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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마을 Dec 26. 2022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Manche Menschen haben einen Gesichtskreis vom Radius Null und nennen ihn ihren Standpunkt. - David Hilbert

이 문장은 학생 시절 Solid-state physics 시험지 제일 상단에 해당 과목 교수님께서 써 놓으셨던 문구입니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해의 반경이 0인데 그걸 자신의 관점이라고 부른다 정도의 의미가 됩니다. 이 말은 1940년대 Ring Theory 의 대가였던 독일의 수학자 David Hilbert가 한 말인데 처음 들었을 때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접할 때마다 일정 수준의 충격을 받습니다.


그 교수님께서 왜 이 문장을 시험지 상단에 적어 놓았는지는 모릅니다. 생각 좀 하고 시험 문제를 읽어보라는 따끔한 충고였을수도 있고 곧 한명의 학자이자 연구원으로 세상에 나가게 될 제자들에게 학문적 아집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스승의 우려였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선생님의 의도에 부합하는지 모르겠으나 이후 제 생각이 이해의 반경이 0 인 상황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평생 안고 살고 있습니다. 학문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분야에 대해서.


오늘 뒤늦게 조세희 선생님의 부고를 접했습니다.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의 삶을 기리기 위해 술잔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명의 위대한 지성을 잃은 한국에게 위로주를 한잔 따라 건넵니다. 이해의 반경이 제로가 되어 버린, 오로지 '내 관점'만이 중요해진 세상의 민낯을 펜으로 묘사하며 거꾸로 이해의 반경을 넓혀 이웃을 바라봐야 함을 목이 터져라 소리쳤던 지성을 떠나 보낸 한국에게 정말 진심으로 위로의 한마디를 건넵니다. 


왜 장애인들이 지하철을 타기 위해 투쟁을 해야 하는지 관심도 없고, 화물차 기사들이 도대체 무슨 불법을 저질렀다는 것인지 알아볼 생각도 없는 이들이기에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소설의 제목인지 웹툰의 제목인지 알지 못할거라는 친구의 이야기가 가슴 아프지만 그들에게도 그들을 납득시키는, 제가 알지 못하는 삶의 형태가 있을 뿐이겠지요. 그 삶을 알지 못하는 제게 그들을 비난하거나 훈계할 자격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슬픕니다. 그들과 저 사이에 각자의 관점이라는, 이해의 반경이 제로에 수렴하는 깊은 골이 있는것 같으니 말이죠. 


하지만 지금은 그저 이렇게, 


혼자 테이블에 앉아 이억만리 미국땅에서 한국의 위대했던, 위대한 한 지성의 삶을 기리며 술잔을 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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