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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마을 Sep 29. 2021

영화 감상평: 미나리

영화 '미나리' 를 봤습니다. 자칫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가급적 영화의 줄거리 설명 없이 몇가지 감상평을 올립니다. 그리고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몇가지 배경 지식도 함께 말이죠. 스포일러는 없지만(음... 생각해보니 약간 있기는 합니다), 사전 정보 없이 미나리를 볼 계획인 분들은 뒤로가기를 누르시기를 권합니다.





미나리는 한국 영화가 아니다


저는 이 영화가 한국계 이민 가정이 미국 이민 후 정착을 하는 과정에 대한 서사가 주를 이루는, 한국 이민자에 대한 한국 영화라고 고정 관념을 갖고 봤습니다. 그런데 보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더군요. 이민 가정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들 개인의 서사를 따라 영화가 흘러가기는 하지만 정말로 감독이 카메라 앵글을 맞추고 있는 건 그들을 둘러싼 미국의 현실이었습니다. 한국계 감독이 연출했고, 한국 배우들이 등장했고, 주인공들이 한국 이민자라는 영화 설정을 했기에 한국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더군요. 어떤 영화의 등장 인물 중 어린아이가 있다고 해서 아동 영화가 아니듯, 이 영화도 한국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다 보고 나서 왜 미국 내에서 이 영화를 외국어 영화로 분류한 것에 대한 반대 여론이 있었는지 이해가 갔습니다. 미나리는 철저하게 미국인의 삶을 그린 미국 영화입니다.



흔한 단어, 이민자


한국에서는 이민자가 무척 드뭅니다. 그래서 이민자가 된다는 것에 대해 자신이 무척 소수가 되고 고립된 존재가 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큽니다. 하지만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이민자의 나라 라고 불리는 미국에서는 상황이 다릅니다. 이민자가 없는 커뮤니티/지역이 없습니다. 본인이 이민을 왔거나, 여기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이 이민자거나, 어렸을 때 부모님 손을 잡고 이민을 왔거나 한 사람들이죠. 하다못해 할아버지/할머니 세대까지 따져보면 정말 많은 이민자들이 주위에 살고 있습니다. 2차대전 시기 정말 많은 유럽인들이 이민을 왔거든요. 그래서 미나리에서 한예리의 가족이 이민자라는 사실 자체는 그들에게 특이한 소재로 작동하지 않습니다만, 그들이 보여주는 삶의 모습은 미국인들에게 이들을 미국에서의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라는 동질감을 줍니다. 적어도 그들이 그랬고, 그들의 부모들이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아칸소로 터를 잡기 위해 가는 영화의 시작은 미국인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끼게 합니다. 한국인들이 별다른 감흥 없이 보게 되는 그 시작 부분 말이죠.



Arkansas, Arkansas, Arkansas


한국인들에게 이 영화는 무척 불친절 합니다. 그럴수 밖에 없는게 미국인을 위한 영화이기에 미국인이라면 당연히 알만한 것들은 설명하지 않고 있거든요. 그리고 그게 이 영화의 매력적인 장치이기는 합니다. 알고는 있지만 외면하고 있던 사실을 누가 설명해주는게 아니라 스스로가 이미 알고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깨닫게 해주니까요.


아칸소는 미국에서도 살기 척박한 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언론들이 best / worst 를 꼽을때면 살기 힘든 곳으로 항상 상위권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이곳의 자연 환경 자체는 무척 온화하고 물가도 낮습니다. 더구나 1900년대 초반, 아칸소는 American Dream 의 상징과 같은 곳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이곳이 one of the worst.... 가 되었을까요?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잠깐 다른 영화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40대 이상의 분들이라면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 주연한 영화, Far and Away 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영화는 영국 귀족이었으나 몰락한 후 미국으로 넘어온 섀넌과 영국 하층민으로 살다 미국으로 넘어온 조셉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영국에서의 신분 차이는 있었지만 이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땅을 차지하기 위한 경주에 참가합니다. 네? 땅을 차지하기 위한 경주라구요? 미국 역사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은 이 부분에서 물음표를 가질 수 있습니다만, 영화적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말 달리는 톰 크루즈. 이 글에 굳이 이 사진을 넣을 필요는 없지만, 제가 워낙 좋아하는 장면이라 넣었습니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인 이 장면은 정말 웅장했습니다.


