬, 그야말로 '술에 취한' 편지였다. 즉, 한결같이 장황하기 그지없고 아무런 두서도 없이 내뱉는 넋두리 같은 것이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숙명적인 카챠! 내일 돈을 손에 넣어 당신의 그 3000을 돌려주겠어, 그리고 안녕 - 위대한 분노의 여인이여, 하지만 안녕, 나의 사랑이여! 끝을 내자! 내일 모든 사람들에게 돈을 구해 보겠지만 그래도 구하지 못할 때는, 당신에게 약속한 대로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의 머리를 부수고 아버지 베개 밑에서 가져올 거야, 이반이 떠나 주기만 한다면. 징역살이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3000은 돌려주겠어.
당신도 용서해 주길. 당신 앞에서 나는 야비한 놈, 땅에 머리가 닿도록 절하노라. 나를 용서해 주길. 아니, 차라리 용서를 해 주지 않는 편이 낫겠군.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그쪽이 더 편하니까! 당신의 사랑보다는 징역살이가 낫지, 다른 여인을 사랑하거든. 그런데 당신은 오늘 그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너무도 잘 알게 됐으니, 어떻게 그녀를 용서할 수 있겠어? 내 돈을 훔쳐 간 도둑놈을 죽이고야 말겠어! 더 이상 아무도 알고 싶지 않기에, 당신들 모두를 떠 나 동쪽으로 가겠어. 그 여자도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아. 나를 괴롭히는 건 당신 하나만이 아니니까, 그 여자도 또한 그러하니까. 안녕히!
P.S. 저주의 말을 쓰고는 있지만, 당신을 숭배하노라! 내 가슴속의 목소리가 들리노라. 현 한 가닥이 남아서 울리는군. 차라리 심장을 절반으로 쪼개는 것이 나으련만! 내 목숨을 끊어 버릴 테지만, 어쨌거나 일단은 저 수캐 새끼부터 죽여 버릴 테다. 그놈한테서 3000을 가져와 당신에게 던지겠어. 이 몸이 비록 당신 앞에서 야비한 놈이긴 하지만 그래도 도둑놈은 아니야! 3000을 기다리고 있으라. 저 수개 새끼의 이부자리 밑에는 장밋빛 리본이 있어. 나는 내 돈을 훔친 도둑놈을 죽일 뿐, 도둑놈은 아니야. 카챠, 나를 경멸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 주길. 드미트리는 도둑놈은 아니지만, 살인자야! 당당히 서서 당신의 오만함을 더 이상 감당하지 않기 위해 아버지를 죽이고 스스로를 파멸시켰노라.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PP.S. 당신의 발에 입을 맞추노라, 안녕히!
PP.SS. 카챠, 사람들이 나한테 돈을 주도록 하느님에게 기도해 주길. 그러면 나도 피를 묻히지 않겠지만, 만약 아무도 안 준다면 나는 피를 묻힐 거야! 나를 죽여 줘!
'서류'를 다 읽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이반은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러니까 스메르쟈 코프가 아니라 형이 죽인 것이다. 스메르쟈코프가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그, 이반도 아니다. 이 편지가 그의 눈에는 갑자기 수학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로서는 미챠의 유죄를 의심할 여지가 조금도 있을 수 없었다. 겸사겸사, 미챠가 스메르쟈코프와 공모하여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이반에게 절대로 들지 않았고 더욱이 이건 사실 관계 차원에서도 맞질 않았다. 이반은 전적으로 마음을 놓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그는 스메르쟈코프와 그의 냉소를 회상하며 그저 경멸감만을 느꼈을 뿐이다. 며칠이 지났을 때는 스메르쟈코프의 의심 때문에 자기가 그토록 고통스러울 만큼 모욕감을 느낄 수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기까지 했다. 이반은 그를 경멸하여 아예 잊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갔다. 누구에게 스메르쟈코프에 대해 캐묻는 일은 더 이상 없었지만, 두어 번 정도 지나가는 말로 그가 몹시 아프고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을 듣기는 했다. "결국엔 미쳐 버릴 모양입니다." 스메르쟈코프를 두고 젊은 의사 바르빈스키가 이렇게 말했고 이반은 이것을 기억해 두었다.
이반의 질투
그런데 그 달의 마지막 주에는 이반 자신도 몸 상태가 몹시 나빠지기 시작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모스크바에서 초빙한 의사가 공판을 바로 앞에 두고 우리 도시로 왔을 때부터 이미 이반은 진찰을 받으러 다니고 있었다. 또 바로 그 무렵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 대한 그의 태도는 극도로 날카로워져 버렸다. 그들은 서로 사랑에 빠진 무슨 두 명의 원수 같았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마음이 비록 한순간이었지만 맹렬한 기세로 미챠에게로 돌아서 버리자, 이반은 이미 흥분하다 못해 완전히 미칠 지경이 되었다.
이상하게도 우리가 묘사한 마지막 장면, 즉 알료샤가 미챠에게 갔다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집에 들렀던 그때까지 이반은 요 한 달 내내 단 한 번도 그녀가 미챠의 유죄를 의심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의 마음이 미챠에게로 '돌아서 버리자' 이반은 완전히 증오심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이반은 자신이 나날이 미챠를 더욱더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이와 동시에 그 증오의 원인이 카챠의 마음이 미챠에게로 '돌아서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미챠가 아버지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자신도 이 점을 느끼고 있었으며 또 이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탈출 계획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판이 열리기 열흘쯤 전에 미챠를 찾아가 탈출 계획을 제시했던 것이니 - 분명히 오랫동안 곰곰 생각한 끝에 나온 계획이었으리라. 여기에는 그로 하여금 이런 발걸음을 내딛도록 부추긴 주된 원인 외에 스메르쟈코프가 던진 한마디 말로 인해 받은, 아직도 아물지 못한 마음의 상처도 적지 않은 몫을 했는데, 형의 유죄가 확정되면 그때는 알료샤와 그에게 돌아올 아버지의 유산이 4만에서 6만으로 늘어날 테니까 자기, 즉 이반에겐 큰 이득이 될 것이라는 그 한마디 말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 미챠를 탈출시키는 데 3만을 희생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때 미챠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과 혼란에 사로잡혔다. 자기가 미챠의 탈출을 원하는 것은 이 일에 3만을 희생함으로써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뭔가 다른 이유 때문이라는 느낌이 갑자기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영혼 깊은 곳에서는 '나도 똑같은 살인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이렇게 자문해 봤던 것이다.
알료샤와 대화를 나누고 나서 자기 집의 초인종에 손을 댔으나 갑자기 스메르쟈코프를 찾아가기로 결심하고 나자, 이반 표도로비치의 가슴속에서는 느닷없이 한 가지 특별한 분노가 끓어올라 그를 완전히 사로잡아 버렸다. 갑자기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바로 방금 전에 알료샤가 있는 데서 자기에게 소리친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건 당신이었어, 그 사람이(미챠가) 살인자라고 나한테 주장한 사람은 오직 당신 하나였단 말이야!"
이 말이 떠오르자, 이반은 심지어 장승처럼 얼어붙어 버렸다. 그는 결단코 그녀에게 미챠가 살인자라고 주장한 적이 없었을뿐더러, 오히려 그때 스메르쟈코프를 만나고 돌아와선 그녀 앞에서 자기 자신에게 혐의를 두었다. 오히려 그건 그녀, 그러니까 그녀가 그에게 그때 '서류'를 내놓으면서 형의 유죄를 증명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그녀는 '내가 직접 스메르쟈코프에게 갔다 왔어!'라고 외치지 않는가.
언제 갔단 말인가? 다시 말해서, 그녀는 미챠의 유죄를 별로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스메르쟈코프 녀석은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그의 심장은 무서운 분노로 불타올랐다. 그는 자신이 왜 반 시간 전에는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는 초인종을 내버려 두고 스메르쟈코프 집 쪽으로 내달았다. '이번엔 내 그놈을 죽여 버릴지도 모른다.' 길을 가면서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
길을 절반도 가지 않아, 이날 아침 일찍부터 그랬듯 매섭고도 메마른 바람이 일더니 어느새 잘고 메마른 싸락눈이 마구 휘날리기 시작했다. 이반 표도로비치는 눈보라가 치는 줄도 모르고 본능적으로 길을 헤아리면서 암흑 속을 성큼성큼 걸었다. 머리가 아팠고 관자놀이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지끈거렸다. 손목에 경련이 이는 것도 느껴졌다.
문을 열어 주기 위해 손에 양초를 들고 달려 나온 마리야 콘드라치예브나는 현관에서부터 스메르쟈코프가 몹시 아픈데 거의 제정신이 아니며 차도 마시기 싫으니 치우라고 했다고 그에게 속삭였다.
“아니 그래, 그가 난동이라도 부린다는 건가?” 이반 표도로비치가 거칠게 물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오히려 너무 조용합니다요. 다만, 도련님, 그분을 붙잡고 너무 오래 얘기를 나누지는 말아 주세요…….” 마리야 콘드라치예브나가 부탁했다.
이반 표도로비치는 문을 열고 오두막 안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침대 위에는 스메르쟈코프가 여전히 예의 그 실내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노란색 표지의 무슨 두꺼운 책이 놓여 있었지만 스메르코프는 그것을 읽기는커녕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 있는 듯했다. 그는 말없이 긴 시선으로 이반 표도로비치를 맞이했으며, 상대방의 방문이 조금도 놀랍지 않은 듯한 눈치였다. 그는 안색이 몰라볼 정도로 여위고 또 얼굴빛이 샛노래져 있었던 것이다. 눈은 움푹 들어갔고 아래쪽 눈꺼풀은 시퍼렇게 변해 있었다.
"그래, 정말로 아픈 거냐? 오래 있지는 않을 테니 외투도 벗지 않겠다. 아니 왜 쳐다만 보고 있는 거냐, 말도 없이? 그냥 한 가지 질문할 게 있어서 왔으니, 맹세코 대답을 듣지 않고는 네 방을 나가지 않겠다. 너에게 아씨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왔더냐?" 스메르쟈코프는 갑자기 한 손을 내저으면서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다.
"뭐 오시긴 했지만, 뭐 도련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죠. 이제 그만 좀 하십죠."
"아니, 그만하지 않겠어! 말해, 언제 왔다 갔지?"
"기억도 안 나요, 잊어버렸습니다." 그러고서 스메르쟈코프는 경멸스럽다는 듯 씩 웃었다.
그리고 갑자기 또 다시 이반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응시했는데, 증오로 불타오르는 시선이었다.
"도련님도 어디가 편찮으신 모양이군요. 얼굴이 홀쭉해진 것이 꼴이 영 말이 아니군요." 그가 말했다.
"내 건강 따위는 집어치우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도련님 눈도 샛노래지셨네요, 흰자위가 완전히 노란색이 됐으니, 원. 괴로워서 못살 것 같으신가 봐요?"
그는 경멸스럽다는 듯 씩 웃더니 갑자기 숫제 웃음을 터뜨렸다.
"대체 뭐가 그리 불안하십니까?" 이젠 경멸도 아니고 거의 어떤 혐오감이 깃든 시선이었다.
"내일 공판이 시작될 거라서 그런 건가요? 도련님한테는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제발 좀 믿으시죠! 집에 가서 잠이나 편히 주무세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시고요."
"네놈이 이해가 안 돼…… 내가 내일 뭘 두려워한다는 거냐?" 이반이 놀라워하면서 말했는데, 갑자기 어떤 경악이 싸늘한 냉기처럼 그의 영혼을 스치고 지나갔다. 스메르쟈코프는 자로 재듯 눈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이 - 해 - 가 안 된다고요?" 그가 책망하듯 말을 질질 끌었다.
"영리한 사람은 이런 희극을 연출 하는 것이 그렇게도 좋은가 보군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도련님은 두려워할 게 없다니까요. 도련님한테 해가 되는 말은 절대 하지 않을 테고 또 증거도 없잖아요. 손은 또 왜 떠실까. 아니, 도련님, 손가락을 왜 그리 떨고 계시 죠? 집으로 돌아가세요, 도련님이 죽인 건 아니니까요."
"나도 알고 있어, 내가 아니라는 건……" 그가 중얼거렸다.
"아- 신- 다고요?" 스메르쟈코프가 다시 말을 받았다.
