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사는 이야기)

우리 아이의 첫 나들이.

by Aner병문

그러므로 충사(蟲師) 깅코는 꿈벌레에 시달리는 한 남자에게 베개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하루의 1/3 이상을, 머리를 맡겨두는 장소예요. 영혼이 깃들어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요. 대표적으로 잠을 줄여 산 사람이라면 역시 단신의 용장, 코르시카의 촌놈 나뽈레옹일 터이다. 하루 4시간의 잠으로는 황제이자 장군으로서의 업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어서, 포탄이 몰아치는 전쟁터에서도 말에서 내려 땅바닥에서 30분 정도 쪽잠을 자고 다시 싸웠다고 한다. 침착맨 이말년은 웹드라마로까지 만들어낸 수작 '잠은행' 에서 딸스따이의 소설에 빗대며 '사람이 행복하려면 얼마나 자야 하는지, 혹은 얼마나 잠을 포기해야 하는지' 에 대해 묻는다. 우리 부부야 매일같이 아이를 돌보므로 잘 알 수 없었지만, 보는 이마다 아이가 부쩍 컸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이요, 장마철이 지나 다시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나들이를 나갔더니 그새 유모차 바깥으로 작은 무다리가 짤뚱하게 나왔다. 예전에는 유모차 바깥으로 다리가 나오지 않아 충분히 안전막대를 채워줄 수 있었는데 이제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었다. 새삼 우리 부부가 걱정하던 밤마다, 아이는 제 다리를 위아래로 구르며 열심히 크려고 애쓰고 있었구나 싶었다.



그러므로 아이가 밤새 발을 구르며 때때로 깨어 아내와 나는 아침잠이 비교적 모자란 편이다. 아이가 잠이 부족하여 백일사진을 찍다 말고 중간에 돌아와야 했기에, 우리는 이번주에 다시금 사진을 마저 찍고 모처럼 하루 푹 쉬고 난 뒤였다. 어머니가 아주 조심스레 전화하셔서, 절대 강요는 아닝게, 걱정 말고, 오늘 산에 갈라 허는디, 노인네 둘만 갈라니까 영 적적혀서 그른다, 메누리헌티 함 같이 가자 물어보지 그르냐. ...손녀 보고 자픈건 아니고요? 아, 메누리 부름사 당연지사 손녀 오는 것이지, 그걸 말이라고 허냐, 니는, 근디 메누리가 괜시리 시어미 비위 맞춘다고 몸 피곤헌디 온다 할까봐 그게 걱정이여, 안와도 됭게 행여나 깨면 물어바잉. 다행히도 아침잠 한 잠 자고 난 아내는, 아이고, 어머이가 그래 맘 써주심사 내야 감사하지, 안 그래도 울 소은이도 함 밖에 데리갈라 캤는데, 영 어데로 가야할지 감이 안 서더라고요, 갑시데이, 내도 코에 바람도 넣구로. 그리하여 제 고모가 사준 보라색 원피스로 곱게 단장하고, 조부모님들이 한 번 보면 포복절도하면서 돈을 안 넣어주고는 못 배긴다는 '용돈주세요, 까까사먹게' 주머니까지 상비한 다음, 어머니 아버지 드실 커피 내려서 준비하고, 우리 부부는 접어놓은 유모차를 포함하여 짐을 세 개씩 딸딸딸 끌며 부모님 차에 몸을 맡겼다. 정말이지 아이 하나 움직이려면 짐이 태산이라더니 그 말이 꼭 맞았다.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행여나 피곤한 아내가 완곡하게라도 초청을 거절할까 싶어 노심초사 하셨는지 입가에 미소가 벙긋벙긋 하시었다. 걱정 말아라잉, 오늘 아주 우리가 칙사 대접을 할 꺼잉게. 코로나가 횡행하는 주말의 도로는 정말이지 그 떄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한산하였다. 또한 우리 벗들은 각자 모두 바빠서, 너는 단양 특산물인 시멘트 먹으러가고(?!), 본디 관광지에서 일하는 곽 선생은 대단할 것도 없는 갈비를 굽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머니는 며느리 먹인다고 아침부터 수삼과 대추를 잔뜩 넣어 닭을 세 마리나 삶아오시고, 저녁은 그럴듯한 한옥집의 버섯전골과 막걸리를 예약해놓으시었다. 어머니는 우리 아내와 술에 대한 생각이 비슷하시어, 평생 술 한 방울 입에도 안 대셨거니와 주변 사람들이 술을 즐기는 것 또한 좋아하지 않으시는데, 손녀 며느리와 함께 하는 여행길이 얼마나 좋으셨는지 맑은술로 유명한 고택주까지 친히 예약해놓으실 정도였다. 우리가 점심을 먹을 때, 미리 예약해둔 밥집으로 몇 대의 차가 계속해서 꼬리를 물고 달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바람이 솔솔 부는, 고추밭 앞 정자에서 닭을 뜯고, 조그마한 유치원 같은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단독주택이 올망졸망한 시골길을 걸었다. 마을이 한갓지고 조용해서, 젊은 사람들보다는 나이든 이들이 노후를 맞아 머물고자 하는 곳으로 보였다. 유모차가 산길을 오르기 쉽지 않았으므로 아내와 나는 중간 턱쯤에 아이를 뉘어놓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삼십분만 더 산을 타고 오시겠다며 바람같이 사라지시었다. 아내는 원래 산이 직장인 사람이라 주변에 나무와 꽃을 보며 여기는 어떻게 무엇으로 조성했네, 길을 어떻게 꾸몄네 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행여나 아이 몸에 모기가 달라붙을까 때때로 쓸어주고, 종이를 접어 바람을 부쳐주었다. 영인산 자연휴양림은, 소나무가 우거지고 그늘 아래로 바람이 차서, 에어컨 없이도 산뜻한 바람이 시종일관 불어 좋았다. 평상 곳곳마다 나들이온 가족들이 사지를 쭉 뻗고 잠들어 있었다. 아내도 나와 장난치며 아이를 돌보다 살풋 잠이 들었고, 나는 책이라도 한 권 가져올걸 아쉬워서 스트레칭을 하다가 마침 밥 잘하는 유진이가 유단자 수련 공지와 함께 소집령을 발령(?!) 하여 마침내 오랫만에 도장에 가야겠구나 생각하였다. 뒤늦게 일어난 아내는 '아이코, 또 술 드시겠고만.' 고시랑고시랑 하였다.