이 영화는 Land Run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1890년대, 농작물을 키우기에 최적화된 날씨와 기름진 넓은 토지에 반해 여기서 농사를 짓고 살 사람..그러니까 개척자의 수가 부족하던 미국은 아이디어를 냅니다. 누구든(미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상관없이) 미국에 와서, 경주를 해서 각 포인트마다 꽂혀 있는 깃발을 차지하면 그 일대의 토지 소유권을 준다고 말이죠. 이 경주를, Land Run 이라고 불렀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Land_run


Silver gelatin prints on 6 x 8.75 in. mounts with manuscript titles: "One Minute Before the Start"



Far and Away의 영화속 배경은 오클라호마Oklahoma 에서 벌어졌던 Land Run 1893지만 비슷한 시기 오클라오마 뿐만 아니라 캔자스, 오클라호마, 아칸소 등 남부 지역의 많은 곳들이 이런식으로 토지 소유권이 많은 사람들에게 주어졌고 그들의 절대 다수는 정착하여 농장을 만들고 살기 시작합니다. 180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반까지 그렇게 이 지역은 이민자들에게, 그리고 가난한 미국인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의 성지와 같이 취급 받습니다. 경주라고는 하지만 사실 너무나 땅이 넓어서 경주 참가자의 많은 수가 땅을 차지할 수 있었고(이곳은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농작물이 잘 자라는 날씨와 토질 덕분에 많은 수확량으로 부를 쌓을 수 있었으니까요.


한편으로는 강도를 당해 보안관을 부르더라도 너무 땅이 넓어 며칠 뒤 도착할 정도의 이런 곳에서 나와 내 가족을 지킬 총기 소유가 합법화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미지의 땅에, 아무런 인프라도 없는 황무지에서, 도둑질을 하는 무법자들의 습격을 받기도 하지만 용기를 갖고 말을 달려 내 가족을 위한 땅을 일구고 손에 든 총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내는 전형적인 아메리칸 드림은 바로 이들 지역에서 시작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문제는 1920년대를 중심으로 Roaring twenties 라고 불릴 정도로 급격하게 진행된 산업화의 물결이었습니다.


소규모 농장 중심의 경제 구조를 갖고 있던 이들 남부지역 주들은 이런 변화의 물결에 올라타지 못합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지요. 변화는 해안가 대도시들로부터 시작이 됐고 통신도, 교통도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그런 변화의 물결이 남부까지 도달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으니까요. 여기에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기업형 농장들이 등장하고 남미와의 농산물 무역이 활성화 되면서 이들 소규모 자영농들은 급격하게 무너져 내립니다. 농작물을 수확해도 판로를 찾기 어렵고, 판로를 찾아도 제값을 받기 어려웠습니다. 이런 상황은 계속 악화되어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들 지역은 못사는 지역에 병원과 같은 필수 인프라도 부족한 곳으로 미국인들 사이에서 각인 됩니다. 아마 그런 이미지 자주 보셨을 겁니다. 언제 수리한게 마지막인지 의심스러운 낡은 헛간과 목조 주택앞에 완고해 보이는 백인 농부가 총을 무릎에 올려놓고 흔들 의자에 앉아 있는... 그런데 신기할만큼 넓은 농토를 보유한 농장들에 대한 이미지 말이죠(땅이 부의 상징인 한국인 입장에서 특히 이해가 안가죠). 영화에도, 소설에도 자주 나오지요? 그들이 바로 아칸소 농부들입니다.


더구나 1980년에는 ICBM기지 347-7 Base에서 이 핵미사일의 폭발 사고가 있었는데, 하필이면 이 기지가 아칸소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1980_Damascus_Titan_missile_explosion



정부에서는 괜찮다고 발표 했으나 힘든 삶에 지쳐있던 농부들에게 치명타였습니다. 우리가 후쿠시마산 농수산물을 기피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으니까요. 1900년대의 시작과 함께 불타 올랐던 미국 남부 지역의 아메리칸 드림은 불과 두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주로 전락하면서 순식간에 꺼져 버렸습니다.


미국인들에게 아칸소는, 특히 1980년대 아칸소는 이런 이미지입니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바로 그런 곳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가는 것이죠.



감독이 말하지 않는 것들


미나리는 이런 배경을 인지하고 있는 이들에게 어필하는 영화의 시작을 그렸습니다. 영화는 한예리의 가족이 아칸소로 가는 자동차에서 시작합니다. 자동차를 사랑하는 미국인들은 차를 보면 대략 그게 언제쯤 생산된 차인지 압니다. 마치 우리가 현대 자동차의 포니를 보면 정확한 연도 까지는 몰라도 대략 1980년대 전후 어디쯤.. 이라는 추정을 할 수 있는 것 처럼 말이죠. 가족들이 타고 가는 차를 통해 관객들은 이 영화의 배경이 1980년대라는 것을 바로 깨닫습니다. 그리고 한국어를 통해 이민자라는 것을 바로 깨닫죠. 이들이 가족 농장을 하려 한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감독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들이 향하는 지역이 아칸소라는 것도 바로 알려줍니다. 이제는 몰락해 버린 아메리칸 드림의 성지 말이죠. 영화 시작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관객들은 이 가족의 삶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벌써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 벌어지는 일들이 안타까울지언정 놀랍지는 않습니다.