*뭐 정 그렇다면, 도련님이 죽이신 겁니다." 그는 분에 겨워 이반에게 속삭였다.
"사람 좀 그만 괴롭히세요! 서로 눈을 맞대고 앉아서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괜히 서로를 속이고 희극이나 연출하자는 건가요? 아니면 모든 걸 나한테만 뒤집어씌우려는 건가요, 그것도 내 눈앞에서 버젓이? 도련님이 죽였어요. 도련님이 주범이란 말입니다. 나는 그저 도련님의 앞잡이에, 충실한 하인 리차르드에 불과했다고요. 도련님의 말을 따라 이 일을 수행했을 뿐이죠."
"수행했다고? 아니 그럼, 네가 죽였다는 거냐?" 이반은 순간 온몸이 싸늘해졌다.
뭔가가 그의 뇌수 속에서 전율하는 듯했고, 자잘하고도 싸늘한 오한이 일어 온몸이 벌벌 떨렸다.
그 순간엔 스메르쟈코프 자신도 이반이 진정으로 경악하는 모습에 마침내는 충격을 받았던 것이리라.
"아니,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단 말인가요?" 그는 삐뚜름하게 웃으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반은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 꼭 혀가 마비라도 된 듯 말문이 막혀 버렸다.
"여기에는 우리 두 사람을, 그리고 제삼의 어떤 존재를 제외하면 헛것이라곤 전혀 없습죠."
"그가 누구냐? 누가 있다는 거냐? 제삼의 존재란 누구냐?" 이반 표도로비치는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신입죠, 이건 바로 하느님의 섭리입죠. 도련님은 그분을 찾지 않으니 발견하지도 못할 겁니다."
"네가 죽였다는 건 거짓말이야!" 이반이 광포하게 울부짖었다. "네놈은 미쳤거나 나를 골려 주려는 거야!"
스메르쟈코프는 여전히 이반이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저 '자기 눈앞에서 버젓이 자기한테만 모든 걸 뒤집어씌우기 위해' 연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마침내 그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더니, 갑자기 탁자 밑에서 왼쪽 다리를 들어 올리고 바지를 위로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양말 안으로 깊숙이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붙잡아서 꺼내기 시작했다. 이반 표도로비치가 보니 그건 무슨 종이들, 혹은 종이 뭉치인 것 같았다.
"이겁니다요!" 그가 조용히 말했다.
"한번 보시지요." 스메르쟈코프가 여전히 조용하게 말했다.
"도련님 손가락이 여전히 떨리는군요, 경련이라도 난 듯," 스메르쟈코프는 이런 말을 한 뒤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직접 종이를 펼쳤다. 포장지 안에는 100루블짜리 무지갯빛 수표 세 묶음이 들어 있었다.
"여기 고스란히 다 있습니다. 전부 3000이죠, 세 볼 필요도 없어요. 가져가시죠." 그가 돈을 향해 턱을 까딱하면서 이반에게 권했다. 이반은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는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정말로, 정말로 지금까지 몰랐단 말입니까?" 스메르쟈코프가 다시 한번 물었다.
"아니, 몰랐어. 나는 줄곧 드미트리라고 생각했어. 형! 형! 아!" 그가 갑자기 두 손으로 자기 머리를 움켜쥐었다. "이봐, 너 혼자 죽인 거냐? 형은 빼놓고 너 혼자, 아니면 형이랑 함께 한 짓이냐?"
"오로지 도련님과 함께 했을 따름입니다요.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요."
"그때는 참으로 용감하시더니,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고 하시더니, 이제 와선 완전히 겁을 집어먹으셨군요!" 스메르쟈코프가 놀라워하면서 중얼거렸다.
그는 탁자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이반이 방 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눈여겨봤던 두꺼운 노란색 책을 집어서 돈을 눌렀다. 책의 제목은 '우리의 거룩하신 신부님 이삭 시린의 말씀'이었다.
이반 표도로비치는 기계적으로 그 제목을 읽었다.
"어서 앉아서 말 좀 해 봐. 그 일을 어떻게 해 치웠던 거냐? 모두 다 말해 봐……"
"그 일을 어떻게 해치웠냐는 말이죠?" 스메르쟈코프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해치웠지요, 그때 도련님이 하신 바로 그 말씀을 따라서……."
"도련님이 떠나셨고, 그러고서 나는 지하 창고에서 넘어졌습죠……."
"발작이 났던 게냐, 아니면 연기를 했던 게냐?"
"당연히 연기를 했습죠. 모든 것이 다 연기였어요. 얌전하게 계단을 내려가서, 맨 아래층까지 내려 가서 얌전하게 누웠고 눕자마자 곧 울부짖었죠. 그렇게 사람들이 와서 끌어낼 때까지 몸부림을 쳤죠."
"잠깐만! 그러면 나중에도 줄곧, 그러니까 병원에서도 줄곧 연기를 했단 말이냐?"
"절대로 아닙죠. 다음 날 아침, 병원에 가기 전부터 진짜로 발작이 시작됐는데, 그렇게 심한 발작은 몇 년 만에 처음 겪어 봤어요. 이틀 동안 완전히 의식을 잃었으니까요." 좋아, 좋다고 계속해 봐
"내 짐작대로 나를 칸막이 뒤의 침대에 눕혔는데, 밤에는 신음을 했습니다, 다만 조용하게 줄곧 드미트리 표도로비치가 오기만을 기다렸던 거죠."
"기다렸다니, 너한테 오길?"
"그 양반이 뭐 하러 나를 찾아오나요. 그분의 집으로 오길 기다렸던 거죠. 나는 바로 이날 밤 그분이 오리라는 걸 이미 믿어 의심치 않았어요. 왜냐면 그분은 내가 없어서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으면 무슨 재주를 부려서라도 틀림없이 직접 담장을 넘어 집 안으로 기어 들어올 테니까요, 그러고도 남을 양반이죠."
"만약 오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났을 테죠. 그분이 없었다면 나도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테니까요."
돈은 이부자리 밑에 없었다
"잠깐만." 하고 이반이 말을 끊었다. "하지만 형이 죽였다면. 돈도 가져갔을 텐데, 너도 그 정도는 생각했을 게 아니냐? 그렇게 되면 형이 다녀간 후엔 너한테는 뭐가 남는다는 거냐? 이해가 안 되는군."
"돈이라면 그분은 절대로 찾지 못했을 겁니다요. 돈이 이부자리 밑에 있다는 건 그저 내가 그분에게 일러 준 것에 지나지 않아요. 단, 그나마도 거짓말이었습죠. 전에는 조그만 함 속에 들어 있었지요, 예, 그랬습죠. 하지만 표도르 파블로비치는 세상 사람을 통틀어 오로지 나만을 신뢰했기 때문에, 나중에 내가 그분한테 구석의 성상 뒤라면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거라면서, 특히 서둘러 왔다면 더 그럴 거라면서 그 돈뭉치를 그리로 옮기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자, 그러니까 드미트리 표도로비치가 정작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 살인자들이 늘 그러하듯이 어디 좀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겁을 집어먹고 서둘러 도망을 쳤거나, 아니면 곧 붙잡혔을 겁니다요. 그렇게 되면 나는 다음 날 어느 때나, 아니면 심지어 바로 그날 밤에 성상 뒤로 슬그머니 가서 그 돈을 꺼내 올 수 있었을 테고, 그러면 모든 것은 드미트리 표도로비치가 뒤집어썼을 테죠. 그러니까 나는 언제든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거죠."
"잠깐만…… 좀 헷갈리는군. 그러니까 어쨌거나 죽인 건 드미트리이고 너는 돈만 훔쳤다는 게냐?"
"아니요, 그분이 죽인 게 아닙니다요. 이제 더 이상 도련님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군요. 왜냐면 도련님은 정말로, 내 눈에도 훤히 보이지만,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르셨고 또 도련님 자신의 명백한 죄를 내 눈앞에서 버젓이 나한테 덮어씌우기 위해 내 앞에서 연기를 하셨던 것도 아니지만, 설사 그렇다고 할지라도 어쨌거나 도련님은 살인이 일어나리라는 걸 알고 계셨고 나한테 살인을 하라고 위임해 놓곤 정작 자신은 모든 걸 다 알면서도 떠나셨기 때문에 이 사건 전체에 있어 유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이 사건 전체의 주범은 어디까지나 오직 도련님 한 분이라는 것을, 내가 죽이긴 했지만 나는 주범은 아니라는 것을 도련님한테 증명하고 싶은 겁니다. 바로 도련님이 그야말로 법적인 살인범이다, 이 말입니다!"
스메르쟈코프의 자백
"왜, 왜 내가 살인자야? 오 맙소사!" 이반은 대화가 끝날 무렵까지 자기 얘기는 전부 미루어 두기로 한 걸 잊고 기어코 인내력의 한계를 느꼈다. “더 계속해 봐. 그날 밤 이야기를 계속해 보란 말이다."
"계속 뭘요! 내가 그렇게 누워 있는데 주인 나리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하지만 그 전에 그리고리 바실리예비치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밖으로 나갔는데, 갑자기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고 그러곤 완전히 조용해졌고 암흑만 가득했지요. 나는 그렇게 누워서 계속 기다리는데, 심장이 어찌나 쿵쾅거리는지 참을 수가 없더군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서 가 봤죠 - 왼쪽을 보니 정원으로 통하는 주인 나리 방 창문이 열려 있었고 나는 그분이 아직 살아 있는지 어떤지, 멀쩡히 앉아 있는지 어떤지를 살펴보려고 왼쪽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주인 나리가 뒹굴뒹굴하면서 탄식을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살아 있더군요. 에잇, 젠장이라고 생각했습죠! 창문 쪽으로 다가가서 나리에게 '접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주인 나리는 나한테 '그놈이 왔어, 왔다가 달아나 버렸어!'라고 하더군요. 다시 말해 드미트리 표도로비치가 왔다는 거죠. '그리고리를 죽였어!' 어디서요?라고 내가 그분에게 속삭이듯 물었죠. '저기, 구석에서.'라고 가리키면서 그분도 속삭이듯 말하더군요. 나는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라고 말했죠.
그러고선 좀 살펴보려고 정원 구석으로 가 봤더니, 그리고리 바실리예비치가 온통 피투성이가 된 채로 의식을 잃고 담벼락 옆에 쓰러져 있더군요. 그렇다면 드미트리 표도로비치가 왔다는 게 정말이구나 하는 생각이 즉시 내 머릿속을 퍼뜩 스쳐 지나갔고, 그리고리 바실리예비치가 아직 살아 있다고 해도 의식을 잃은 상태여서 아무것도 보지 못할 테니까 이 모든 걸 순식간에 해치워 버리자고 바로 그 자리에서 결심했지요. 다만 유일한 위험 부담은 마르파 이그나치 예브나가 갑자기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거였죠. 그 순간 이런 느낌이 들었지만, 그저 그 갈망이 나를 온통 압도해 버렸기 때문에 심지어 숨이 탁 막히더군요.
나는 다시 창문 밑으로 가서 '그분이 여기 와 계십니다, 아그리페나 알렉산드로브나가 오셨다고요. 안으로 들어가시겠다는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인 나리는 꼭 갓난애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더군요. 그리고 참 웃긴 일인데, 그때 나는 갑자기 그루셴카가 왔다, 바로 나리의 눈앞에 와 있다는 신호를 담아 창틀을 두드릴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내 말은 믿지 않았으면서도 내가 신호를 보내자마자 곧바로 문을 열러 달려오더군요. 문이 열렸습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주인 나리는 내 앞에 떡 버티고 서서 나를 가로막으며 완전히 안으로 들이지는 않더군요. '그 애는 어디에 있느냐, 어디에 있어?' 나를 쳐다보면서 벌벌 떨고 계셨습니다. 그분에게 속삭였어요. '저기요. 저기 그분이 창문 밑에 와 있습니다. 아니, 나리는 못 보셨습니까?'라고요. 네가 가서 그 애를 데려와, 네가 그 애를 데려오면 되잖아! '하지만 무서워하고 계신걸요, 고함 소리에 놀라 관목 숲으로 몸을 숨기셨어요. 나리께서 몸소 방에서 나오셔서 불러 보세요.'라고 말했지요.
