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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마을 Aug 03. 2021

각자의 장소


"당신 요즘 멋있어졌어요"



며칠 전, 점심 먹고 미뤄 놨던 설거지 거리를 싱크대에서 헹궈 식기 세척기에 넣으면서 옆에서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아내에게 툭 한마디 던졌습니다. 별 시답잖은 소리를 한다며 피식 웃는 아내에게 갑자기 뭔가 설명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에 왜 그런지 구구절절 이야기를 시작했다가 그 상황이 우스워서 "아니, 뭐... 그냥 그렇다고요"라고 얼버무리고는 똑같이 피식 웃고 말았지만.


잠시 프라이팬에서 재료가 볶아지는 소리와, 싱크대에서 달그락 거리며 그릇을 씻는 소리가 어우러지며 말 없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내도 알고 있고, 아내가 안다는 걸 저도 알고 있었지요 첫째 아이가 항상 궁금해하는, 텔레파시로 대화하는 것 같다는 말 없이 대화하는 엄마 아빠의 시간. 그 침묵의 시간에 도달하기까지 걸린 15년이 넘는 시간은 아이에겐 상상이 되지 않는 시간이겠지요.



사람에게는 저마다 정말 잘 어울리는, 각자의 장소가 습니다.


형이상학적인 어딘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발을 딛고 살아가는 '장소' 말이죠. 그리고 아내에게는 미국이 그런, 잘 어울리는 장소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내는 한국에서 10년의 시간을 소위 경단녀로 살았던 탓에 다시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습니다. 노력을 했으나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를 않았죠. 그런데 미국에 와서는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job을 구했습니다. 능력을 증명할 기회가 주어졌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말 열심히 하더니 점차 회사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아 새로운 position 제안을 받으면서 2주에 한 번씩 들어오는 paycheck의 액수도 빠르게 올라갔지요. 누군가에게 인정받을 만큼 열심히 는 이들이 모두 그렇지만, 그렇게 일하느라 정말 아침부터 밤까지 바쁘고 정신없습니다. 그런데 눈빛과 말투 그리고 행동에서는 거꾸로 여유가 묻어나더군요. 몸은 바빠 시간을 들여 꾸미지는 못하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너무나 여유로운, 멋있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모습 말이죠.


그렇게 늘어난 paycheck 덕분에 아내의 소득으로 본인의 IRA 계좌를 열고 첫 투자금을 이체했습니다. 아내가 직접 번 돈으로 자기 이름의 계좌에 저축을 한 건 십 년 만이었습니다. 누가 돈을 버느냐를 놓고 갈등한 적은 없었지만 아내 역시 가치 창출과 대가 지불이라는 방식을 통해 개인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현대 사회에서 스스로 수입을 만들고 자신의 노후를 직접 대비한다는 행위에 대한 갈증은 무시할 수 없었을 겁니다. 저도 기뻤지만, 아내도 기뻤겠지요.


아내 표현에 따르면 여기 와서 미국 촌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 촌년이라고 스스로를 표현하지만, 화려하게 꾸민 과거의 모습보다 멋진 미소를 띠며 이야기하는 지금의 아내가 저는 더 마음에 듭니다. 미국에 첫 발을 내딛고 2년 만에 이처럼 멋있게 변한 모습을 보면, 정말 사람마다 어울리는 장소가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내에게 미국이 그런 장소인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막상 제 장소가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내게 어울리는 장소는 도대체 어디일까? 하는 궁금증을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평생을 이방인 같은 느낌으로 살았는데 미국에서도 같은 느낌으로 살고 있으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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