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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마을 Oct 09. 2021

Science Fair - 아이숙제/어른숙제


미국에 랜딩해서 아이들이 보낸 첫번째 학기 끝무렵(벌써 3년 전이네요)에 학교에서 3,4,5학년을 대상으로 한 Science fair가 공지됐습니다. 이무렵.. 그러니까 9월말에서 10월초쯤 공지됐던 걸로 기억하는데 남은 기간과 연말동안 준비해서 새해가 시작되면 fair를 열고 당선작을 시상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3학년이었던 첫째가 하겠다고 해서 신청서를 작성해서 제출했지요.


Science fair 규칙은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1) 본인이 궁금한 걸 본인이 선정해서, (2) 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을 수립하고, (3) 가설을 증명할 실험 방법을 설계해서, (4) 실험으로 확인한 결과를 정리해서 발표하면 됩니다. 주제의 제한은 없고 발표는 성인 학회의 포스터 발표와 같은 형식으로 합니다.

Science fair @Google images


이렇게 말하고 보면 간단한데, 한국에서 갓 넘어온 아이에게는 굉장히 어려운 과정이더군요. 한국 교실에서 했던 실험.. 그러니까 실험 목표, 실험 방법, 그리고 실험에 올바르게 됐을 경우 나와야 하는 결과까지 모두 다 주어진 상태에서 절차대로 정확하게 재연하는 실험에만 익숙해져 있는 아이에게 다짜고짜 "네가 궁금한게 뭔지 네가 찾아서 가져와. 실험 방법도 네가 생각해보고." 라고 하니 속된 말로 멘붕이 온 듯 했습니다.


아이가 모든걸 완료하기까지 석달이 걸렸습니다. 심지어 포스터 제작은 제출 마감일 전날에서야 간신히 끝났지요. 아이가 했던 제일 첫번째 행동은 어떤 주제를 연구하면 좋을지 엄마 아빠와 함께 상의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내와 저는 미리 어떻게 반응할지 정해두었고 둘 다 똑같이 반응을 했습니다.


네 프로젝트니까 네가 고민해야지. 필요한게 있으면 사다 줄테니 말해. 나머진 네가 알아서 하고.


결론부터 이야기 하면 아이는 그 석달... 전쟁을 치렀습니다.


울었다, 웃었다, 짜증냈다가, 기뻐했다가.... 정말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습니다. 두세번 정도 science fair 참가 포기한다고 선언하기도 했지요. 아이가 포기하겠다고 하면 저희는 "그럼 그래라" 했습니다. 며칠 뒤에 아이가 다시 뭔가 또 꿈지럭 거리며 해보면 민망하지 않게 모른척 해줬구요. 아이가 정말 포기하면, 그렇게 놔 둘 생각이었습니다. 자기가 포기한 science fair에 친구들이 결과물을 가져와서 발표하는 걸 구경만 해보는 것도 좋은, 제 생각에는 fair에 참가하는 것 이상 좋은, 경험일테니까요. (그런 실패감과 자존심 상하는 경험을 꼭 하게 도와주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포기하지 않더군요. 다행스럽게도 이듬해, 4학년때 경험했습니다.)


어떤 주제를 연구할지 정하는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기는 합니다. 평소에 과학적 사고를 많이 하던, 이건 왜 이렇고 저건 왜 저런지 궁금해 하고 따져보는 습관이 있는 아이가 아니라면 실험 방법을 떠나 "확인하고 싶은 궁금한 것" 자체가 없으니까요. 여기에 더해 궁금하고 확인해보고 싶은게 많더라도 초등학교 3학년 아이가 부모의 도움 없이 혼자 실험할 수 있는 주제는 대단히 한정적이지요.


한번도 스스로 궁금한걸 알아보기 위해 실험해보는 경험을 해본 적 없는 아이에게 이런 건 뜬구름 잡는 일이었을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첫 한달 동안 아이가 시도한 주제들은 하나같이 남이 보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멋진 주제 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같이 그런건 실험할 방법 자체가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적어도 초등학교 3학년의 손재주와 쓸 수 있는 도구를 갖고는 말이죠.