'그분은 바로 저기 계십니다(그러면서 나는 창가로 다가가 직접 온몸을 쑥 내밀었습니다.), 저기 관목 숲에 계세요, 주인 나리를 보고 웃고 계시는데 안 보이시나요?'라고 말했지요. 그제야 갑자기 내 말을 믿고는 몸을 부르르 떠시더군요. 고통스러울 정도로 그분한테 빠져 있었던 거죠. 심지어 온몸을 창문 밖으로 쑥 내밀었다니까요. 바로 그때 나는 바로 그 주철 서진(書鎭)을 거머쥐었는데, 도련님도 기억나시겠지만, 그분의 책상 위에 있던, 3푼트는 족히 될 물건이었죠. 그분의 뒤에서 그놈을 휘둘러 모서리 쪽으로 곧장 정수리를 향해 내리쳤습니다. 심지어 비명도 지르지 못하시더군요. 나는 두 번, 세 번 연거푸 내리쳤어요. 세 번째로 내리쳤을 땐 완전히 부숴 버렸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분은 갑자기 얼굴을 위로 향하고 벌렁 나자빠졌는데, 온통 피범벅이었습니다. 나는 내 몸에 피가 묻지는 않았나, 혹시 몇 방울 튀지는 않았나 꼼꼼히 살펴본 뒤 서진을 닦아서 제자리에 놓고 성상 뒤로 가서 돈 봉투에서 돈을 꺼낸 뒤 봉투 자체는 마룻바닥으로 내던졌고, 장밋빛 리본도 그 옆에다 내던졌지요. 그러곤 온몸을 벌벌 떨면서 정원으로 내려갔습니다. 곧장 구멍이 뚫려 있는 사과나무로 향했죠 거기에 헝겊 쪼가리와 종이를 넣어 두곤 오래전부터 준비를 해 뒀더랬지요.
돈을 전부 종이에 싸고 그 다음엔 헝겊으로 싸서 깊숙이 박아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 돈은 이 주 남짓 그곳에 방치되었던 셈이죠. 나중에 퇴원한 후에 꺼냈으니까요. 내 방 침대로 돌아와 자리에 눕고 나니 공포가 밀려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즉, '만약 그리고리 바실리예비치가 완전히 죽은 거라면 사태가 아주 고약해지겠지만, 죽지 않고 정신을 차린다면 사태는 아주 좋아질 것이다, 왜냐면 그때는 그 노인이 드미트리 표도로비치가 왔다 갔다는 것, 다시 말해, 그분이 죽이고 돈을 가져갔다는 것의 증인이 될 테니까.
해서, 나는 의심과 초조함으로 괴로워하면서 마르파 이그나치예브나를 어서 빨리 깨우기 위해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일어났고, 나한테로 달려들었다가 갑자기 그리고리 바실리예비치가 없다는 걸 알아차리곤 밖으로 달려 나갔고, 이어 정원에서 그녀가 지르는 비명 소리가 들리더군요. 뭐, 이렇게 밤새도록 그 모든 소동이 벌어졌고, 나는 이미 모든 점에서 안심하게 된 거죠." 화자는 말을 멈추었다.
문은 열려 있었나
"잠깐만." 하고 이반은 무슨 생각이 난 듯 말을 받았다. "그럼 문은? 만약 아버지가 오직 너한테만 문을 열어 주었다면, 어떻게 그리고리가 너보다 먼저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단 말이지? 그리고리는 너보다 먼저 그것을 보지 않았더냐?"
"그건 그저 그 노인의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스메르쟈코프가 입을 일그러뜨리며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지 않습니까요. 이 노인은 사람이 아니라 어쨌거나 고집불통 노새라니까요. 보지도 않았으면서 봤다고 생각하게 된 것인데, 이 노인이 이런 걸 다 생각해 주다니, 도련님과 나한테는 호박이 덩굴째 굴러온 셈인데, 왜냐면 그 덕분에 드미트리 포도로비치는 결국 빼도 박도 못하고 걸려들 테니까요."
돈 봉투를 왜 바닥에
"그래! 그럼 왜 너는 돈 봉투를 뜯은 다음, 마룻바닥에 남겨 둔 거지? 그냥 봉투째로 가져가지 않고……."
"그렇게 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죠. 사정을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 가령 나처럼 전에도 돈을 제 눈으로 직접 봤고 어쩌면 그 돈을 직접 그 봉투에 집어넣고 그걸 봉하여 겉봉에 이름을 쓰는 것까지 제 눈으로 봤던 사람이라면, 대략 그런 사람이 살인을 저질렀다면 그 봉투를 뜯어 보겠습니까, 그냥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어서 빨리 줄행랑을 쳤을 겁니다요.
하지만 드미트리 표도로비치였다면 완전히 다른 문제죠. 그분은 오직 봉투에 대한 소문만 들었지, 그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니까, 뭐 대략 그것을 이부자리 밑에서 꺼냈다고 한다면, 어서 빨리 그 자리에서 그것을 뜯어 봤을 테고, 그 안에 정말로 그 돈이 들어 있는지 아닌지를 알아봤을 테죠. 그러곤 이미 그 봉투가 자기에게 불리한 증거로 남을 것이라는 판단을 할 겨를도 없이 바로 그 자리에다 버렸을 겁니다. 왜냐면 그분은 타고나길 귀족인 데다가 전엔 뭘 빤히 훔쳐 본 적도 없는, 경험이라곤 없는 도둑이고, 또 지금 돈을 훔칠 결심을 했다고 할지라도 그건 훔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의 것을 되찾으러 온 것일 따름이니까요.
나는 심문을 받을 때 이런 생각을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고 오히려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듯이 슬쩍 흘려 주었고, 그런 식으로 꼭 내가 그들에게 암시를 준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직접 생각해 낸 것처럼 했는데 - 아니나 다를까, 검사 나리는 내가 던진 바로 그 암시에 군침을 삼키더군요.”
"그럼, 정말, 정말로 너는 이 모든 걸 그때 그 자리에서 생각해 단 말이냐?" 이반 표도로비치가 너무 놀라 앞뒤를 잃고 소리쳤다. 그러곤 또다시 경악을 금치 못하며 스메르쟈코프를 바라보았다.
"무슨 당치도 않은 말씀을, 그렇게 황망한 상황에서 이 모든 걸 어떻게 생각해 낼 수 있었겠습니까요? 모든 것을 미리 꼼꼼하게 생각해 뒀던 거죠."
"그래…… 그럼, 악마가 나서서 너를 도와준 게로구나!" 이반 표도로비치가 다시 소리쳤다. "아니야, 너는 멍청하지 않아, 너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영리한 놈이야……."
"들어 봐, 이 불행한 놈, 이 썩을 놈아! 네놈이 아직 모르는 모양인데, 내가 지금까지 네놈을 죽이지 않은 건 오로지 내일 법정에서 증언을 시키기 위해 아껴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보고 계신단 말이다." 이반은 한 손을 위로 쳐들었다. "어쩌면 나도 유죄라고 할 수 있겠지, 정말로 그런 바람을, 그러니까…… 아버지가 죽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맹세코 나는 네놈이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큰 죄를 짓진 않았어, 어쩌면 내가 네놈을 교사한 것이 전혀 아닐지도 몰라. 아니야, 아니야, 교사 같은 건 하지 않았어!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매한가지야, 나는 바로 내일 법정에서 나 자신을 고발하겠어, 결정했다! 나는 모든 것을 말하겠어, 모든 것을, 하지만 네놈도 나와 함께 출두할 거다! 네 놈이 법정에서 나에 대해 무슨 나쁜 말을 하든, 네놈이 어떤 증언을 하든 - 받아들이겠어, 네놈 따윈 무섭지 않으니까. 오히려 내가 나서서 모든 것을 확증해 줄 테다! 하지만 네놈도 법정에서 자백을 해야 만 해! 꼭, 꼭 그래야 하고, 우리는 함께 가는 거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해!"
이반은 웅장하고 정력적으로 이렇게 말했는데, 그의 번득이는 시선만 봐도 정말 꼭 그렇게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요. 도련님은 안 가실 테니까요." 마침내 그가 단호한 어조로 딱 잘라 말했다.
"네놈이 나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이반이 힐난조로 소리쳤다.
"만약 모든 것을 자백하신다면, 도련님은 너무 수치스러우실 겁니다요. 아니, 그래 본들 그건 전혀 무익한 일이 될 겁니다. 왜냐면 난 그런 걸 도련님한테 말한 적이 절대 없다고 딱 대놓고 말할 테니까요, 도련님은 무슨 병이 나서 혹은 자기 형님이 너무 안쓰러워서 스스로를 희생하겠다는 마음에 아예 나한테 뒤집어씌울 생각을 하신 거라고요. 그러면 뭐 과연 누가 도련님 말을 믿어 줄까요, 그래, 어디 하나라도 증거가 있습니까?"
"이 돈은 도련님이 챙기시지요, 가져가시라고요." 스메르쟈코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물론 가져가고말고! 하지만 네놈은 이것 때문에 살인을 해 놓고선 도대체 왜 나한테 주는 거냐?"
"전에는 이 돈으로 모스크바나 외국으로 가서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어요, 더욱이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고 했으니까 그런 꿈을 꾸었단 말입죠. 그때 도련님은 나한테 이런 얘기를 많이 해 주셨잖아요. '무한한 존재인 신이 없다면, 선행 같은 것도 전혀 없고, 아니 그 경우엔 그런 건 아예 필요도 없다고.'"
"네놈의 머리로 거기까지 도달한 것이더냐?" 이반이 삐뚜름하게 피식 웃었다.
"도련님의 지도 덕분이었습죠."
"지금 이렇게 돈을 내놓는 걸 보니, 하느님을 믿게 됐다는 소리냐?"
"아니요, 믿지 않습니다요. 됐어요……. 말할 가치도 없어요!" 스메르쟈코프는 다시 한 손을 내저었다.
"그때만 해도 도련님은 줄곧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자기 입으로 말씀하시더니, 이제 와선 왜 그렇게 불안에 떨고 계신 거죠? 심지어 스스로를 고발하러 가실 생각이라……. 다만,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두고 봐라! 내일 이걸 법정에서 보여 주겠다." 이반이 말했다.
"그래 본들 아무도 도련님 말을 믿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도련님한텐 지금 도련님 돈도 상당히 많이 있으니까 어디 함에서 꺼내 가져왔다고들 생각할걸요." 이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네놈을 죽이지 않은 건 오로지 내일 네놈이 나한테 필요하기 때문이야, 잊지 말라고!"
"아니 왜요, 차라리 지금 죽이십죠. 죽여 보시라고요." 스메르쟈코프가 이반을 이상야릇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갑자기 이상야릇한 어조로 말했다. "감히 그럴 엄두도 못 내시면서. "안녕히 가십시오!"
"내일 보자!" 이반은 다시 소리친 뒤 오두막에서 나왔다.
눈보라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처음 얼마간은 활기차게 성큼성큼 걸었지만, 갑자기 비틀거리는 듯싶었다. '이건 뭔가 육체적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는 피식 웃었다. 기쁨과도 같은 어떤 것이 지금 그의 영혼 속으로 내려왔다. 그는 내부에서 어떤 무한한 확고함이 생긴 것을 느꼈다. 최근에 줄곧 그토록 끔찍하게 그를 괴롭혀 온 동요는 이제 끝이다! 결단은 내려졌으니 '더 이상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는 행복감에 젖어 생각했다.
자기 집 앞에 다다랐을 때 느닷없이 '지금 해야 되지 않을까, 지금 당장 검사를 찾아가서 모든 걸 알려야 되지 않을까?'라는 질문이 튀어나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다시 집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그는 나름대로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렸다. '내일 모두 한꺼번에 처리하자!'라고.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는데, 이상하게도 기쁨과 만족감이 한순간에 거의 모조리 싹 사라져 버렸다.
그는 피로한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노파가 사모바르를 내왔고 그는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붓긴 했지만 거기엔 손도 대지 않았다. 노파에겐 내일까진 일이 없으니 그만 가 보라고 했다.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자니 현기증이 일었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꼭 뭔가를 찾아내려는 듯 간간이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의 시선은 한 점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아까의 맞은편 벽 앞에 놓인 소파를 곁눈질로 흘겨보고 있었다. 그곳의 뭔가, 그 어떤 대상이 그의 짜증을 돋우고 그를 불안하게 만들고 괴롭히는 것 같았다.