대신 불편한 진실을 되새김질합니다. 이민자에게 열린 기회의 창, 아메리칸 드림을 꿈꿀 수 있는 나라 미국은 더 이상 없다는 걸 말이죠. 감동은 관객들이 그 사실을 누군가에게 듣는게 아니라, 본인이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영화를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아칸소로 가면 힘들게 살아야 할텐데...' 하고 말이죠.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조차 관객들은 이 가족의 앞날이 밝지 않다는 걸 압니다. 1980년대면... 오일쇼크 이후 어떻게 미 중부 지역의 중소형 자영농들이 철저하게 빈곤층으로 전락했는지 이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요.


가족중 한명이 병으로 쓰러졌을때도 한국인들은 안됐다.. 힘들겠다.. 정도로 생각할 수 있지만 미국인들이 이 지점에서 느끼는 절망감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오바마케어도 없던 시절, 이 지역 자영농들이 의료보험을 갖고 있을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돈이 있더라도 병원이 너무 멀리 있어 치료가 만만치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요. 더구나 할머니를 미국으로 모신 이유가 한국에 혼자 남겨뒀다는 부채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부가 모두 일을 해야 해서 아이를 케어해 줄 사람이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이기도 한 상황에 그 할머니가 쓰러졌으니 아이들을 케어하기 위해 부부중 한명이 일을 그만둬야 하는 건 물론이고 예상치 못했던 할머니의 병원비와 간병비를 부담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더해 영화의 시작부에서 가족간의 다툼을 통해 이미 감독을 말했습니다. 아이에게 심장질환이 있다고 말이죠. 설상가상. 비슷한 상황에서 막대한 병원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농장을 압류 당하고 파산하는 남부 지역 자영농들은 이제 신파극의 소재로 쓰이기도 민망할 만큼 미국 사회에서는 진부한 이야기입니다. 영화에서 한예리 가족이 겪는 일은 유별나게 힘든 삶을 살아내는 이민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미국을 살고 있는 모든 '미국인'들의 이야기인거죠.



감독은 영화의 시작을 갑작스럽게 합니다. 도입부의 상당 부분을 이후 벌어질 서사의 배경 설명으로 사용하는 다른 영화와 달리 주절주절 떠들지 않고 바로 이야기의 핵심으로 자르고 들어갑니다. 대신 관객에게 말합니다. "내가 알려주지 않아도, 너 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알지?" 하고 말이죠. 영화의 결말을 내주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관객에게 말하죠. "내가 굳이 여기에 보여주지 않아도, 넌 이들의 남은 삶이 어떻게 될지 알잖아?" 하고 말이죠. 말해주지 않아도 관객들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던 미국의 역사와 사회에 대해 떠올릴 수 밖에 없습니다. 영화의 시작부터 클라이막스까지, 관객들은 통렬하게 미국의 현재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걸 아프게 되새김질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영화에 대한 미국인들의 극찬은 바로 이런 영화적 장치들에 의해 나온 것이라고 이해됩니다.


불편한 진실은 누군가 말해줘도 무시할 수 있습니다. 일부러 외면하고 있는 진실이기 때문에 외부의 목소리는 오히려 무시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스스로 이미 알고 있음을 자각하는' 상황이 되면 그것만큼 아픈 순간이 없습니다. 미국인들은 영화 미나리를 보며 감독이 말하지 않은 부분에서 그 불편한 진실을 꺼내들 수 밖에 없습니다. 감독은 가타부터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관객들은 생각해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감독이 말하지 않은, 한예리가 겪을 것으로 예상되는 미국 사회의 가장 처절한 실패에 대해 말이죠. 처절한 삶이 가져온 과도한 복음주의 정신을 넘어 미신(엑소시즘)과 유사과학(수맥 찾기)에 매달리게 만들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어 버린 아메리칸 드림 말입니다.


한국인들에게 이 영화의 결말부가 불편한 건 이 때문입니다. "가족의 끈끈한 정과 사랑으로 온갖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마침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류의 확실한 결말을 보여주지 않거든요. 국제시장이 그랬듯, 눈물 펑펑 쏟으며 아픈 지난 시절을 돌이켜 보다가 어쨌든 지금은 그래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눈물 지으며 아름답게 미소를 짓는 자기 만족을 위한 장치가 결말에 없습니다. 대신 그 결말은, 희망을 놓지 않는 스크린 속 인물들과 달리 스크린 밖에서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해피엔딩 따위 없다는, 그 서글픈 결말은 관객의 머리속에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머리속엔 그런 장치들을 이해할 수 있는 미국 역사에 대한 지식과 사회에 대한 경험이 없으니 '뭐야 이게'는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래서 한국 영화 평론 사이트에서 '가족간 사랑을 통한 힐링' 영화라는 의견들이 나오는 건 이런 상태에서 억지로 뭔가 익숙한 한국 영화식의 의미를 찾아내려 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영화의 마지막을 어떻게든 희망과 이어보려는 시도는 무의미합니다. 영화는 그런 결말을 이야기 하지 않으니까요.