아이는 늘 안양천 근방만 함께 걷다가 난생 처음 보는 울창한 산이며 가파른 언덕이 신기하지 '우, 오, 아,' 를 반복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도 주변을 뚤레뚤레 봐서 우리는 가끔 전뚤레 라고 부르곤 했다. 전뚤레 양은 가는 곳마다 큰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면서 노래를 불러서 사람들의 귀여움을 샀고,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잔뜩 애교 섞인 눈웃음을 쳐서 바짓새로 두둑하게 용돈을 받았다. 아버지는 정치 얘기로 빠져서 언성이 높아지기 전까지 모처럼 약주를 많이 드시고 기분이 좋으시었다. 자는데에 십만원, 밥값은 따로 계산하는데 그조차도 낮지는 않던 한옥집은, 집을 잘 관리하여 풍취가 좋고, 술과 밥이 맛있어서 과연 그 가격이 아깝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은 당연히 어머니가 운전하셨는데, 손녀가 다치지 않게 조심해야 된다는 마음과, 또한 손녀가 피곤하지 않게 어서 집에 가서 재워야된다는 마음이 겹쳐서 텅 빈 도로를 때때로 슈마허마냥 왔다갔다 하시었다. 무사히 돌아와 아이를 눕히고 씻으니 고작해야 밤 아홉 시가 넘었다. 아이가 크면 가족이 함께 돌아다닐 곳이 참 많은데, 내가 가정을 잘 건사하고 늘 건강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아내 몰래 딱 한 잔만 더 하려다, 귀신같이 아신 아내가 와, 이 술귀신을 우야면 좋노? 하여 더 혼나기 전에 후다닥 윗층으로 도망쳤다. 이러고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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