나는 의사가 아니지만, 그래도 이반 표도로비치의 병의 특성에 대해 독자에게 무슨 설명이라도 꼭 해야 될 순간이 왔음을 절감하고 있다. 미리 한마디 해 두자면 이렇다. 그는 지금, 이날 저녁 그야말로 섬망증(譫妄症) 발병 직전이었으니, 그것은 오래전부터 흐트러져 있었지만 집요하게 병에 저항해 온 그의 조직을 이젠 마침내 완전히 점령해 버린 것이다.
그는 어느 날 의사를 찾아간 적이 있긴 한데, 의사는 그의 얘기를 듣고 진찰을 해 본 뒤 뇌가 손상된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이반이 혐오감마저 느끼며 마지못해 그에게 얼마간의 증상을 고백했지만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당신과 같은 상태에서는 그런 환각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라는 것이 의사의 결론이었다. “어쨌든 잠시도 미루지 말고 꼭 본격적인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안 그러면 상황이 나빠질 테니까요.” 하지만 이반 표도로비치는 의사에게 다녀온 뒤 병상에 누워 치료를 받는 걸 싹 무시해 버렸다.
어떤 신사
그리하여 그는 지금 자신이 미망에 들떠 있음을 의식하면서도 그냥 앉아서, 내가 이미 얘기했듯 맞은편 벽 앞, 소파 위의 어떤 물체를 집요하게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어떤 자가 느닷없이 앉아 있었으니, 이반 표도로비치가 스메르쟈코프한테 갔다가 돌아와 방 안으로 들어섰을 때만 해도 방 안에 없던 자였다.
이 자는 어떤 신사, 더 정확히 말하면, 특수한 종류의 러시아 신사로서 이미 젊지 않은 나이, 프랑스인들이 흔히 말하듯 '쉰 살쯤' 된 듯했고 아직까지 숱이 많고 짙은 색인 상당히 긴 머리카락에는 드문드문 새치가 보이고 턱수염은 쐐기처럼 깎은 상태였다. 그는 최고의 재봉사가 재단한 것이 분명한 어떤 갈색 재킷을 입고 있었지만, 이미 다 해어졌을뿐더러 대략 삼 년 전에 재단한 것으로서 완전히 유행이 지난 스타 일이라서 형편이 넉넉한 상류 사회 인사라면 이미 이 년 전부터 아무도 저런 것은 입지 않았다.
와이셔츠, 스카프처럼 생긴 긴 넥타이 등 모든 것이 한결같이 멋 부리기 좋아하는 신사들한테서 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좀 더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와이셔츠는 더러웠고 넓은 스카프는 몹시 닳아 있었다. 체크무늬 바지도 훌륭했지만 이것 역시도 색깔이 너무 밝고 어쩐지 폭도 너무 좁아서 지금은 이미 한물간 것이었고, 손님이 쓰고 온 부드러운 하얀 털모자 역시도 마찬가지로 영 계절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호주머니 사정이 극히 부실하지만 체면치레를 하느라 자기 딴엔 열심히 차려입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 신사는 농노제 시절만 해도 끗발을 날리던 과거의 백수 겸 지주 부류에 속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필경 상류 사회의 점잖은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았고 언젠가는 그들과 연출도 있었으며 아마 지금까지도 더러 그 연줄이 남아 있을 수도 있지만, 젊은 날의 즐거운 삶은 지나가 버리고 최근에 농노 제도가 폐지된 이후 조금씩 가난해져서 품위를 갖춘, 마음씨 좋은 옛 지인들 집을 떠도는 식객 같은 존재로 전락해 버린 것 같았는데, 그들은 그나마 자기 집 식탁에 자리를 마련해 주지만, 그래 봤자 물론 참 옹색한 자리에 불과했다.
이런 식객들은 얘기보따리를 풀어놓는 능력도 있고 카드놀이에 한몫 낄 줄도 아는 모나지 않은 성격의 신사들이지만 어디에 얽매이거나 뭘 위임받는 것은 싫어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아이들은 항상 어디 먼 곳의 무슨 아주머니 댁에서 키우고 있고 신사는 자신의 이러한 가족 관계를 다소 수치스러워하는지 점잖은 모임에서는 거의 절대로 가족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드물게나마 아이들한테서 그들의 영명 축일과 크리스마스 무렵에 축하 편지를 받기도 하고 때때로 답장도 보내지만 시나브로, 그러다가 완전히 그들의 존재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시계는 안 갖고 있었지만, 검은 리본이 달린 별갑 오페라글라스를 갖고 있었다.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에는 싸구려 오팔이 박힌 커다란 금반지가 번쩍거렸다.
실재인가 환영인가
"좀 들어 보게나." 그가 이반 표도로비치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미안하네만, 내 그저 상기시키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자네가 스메르쟈코프를 찾아간 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서였는데, 정작 그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채 그냥 와 버렸어, 아마 깜빡 잊었던 모양이지"
"아, 그렇군!" 이반의 얼굴엔 금세 어두운 근심의 빛이 드리워졌다. 그래, 깜빡 잊었어……. 하지만 이젠 이러나저러나 매한가지야, 내일이면 모든 게 끝날 테니까." 그가 혼잣말처럼 웅얼거렸다.
"그런데 넌 말이야."하고 이반이 짜증을 내며 손님에게 말을 걸었다. "이건 지금 나 혼자 기억해 낸 것이 틀림없어, 안 그래도 바로 그 문제 때문에 괴로워 숨이 막힐 지경이었으니까! 그런데 네가 웬 참견이야, 나 혼자 그걸 기억해 낸 게 아니라 네가 나한테 슬쩍 귀띔해 준 것처럼 믿게 할 참인가?"
"그럼, 그렇게 믿지 말게나." 신사는 상냥하게 웃었다. "믿음을 억지로 강요할 수야 있나? 더욱이 어떤 증거도 믿음에는 도움이 되지 않거든, 특히 물적 증거는 말이야. 토마스가 믿은 건 부활한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믿기를 바랐기 때문이야."
"좀 들어 봐." 이반 표도로비치는 갑자기 탁자에서 일어났다. "나는 지금 꼭 미망에 들뜬 것 같아……. 어디 한번 마음껏 지껄여 봐, 그래 봤자 나를 지난번처럼 미친 듯 흥분시키진 못할 거다. 이따금씩은 네가 보이지도 않고 심지어 네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래도 언제나 네가 뭘 뇌까리고 있는지는 짐작이 가. 왜냐면 이건 나, 나 자신이 말하는 거니까, 네가 아니라! 그래, 수건을 찬물에 적셔 머리에 갖다 대 보자, 그러면 네가 증발해 버릴 거야." 이반 표도로비치는 자기 말대로 한 뒤 물수건을 머리에 얹은 채 방을 앞뒤로 거닐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자넨 이미 나를 시나브로 뭔가 정말로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군, 지난번엔 나를 자신의 환상에 불과하다고 그렇게 우기더니만……."
"단 한순간도 자네를 실재하는 현실로 받아들인 적이 없어." 이반이 소리를 질렀다. "너는 거짓이야, 그냥 나의 병이고, 환영에 지나지 않아. 나는 다만 너를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는지를 모르겠고, 보아하니, 얼마 동안은 고통을 받아야 할 것 같아. 그래 봐야 고작 나의 사상과 감정 중에서 가장 역겹고 어리석은 부분의 구현일 뿐이라고. 너는 나한테 심지어 흥미로운 존재가 될 수도 있지, 다만 내가 너와 상대할 시간만 있다면……."
"이봐, 미안하지만 나는 자네의 실체를 까발려야겠네. 아까 가로등 곁에서 자네는 알료샤한테 덤벼들며 '너는 그놈한테서 알아냈구나! 어떻게 너는 그놈이 나한테 온다는 걸 알아냈지?'라고 외치지 않았나. 이건 아무래도 나를 떠올려서 나온 얘기잖아. 그렇다면 아주 짧은 한순간이지만 믿긴 믿었다는 소리야, 내가 정말로 존재한다는 것을 믿었던 거라고." 신사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그게 인간 본성의 맹점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 믿을 수 없어. 지난번엔 어쩌면 그때 너를 그냥 꿈속에서 본 건지도 몰라, 생시에서 봤을 리가 절대 없어…….
"그럼 아까는 왜 그 애한테 그렇게 엄격하게 굴었나? 나는 조시마 장로 일로 그 애한테 죄지은 게 있거든."
"알료샤 얘기는 하지 마! 감히 네가 어떻게, 한낱 종놈 주제에!" 이반은 또다시 웃기 시작했다.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정작 자네는 웃고 있으니 - 좋은 징조야. 어쨌거나 자네가 오늘은 지난번보다는 훨씬 더 상냥하게 나오는데, 무엇 때문인지 나는 알지. 그 위대한 결단 때문……."
"결단 얘기는 하지도 마!" 이반이 광포하게 소리쳤다.
"알았어, 알았네, 이건 고귀한 일이야, 이건 매력적인 일이지. 자네는 내일 형을 변호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러 가는 거니까…… 이거야 말로 기사다운 행동이 아니겠나."
"나한테는 이러나저러나 매한가지니까 원한다면 욕설을 퍼부어도 좋지만, 최소한 나와 있을 때는 조금이라도 예의를 갖추는 게 좋지 않겠나. 바보니 종놈이니, 도대체 무슨 말을 그리 험하게 하나!”
“너를 욕하는 건 나 자신을 욕하는 거야!” 이반은 또다시 웃었다.
"나의 벗이여, 난 어쨌거나 신사가 되고 싶고 또 신사 대접을 받았으면 한다네." 손님은 그야말로 식객답게 벌써 미리부터 양보를 해 준다는 호의적인 야망을 발작적으로 과시하면서 말을 시작했다.
"나는 가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주 떳떳하다고 말하지도 않겠네만, 그래도…… 통상 사회에서는 나를 타락한 천사로 받아들여 주는 것이 무슨 공리처럼 되어 있다네. 만약 언젠가 정말 그랬다면, 너무 오래전 일이라서 그걸 까먹은 것도 죄는 아니지. 지금은 그저 점잖은 사람이라는 평판만을 소중히 여기고, 유쾌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면서 그럭저럭 살고 있네. 나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해 ─ 오, 그런데도 많은 점에서 중상모략에 시달려 왔지!
내가 이따금씩 여기 자네들 세상으로 옮겨 와 보면, 내 삶은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처럼 흘러가고, 나는 이게 무엇보다도 마음에 들어. 나도 자네와 꼭 마찬가지로 환상적인 것 때문에 고통스러운 처지라서, 자네들의 그 지상의 리얼리즘을 좋아하지. 자네들 세계에는 모든 것의 윤곽이 뚜렷하고 공식이 있고 또 기하학이 있지만, 우리 세계에서는 죄다 무슨 부정방정식뿐이라네! 나는 이곳을 거닐며 몽상에 잠긴다네. 게다가 지상에 있으면서 미신을 믿게 됐지 뭔가 - 비웃지 말게, 제발. 나는 내가 미신을 믿게 된 것이 마음에 든단 말일세. 나는 여기서 제네들의 관습을 전부 받아들이고 있어. 그리고 자네들 세계에서 치료받는 것도 좋아하게 됐어."
사탄이니까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나
"그런데 자네는 듣지도 않는구먼. 이보게, 자네는 오늘 왠지 기분이 영 꿀꿀한 모양이야." 신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자네가 어제 그 의사한테 다녀왔다는 걸 알고 있네…… 그래, 의사가 뭐라고 하던가?"
"바보 같은 자식!" 이반이 딱 잘라 말했다.
"그 대신 자네는 참 영리하지. 또 욕설을 퍼부을 텐가? 나도 뭐 딱히 관심이 있어서 물은 건 아니고 그냥 그런 거야. 그럼 대답하지 말게나. 요즘은 류머티즘이 또다시 기승을 부려서 말일세……."
"나는 사탄이니까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나 내게도 낯설지 않지."
"뭐, 뭐라고? '사탄이니까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나'라고……. 이런 말을 하다니 악마치고는 제법 똑똑한걸!"
