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홀이라는 당장이라도 애국가가 흘러나올 것 같은 이름을 갖고 있던 삼성전자 기흥 사업장의 식당 복도에는 내가 퇴사하기 한두해 전부터 미술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유명한 작품들의 모조화였는데 식당을 나서다 말고 가끔 멈춰 둘러보곤 했다. 특히 혼자 밥을 먹어서 동료의 발걸음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는 아침이나 저녁시간이 그런 여유를 부리기에 가장 좋았다.
내가 삼성전자를 다녔던 마지막 1년여간은 무궁화홀 복도에 Mark Rothko의 작품으로 전체를 통일해서 십여점 전시되어 있었는데 특히 좋아하는 작가중 한명이여서 식당을 가는게 즐겁기까지 했다. 거기다 작품들이 모두 큼지막한... 실화 크기여서 더욱 좋았다. 여러 유명한 작가들의 대표작을 짜집기한 컬렉션이 아닌 한 작가의, 한 시리즈로 이루어진 컬렉션이 주는 느낌은 그 전시를 기획한 기획자가 누군지 궁금할만큼 강렬했다.
Orange and Yellow, Mark Rothko, 1956
하루는 퇴근을 하기 위해 회사를 나서다 하늘에 걸린 석양을 보고는 그길로 발길을 돌려 다시 게이트를 지나 식당까지 찾아가서 한참을 그의 작품을 바라보기도 했다. 많은 인내심을 사용해야 했던 날이었고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는 고민들이어서 어디로 발걸음을 옮기기도 쉽지 않은 날이었다. 술자리로도, 집으로도.. 그 어디로도. 하지만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마음의 위안을 식당의 그 그림에서 그날 차고 넘칠만큼 얻었었다.
지금 혈압을 재면 무조건 고혈압 진단을 받을 것 같다. 조금전부터 거세지기 시작한 심장 박동은 그 정도와 속도를 늦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일주일 전 실수가 있어서는 안되는 두가지 업무를 팀원에게 지시했는데 지금 확인해 보니 한가지는 업무 지시 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해서 아직 시작하지 않았고 다른 하나는 잘못 처리가 됐다. 당사자도 상황을 깨닫고 really sorry 를 연발하는데, 이미 꼬여버린 상황은 그의 마음이 어떤지에 관심을 쓸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오히려 sorry 라고 할 때마다 속에서 짜증이 올라온다. 이럴 땐 직접 얼굴 보지 않고 일을 처리하게 되는 remote 근무 환경인게 차라리 더 낫다는 생각도 든다. 그저 화를 내봐야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만 수없이 반복해서 중얼거리며 키보드를 두드릴 뿐.
어떻게든 이 일이 지연되지 않고 처리가 될 수 있도록 여러가지 다른 task 들의 우선 순위 사이에서 복잡한 춤을 추고 나니 진이 빠진다. 그리고 갑작스런 분노가 치솟는다. 이렇게 일을 꼬이게 만들다니. 사실 조율 했다고는 하나 그저 문제 없이 처리되기만 바랄 뿐 기한내 완료 된다는 장담은 할 수 없다. 몇번의 이메일이 사람들 사이에 오가고 모두가 문제와 이후 해결 방향에 대해 인지했다는 것을 확인한 뒤 잠시 outlook 을 끄고 뒤로 물러 앉았다.
그리고 피난처인 것 마냥 Mark Rothko의 그림이 생각났다.
지나치게 신경이 곤두서 있을 땐 차라리 바디감 있는 와인이 한 잔 생각나듯, 속 시끄럽고 마음이 복잡할 땐 부담스러울 만큼 강렬하고 단순한 Rothko의 그림이 떠오른다. 보고 있으면 그리고 잠시 시간이 지나면길게 한숨을 내쉴 수 있을 만큼 마음이 진정이 된다.
실수는 개인이 하지만 책임은 조직이 져야 한다.
삼성전자 시절 팀원들의 잘못이나 실수에 왜 화를 내지 않느냐는 주위의 질문에 입버릇처럼 대답했던 말이었다. 실수는 개인이 할 수 밖에 없다. 사람이니까. 그런데 그렇다고 그 개인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된다. 책임은 조직이 져야 한다. 잘못된 일의 책임을 개인에게 미루면 조직의 존재 의미가 사라지니까.
지금이라고 저 생각이 달라졌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왜 지금은 부서원의 실수를 놓고 이렇게 화를 가라앉히지 못해 힘들어 하는지 의아해진다. 이민자로써 실수 없이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일까? 아니면, 개인과 조직 사이의 관계가 한국 회사와 많이 다른 미국 회사에서 일하면서 생각이 바뀐 것일까? 알 수 없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하나를 선택해 보자면, 내가 아직 미국 회사에 동화되었다고 볼 수 없으니, 분명 전자이리라. 내가 갖고 있는 이민자로써의 불안감과 조바심 같은 것. 그런데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고 나면 뭔가 입맛이 쓰다. 내가 알던 그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