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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마을 Jul 30. 2021

불 꺼진 볼링장에서 볼링 치기

제가 사는 지역은 오늘 날씨가 참 좋았습니다. 겨우내 두터운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는 날이 많았는데, 어제와 오늘은 간만에 파란 하늘이 펼쳐졌고 기온도 50도를 훌쩍 넘는 탓에 완연한 봄 날씨였습니다.


회사 앞 공터. 이 곳을 끼고 한바퀴 걸으면 30분 정도 걸린다. 점심 산책으로 적당한 거리.


점심으로 싸온 샐러드를 먹고 잠시 창 밖으로 하늘을 쳐다보다 날이 이렇게 좋은데 산책이라도 하자는 생각에 회사 건물을 나섰습니다. 30분 정도 걷자는 생각으로 회사가 위치한 단지를 따라 걸으며 아내에게 수다를 떨기 위해 전화를 했습니다.


아내에게 날씨 이야기와 일찍(...평소보다 조금 더) 퇴근하고 싶다는 하소연을 한참 하고는 전화를 끊었는데 부재중 메세지가 들어왔습니다. 확인해 보니 회사 CEO인데 잠깐 산책 하면서 이야기 나눌 수 있느냐고 묻더군요. 무슨 이야기인지는 설명이 없었습니다만, 왜 찾는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도 제가 알고 있을거라 생각 했으니 별다른 설명이 없었겠지요. 이미 밖을 산책하고 있으니 join 하라고 답장을 하고 그 자리에서 기다렸습니다. 잠시 후 멀리서 열심히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같이 걸으며 시덥잖은 자동차 이야기, 날씨 이야기, 출장 이야기(독일-한국-중국-미국 으로 이어지는 지구 한바퀴 출장이 3월에 예정되어 있었는데 취소됐습니다)를 하며 잠시 걷다 드디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내더군요. 오전에 있었던 경영진 회의에서 제 promotion 건이 최종 확정 되었답니다. 그리고 다음주 월요일에 회사내 공식 announce 될거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딱히 할 말이 없어 간단히 It is great 했죠. CEO가 껄껄 웃더니 다음부터는 좀 더 감정을 담아서 기뻐하는 연습을 하라고 농담을 했습니다. 한국 식으로는 '영혼 어디갔어' 정도 이야기겠죠. 독일 사람에게 그런 충고를 받다니 이럴수가! 하고 가볍게 받아쳐 줬습니다.


사실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습니다. 실은 지난 겨울 이미 promotion 오퍼를 받았었고 이런 저런 이유로 계속 거절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던 중 (이야기 하기 어려운) 이유로 얼마전 오퍼를 ok 를 했습니다. 경영진 회의에서 뭔가 큰 이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오늘의 결정이 궁금한 입장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지난주에 바꿀 조직도를 HR과 함께 확정한 뒤 경영진 report까지 했는데 무슨 이변이 있겠습니까.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면 오늘 회의에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무산되는 것 정도를 약간 기대하기는 했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가능성은 없었지만요. 어쨌든 이제 다음주 부터는 미국과 중국에 나눠져 있는 개발팀을 이끄는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시차를 생각하면 밤낮으로 바삐 일할게 너무 뻔히 보이네요.


20분 정도 같이 산책하며 이야기 하던 CEO는 회사 건물 앞을 지나면서 다른 회의가 있다고 먼저 들어가고 저는 한바퀴 더 돌기로 했습니다. 사무실 안들어가냐고 묻길래 당신이 내 산책을 방해했으니 이제라도 다시 한바퀴 걸어야 겠다고 했습니다. 농담을 핑계로 약간은 뾰족하게 받아친 제 말에 그가 빙긋 웃더니 악수를 청하면서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역시 별로 할 말이 없더군요. 그냥 같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맞잡아 줬습니다. 그리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이야기 합니다. 이번주에 새 사무실 고르는 것과 이사를 HR의 누가 도와줄거고, offer letter에 포함할 benefit cap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으니 곧 받아 볼거라고 했습니다.(아, benefit cap! 돈 이야기 마저 했어야 하는데 타이밍을 놓쳤습니다)


걸으면서 혼자 여러가지 생각 속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따져보면 이번달을 기점으로 미국에 랜딩한지 1년 반이 지났습니다. 정확히는 돌아오는 7월이 되면 2년이 됩니다. 그 짧은 시간동안 정말 벼라별 일이 다 있었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살아지긴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했던 승진은 아니지만, 살아 가려면 이 또한 넘어야 할 산이겠지요. 완전히 지쳐서... 젖은 빨래같은 상태로 직장도 없이 온가족 함께 미국에 넘어올 때만 해도 나이 60 넘어서까지 실무 엔지니어로 조용히 그리고 여유있게 살다 은퇴하리라는 결심을 했었더랬죠. 그리고 어느 정도는 그런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일찌감치 짐 챙겨서 퇴근... 집에 와서 아이들과 운동장 나가서 자전거도 타고, 캐치볼도 하고, 닌텐도로 다같이 마리오카트도 즐기고 말이죠. 그 이후 같이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정말 온 가족이 한 공간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낸다는게 어떤건지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시간들이 영향을 조금은 받겠지요. 새로운 포지션에 적응하는 것도, 하필 그 포지션이 까딱하면 짐 싸서 딴 직장 알아봐야 하는 포지션이라는 것도 부담입니다.


미국 입국 후의 제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면, 불 꺼진 볼링장에서 볼링을 치는 기분입니다. 이민이라는게 누가 더 뛰어나서 잘 풀리는 것도 아니고, 누가 더 부족해서 일이 꼬이는 것도 아니더군요. 운칠기삼도 아니고 그냥 운이 구할인 것 같습니다. 그동안 해 온 연습량을 믿고, 팔과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감각을 믿고 있는 힘껏 공을 굴려 보내는 것. 거기까지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결과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겠죠. 저 역시 이번 승진으로 이제 '책임' 져야 하는 포지션이 됐으니 결과가 안좋으면 가차없이 layoff 될거라는 걸 저도 잘 압니다. 제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여전히 불은 꺼진 상태입니다. 멀리서 들린 핀 쓰러지는 소리를 향해 한번 더 굴릴 뿐이죠.


소리를 들어보면 첫번째 볼은 어찌어찌 핀을 찾기는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두번째 볼을 손에 쥐어 봅니다.



*Cover image: Rudy and Peter Skitterians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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