"하지만 그건 나한테서 취한 말이 아니야." 이반이 갑자기 충격을 받은 양 멈칫했다.
"내 머릿속에선 그런 생각이 떠오른 적이 결코 없어, 거 이상한 일이야……."
"이건 제법 참신하지, 안 그런가? 내 이번에는 떳떳하게 구는 차원에서 자네에게 설명을 해 주겠네. 꿈을 꿀 때, 특히 뭐 저기 소화 불량이나 뭐든 다른 이유로 인해 악몽을 꿀 때 인간은 맹세코, 레프 톨스토이도 지어 내지 못할 만큼 예술적인 꿈을, 그토록 복잡하면서도 사실적인 현실을, 그런 사건 내지는 심지어 그런 유의 음모로 촘촘하게 연결된 사건들의 세계 하나를 보곤 하는데, 그것도 자네들 세계의 드높은 현상에서부터 와이셔츠의 가슴팍에 달린 마지막 단추 하나에 이르기까지 예상도 못 할 만큼 세세하게 말이지.
하지만 이런 꿈을 꾸는 사람들이 이따금씩 절대 무슨 대단한 작가들이 아니고, 오히려 극히 평범한 사람들, 관리들, 칼럼니스트들, 사제들이라니…… 이건 숫제 지난한 문젯거리라고 할 만하다네. 한 장관이 나한테 직접 고백한 바에 따르면, 그의 최상의 발상들은 잠을 잘 때 떠오른다는 거야. 자, 지금 상황이 바로 그런 거라네. 나는 비록 자네의 환각이지만 악몽을 꿀 때처럼 나는 지금까지 자네의 머릿속에 떠오른 적이 없는 독창적인 것들을 말하고 있으니까, 고로 나는 자네의 악몽에 불과할 뿐, 이걸 두고 벌써 자네의 생각을 반복한다고 할 순 없는 것이지."
"거짓말이야. 너의 목표는 네가 독자적인 존재이지 나의 악몽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시키려는 데 있고, 그래서 너는 지금 네 입으로 네가 꿈이라고 자꾸 주장하는 거야."
"나의 벗이여, 내 오늘은 특수한 방법을 택했는데 나중에 설명해 줌세. 가만있자,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그래, 바로 그때 내가 감기에 걸렸는데, 다만 자네들 세계에서가 아니라 아직 저기에 있을 때…"
"저기가 어디야? 말해 봐, 너는 나의 세계에서 오래 머물 텐가, 떠나 줄 수는 없겠어?" 거의 절망에 차서 이반이 소리쳤다. 그는 걸어 다니는 것도 그만두고 소파에 앉아 다시금 탁자에 팔을 괴고 두 손으로 머리를 꽉 움켜잡았다. 물수건은 걷어 내서 신경질을 내며 집어던졌다. 분명히 별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리라.
"자네는 신경이 완전히 엉망이 됐어." 신사가 무사태평하면서도 참 우호적인 표정을 지으며 지적했다.
"자네는 심지어 내가 감기에 걸릴 수 있었다는 것도 화가 나는 모양이지만, 아주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그렇게 됐던 걸세. 나는 그때, 장관들을 점찍어 두고 있던 페테르부르크의 어느 지체 높은 귀부인이 주최한 외교관들 저녁 모임에 가는 길이라 정신이 없었지. 뭐, 연미복에 하얀 넥타이, 장갑까지 챙겼지만 아무도 모르는 머나먼 곳에 있다가 자네들의 땅에 닿으려면 공간을 날아가야만 했는데…… 물론 이건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하지만, 태양 광선으로도 꼬박 팔 분은 걸리는 거리를, 그래, 한번 생각해 보게, 연미복에다가 가슴팍이 확 트인 조끼를 입었으니, 원.
원래 정령들은 추위에 떠는 법이 없지만 사람으로 현현했을 때는…… 한마디로 말해서, 아무 생각 없이 길을 떠났던 건데, 이런 공간, 이런 에테르와 이런 물속, 이런 천공 위는 얼마나 추운지 몰 라…… 다시 말해서 얼마나 추운지 - 숫제 춥다는 말로도 부족할 지경이야. 자네도 짐작할 걸세, 영하 150도였다니까! 촌구석의 계집아이들이 곧잘 치는 장난이 제법 유명하지 않나. 영하 30도의 혹한에 풋내기 총각한테 도끼를 핥으라고 하는 거야. 도끼에 닿는 순간 혀는 얼어붙고 그 바보 천치가 그걸 떼 내려면 혀 껍질이 벗겨져 피가 철철 나는 거지. 하지만 그래 봤자 겨우 영하 30도가 아닌가. 그런데 150도쯤 되면, 내 생각으론 말일세, 도끼에 손가락 하나만 갖다 대도 금방 없어지고 말걸, 물론…… 다만 때마침 거기에 도끼가 있기만 하다면……"
"그런 곳에 과연 도끼가 있을 수 있을까?" 이반 표도로비치가 갑자기 멍하면서도 혐오감에 사로잡힌 듯 상대의 말을 가로챘다. 그는 완전히 광기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저항하고 있었다.
"도끼라고?" 손님은 놀라면서 되물었다.
"뭐 그렇지, 그런 공간이라면 도끼는 어떻게 될까?" 이반 표도로비치가 집요하게 고집을 부리면서 소리쳤다.
"그런 공간에 도끼가 있으면 어떻게 될 거냐고? 발상 한번 기막히군! 내 생각으론, 이유도 모른 채 위성처럼 지구 주위를 날아다니겠지. 천문학자들은 도끼의 출몰을 계산할 테고, 가트추크는 달력에 기입해 넣겠지."
"너는 멍청해, 어찌나 멍청한지 아주 바보 천치야!" 이반은 박박 우겨 댔다. "거짓말을 하려면 좀 똑똑하게 하란 말이야, 안 그러면 난 네 말을 듣지 않겠어. 너는 리얼리즘을 무기로 나를 무찌르고 나한테 네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시키고 싶겠지만, 나는 네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아! 믿지 않겠어!"
"아니, 나는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닐세, 모든 것이 진실이야. 유감스럽게, 진실은 거의 언제나 싱겁게 마련이거든. 보아하니, 자네는 나한테 그야말로 뭔가 위대한 걸, 어쩌면 뭔가 아름다운 걸 기대하는 모양이군. 거참 대단히 유감이야, 왜냐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밖에 줄 수가 없으니까……"
악마의 감사문
"그 따위 철학적 얘기는 집어치워, 이 당나귀 같은 놈!"
"철학은 무슨 철학, 가뜩이나 지금 오른편이 전부 마비되어 끙끙 신음을 하는 판국에. 의사라는 의사는 죄다 찾아가 봤네. 진단을 내리는 데는 도사라서 자네 병이 어떤 것인지 손가락으로 세듯 낱낱이 얘기해 주지만 치료할 줄은 모르더라고. 이런 경우에 또 환자를 전문의들한테 보내는 것이 그네들의 수법 아닌가. '우리는 그냥 진단만 하니까, 이제는 아무개 전문의한테 가 보시오, 그분은 치료를 해 줄 거요,'하고.
그럼 어떻게 할 텐가? 민간요법에 의존하기로 했지. 한 독일인 의사가 목욕탕에 앉아서 소금 탄 꿀을 몸에 문지르라고 충고했거든. 그래서 나는 오로지 목욕이나 한 번 더 할 참으로 거길 찾아가서 온몸에 꿀을 칠해 봤지만 효과는 전혀 없더군. 절망한 끝에 밀라노에 있는 마테이 백작에게 편지를 썼지. 그랬더니 책과 물약을 보내 줬는데, 허, 거참, 그러고는 생각을 해 보게, 호프의 맥아(麥芽) 진액이 효험이 있었지 뭔가! 우연한 기회에 사서 한 병 반을 마셨는데, 춤이라도 출 수 있을 만큼 싹 나았지 뭔가.
고마운 마음이 끓어올라 신문에다 꼭 그에 대한 '감사문'을 실어야겠노라고 결심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여기서 이미 완전히 다른 문제가 생겨 버렸단 말이지. 그 어떤 신문사에서도 내 글을 받아 주지 않는 거야! '지나치게 반동적인 얘기가 될 것이므로 아무도 믿지 않을 겁니다, 악마가 존재할 리가 없잖습니까. 차라리 익명으로 실으시지요.'라는 충고만 할 뿐이었지. 아니, 익명이라면 그게 무슨 감사문인가.
나는 신문사 편집인들과 농지거리를 좀 했지. '요즘 같은 시대에 신을 믿는 건 정말 반동적인 일이지만, 나는 악마가 아니오, 나를 믿는 건 괜찮소.'라고 말해 줬거든. 그랬더니 그쪽에선 '충분히 이해는 갑니다, 도대체 누가 악마를 믿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어쨌거나 그건 우리의 편집 방향에 해를 끼칠 수 있거든요. 설마 농담으로 이러는 건 아니실 테죠?'라고 하더군. 그쪽에선 결국 실어 주지 않았어. 나의 가장 훌륭한 감정들, 가령 고마워하는 마음마저도 오로지 나의 사회적인 지위 때문에 공식적으론 금지되었다는 소리니까."
부정과 비평
"또다시 철학 행진을 시작했군!" 이반이 증오스럽다는 듯 이를 갈았다.
"하느님이 나를 보우하사, 제발 안 그랬으면 좋겠지만 이따금씩은 도대체 불평을 하지 않을 수가 있어야지, 원. 나는 중상모략을 당한 인간이야. 자네도 지금 걸핏하면 나더러 멍청하다고 하지 않나. 그러니까 자네가 아직은 젊다는 거야. 이보게, 친구, 세상사는 이성으로만 해결되는 게 아닐세! 나는 천성적으로 선량하고 명랑한 마음을 타고났고 '나도 이런저런 보드빌을 써 본 몸이야." 자넨 나를 그야말로 머리털이 희끗희끗한 흘레스타코프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내 운명은 그보다는 훨씬 더 진지하다네.
내가 결코 헤아릴 재간이 없는 저기 어떤 태곳적 소명에 의해서 나는 '부정'을 할 운명을 타고났지만, 사실 나는 진정으로 착한 사람이라서 부정에는 전혀 소질이 없다네. 안 돼, 어서 부정해, 부정이 없으면 비평도 없고 '비평 분과'가 없다면 무슨 잡지라고 할 수 있겠나? 비평이 없으면 그저 '호산나'밖에 없을 테지. 하지만 삶을 위해선 '호산나' 하나만으론 부족해, 이 '호산나'는 회의의 도가니를 거쳐 나오지 않으면 안 돼, 뭐 등등 이런 종류의 것들이지.
하지만 이 모든 건 내가 참견할 일이 아니지, 내가 창조한 게 아니니까 내가 책임질 일도 아니거든. 뭐 그쪽에서들 속죄양을 한 마리 골라서 비평 분과에서 글을 쓰도록 강요했고 그러다 보니 인생이 이 꼬락서니가 된 거라네. 우리는 이 희극을 이해해. 예컨대 나는 솔직히 탁 깨 놓고 나 스스로의 파괴를 요구하는 바일세. 하지만, '안 돼, 살아야 돼, 너 없이는 아무것도 없을 테니,'하고 말하더군. 세상에 모든 것이 합리적이라면 아무 일도 일어 나지 않을 거다. 네가 없으면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을 테지만, 하지만 사건이란 반드시 일어나야만 한다.
자 그래서, 나는 마지못해 마음을 굳게 먹고 사건이 일어나도록 봉사를 하는 거고, 또 명령에 따라 불합리한 짓을 저지르는 거란 말일세. 사람들은 심지어 의심의 여지 없이 명료한 이성을 지녔음에도 이 희극 자체를 뭔가 진지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바로 여기에 그들의 비극이 있는 거야. 뭐 물론 고통스럽기도 하겠지만…… 그 대신 여전히 살고들 있어, 그것도 환상적인 삶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왜냐면 고통이란 것이 곧 삶이기도 하니까. 고통이 없다면 인생에 무슨 낙이 있겠나 - 모든 것이 끝없는 기도의 연속으로 바뀔 텐데. 그건 거룩하긴 하지만 지루하기 짝이 없지.
