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진로에 대한 고민

'연구자'라는 직업에 대한 생각

by 봄마을

첫째와 진로 이야기를 시작한 지는 제법 시간이 된다. 오는 9월이면 11학년, 한국식 분류로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나이인 만큼 진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할 때가 되긴 했다. 둘째와는 몇 달 전부터 조금씩 시작했다. 9월에 9학년이 되고 한국식으로는 중학교 3학년이지만 9학년부터 고등학교로 분류되고 공식적으로 진로에 대한 고민과 대학 준비가 시작되는 만큼 이제는 그런 대화를 시작할 때가 됐다.


아이들에게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는 "어떤 직업을 갖고 싶은지를 생각하기에 앞서 나는 어떤 성향의 사람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자"는 권유다. 그리고 아이들 자신이 생각하는 "나"와 내가 부모 입장에서 보는 "3자의 시선"에 비친 "너"를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이야기하는 성향이라는 건 대충 요약하면 이런 거다. 나는 경쟁에서 활력을 얻는지, 주목을 받는 게 즐거운지, 하고 싶은 걸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지, 남을 돕고 보살피는 게 좋은지, 칭찬을 받는 게 엄청난 활력을 주는지, 새로운 생각을 해내는 게 재미있는지 아니면 새롭진 않아도 정해진 루틴을 수행하는 게 마음이 편한지, 주위 사람들과 날 비교하는 경우가 많은지, 실패에서 스트레스를 받는지 아니면 실패와 무관하게 새로운 시도에서 재미를 느끼는지 등등. 어떤 과목을 잘하는지도 물론 중요한 고려 사항이기는 하지만 내가 말하는 건 그 이전에 고민해야 하는 더 아래에 깔린 부분이다.


아내와도 여러 차례 깊은 대화를 나눴는데 이 부분에서 서로의 의견 차이가 없어서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 각자의 생각이 아닌 '부모'로써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아이들에게 딱 하나 분명한 내 생각을 전했는데, 그건 대학을 필수 옵션으로 두지 말고 선택지로 둬야 한다는 것. 아이들에게 대놓고 이야기는 안 했지만 내가 두 아이들의 성향에 잘 맞고 삶의 만족도가 높은 직업이 될 거라 생각하는 분야들은 대학을 갈 필요가 없는 분야다. 난 솔직히 이 아이들이 대학을 가지 않고 일찌감치 성향에 맞는 일을 시작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아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들으시면 기겁을 하실테니지만 나와 아내의 생각은 그렇다. 아빠는 물리학 박사까지 했으니 넌 더 잘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할머니에게 들었던 첫째에게도 나중에 분명하게 말했다. 아빠의 박사 학위는 아빠 삶의 흔적일 뿐이지 네 삶의 지침이 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고. 먹고사는 게 힘들었던 과거 한국에서 물리학 박사는 그 자체만으로 밥 벌어먹고살 수 있는 길이 많았고 대우를 받았지만 시대가 달라지고 나라가 달라진 지금은 예제도 되지 못할 오래된 흔적이니 아빠의 삶을 네 삶으로 끌고 들어가려 하지 말라고 했다.


첫째는 Chemistry라고 하는 확고한 선호 과목이 있어서 어쩌면 대학을 가서 그 분야를 더 공부하겠다고 할 수도 있다. 아이가 이 분야를 먼저 경험해 보고 싶다고 해서 chemistry로 박사 학위를 받고 신약 개발을 하고 있는 후배에게 도움을 청했다. 다가오는 여름 방학 때 그 후배가 첫째 아이를 데리고 고등학생이 할 수 있는 주제로 페이퍼를 같이 써보기로 했는데 페이퍼 자체보다 그 후배가 아이와 시간을 보내며 해 줄 이야기들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


Computational Chemistry가 (혹은 내가 했던 computational physics 역시) 보편화된 지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났고 이제는 여기에 더해 인공지능이라는 도구와 온갖 페이퍼가 공개되는 세상이니만큼 이제는 research를 취미로 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내가 박사 과정을 하며 펀딩을 받아 구축했던 소형 클러스터 수준의 컴퓨팅 리소스는 이제 개인도 충분히 접근 가능하다. 아니,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훨씬 고성능 컴퓨팅 자원을 개인이 쓸 수 있는 시대다. 내가 20대 때 취미로 코딩을 했듯이 내 아이들은 관심만 있다면 취미로 research를 하게 될 거라 생각한다. 아, 물론 분명한 과학자들의 영역이 여전히 존재하기는 하겠지만 지금 엔트리급 연구자들의 영역은 '연구자' 타이틀이 없는 개인이 취미로 할 수 있는 시대가 됐고 그 변화의 속도는 더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이가 '좋아하는' 분야에 '탁월한 재능'이 없다면 그 분야에 인생을 걸기보다는 좋아하며 할 수 있는 '취미 생활'로 남겨 놓는 것도 좋은 선택지다. 나처럼 탁월한 재능이 없으면서 단지 해당 분야가 연구자들 이외에는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박사 학위를 받고, 그걸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났으니까.


나는 첫째가 내 후배와 시간을 보내며 인공지능과 잘 마련된 오픈툴을 이용해서 최신 연구 동향을 추적하고 공부해야 할 문헌을 찾고 의문이 생기는 부분에 대해 리서치를 실행하는 일련의 과정이 개인 차원에서 제법 많은 부분을 할 수 있다는 걸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연휴의 중간, 시간이 많은 아침을 보내다 보니 생각이 많고 글이 길어졌다.


어쨌든 난 아이들이 기계적으로 대학을 진학하기보다는 자신의 성향을 잘 고민해 보고 밥벌이 수단과 즐거운 취미 활동 사이에서 균형 잡힌 삶을 살기를 바란다. 성인이 되기 전에 삶의 다양성을 느끼고 깨닫고 선택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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