한달의 시간이 지나고 점차 "멋있어 보이는 주제"가 아니라 정말로 일상에서 종종 접하지만 자기가 "why" 라는 질문을 들었을때 답할 수 없는 현상들을 들고 오기 시작하더군요. 그리고는 실험할 방법을 찾으며 좌절하기를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실험의 한계와 내 실험 능력의 한계"에 대해 깨달아 갔습니다. 최종 주제를 확정한 뒤 실험을 이렇게 저렇게 반복해 가며 올바른 실험 방법을 확정하는데 또다시 한달이 걸렸습니다.


막판에 아이가 정말 고생했던건, 자기가 보기에 전혀 문제가 없는 실험 방법으로 했는데 자기가 세운 가설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점 이었습니다. 포스터 제출 마감 직전날 오후, 자기 책상에 앉아서 실험 도구들을 밀어놓고 울고 있는 아이에게 제 박사 학위 논문을 들고가서 한마디 건넸습니다.

ㅇㅇ아, 실험은 네 가설이 맞다는걸 증명하는 도구가 아니야. 그 가설이 맞는지 틀렸는지 확인하는 도구지. 가설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는건, 가설이 맞았다는걸 증명하는것 보다 중요해. 어떤 가설이 틀렸다는게 확인되면 너나 다른 사람들이 후속 연구를 할때 그건 제외해놓고 연구할 수 있잖아. 답에 한걸음 더 다가가게 도와주는거지. 우리가 어떤 현상을 이해할때 이론이 맞는 경우와 틀리는 경우를 모두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 이 세상의 모든 연구는 그렇게 틀린 가설 수백 수천가지를 제외해가면서 마지막에 답을 찾아낸 것들이야. 아빠가 박사 학위를 받을때 쓴 이 논문도 1/3 에 해당하는 내용이 아빠의 어떤 가설이 틀렸다는 내용이야. 이 부분 봐봐. 아빠의 연구가 xx에 적용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지? 아빠는 아빠가 세웠던 이론이 틀렸다는걸 스스로 증명해서 박사가 된거야. 네 가설이 틀렸다는걸 네가 증명한다면 너는 사람들이 진실에 다가설 수 있게 도와주는거야. 얼마나 멋지고 가치있는 일이니. 그건 틀려야만 할 수 있는 일이야.


그 순간 아이가 받은 충격은 고스란히 아이의 눈동자를 통해 제게 전해졌습니다. 정답을 맞추는게 최고라는 생각이 깨지는, 답을 맞추는건 좋은거고 틀리는건 나쁘다는 시험 성적 위주의 사고 방식에 커다란 금이 가는 순간이었지요. 아이를 마주보면서 아빠로서, 그리고 어쩌면 선배 과학자의 입장이 될 수도 있는 사람으로서 정말 소중한 순간을 아이와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방해하지 않고 한번 생각해보라며 대화를 끝내고 조용히 방 문을 닫고 나왔습니다.


아이는 그날 실험 결과를 정리하고 다음과 같이 자기가 세운 가설이 틀렸다는 결론을 담은 포스터를 작성했습니다.



Science Fair 당일.


아이는 선생님들로부터, 친구들로부터, 그리고 fair에 참석한 다른 부모들(주제가 주제다 보니...)로부터 이 연구에 대해 정말 많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키친 타올이 질기다는게 무슨 뜻이냐는 정의 자체부터 시작해서, 실험 방법에 잘못된게 없는지(ie., 키친타올로 만든 끈의 폭이 달라지면 어떻게 되냐, 들어올리는 속도는 일정하냐, 물에 젖은 상태를 비교해야 맞는거 아니냐) 등등 정말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사실 제가 보기에도 실험 방법에 문제들이 많이 있었지만 이건 부모 과제가 아니라 아이 과제기 때문에 조언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아이는 자기 실험에 얼마나 많은 개선할 부분이 있는지 포스터 발표를 하면서 폭풍같은 질문 속에서 배웠습니다.