그럼, 나는 어떤가? 나는 고통받고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살고 있는 건 아니지 않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부정방정식의 엑스(x)라네. 나는 모든 시작과 끝을 잃어버린, 심지어 결국엔 자기 이름마저도 망각해 버린 삶의 어떤 환영이지. 자네 비웃고 있구먼…… 아니, 비웃는 게 아니라, 또다시 화를 내고 있어. 자네는 영원히 화만 내면서 이성 하나만 붙들고 있으면 되겠지만, 자네한테 또다시 반복하건대, 나는 저 천상의 삶을, 모든 지위와 모든 명예를 송두리째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7푸드나 나가는 장사꾼 아줌마의 영혼으로 현현하여 하느님 앞에 촛불을 밝힐 수 있길 바랄 따름이라네."
"그럼, 너는 신을 믿지 않는 건가?" 이반이 증오스럽다는 듯 씩 웃었다.
"다시 말해서, 자네에게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까, 자네가 이렇게 진지하게 나온다면야……."
"신은 있는 건가, 없는 건가?" 이반이 다시금 광포하고도 집요하게 소리쳤다.
"아, 자넨 정말 그렇게 진지한 건가? 어이, 이보게, 난 모르겠어, 거 위대한 말이 나왔네그려."
"모른다면서 신을 본다고? 아니야, 너는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야, 너란 놈은 나야, 너는 나일뿐,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걸레쪽이야, 너는 나의 환상이야!"
"다시 말해서 자네가 원한다면, 나는 자네와 동일한 철학을 갖고 있다고 할 수도 있네, 그래, 이 편이 공평할 거야.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건 나도 잘 아는 내용이지만, 그 밖에 나를 에워싸고 있는 모든 것들, 이 모든 세상들, 신, 심지어 나 자신인 사탄에 이르기까지 - 이 모든 것이 나에겐 증명되지 않았어, 그러 니까 이것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나의 유출에 지나지 않는 것이어서 태곳적부터 하나의 인격체로 존재해 온 나의 자아의 발전에 불과한 것인지……."
1000조 킬로미터 전설
"차라리 무슨 재미나는 일화라도 들려주면 좋으련만!" 이반이 병적으로 말했다.
"우리 화제에 꼭 맞는 일화가 있긴 있는데, 다시 말해 일화가 아니라 전설이지. 자네는 지금 보면서도 믿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나의 불신을 꾸짖고 있지. 하지만 이보게 친구, 사실 나만 그런 것도 아니잖나, 저기 우리 쪽에선 지금 다들 정신이 아찔해졌다네, 모든 게 다 자네들의 과학 때문이야. 원자와 오감, 4대 원소가 있었을 때만 해도 어떻게 그럭저럭 잘 굴러가고 있었지. 원자라는 것은 고대 세계에도 있었던 거니까. 하지만 자네들이 거기서 '화학적 분자'니 '원형질'이니 뭐 이런 악마로선 도통 알 길이 없는 것들을 발견해 냈다는 것을 우리 세계에서 알게 되자마자, 우리는 그만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지.
그야말로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기 시작했어. 중요한 것은 미신과 유언비어들이 만연하게 됐다는 거야. 유언비어라면 우리 세계에도 자네들만큼이나 많고, 아니, 심지어 조금 더 많을지도 몰라. 끝으로, 밀고라는 것도 있어서 우리 세계에도 특정한 '정보'를 수집하는 분과가 하나 있다네.
자, 그래서 이 기괴한 전설은 우리의 중세, 그러니까 아무도 믿지 않는 얘기지. 이 전설은 천국에 대한 거야. 여기 자네들의 땅에 사상가 겸 철학자가 한 명 있었는 데, '법이고 양심이고 신앙'이고 모든 것을 다 거부했고 무엇보다도 - 내세'를 '거부'했다더군. 그러다가 죽었는데 이제 곧 암흑과 죽음으로 가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 그의 앞에 내세가 떡하니 나타난 거야. 그는 너무 놀랍고 또 분개해서 '이건 내 신념에 위배되는 일이다.'라고 말했지.
어쨌건 이 때문에 그는 형을 받게 됐는데……. 다시 말해서 있잖나, 미안한 얘기지만 나도 들은 얘기를 전하는 것뿐이고 이건 그냥 전설에 불과한 얘기라서 말일세……. 어쨌거나 그가 받은 형이란 암흑 속에서 1000조(*) 킬로미터를(우리 세계에서도 요즘은 미터법을 쓴다네.) 걸어가라는 것이었는데, 이 1000조 킬로미터를 다 걸으면 그때는 그를 향해 천국의 문이 열리고 모든 걸 용서받을 거라는 거였지……."
"너희들의 저세상에는 1000조 킬로미터 말고 또 어떤 고문법이 있지?" 이반이 말을 가로막았다.
"어떤 고문법이 있냐고? 옛날에는 별의별 고문법이 다 있었지만, 요즘은 도덕적인 것들이 점점 더 많이 생겨나선 '양심의 가책'과 같은 헛소리들뿐이라네. 뭐 그래 봤자 누가 득을 봤나, 득을 본 건 오로지 양심 없는 자들뿐이지. 원래 양심이란 게 없는데 양심의 가책을 느낄 턱이 없잖나 말일세. 자, 그래서 1000조 킬로미터 형을 받은 이자는 길을 가로막고 드러누워선 '가지 않겠어, 원칙 때문에 가지 않겠다!'라며 버텼지. 러시아의 계몽된 무신론자의 영혼과 고래 배 속에서 사흘 낮 사흘 밤을 성내며 버텼던 예언자 요나의 영혼을 한데 뒤섞으면 - 바로 그게 이렇게 길바닥에 드러누운 사상가의 성격이 될 걸세."
"어쨌거나 그는 천 년을 드러누워 있다가 일어나서 걸어가기 시작했고, 10억 년에 걸친 대장정 끝에 이미 오래전에 다다랐고, 바로 거기서 일화가 시작되는 거라네."
"다다랐다니! 대체 어디서 10억 년을 구했을까? 다다랐을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났나?"
"그를 향해 천국의 문이 열리자마자, 그리고 그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이 초도 채 지나지 않아 - 이건 그의 시계에 따른 건데 - 어쨌거나 이 초도 채 지나지 않아 소리쳤다네. 이 이 초를 위해서라면 1000조 킬로미터는 고사하고 1000조 킬로미터에 또다시 1000조 킬로미터를 곱하고 또 거기다가 1000조 킬로미터를 곱한 거리라도 걸을 수 있겠노라! 하고. 한마디로 '호산나'를 불렀는데, 너무나 맹렬하게 보수주의자로 변해 버렸다는 거지. 한데 이거야말로 러시아적 천성이 아닌가. 다시 한번 말하네만, 이건 어디까지나 전설일세."
"나는 네놈의 정체를 간파했어!" 이반은 이젠 완전히 기억났다는 듯 어린애처럼 기뻐하면서 소리쳤다.
"1000조 년에 대한 그 일화 - 그건 바로 내가 직접 지어낸 거야! 나는 그때 열일곱 살이었고 김나지움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때 내가 그 일화를 지어내서 한 친구에게 이야기해 줬고, 그 아이의 성은 코로프킨이었고, 그건 모스크바에 서 있었던 일이야……. 이 일화는 너무도 독특한 것이어서, 어디 다른 데서 가져왔을 리도 없어. 거의 다 잊어 먹었는데……. 지금 무의식적으로 떠올랐어. 그러니까 너야말로 그 꿈이라는 거다! 너는 꿈이니까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는 거야!"
나는 너를 믿고 싶은지도 몰라!
"자네가 나를 거부하느라 이렇게 열을 올리는 걸 보니까, 자네가 어쨌거나 나를 믿고 있다는 확신이 서는군."
"절대 아니야! 100분의 1도 믿지 않아!"
"그래도 1000분의 1 정도는 믿겠지. 원래 동종요법(同種療法)적인 한 방울이야말로 가장 치명적인 것이 아니겠나. 슬슬 고백하게나, 믿는다고 말이야, 하다못해 1만 분의 1이라도……."
"단 한순간도 믿지 않아! 나는, 그래도, 너를 믿고 싶은지도 몰라!" 이반이 갑자기 이런 이상한 말을 덧붙였다.
"어라! 어쨌든 이제야 고백을 하는군! 하지만 나는 워낙 착한 사람이니까 이번에도 자네를 도와주겠네. 자네가 나의 정체를 간파한 게 아니라 내가 자네의 정체를 간파한 거라네! 나는 일부러 자네한테 자네가 이미 잊어버린 일화를 이야기해 주었던 건데, 그건 자네가 나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버리도록 하기 위해서였지."
"거짓말이야! 네가 출현한 목적은 네가 존재한다는 것을 나에게 확신시키는 것이야."
"그거야 당연하지. 하지만 동요, 하지만 불안, 하지만 믿음과 불신 간의 투쟁 - 이런 것은 자네처럼 양심이 있는 사람에겐 이따금씩 너무도 큰 고통인지라 차라리 목을 매는 것이 낫지. 나는 그러니까 말일세, 자네가 나의 존재를 아주 조금이나마 믿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일화를 얘기해 줌으로써 자네에게 철저하게 불신을 불어넣은 거라네.
나는 자네가 믿음과 불신 사이를 번갈아 왔다 갔다 하도록 이끄는 거라네, 여기에는 나만의 목적이 있거든. 새로운 방법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자네는 나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버리자마자 그 즉시 내 눈앞에서 내가 꿈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을 나한테 확신시키려 들 거야, 내 자네를 잘 알고 있지. 그렇게 되면 나는 내 목적을 달성하는 셈일세.
나의 목적은 고결한 거야. 내가 자네에게 믿음의 깨알만한 씨앗 하나라도 뿌리면 거기서 참나무가 자라날 테고 - 또 그 참나무가 얼마나 대단한지, 자네는 그 위에 앉아 '황야의 은자들과 죄에 물들지 않은 여인들'의 대열에 합류하고 싶어질 걸세. 사실 자네는 남몰래 몹시, 몹시 그러고 싶어 하지 않나. 자네는 메뚜기를 잡아먹고 구도 생활을 하기 위해 황야로 떠날 걸세!"
"그러니까 네놈은, 이 개망나니 같은 놈아, 내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노력하는 거냐?"
"어쨌든 언젠가는 착한 일을 해야 되지 않나. 자네는 또 내가 슬쩍 보기만 해도 버럭 성질을 내니, 원!"
"어릿광대 같은 놈! 네놈은 언젠가 바로 그런 자들, 즉 메뚜기를 잡아먹고 십칠 년씩이 나 텅 빈 황야에서 기도하느라 온몸이 이끼로 뒤덮였던 그런 자들을 유혹해 본 적이 없었나?"
"이보게, 나는 그런 짓만 해 왔다네. 온 세상들을 다 잊고 그런 사람 하나한테 달라붙는 거야. 원래 금강석이란 아주 귀한 것이잖나. 그런 영혼 하나는 때때로 하나의 성좌 전체와 맞먹는 가치가 있다네! 그런데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발달 수준이 자네보다 못하지도 않다네. 믿음과 불신의 심연이란 동일한 순간에 한꺼번에 관조할 수 있는 것이어서, 때때로 한 발짝만 내디디면 사람이 '곤두박질'을 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야."
코는 붙들고 떠나왔나
“아니, 그래, 코는 간신히 붙들고서 떠나왔나?”
"이보게, 친구. 어쨌거나 때때로는 코가 아예 없는 것보다는 그나마 코를 붙들고 떠나오는 편이 더 나을 때가 있지 않나, 병을 앓게 된 어느 후작이 고해성사 때 자신의 고해신부인 예수회 신부에게 최근에 말했듯 말일세. 나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 아주 기가 막히더군.
후작이 '나에게 내 코를 돌려주십시오!'라고 말했어.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말이지. '내 아들이여'라며 신부가 말을 빙빙 돌리더군. '만사는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운명들에 따라 채워지는 법이고, 눈에 보이는 재앙은 이따금씩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굉장히 큰 이득을 가져다줄 수 있는 법이오. 만약 준엄한 운명이 그대에게서 코를 빼앗았다고 할지라도, 이제 한평생 아무도 그대에게 그래도 코나 붙든 채 남게 됐다는 말은 못 할 테니, 이거야말로 그대에겐 이득인 것이오.'
