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3.11.
제 사무실에 회의용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간단한 회의는 회의실을 잡지 않아도 팀원들이 쉽게 모여서 회의를 하고 가끔 면담도 하는 용도입니다. 의자가 많지는 않아서 전체 팀원들이 들어오는 건 꿈도 못꾸지만, 저는 보통 그 정도 인원이 모이는 회의를 소집하지 않습니다. 많은 인원이 모여봐야 제대로 토론도 안될 뿐더러 일방적으로 내용을 전달하는 식이 될 우려가 있어 선호하지 않거든요. 전달해야 하는 안건이 생기면, 이메일이나 컨퍼런스 콜을 이용합니다.
음... 말이 옆으로 샜는데, 어쨌든 그런 테이블이 하나 있습니다. 동그랗고, 네명 정도 둘러 앉을 수 있는 크기의 테이블이요.
새 사무실을 배정 받고 들어와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황량하다' 였습니다. 커다란 화이트 보드가 붙어 있는 하얀색 벽과 창문, 제 업무용 책상과 가구 그리고 회의용 테이블. 가구들은 전무 갈색이고 나머지는 전후 흰색인게, 차라리 비닐로 덮여 있는 검은색 쓰레기통이 생동감 넘쳐 보일 지경이더군요.
뭔가를 더해서 삭막함을 누그러 뜨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 갑자기 커피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커피를 좋아하거든요.
한국에 있을 때는 생두를 사다 집에서 직접 로스팅을 하고, 그렇게 만든 원두를 핸드밀러로 갈아서,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려 마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을 만큼, 딱 그만큼 좋아합니다. 한국에서 다녔던 회사에서도 사무실에 앉아서 원두를 갈아 핸드드립을 하고는 했었습니다. 술을 즐기지 않는 저는 그렇게 내리는 커피를 제 친교 수단으로 이용하고는 했었습니다. 뭔가 어렵고 갈등이 생길만한 안건을 이야기 해야 하는 상대에게 그렇게 내린 커피를 들고가서 건네면서 이야기를 시작했었죠. 너무 안좋은 이야기만 하면 제가 커피 들고 갈 때마다 움찔 할 것 같아 종종 아무 이유 없이 핸드드립 해서 주위 동료들에게 서빙하기도 했었구요. 온 사무실에 커피 냄새 풍긴다고 하소연 아닌 하소연도 자주 들었고 회사 생활 할만한가 보다는 놀림도 들었지만, 뭐 어떤가요. 그런 사람들도 제가 여름에 얼음 채운 서버에 아이스 핸드드립 해서 건네면 같이 즐겁게 커피를 즐겼습니다. 일 하다 보면 나오는 본심과 다른 입 찬 소리. 살면서 한두번 보는 게 아니죠.
미국에 와서는 핸드드립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회사 탕비실에 항상 신선한 커피가 준비되어 있는데 굳이.. 싶었거든요. 그런데 사무실을 옮기고 이 삭막한 환경에 뭔가 향긋함을 더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집에서 주전자와 커피 원두, 드리퍼, 서버, 필터 등등 도구를 한가방 챙겨 왔지요. 그리고 아침마다 출근하면 노트북을 연결하기 전에 항상 커피를 한잔씩 내려서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아, 좋더군요. 신선한 커피 향기가 사무실에 가득 차는데 그보다 좋은 아침의 시작이 따로 없었습니다.
첫번째 변화는 제 사무실 바로 맞은편에서 일하고 있는, 저처럼 아침 일찍 출근하는 인도계 여직원 한명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하루는 제가 커피를 내리고 있는데 밖에서 그 직원이 제 사무실을 기웃거리는 걸 발견했습니다. 반쯤 열려 있던 문을 활짝 열고 내다보고는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죠.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온 그 직원은 제게 핸드드립을 하는 줄 몰랐다며 매일 아침 제가 사무실 전체를 커피 향으로 채워놓는 바람이 요즘 다들 아침부터 커피를 찾느라 정신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뭐... 제 사무실에 공기청정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커피향이 퍼지는 걸 막을 방법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겠죠. 그냥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텀블러를 가져오면 커피를 한잔 더 내려서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신이 나서 자기 자리로 달려가더군요. 텀블러를 들고와서 테이블에 앉은 그 동료를 앞에 두고 정성들여 커피를 내리면서 이런 저런 커피에 대한 small talk을 나눴습니다. 그러다 어디 원두냐는 질문에 스타벅스 원두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회사에 스타벅스를 차린 거냐며 재미있어 하더군요. 그래서 그렇다고 맞장구 치면서 제 영어 이름 이니셜을 붙여서 여기는 D's Starbucks 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이후 제 사무실에 오면 제가 커피를 내려 주더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회의를 하기 위해 사무실을 방문한 사람들이 왜 자기는 커피 안주냐고 장난스레 항의하는 일이 늘어났습니다. 커피 내려주는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해서 제가 회의를 소집하는 경우에는 제가 두세잔 정도의 커피를 회의 시작할 때 내려서 나눠주고 나서 회의를 시작했죠. 덕분에 제 사무실이 있는 블럭의 경우 하루종일 은은하게 커피 향이 떠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커피 값이 저 혼자 마시는 것보다 서너배는 들긴 하겠지만, 회식도 없는 미국 회사에서 사람들과 가까워 지기 위한 비용으로는 싸게 들인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팀원 한명이 회의 공지를 하면서 회의 장소를 D's Starbucks 라고 적어서 outlook으로 뿌렸습니다. 기가막혀 하고 있는데 다들 회의 장소가 어디냐고 묻지도 않고 알아서 잘 찾아 오더군요. 회의를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어떻게 공식 회의 공지에 그렇게 붙이냐고 따졌더니 사무실 앞에 붙어있는 제 이름표를 떼고 스타벅스 로고를 붙이자는 의견도 있었는데 뭘 그 정도로 그러냐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더 말하면 손해볼 것 같은 분위기에 꿀먹은 벙어리가 되서 커피를 내리고 있자니 다들 시끌시끌 합니다. 커피 신선도가 떨어진 것 같다느니, 거품이 부드럽게 안올라 온다느니... 확 그냥!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니 다들 낄낄거리면서 즐거워 합디다. 그 분위기에 저도 같이 피식 하고 웃음이 났습니다.
덕분에 조금 어려웠던 회의가 좋은 분위기로 끝났습니다. 개발과 품질간에 책임 공방이 예상됐던 회의였는데 커피 한잔에 다들 조금 누그러져서 효과적인 합의점을 쉽게 찾아 냈습니다. 뭐, 커피숍에서 공부하면 더 잘되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예상대로 팀을 이끌게 되고 나서 밤낮으로 바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엄청난 수의 메일이 중국에서 도착해 있고, 저녁때도 대부분 노트북을 켜놓고 있습니다. 바쁩니다. 그래서 아주 못마땅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팀원들과 같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 커피 향을 더할 수 있다는 사실은 큰 위안이 됩니다.
살아가다 보면 예상치 못한 작은게 큰 변화를 이끄는 무기가 되곤 합니다. 그리고 사실 변화는, 대단한 노력으로 생기는게 아니죠. 작은 행동이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제게는 핸드 드립으로 커피를 내리는 2분 30초의 짧은 시간이 팀원들과의 거리를 한걸음 더 줄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제 사무실은 커피 향으로 가득 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