결과는 놀랍게도 전체 2등. 3,4,5학년 모두가 참여한 fair에서 3학년인 아이가 2등을 차지한 겁니다. 아이도 놀랐고, 저희 부부도 놀랐고, 아이의 담임과 친구들도 모두 놀랐습니다.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음날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아이를 세워놓고 "두꺼운 키친 타올이 질길거라고 누구나 쉽게 생각하는데 ㅇㅇ이가 연구를 통해 그렇지 않다는 걸 밝혀냈다" 며 반 전체 아이들의 박수를 받게 해줬다고 하더군요. 4학년과 5학년을 이겼다고 반 전체가 난리도 아니었다며 뿌듯해 하는 아이를 보며 저도 기뻤습니다.


Science Fair가 있었던 날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씻고, 잠잘 준비를 해서 아이를 방에 눕혀놓고 잠깐 대화를 했습니다. 오늘 기분이 어땠냐는 제 질문에 아직도 상기되어 있던 아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신기해요. 저는 제가 틀렸다고 했는데.. 오히려 사람들이 잘했다고 하고 2등 상을 받았어요. 틀린게 잘못된게 아니라 잘한거래요."


저도 모르게 지어지는 미소를 감출수가 없었습니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보탰습니다.


"응. 정말 잘한거야. 아빤 네가 자랑스러워."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학교 선생님과의 면담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수순으로 science fair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때 담임이 제게 부모님이 아이의 작업에 관여하지 않은게 보여서 기뻤고 스스로 그런 결론을 이끌어 낸 아이가 더 자랑스러웠다고 하더군요. 데이터 테이블은 제가 만들어 줬다고 하니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었습니다.


교실 안에서 유사한 과제를 많이 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집에서 해오는 과제 결과물을 보면 부모님들이 도와줬는지 아닌지 쉽게 알아볼 수 있답니다. 그 아이의 손재주와 사고 방식에서 나오기 어려운 결과물을 들고 오면 예외없이 부모들이 도와준 거라고. 종종 교실에서 작업한 것과 집에서 해온게 차이가 큰 아이들이 있는데 안타깝지만 그런 경우에는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사실 science fair 당일에도 제가 보기에도 너무 멋진 연구 결과와 포스터를 가져온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아이와 대화를 해보니 부모의 작품인걸 바로 알겠더군요.) 저희 부부가 답답했을 텐데도 아이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않고 아이 스스로 고민하고 노력할 기회를 줬다는 사실이 기쁘다며 오히려 감사의 인사를 저희에게 했습니다.


사실, 그 석달동안 아이가 괴로와 하는걸 보며 저도 많이 답답하고 힘들었습니다. 열두번은 끼어들어서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 이걸 하고 저건 하지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실험을 할 때 아이의 손재주로 정확하게 하기 어려워서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거들어 주고 싶은 마음도 수십번 들었습니다. 하지만 참았습니다. 아이에게서 고민하고, 노력하고, 누가 물어보든 나 혼자 했다 고 답할 수 있는 뿌듯함을 빼앗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미국에 사는 한국 이민자 커뮤니티를 보면 많은 학부모들이 한국에서 하듯이 아이들 과제에 함께 매달려 있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자녀 교육 문제라 이야기 하기 어려운데, 저는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런 과제들이 좋은 평가를 받는 나라도 아니거니와 '부모가 보기에 남보다 멋있고 잘한 것 같은' 과제물을 부모가 해서 아이 손에 건네줘 봐야 아이 교육 측면에서도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요.


아이에게 실패라는 경험을, 어려워서 포기하는 경험을, 남에게 뒤쳐지는 경험을 할 권리를, 고민과 노력끝에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물을 손에 쥐어볼 수 있는 기회를 빼앗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아이에게는 소중한 경험이자 자산이 됩니다.


실패의 경험을 선물해 주세요. 실패해 본적 없는 아이는 어른이 되어 처음 겪는 실패에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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