'성스러운 신부님, 그건 위안이 못 됩니다!' 절망에 찬 사람은 그렇게 소리쳤지. '오히려, 코만 제자리에 붙어 있다면, 저는 한평생 매일 코나 붙든 채 남게 돼도 황홀에 들떠 있을 겁니다!' 그러자 신부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네. '나의 아들이여, 모든 복을 한꺼번에 요구해서는 안 되는 법이니, 그것 자체가 이런 경우에도 그대를 잊지 않은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불평인 것이오. 그대가 방금 외쳤듯 한평생 기꺼이 코를 매달고 있어도 좋다고 외친다면, 그대의 소원은 이미 간접적으로나마 이루어진 것이오. 왜냐면 코를 잃어버림으로써 어쨌거나 그 덕분에 한평생 코나 붙든 채 남게 된 꼴이 됐으니까요……."
"쳇, 병신 같은 소리 작작 해!" 이반이 소리쳤다.
"이보게 친구." 나는 그저 자네를 웃겨 주고 싶었을 따름이네. 하지만 맹세코 이건 정말로 예수회 교도들이나 써먹는 궤변이고, 맹세코 그때 일어났던 일을 나는 지금 토씨 하나 안 빼고 자네한테 그대로 전해 준 거야. 최근에 있었던 이 사건 때문에 나도 골치깨나 앓았다네. 이 불운한 청년이 집으로 돌아와 바로 그날 밤 권총으로 자살을 했거든. 나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 청년 곁에 붙어 있었지…… 이 예수회 고해로 말할 것 같으면, 인생의 울적한 순간마다 나에게 진정으로 가장 사랑스러운 오락 거리가 되어 준다네.
늙은 신부의 고해성사
자네한테 사건 하나를 더, 그것도 아주 최근에 일어난 걸 얘기해 줌세.
스무 살쯤 된 금발 머리의 노르만 처녀가 늙은 신부를 찾아왔지. 그 아름다움이며 몸매며 착한 마음씨며 - 군침이 돌 정도였어. 처녀는 고해틀 너머로 몸을 숙이고 신부에게 자신의 죄를 속삭였지. 그러자 신부가 소리쳤어. '나의 딸이여, 그대는 정녕 또 타락해 버렸단 말이오……? 오 성모 마리아여, 이 무슨 소리란 말이오, 이번엔 그 남자가 아니라니. 하지만 이런 일이 얼마나 더 오랫동안 계속될 것인가, 그대는 정녕 이러고도 부끄럽지도 않단 말이오!'
'아, 나의 신부님' 하고 죄지은 여인은 회개의 눈물을 펑펑 쏟아 내면서 이렇게 대답하는 거야. 그 일이 그이에겐 너무나 큰 만족을 선사하고 나한테도 전혀 힘든 일이 아닌걸요!' 세상에, 이런 대답이 나왔으니, 기가 막히지 않나! 그 순간, 나도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났다네. 이건 자연 그 자체의 외침일세, 이건 자네가 원한다면, 순결 그 자체보다도 더 좋은 것이 아닌가! 나는 당장 그녀의 죄를 사해 준 뒤 몸을 돌려서 그 자리를 떴는데, 곧장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네.
신부가 고해틀에다 대고 내일 저녁 그녀와 밀회 약속을 하는 소리가 들리지 뭔가. 노인은 그야말로 부싯돌 같았는데, 글쎄 한순간에 타락해 버린 거지! 본성이, 본성의 진리가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 자네는 또다시 콧방귀를 뀔 텐가, 또다시 화를 낼 건가? 통 모르겠어, 어떡하면 자네의 비위를 맞출 수 있을까……."
하늘의 호산나
"나를 좀 내버려 둬, 네놈은 찰거머리 같은 악몽처럼 내 뇌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구나." 이반이 자신의 환시 앞에서 맥이 빠져 병적으로 신음했다. "나는 네놈과 있는 것이 지루해, 참을 수 없는 일이야, 너무 고통스러워! 네놈을 쫓아낼 수만 있다면, 어떤 희생이라도 치르련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자신의 요구를 좀 제한하고 또 나한테서 '한결같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나와 자네가 서로 얼마나 다정스럽게 지낼 수 있는지를 보게 될 걸세." 신사는 훈계조로 감정을 담아 말했다. "자넨 나를 보고서 골이 잔뜩 나 있겠지, 내가 불타 버린 날개를 단 채 무슨 붉은 빛에 휩싸여 '천둥 번개를 치고 번쩍이면서' 자네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초라한 몰골로 임했다고 말이지.
그리하여 첫째, 자네의 미학적 감각이 모욕을 받았을 테고, 둘째, 자존심이 또 상했을 걸세. 아니, 어떻게 나같이 위대한 사람한테 이렇게 속물적인 악마가 찾아들 수 있단 말인가? 하고. 그러게 말일세, 자네에겐 아무래도 벨린스키가 그토록 조롱한 그 낭만적인 기질이 있는 거야. 하지만 어쩌겠나, 젊은이. 나도 아까 자네에게 올 채비를 할 때만 해도 그냥 장난삼아, 진짜로 캅카스에서 근무하다가 퇴역한 5등 문관처럼 연미복에 사자별과 태양별을 달고 자네 앞에 임해 볼 생각이었지만, 최소한 북극성이나 시리우스별도 아니고 감히 사자별과 태양별을 연미복에 붙였다간 자네한테 죽도록 얻어맞을 것 같아서 더럭 겁이 나지 뭔가. 안 그래도 자네는 줄곧 나더러 멍청하다고 하지 않나.
하지만 천만의 말씀, 나는 지적인 면에서 자네와 겨룰 생각은 추호도 전혀 없네. 파우스트 앞에 나타난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는 자신이 악을 원하지만 정작 선만을 행하는 자라는 것을 증명했지. 이거야 뭐 자기 마음대로지만, 나는 완전히 반대야. 나는 어쩌면 자연 전체를 통틀어, 진리를 사랑하고 진정으로 선을 바라는 유일한 사람일지도 몰라. 나는 십자가에서 죽은 말씀이 오른쪽에 못 박혀 죽은 강도의 영혼을 자신의 가슴에 품은 채 하늘로 올라갈 때 그 자리에 있었고, 또 '호산나'를 부르며 환호하는 게루빔들의 기쁨에 찬 외침 소리를, 하늘과 온 우주를 뒤흔들어 놓은 세라핌들의 우렁찬 환희의 울부짖음을 들었다네. 그리하여 모든 성스러운 것에 맹세하건대, 나는 그 합창단에 합류하여 그들 모두와 함께 '호산나!'를 외치고 싶었다네. 아니, 가슴속에선 벌써 그 소리가 터져 나오고 튀어나왔을 정도였어…….
내가 또, 자네도 알다시피, 워낙에 감상적이고 또 예술적일 정도로 감수성이 예민하지 않나. 하지만 상식이란 놈이 - 오, 이놈이야말로 내 천성의 가장 불행한 자질이 아니겠나 - 이 순간에도 나를 의무의 경계선 안에다 가두어 버리는 바람에, 그만 절호의 순간을 놓치고 말았다네! 왜냐면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던 거야. 즉, 나마저도 '호산나'를 외치면 도대체 어떻게 될까? 그 즉시 세상의 모든 것이 싹 사라져 버릴 테고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을 게 아닌가.
바로 그래서 나는 오로지 나의 직업적 의무와 사회적 지위 때문에 내 내부에서 끓어오른 훌륭한 순간을 억누르고 추잡한 일들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됐던 걸세. 선의 명예는 누군가가 죄다 가져가 버렸기 때문에 나한테는 오직 추잡한 일만 남게 되었지. 그래도 나는 그렇게 공짜로 놀고먹으면서 명예를 누리는 삶이 부럽지는 않네, 명예에는 별로 욕심이 없거든.
그런데 세계의 모든 생명체 중 왜 오직 나만이, 단지 나 하나만이 모든 점잖은 사람들로부터 저주를 받고 심지어 발길질까지 당하는 운명에 처해졌을까? 사실 사람으로 현현하면 때때로 이런 불미스러운 부산물마저도 감수해야 되거든. 나도 여기에 비밀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저쪽에선 절대 나한테 그 비밀을 털어놓으려고 하지 않아. 왜냐면 내가 무엇이 문제인지를 깨닫고서 '호산나'를 부르면 그 즉시 필수 불가결한 마이너스가 사라지고 온 세상에 건전한 상식이 판칠 테고, 그런 상황이라면 아무도 신문 잡지 따윈 구독하지 않을 테고 따라서 물론, 그런 걸 비롯한 모든 것이 끝장날 테니까 말이야.
사실 나도 알고 있다네, 내가 결국엔 화해를 하고서 나의 1000조 킬로미터를 끝까지 걸어간 뒤 비밀을 알아낼 것임을,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성내고 버티면서 마음을 다잡은 채 내게 주어진 소명을 이행할 것이네. 바로, 한 명이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 수천 명을 파멸시키는 것이지. 예를 들어, 그 옛날 옛적 나를 그토록 골탕 먹인 단 한 명의 의인 욥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영혼을 파멸시키고 또 얼마나 많은 명예로운 평판들을 치욕스럽게 만들었던가! 그래, 비밀이 밝혀지기 전까지 나에게는 두 개의 진리가 존재하는 셈이야. 하나는 저 세계의 것, 저쪽의 것으로서 아직은 내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진리이고, 다른 것은 나 자신의 진리이지. 그리고 어떤 것이 더 순수한지는 아직은 알 수 없는 거야…… 자네, 잠들었나?"
"여부가 있나." 이반은 표독스럽게 신음했다. "내 천성 속에 들어 있는 온갖 어리석은 것, 내 머릿속에서 이미 오래전에 단물 쓴 물 다 빼먹고 씹을 대로 다 씹은 뒤 썩은 고깃 덩어리처럼 내동댕이쳐진 이 모든 것들을 네놈은 무슨 새 소식이라도 되는 양 내 앞에 갖다 바치는군."
"이번에도 자네 입맛을 맞추는 데 실패했군! 그래도 난 문학적 표현까지 써 가며 자네를 유혹할 생각이었는데. 나의 이 하늘의 '호산나' 얘기, 사실 썩 괜찮지 않았나? 지금 이 하이네 풍의 신랄한 어조, 썩 괜찮지?"
"아니, 나는 절대로 네놈 같은 종놈이었던 적이 없었어! 어떻게 나의 영혼에서 네놈 같은 종놈이 태어났을까?"
지질학적 변동
"이보게 친구, 나는 매력이 철철 넘치고 귀여워 죽을 것 같은 러시아 도련님 하나를 안다네. 젊은 사상가에다가 문학을 비롯한 각종 세련된 것들을 대단히 애호하고 또 '대심문관'이라는 제목의 서사시를 쓴, 장래가 촉망되는 작가라네……. 내가 염두에 둔 건 오직 이 청년이야!"
"'대심문관' 얘기는 하지도 마, 그건 금지야." 이반은 너무도 수치스러워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 소리쳤다.
"뭐, 그럼 '지질학적 변동'은 어떤가? 기억나나? 마침 이것도 작은 서사시이지!"
"입 닥치지 못해, 안 그러면 네놈을 죽여 버릴 테다!"
"나를 죽이겠다고? 천만에, 미안하지만 말을 해야겠네. 이렇게 해서 나도 좀 기쁨을 누려 보자고 온 것이니까 말일세. 오, 나는 삶에 대한 갈망으로 전율하는 내 벗들의 열렬하고 젊은 꿈들을 사랑한다네!
지난봄에 자네는 여기에 올 채비를 하면서 '그곳엔 새로운 사람들이 있다.'라는 단정을 내렸지. '그들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식인(食人)이라는 원점에서 다시 시작할 생각을 하고 있다. 바보들 같으니, 내가 생각하기론 오직 인류의 내부에 있는 신에 대한 관념만을 파괴하면 되고, 바로 여기서부터 일에 착수해야 된다! 이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일단 인류가 하나같이 다 신을 거부한다면(나는 이 시대가 지질학적 시대와 나란히 평행선을 형성하면서 완성될 것이라고 믿는 바이다.) 이전의 모든 세계관이, 무엇보다도 이전의 모든 도덕률이 저절로 붕괴될 것이며 완전히 새로운 것이 도래할 것이다.
