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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마을 Sep 19. 2021

한국의 앞마당. 미국의 front yard.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 전에 마당으로 나가서 잔디밭 위를 거닐며 둘러보고는 합니다.


사실 제가 사는 이 집에 딸린 앞 뒤 공간을 한국어로 마당이라고 말하기는 조금 애매합니다. 한국어에서 말하는 마당 혹은 뜰 은 주택에 딸려 있기는 하지만 풀이 나 있지 않은 깨끗하고 단단하게 다져진 흙바닥으로 이루어진 공간을 말하니까요. 그리고 담장 안에 있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누군가를 맞이하는 교류의 장이고 대화의 장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한국 주택에서는 대문을 지나 대청마루에 이르는 그 넓은 마당이 외부에서 찾아온 이를 맞이하는 공간으로 쓰입니다. 교류의 장소가 '선'이 아닌 '면'이라는 의미로 해석도 가능하지요. 큰 잔치가 벌어지면 앞마당에 판을 벌려놓고 손님을 대접하기도 하는데 결국 앞마당은 담장 안에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이면서 동시에 교류의 공간이며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이 마당이라는 개념은 개인 주택뿐만 아니라 관청에도 동일하게 구성되어 있어(심지어 궁궐까지) 한국의 모든 만남과 교류의 장은 선이 아닌 면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를 방증이라도 하듯, '마당극', '마당놀이'와 같이 사람들을 한 공간/장소에 모아놓고 하는 공연의 이름에도 쓰이며 단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형이상학적인 공간 또는 상황을 지칭할 때도 마당이라는 단어를 채용하지요. (지금 이 마당에 그거 따지게 생겼어?/ 마당 벌어졌는데 솔뿌리 걱정할래?) 손님이 없더라도, 가족끼리 무언가를 할 때도 뒷마당보다는 앞마당에서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살았던 주택도 수도부터 개집까지 모든 게 앞마당에 있었습니다.


한국식 앞마당. 담장 안에 있으며 일상의 중심이다.


미국 주택의 front yard는 이와 다릅니다. 한국과 달리 흙이 아닌 잔디로 덮여 있으며 만남이나 교류의 공간으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집을 찾아갈 때는 보통 마당을 지나쳐서 주택의 현관으로 바로 직행하며 방문자와의 대화는 현관에서 이루어집니다. 이처럼 면이 아닌 '선'을 사이에 놓고 하는 그 교류가 대부분의 미국 주택이 현관에 투명한 이중문을 가진 이유를 설명해준다. 재미있는 것은, 이 Front yard가 열린 공간이고 쉽게 오갈 수 있는 장소이나, 직접적인 초대나 목적이 있지 않고는 발을 들이지 못하게 막는 무언의 장벽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의 주택은 방문객이 마당에 이르기 전 바로 대문을 두드릴 수 있으나 미국의 주택의 경우 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는 한 front yard를 지나쳐 현관까지 걸어오는 그 공간이 심리적인 장벽으로 동작합니다. 굉장히 gentle한 장벽이랄까.


미국식 front yard. 집 밖에 있으며 방문객에게 일종의 심리적 장벽처럼 작용해서 쉽게 가로지르기 어렵게 만든다.


그러다 보니 미국 가정에서는 손님을 초대해서 파티를 하거나 가족들과 야외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더라도 front yard에서 하지 않고 외부의 시선이 닿지 않는 back yard에서 합니다. 손님맞이는 현관이라고 하는 좁은 선에서 이루어지고 교류는 back yard라고 하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셈이죠. 아이들과 놀더라도 back yard에서 하지 front yard에서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front yard의 거의 유일한 역할은 내 집의 '현관'과 외부 사이의 완충제라 봐도 무방합니다. 잔디를 가꾸고 꽃을 심는 것은, 그 완충 공간을 보기 좋게 가꾸는 것이지 어떤 다른 용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에 지어지는 미국 주택의 경우 앞마당의 크기를 줄이는 경우도 자주 보이는데, 어차피 활용도가 별로 없는 공간이다 보니 차라리 여기를 줄이고 직접적인 활동과 교류의 장인 back yard를 넓게 가져가는 것이죠. (집에 따라 뒷마당 공간이 모자라면 앞마당에서 아이 생일파티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국 한국의 앞마당은 내 개인적인 공간을 손님에게 일부 내어주면서 교류의 장으로 활용되는 곳이고, 미국의 front yard는 내 개인적인 공간과 외부를 나누는 대단히 부드러운 울타리로 활용되는 곳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나고 자란 제게 있어 front yard는 어딘지 모르게 한국의 앞마당과 그 의미가 비슷하게 다가옵니다. 내 front yard가 그들에게 울타리로 보이지 않고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교류의 장으로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니까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이나마 한국식 앞마당을 가진 집에서 살아본 기억을 가진 마지막 세대가  나이대의 사람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장 우리 집 아이들만 해도 한국에서는 아파트에서만 살았고 미국에 와서야 마당을 경험했으니 이 아이들이 기억하는 마당은 미국식 마당이지 한국의 마당은 아닐 테니까요. 어딘가 좀 아쉽습니다. 주택의 앞마당이라는 게 책으로 읽어서 배울 수 있는 문화와 경험이 아닌 만큼 앞으로도 알기 어렵겠지요. 앞으로 미국에서 살아갈 확률이 매우 높은 이 아이들이 제가 기억하는 한국의 문화를 제 수준으로 알 필요는 분명 없겠지만 그냥 아쉽습니다. 제 어린 시절의 정말 좋았던 기억이고 문화인데, 제 아이들은 알지 못한 채로 자라야 한다는 사실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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