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미국 시민권 신청 자격이 됩니다.
사실 몇해전 한국을 나올때 어지간한 것들은 다 정리하고 나왔습니다. 자산을 정리하면서 미국 송금을 위해 마지막까지 필요했던 은행 계좌 하나 남겨두고 모든 금융 계좌를 다 정리했는데, 금융 계좌 뿐만 아니라 의료보험도, 국민연금도 전부 다 해지했고 부동산이고 뭐고 전부 다 현금화 해 국세청 신고한 뒤 싹싹 비질까지 해서 모아 미국으로 옮겼지요.(남겨 놓은 은행 계좌에 아마 몇십만원 정도 있을 것 같은데... 잘 모르겠네요.)
요약하면 정말 '돌아갈 다리를 불태우고' 나왔다는 표현을 쓸 수 있을 정도. 나중에 아프면 한국에 들어와서 바로 병원 가는 법이라느니, 세금에서 이러쿵 저러쿵 하는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지만 다 무시했습니다. 지인들에게 '남겨 놓은 건 친구와 가족뿐' 이라고 말 할 정도로 정리했지요.
무슨 대단한 결심이나 신념이 있어서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했냐 하면, 가진 자산이 많지 않은 직장인이라 그렇게 다 현금화 해서 가져오지 않으면 미국에서 초반 정착에 필요한 자금을 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없으면 없는대로 시작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이 셋이 딸린, 직장도 없이 넘어오는 사십대 이민자가 쉬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은 아닙니다. 거기에 더해 미국에 와서는 바로 직장을 구하지 않고 한동안 가족들과 100%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기에 그 생활비도 필요했고 말이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이제와서 보니 한국을 너무 말끔하게 정리하고 나온 탓에 국적 포기와 같은 큰 일들이 지나치게 쉬워져 버렸습니다. 조금 과장하면 한국 영사관에 서류 한장 제출하는 걸로 충분한 상황.
쉬워지니까 고민해보게 됩니다. 미국은 남은 내 생을 보내기에 괜찮은 나라인가?
5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직접 살아본 미국은 좋았습니다. 주절주절 떠들지 않고 짧게 표현하자면 그렇습니다. 제게도, 아내에게도, 그리고 제 아이들에게도 말이죠.
제 아이들이 제 나이대가 되는, 몇십년 후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제가 바라보는 짧은 시선 안에서는 괜찮다는 평가가 쉬이 바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보다 먼 미래를 예상하는건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일이겠지요. 물론 이 나라도 몇가지 구조적인 문제를 품에 안고 있지만 어디 그렇지 않은 나라가 있던가요. 심지어 국민 모두가 행복한 나라로 알려졌던 부탄왕국도 나름의 어려움과 구조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걸요.
종종 아이들 다 키워서 대학 보내고 나면 한국에 돌아갈 거라는 이민자들을 보는데 저희 부부는 아이들 때문에 나온게 아니라 아이들이 독립한 뒤에도 한국에 들어갈지 여부가 불투명합니다. 그러다 보니 저희 가족은 '나중에 돌아 갔을 때' 를 위한 고민 자체를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지인들과 대화를 해보면 '한국과 미국중 어디가 더 나은 사회냐' 라는 질문을 받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나' 라는 주체를 빼놓고 하는 평가는 의미가 없으니까요. 쉽게 말해 내게는 한국이 혹은 미국이 더 나은 사회더라도 다른이에게는 그렇지 않을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질문에는 보통 답을 하지 못합니다. 전 그가 미국 사회에 만족할지 어떨지 알지 못하니까요. 그런데 미국 이민을 결정하려면 미국 사회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어야 하지만 그런 기본적인 이해를 갖기 위해서는 살아보는 것 말고는 딱히 뾰족한 방법이 없습니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따져야 하는 딜레마.
이 부분에서 제가 감사하게 여기는 건, 저는 운 좋게도 어느 정도 세상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된 중년의 시선으로 두 나라를 직접 비교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민 결심 전에도 두 나라를 오가며 일을 할 기회가 많았고 지난 5년의 시간을 통해 미국에 삶의 터전을 꾸며 일하고, 세금 내고, 이웃과 교류하고, 아이를 키워가면서 살았던 경험을 했습니다. 그 경험 덕분에 미국을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살았던 시간에 비하면 짧지만 그렇다고 40대에게 5년이 어떠한 판단도 하지 못할 정도로 짧은 시간은 아니겠지요. 잘못된 정보와 편견을 걷어내고 바라본, 직접 경험한 미국은 저와 제 가족이 살기에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갑자기 한국에 돌아가 살아야 한다면 우울할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전 한국에 살 때도 여기선 못살겠다 하는 식의 불만은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오늘 당장 앞으로 살 곳을 골라야 한다면 미국을 고를게 분명합니다. 그러니 논리적 귀결점은 제가 일하고 가족과 살아가게 될 이 나라의 시민권을 취득해서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신분의 불안정성을 해소하는 거겠지요. 그리고 이 나라의 정치적 결정에 투표권을 행사해서 미국이 나아가야 한다고 제가 믿는 쪽으로 힘을 싣는 노력을 하는 것일 테구요.
그런데.. 그래서, 미국으로 국적 변경을 할까? 하면 이게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 됩니다. 주민등록 번호 그게 뭐라고, 참. 몇날 며칠의 논리적인 결론이 주민등록증 하나를 넘어서지 못하는군요.
어쨌든 그 동안은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이 막연했는데 이제는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는 시기가 됐습니다. 어쩌면 결론은 이미 나와 있고, 단지 도달하는 길을 더 느린 걸음으로 걷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