사람들은 삶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삶으로부터 취하기 위해 한데 뭉치겠지만, 이는 기필코 오로지 이 세계에서의 행복과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일 따름이다. 인간은 신성과 거인적인 오만함 덕택에 기고만장해질 것이며 그렇게 인신(人神)이 나타날 것이다. 이젠 자신의 의지와 과학의 힘으로 시시각각 무한히 자연을 정복함으로써 인간은 예전에 자신이 갈망했던 천상의 열락을 모두 대체해 줄 만큼 드높은 열락을 시시각각 맛보게 될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부활의 가능성이 없는, 그야말로 필멸의 존재임을 알게 될 것이되, 신처럼 오만하고 평온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는 너무도 오만하기 때문에 인생이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불평할 이유도 전혀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고, 이제는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자신의 형제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 사랑은 그저 삶의 순간만을 만족시킬 따름이지만, 그것이 순간에 지나지 않음을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삶의 불꽃은 강렬하게 타오를 것이니, 그것은 이전에 무덤 저편의 무한한 사랑을 갈망하며 타올랐던 그 불꽃만큼이나 강렬할 것이다.'…….뭐 등등, 이런 유의 얘기지, 정말 귀여워 죽겠다니까!"
그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
이반은 양손으로 귀를 꽉 틀어막고 방바닥을 내려다보며 앉아 있었지만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래도 목소리는 계속했다.
"나의 젊은 사상가의 생각은 이랬다네. '이제 문제는 이런 시대가 언제든 도래할 수 있을까, 없을까? 하는 것이다. 만약 도래한다면 모든 것이 해결되고 인류는 최종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뼛속까지 배어 있는 어리석음을 보건대 1000 년이 더 지나도 이러한 세계가 건설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진리를 의식하고 있는 사람 중 누구든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새로운 원칙에 따라 세계를 건설해도 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이다.
더욱이, 이 시대가 절대로 도래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어쨌거나 신과 불멸은 없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은 인신이 될 수 있으며, 설사 그런 사람이 전 세계를 통틀어 단 한 명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어쨌거나 그는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은 이상 필요하다면 예전의 노예와 같은 인간이 가졌던 온갖 도덕적 장벽을 가뿐한 마음으로 뛰어넘을 수 있다. 신은 법률의 구애를 받지 않으니까! 신이 나타날 곳- 그곳이 곧 신의 자리인 것이다! 내가 나타날 곳, 그곳이 지금 곧 제일가는 자리가 될 것이며…… 모든 것이 허용된다.', 이것으로 끝이다!
정말 하나 같이 귀여운 얘기라니까. 다만, 사기를 치고 싶었다면 진리의 승인 따위를 받을 필요가 어디 있나? 하긴, 요즘 러시아의 젊은 녀석이 다 이렇지 뭐. 진리라는 걸 얼마나 사랑하게 됐으면, 승인을 받지 못하면 감히 사기를 칠 엄두도 못 내니까 말이야……."
손님은 자신의 뛰어난 웅변에 도취된 나머지 점점 더 목소리를 높여 가며 비아냥 거리는 듯 주인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하지만 말이 채 다 끝내기도 전에 이반은 갑자기 탁자에서 찻잔을 집어 획 던져 버렸다.
"아, 하지만 이거야말로 바보짓이 아닌가, 결국!" 상대방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손가락으로 차 방울을 툭툭 털어 내면서 소리쳤다. "'루터의 잉크병'이 떠올랐나 보군! 자기는 나를 꿈으로 간주한다고 하면서 꿈을 향해 찻잔을 집어던지다니! 이거야말로 여자들이나 써먹는 수법 아닌가! 하지만 내 이럴 거라고 생각했어, 자네는 그냥 귀를 틀어막고 있는 시늉을 했을 뿐, 실은 다 듣고 있었던 게야……."
갑자기 마당에서 집요하게 창틀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반 표도로비치는 벌떡 일어났다.
"저 소리 안 들리나? 저건 자네 동생 알료샤가 아주 뜻밖의 흥미진진한 소식을 갖고 온 걸세, 내 장담하지!"
"입 닥치지 못해, 이 거짓말쟁이야, 저게 알료샤라는 걸 나는 네놈보다 먼저 알았어. 녀석이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단 말이야. 물론 녀석이 그냥 왔을 리는 없으니까, 물론 '소식'을 갖고 왔겠지……!"
"문을 좀 열어 주게, 얼른 열어 주란 말일세. 밖엔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고, 그 애는 자네의 동생이 아닌가. 이보게, 날씨가 어떤지 빤하지 않나? 이런 날씨엔 개도 바깥에 내놓지 않는 법인데."
노크 소리는 계속되었다. 이반은 창문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갑자기 뭔가가 그의 팔다리를 묶어 버린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가쇄를 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버둥거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점점 더 강해지고 또 커졌다. 마침내 갑자기 가쇄가 끊겼고, 이반 표도로비치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몹시 생경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양초 두 자루가 거의 다 타 버렸고, 지금 막 손님에게 집어 던졌던 찻잔 은 탁자 위, 자기 앞에 놓여 있고 맞은편 소파에는 아무도 없었다. 창틀을 두드리는 소리는 집요하게 계속되었지만 방금 그의 꿈속에서 귓전에 맴돌았던 것처럼 그렇게 크지는 않았고, 오히려 아주 절제된 것이었다.
"이건 꿈이 아니다! 천만에, 맹세코, 이건 꿈이 아니었어. 이건 모두 지금 실제로 있었던 일이야!" 이반 표도로비치는 이렇게 소리치면서 창문으로 달려가 통풍창을 열었다.
"알료샤, 너한테 오지 말라고 명령했잖아!" 그는 동생에게 광포하게 소리쳤다. "한두 마디로 잘라 말해. 왜 왔어? 한두 마디라고 했다. 듣고 있니?"
"한 시간 전에 스메르쟈코프가 목을 맸어." 알료샤가 마당에서 대답했다.
알료샤가 안으로 들어와 이반 표도로비치에게 전한 소식은 한 시간 남짓 전에 마리야 콘드라치예브나가 자기 집으로 달려와 스메르쟈코프의 자살을 알렸다는 거였다. “제가 사모바르를 치우려고 그분 방에 들어갔는데 그분은 벽에 박힌 못에 매달려 있었어요.” “신고는 했느냐?”라는 알료샤의 질문에 그녀는 아무에게도 신고하지 않고 ‘곧장 도련님한테 제일 먼저 달려왔고 오는 내내 열심히 뛰었다.’라는 것이었다.
알료샤가 그녀와 함께 그들의 오두막으로 달려가서 보니 스메르쟈코프는 여전히 매달려 있었다. 탁자 위에는 “아무에게도 죄를 돌리지 않기 위해 나 자신의 의지와 의향에 따라 내 생명을 끊는 바이다.”라고 쓴 쪽지가 놓여 있었다. 알료샤는 이 쪽지를 탁자 위에 그대로 내버려 두고 곧장 경찰 서장을 찾아가 모든 것을 신고했다는 거였다. 알료샤는 이반의 얼굴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서 “거기서 곧장 형에게로 왔어.”라며 말을 끝맺었다.
“형.” 하고 알료샤가 말했다. “형은 정말로 아픈 게 분명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야.”
이반은 생각에 잠긴 듯, 알료샤의 외침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사실 그놈이 목을 맸다는 건 알고 있었어.”
“누구한테서?”
“누구인지는 몰라. 그래, 그놈이 나한테 말했어. 그놈이 방금 전에 나한테 말해 주었지…….”
이반은 방 한가운데에 서서 여전히 그렇게 생각에 잠긴 듯 방바닥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그놈이라니, 대체 누구야?” 알료샤는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고 물었다.
“악마야! 그놈이 내 방을 들락날락했어. 두 번을 왔었지, 아니 거의 세 번이라고 해야겠군. 그놈은 나를 약 올렸어, 그놈이 불타 버린 날개를 단, 천둥 번개와 광채를 동반한 사탄이 아니라 그저 하찮은 악마라는 것 때문에 내가 화를 낸다면서. 하지만 그놈은 사탄이 아니야, 이건 그놈의 거짓말이야. 그놈은 참칭자(僭稱者)거든. 그놈은 그저 악마, 시시껄렁하고 하찮은 악마에 지나지 않아. 그놈은 목욕탕에 다닌대. 그놈의 옷을 벗기면 아마 길고 매끈한 꼬리가 나올 테고, 그 꼬리는 덴마크 개처럼 길이가 1아르신이나 되고 짙은 갈색일 거야……. 알료샤, 눈 속을 걸어왔으니 몸이 꽁꽁 얼었겠구나, 차를 좀 마시련? 뭐라고? 식었다고? 사모바르를 내오라고 할까? 이런 날씨엔 개도 바깥에 내놓지 않는 법인데……."
알료샤는 얼른 세면대로 달려가 수건을 적셨고 이반에게 다시 좀 앉으라고 한 뒤 물수건을 그의 머리에 얹어 주었다. 그러고는 자기도 그의 곁에 앉았다.
“아까 네가 리자에 대해 무슨 말을 했더라?” 이반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그는 몹시 수다스러워졌다.) “나는 리자가 마음에 들어. 내가 너한테 그 애에 대해 뭔가 추잡한 말을 했지. 그건 거짓말이었어, 사실 그 애가 마음에 들거든……. 나는 내일 카챠 때문에 걱정이 돼, 이게 제일 걱정이야. 그 여잔 내일 나를 내팽개치고 두 발로 짓밟을 거야. 내가 자기 때문에 질투에 사로잡힌 나머지 미챠를 파멸시키고 있다고 생각하거든! 그래, 그 여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절대 그런 게 아니야! 내일은 십자가의 날이지, 교수대의 날은 아니거든. 아니, 난 목을 매진 않을 거야. 알고 있니, 나는 자살 따윈 절대로 할 수 없는 놈이야, 알료샤! 비열하기 때문에 그럴까, 응? 하지만 난 겁쟁이는 아니야. 살고 싶은 욕망 때문이야! 그런데 스메르쟈코프가 목을 맸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그래, 이건 그놈이 나에게 말해 준 거야…….”
“형."하고 알료샤는 형의 말을 가로막았는데, 자기도 공포심에 숨이 넘어갈 것 같지만 어떻게든 이반이 정신을 차리게 하려는 희망을 아직 버리지 않은 듯했다. “그놈이 어떻게 내가 오기도 전에 형한테 스메르쟈코프가 죽었다는 얘기를 해 줄 수 있겠어, 아직 아무도 모르는 일이고 더욱이 그걸 알 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었는데?”
“그놈이 말했다니까.” 이반이 추호의 의심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확고하게 말했다. 그는 미친 듯 흥분하여 벌떡 일어나더니 수건을 걷어 던지고서 또다시 방 안을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알료샤는 얼른 달려가 의사를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지만, 형을 혼자 남겨 두는 것이 두려웠다. 형을 맡아 줄 만한 사람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이반은 시나브로, 그러다가 완전히 의식을 잃어 갔다.
알료샤는 베개를 가져와 옷도 벗지 않고 그냥 소파에 누웠다. 잠이 들어가면서 미챠와 이반을 위해 기도했다. 이반의 병이 어떤 것인지 차츰 이해되었다. ‘오만한 결단에서 우러나온 고뇌이며 또 심오한 양심이다!’ 형은 하느님을 믿지 않았지만 하느님과 하느님의 진리가 여전히 굴복하려 들지 않았던 형의 마음을 점령한 것이다. 이미 베개를 베고 누워 있는 알료샤의 머릿속에서 이런 생각이 스쳐 갔다.
‘그래, 스메르쟈코프가 죽어 버린 이상, 더 이상 아무도 이반의 증언을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형은 그래도 가서 증언할 것이다!’ 알료샤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하느님이 승리하실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은 진리의 빛 속에서 부활하든지, 아니면…… 자기 자신도 믿지 않는 것을 섬겼다는 이유로 자신과 모든 사람들에게 분풀이를 하며 증오 속에서 파멸하겠지.’ 알료샤는 쓰라린 마음으로 이렇게 덧붙인 뒤 다시금 이반을 위해서 기도했다.
<11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