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다이닝룸에 앉아서 일을 하고 있는데 1학년 막내가 갑자기 옆에 오더니 저를 부릅니다. 할 말이 있다는 겁니다. 그냥 무심코 시선은 모니터를 보며 "응?" 했더니 "날 봐봐요" 라는 답이 돌아옵니다. 뭔가 진지하게 할 말이 있구나 싶어서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아이를 바라보며 이야기 했습니다.
"미안, 아빠가 이제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됐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뭘까?"
"있잖아요, 아빠가 야단칠때요, 무섭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응? ...음. ...응?????
부연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평범한 한국 가정의 아버지인 저는 아이들의 잘못을 질책할때 화를 내는 편입니다. 목소리를 깔고, 낮은 목소리로 무섭게 말합니다. 종종 크게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아빠가 이렇게 하지 말라고 말 했을 텐데. 왜 아빠 말을 안듣지?"
그런데 이 아이는 지금 그걸 하지 말라고 하는 거지요. 일단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반응을 했습니다.
"너희가 잘못한게 있으니까 아빠가 야단치는 건데?"
"야단 치더라도 무섭게 말 안했으면 좋겠어요. 그냥 뭘 잘못했는지 알려주면 되잖아요."
일단은 제가 생각하는대로 좀 더 밀어붙여 보기로 했습니다.
"네가 분명하게 아빠가 몇 번 주의를 준 것들에 대해서 계속 잘못하는게 있고 그래서 아빠가 화가 나게 되고 그래서 화를 내는건데 그건 아빠 잘못이 아닌것 같은데?"
그랬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한마디 합니다. 보아하니 제 이 말을 기다린 것 같더군요.
"화가 났으면 뭐에 화가 났다고 말하면 되지 왜 무섭게 말하고 큰 목소리로 말하고 그래요? 안그랬으면 좋겠어요. 뭐에 화가 났는지 말해주면 무섭게 말 안해도 되잖아요."
잠시 말을 못했습니다. 화가 났으면 뭐에 대해 화가 났다고 직접 말하면 되지 그걸 간접적으로 알리기 위해 상대를 비난하거나 큰 목소리로 겁줄 필요 없다는 말에 어떤 반박도 못하겠더군요.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이를 바라보다 이렇게 시간을 끄는건 아닌 것 같아 머리속에 복잡하게 오가던 생각들을 접어 놓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게, 아빠가 그 생각을 못했네. 생각해보니 ㅇㅇ 이 말이 맞는 것 같아. 앞으로는 그렇게 해볼게. 큰소리로 화내지 않고 뭐에 화가 났는지 잘 설명하고 네 대답을 들어볼게."
아이와의 갈등 상황에서 아이가 맞는 말을 했을땐 억지를 부리기보다 인정하는게 낫다는게 그간 세명의 아이를 키우면서 얻은 딱 하나의 지혜입니다. 제 대답이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아이가 미소를 띠더니 저를 한번 꼭 안아주고 돌아갔습니다.
...이번에 아이가 한 말은 여운이 남습니다. 화가 났으면 화가 났다고 말하면 되지 그건 말 안하고 간접적으로 상대를 불편하게 해서 내 감정을 전달하는건 확실히 올바른 선택지가 아닌 것 같으니까요. 그게 몇번이 됐든, 아무리 내가 수십번 말했는데 듣지 않았든 관계 없이 말이죠.
아이의 저런 태도가 저 아이의 개성인지 아니면 미국에서 Pre-K부터 교육받고 자란 아이의 특징인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주위에 한국인 가정이 있으면 뭔가 비교해볼 수 있을텐데 그런 여건도 아니라 물어보고 답할 한국 가정은 저희 집이 유일합니다. 하지만 이웃집들을 보면 확실히 아이들의 어처구니 없는 잘못에도 언성을 높이지 않고 끈기 있게 왜 안되는지를 설명하기는 합니다. 아이들에게 무섭게 말하지 않습니다. 끈기있게 반복해서 뭐가 잘못인지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래서 아이가 수긍하면 아이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더군요. "엄마의 이야기를 네가 따라줘서 정말 고마워." 같이요.
아내에게 물어봤습니다.
"당신은 저거 가능해요?"
예상했던 답이 돌아 옵니다.
"자신 없어요."
... 네, 저희 부부는 한국에서 나고 자랐거든요.
사실 아이에게 쉽게 화를 내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내가 아이보다 가정에서 힘이 세기 때문이지요.
상대방이 누구든 관계없이 똑같이 화를 내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라면 그에 대한 보편적 평가와 별도로 차라리 일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사회에서 만나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중하면서 아이에게만 쉽게 화를 낸다면 그건 내가 아이보다 힘이 세다는걸 인지하고 하는 행동입니다. 제게 화를 내지 말라는 아이의 말에 꿀먹은 벙어리가 된 이유가 그거였습니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 올바른 습관과 실력을 갖추게 하기 위해서.. 라고 말 할 수도 있습니다만 목적이 뭐냐를 떠나 방법론적으로 아이에게만 화를 낸다는건 내가 아이보다 강자라는 생각이 저 아래에 깔려 있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입니다. 비겁하지요.
그런데 동네 이웃들이 아이들을 훈육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젠틀하다 못해 정중하기까지 합니다. 아이가 어처구니 없는 떼를 쓸 때 조차도 화를 내지 않고 그저 확실하게 안되는건 안된다고 백번 넘게 선을 그을뿐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제 모습이 부끄러워 남들 앞에서 아이를 야단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집 안에서는 달라지는거죠. 저 스스로가 비겁하다고 느껴집니다.
한국 문화에 익숙한 첫째는 엄마 아빠의 기분과 분위기를 민감하게 캐치합니다. 알아서 조심하지요. 그런데 미국 아이로 자라고 있는 막내는 아빠에게 이야기 합니다. "할 말만 정확하게 하고 불필요하게 화내지 말아주세요" 라고 말이죠.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건 아이들이 아닌 엄마 아빠입니다.
영어고 문화고 상관없이 아이들의 적응만 걱정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정말 지내면 지낼수록 깨닫게 되는건 영어 잘해야 하는건 부모고, 적응해야 하는건 부모입니다. 미국 사회, 문화, 정치에 적응해야 하고 미국 아이로 자라기 시작하는 내 아이들에게 적응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갱년기 한국인 부모와 사춘기 미국인 자녀가 충돌할 수도 있으니까요. 사춘기의 그 복잡 미묘한 감정을 아이는 한국어로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엄마 아빠는 영어로는 아이가 전달하고자 하는 뉘양스를 정확하게 캐치하지 못합니다. 이 간극은 생각보다 넓고 깊습니다.
별 수 있나요? 그 간극을 메우려면 부모가 적응해야지요. 아이에게 한국어도 완벽하게 하라고 요구하는건 부모인 난 쉬운길만 걷고 힘들고 노력 필요한건 아이에게만 강요하는것 이상도 아하도 아니니까요.
그동안 내심 그래도 이 동네 문화에 맞게 아이를 키운다고 생각했는데 어제 막내의 한마디에 대부분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앞으로 아이들에게 소리지르지 않고, 화내지 않고 그렇게 훈육할 수 있을까요? 일단 결심을 그렇게 하고 있는데...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