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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마을 Jul 30. 2021

위스키 한잔 그리고 주절주절

*2020.2.15.


얼마 전부터 회사에서 엔지니어들을 대상으로 금요일마다 기술 세미나를 하고 있습니다.


시작은 별 것 없었습니다. 제 분야에 대해 회사 내에 딱히 전문가라고 할만한 사람이 없어서 제가 온갖 상황에 불려 다니는 걸 좀 피해보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만큼 회사 내에 포지셔닝이 잘 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별 시답잖은 것까지 전부 연락이 와서 막상 제가 해야 하는 일을 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최소한의 기초 정도라도 개발팀과 품질팀 엔지니어들에게 가르쳐 주면 최소한 '이게 도대체 뭐냐'라는 수준의 문의는 줄어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강의 같이 딱딱한 건 싫고, 서로 부담스럽지 않은 부드러운 세션으로 하면 좋겠더군요.


그래서 고민 끝에 매주 금요일마다, 점심시간에, working lunch 세션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보스에게 매주 금요일마다 세미나 참석 인원들에게 점심을 제공해 준다면 내가 기술 세미나를 한 시간씩 하겠다고 제안을 했습니다. 보스가 오케이 하더군요. 그게 작년 크리스마스 즈음이었습니다.


연휴가 끝나고 1월이 되자마자 세미나를 시작한다고 팀에 공지를 띄우고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어제까지 다섯 번의 세션을 소화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제가 필요해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효과를 좀 보고 있습니다.


우선, 매주 금요일 오전이 되면 주문할 음식을 놓고 온갖 요청이 제게 쏟아집니다. 제가 메뉴를 결정하거든요. 다들 똑같은 음식을 두 번 연달아 먹는 게 싫다며 서로 이거 시키자 저거 시키자 하면서 말들이 많은데 자연스럽게 제가 그 대화의 중심에 서게 되어 동료들과 대화가 많이 늘었습니다. 그러면서 전보다 확실히 더 친해졌습니다. 사람들에게도 저는 평소 말이 없이 조용한... 혼자 왔다 갔다 하는 아시아계 엔지니어로 인식되었다가 휴게실에서 커피를 내리며, 오가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이야기할 거리가 있는, 그리고 원하는 메뉴를 관철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화를 해야 하는 존재로 바뀌었습니다.


두 번째는 이름과 얼굴을 아는 직원들의 수가 정말 많이 늘었습니다. 전에는 업무적으로 긴밀하게 협업하는 몇 명을 빼면 잘 몰랐는데 이 세미나에 대해 듣고 참여하는 엔지니어들의 수가 정말 많이 늘어났고 세미나 하면서 계속 대화를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이름을 알게 되고, 얼굴과 매치하게 되더군요. 이번 주에는 PM들도 몇 명 참석했더군요.


여기도 다 사람 사는 동네고, 사실 사람 사이 일은 어디나 똑같습니다. 대화 자주 하고, 얼굴/이름 알면 상황 끝나는 거죠. 그 사람들도 제가 좀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지 지나가다 제 오피스에 들려서 시답잖은 농담 한마디 하고 가는 경우가 늘었습니다. 그렇게 아는 사람이 늘고 대화를 많이 하며 각자에 대한 개인적인 일들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모두에게 해피(?) 한 효과인데.. 세미나가 금요일마다 있는 이벤트처럼 되면서 한주의 업무를 마감하는 신호탄 같은 역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세미나가 보통 1시 반에 끝나는데 세미나 끝나고 나면 다들 조금 느슨해져서는 주말에 뭐할 건지 잡담하고, 공부했으니 머리 식혀야 한다며 휴게실에서 커피 내려서 손에 들고 수다 떨고... 하면서 퇴근 준비를 합니다. 어제는 보스가 팀원들을 찾아 휴게실로 와서 잠깐 회의할 시간 있냐고 물었는데 다들 '너무 열심히 공부해서 머리가 뜨거운데 금요일 오후에 꼭 회의를 해야겠냐'며 이구동성으로 항의해서 회의가 월요일로 미뤄졌습니다. 보스가 피식 웃고는 see you on Monday 하고 사라지자마자 사람들이 일제히 저를 돌아보며 엄지를 치켜세우더군요. 미소를 가리느라 커피를 한 모금 마셨습니다. (잠시 후 보니 보스도 퇴근...)


저 역시 분위기에 편승해서 오늘 평소보다 일찍 짐을 챙겨 자리를 떴습니다. 그런데 사무실을 나오는 저를 동료 한 명이 부르더니 자기 집으로 우리 가족을 한번 초대하고 싶은데 괜찮냐고 물어보더군요. 회사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외각에 넓은 집을 갖고 있다고 들었는데 세미나 때 제가 언제 한번 구경시켜 달라고 한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모양이었습니다. 아직 영어가 아주 편하지는 않은 가족들 생각에 잠깐 멈칫했는데 까짓 거 뭐 어때 싶어서 OK 하고 다음 주에 날을 잡아서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차를 끌고 회사 주차장을 나서면서 매주 하는 이 세미나를 위해 내가 들이는 노력보다 많은 것을 내가 얻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강좌를 시작할 때 고민이 많았습니다. 저는 공부하는 내내 한국을 벗어나 본 적 없는 토종이라 영어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엔지니어라 수식과 도면으로 대화를 보조할 수 있기 때문에 붙어서 일하고 있는 거지 아직도 회의 시간에 사람들끼리 빠르게 말이 오가면 정신줄을 놓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더듬거리고 문법도 다 틀리는 영어로 강좌를 한다? 전 같으면 상상도 못 했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미국에 온 이후 알게 된 건 생각보다 이민자들 수가 많고 일상에서 영어 잘 못하는 사람들을 접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거였습니다. 인도 사람은 인도식 영어를 하고, 독일 사람은 독일식 영어를 합니다. 저요? 한국식... 그러니까 콩글리시를 합니다. 그래도 서로 다 말 통합니다. 못 알아듣는 건 못 알아 들었다고 말하면 다시 잘 설명해 줍니다. 서로 일 해야 하고 상대가 내 말을 알아들어야 하거든요. 상대가 하는 말을 내가 알아들어야 하기도 하고요. 중요한 건, 매끄러운 영어가 아니라 단어를 긁어 모아 대화를 하더라도 대화를 하려 하는 노력 그 자체입니다.


물론, 미국 이민을 하고자 결심했다면 영어 실력은 필수입니다. 최소한 영어로 대화해야 하는 상황에서 도망가는 실력은 아니어야 합니다. 하지만 미국 와서 살아남는데 현지인 같이 굴러가는 발음, 완벽한 문법, 고급진 문장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와서 살아보니, 내가 원하는 바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지가 굴러가는 발음보다 더 중요하더군요. 말이 안 되면 글로, 글이 안되면 춤과 노래로 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피하지 않고 한걸음 다가서면 길이 열린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민자고, 이민자들이 영어를 못하는 건 당연합니다.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에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여기서 나고 자란 사람들 역시 그런 이민자들과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경험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어가 자신 없다는 이유로 상황을 피하거나 도망치지만 않으면, 길이 열립니다.


지금은 가족들하고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간단히 위스키를 한잔 했습니다. 기분이 좋네요. 취했나 봅니다. 미국 오니 회식도 없고, 사다 마시는 술값이 싸서 저처럼 회식 싫어하고 집에서 술 마시는 걸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천국이네요.


좌충우돌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저렇게 조금씩 뿌리를 내리고 있나 봅니다.



Cover image: Noupload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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