미나리


그리고 미나리가 등장합니다. 영화의 이해를 위한 많은 소재들을 일부러 설명하지 않고 플롯에 녹여낸 정이삭 감독과 주연 배우인 스티브 연은 굳이 미나리라는 소재 만큼은 인터뷰를 통해 의미를 정확히 설명합니다. 땅에 심고 1년은 지나야 먹을 수 있게 자라는 미나리, 땅과 물을 정화하는 능력이 있는 미나리는 자신에게 가족의 사랑을 뜻하며 동시에 자녀 세대의 보다 나은 미국에서의 삶을 위해 희생하는 1세대 이민 가정 부모들을 의미한다고 말이죠. 이보다 더 한국적인 소재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제가 미나리는 한국 영화라는 선입견을 갖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미나리가 한국 영화였다면 지극히 한국적인 소재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지 않고 미국적인 소재에 대해 설명했겠지만 이 영화는 반대입니다. 미국인이라면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는 내용은 인터뷰든 영화에서든 설명하지 않고 대신 미국인들이 모르는 미나리에 대해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합니다. 철저히 미국 영화인거죠.


미나리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랍니다. 극중 등장 인물들 역시 불평하고 다투고 힘들어 하지만 현실에 좌절하고 포기하는 대신 묵묵하게 제 갈 길을 갑니다. 미신에 매달리고, 유사과학에 빠질만큼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이 되지만 그럼에도 현실을 감당해 가며 앞으로 걸어갑니다. 힘들지만 꿈과 희망에 가득차있다는게 아니라, 그냥 포기하지 않고 견뎌낸다는 뜻입니다. 마치, 척박하고 오염된 땅에서 그 땅을 정화해가며 자라나는 미나리처럼 말이죠. 그리고 그 장치를 통해 감독은 다시 묻습니다. 아메리칸 드림이 미국이라는 땅에 있는 것인지,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정확히는 그들의 손길이 닿은 그 자리에 있는 것인지 말이죠. 이곳이 꿈과 희망이 가득한 땅인건지, 아니면 포기하지 않고 버텨낸 이들이 정착한 땅인건지 말이죠. 만일 후자라면, 아메리칸 드림이 이제는 더 이상 없다고 할 수 있는건지 또 한번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역시 답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직접 그 삶을 살아낸 정이삭 감독은 너무나 잘 알고 있겠지요. 각자에게 각자의 답이 있을 뿐 정답은 없다는 걸 말이죠.


예리의 가족은 한국 문화에 대한 정체성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미국 주류 사회와의 갈등도 영화에 보이지 않습니다. 주류/비주류 인종간의 갈등, 민족/문화적 차이에 의한 갈등을 감독은 무시해버리고 있습니다. 주어진 험난한 현실 앞에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들은 '여긴 원래 이렇게 xx 한거야?' 또는 '나만 이거 불편해?' 와 같이 미국이라는 사회와 한국 사회를 비교해가며 부당하게 느끼는 것들을 찾아내지 않습니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현실에 최선을 다 할 뿐이지요. 감독 본인의 삶에서 가져온 이야기라는 걸 놓고 보면 일견 부럽기까지 합니다. 극중 어린 자녀인 정이삭 감독의 눈에 비친 부모님의 삶이 분명 힘들지만 정감독에게 고통스럽거나 돌이켜보고 싶지 않은 기억이 아니니까요. 힘들게 살았다는 그 사실을 담담하게 인정하면서도 이렇게 추억할 수 있다는게 부러웠습니다. 억지로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추억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죠. J.D. 밴스가 쓴 '힐빌리의 노래' 를 읽으면서 느낀 감정과 비슷했습니다. 제 아이들은 수십년 시간이 지난 후 지금 오늘을 어떻게 기억할까요.



며칠 전 아내와 이민자로써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하며 그런 대화를 했습니다. 이민의 목적이 무엇이든, 와서 어떤 삶을 살든 관계없이 이민자들은 최소한 자리에 주저 앉아서 닥쳐올 일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아니라구요. 감나무 아래에서 입을 벌리고 있기 보다는 나무를 한번 걷어차 보기라도 하는 성격들인거죠. 그 결말이 항상 해피엔딩은 아닐지언정, 그런 도전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감나무를 걷어차거나 흔들어 보는 사람이 입을 벌리고 있는 사람보다는 감을 먹을 확률이 높을 겁니다. (감이 땅에, 또는 얼굴에 떨어지는 불상사도 있겠지만..)


그래서 저는 오늘도 감나무를 한번 더 걷어차 봅니다. 감이 떨어지기를 기대하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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