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나는 작가다 공모전-3)

나를 나답게 하는 것.

by Aner병문

그러므로 '그 사람' 어둠의 마왕 볼드모트를 무찔러 명성이 혁혁한, 호그와트의 교장이자 당대의 가장 위대한 마법사 덤블도어는 '위대한 아이' 해리 포터에게 말한다. 우리의 진정한 모습은 우리의 능력이 아닌 선택에서부터 나온단다, 해리. 가장 악독한 마법사의 유년시절과 본인이 많이 닮았다는 말에 전율하는 사춘기 소년에게, 덤블도어의 말은 훌륭한 이정표가 되어 위험한 순간마다 그가 옳은 선택을 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므로 해리 포터는 볼드모트의 대척점에서 그를 비추어 닮는 자가 아니라 끝내 그를 부정하고, 위대한 마법사의 후계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다.




신사들의 박쥐우산과 시간을 지켜마시는 홍차와 한쪽 면만 구워내는 토스트로 유명한 저 머나먼 섬나라의 마법 세계 말고 현실에서의 우리들은 무엇으로 스스로를 설명할 수 있을까? 세상이 어지러워 선악이 혼재되고, 이 사람이 누군지조차 알 수 없게 되는 요즘이다. 이른바 N번방 사건이 터졌을 때, 범인들의 지인들은 대부분 다 '그 사람이 그럴 줄 몰랐다, 조용하 사람이었다' 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행위가 그 존재의 증명이 된다는 점은, 맞는 말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다른 듯하기도 하다. 내가 유기농 관련 농업 단체에서 일하던 시절, 어느 기자님의 카카오톡 상태메시지가 불현듯 기억난다. '적자생존- 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기자다운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기자일 때 그 문장은 강한 힘을 지닌다. 하지만 그녀가 글을 쓰는 일을 그만두게 되면, 적는 힘으로서 구현하던 그녀의 정체성도 함께 사라지게 되는 것일까?




여기 있는 나는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한 아내의 남편이자, 딸아이의 아비이며, 직장을 가지고 있고, 태권도장의 수련생이기도 하고, 또한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아들이자, 여동생의 오라비이다. 이 것은 관계로 내 스스로를 증명코자 하는 방식이다. 달리 말하면 관계가 사라질 때 나도 사라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기 위해 기록을 남긴다. 죽어서도 나는 누구의 아들이자 아비로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터이다. 동양에서는 이를 천륜이라 하여 하늘이 부여하여 지울 수 없는 관계로 만들었다. 혈연은 기초적인 사회 조합의 방식이자 개인이 가지는 정체성의 뿌리 역할을 했다. 그러나 신하균과 변희봉- 두 배우가 열연한 '더 게임' 에서 단지 겉모습을 것만으로, 관계나 기록, 기억, 혹은 앞서 말한 행위 등으로 스스로를 설명하려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가 여실히 드러났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생각하는 나는 너무 달라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또한 내가 내 스스로 내 정체성이라고 생각했던 행위들- 읽고 쓰는 일, 무공을 익히는 일, 미식을 즐기는 일,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일을 하지 않게 된다면, 나는 내가 아니게 되는 것일까.




그러므로 내 외부에 있는 무엇으로는 나를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동서양의 석학들은 이른바 자의식 이라는 단어로 내 스스로를 증명하는 힘을 찾고자 했다.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내가 나를 구성한다고 생각하는 요소들을 끌어들이 하나의 거대한 자석 같은 체계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이 자의식은 마치 강력한 전자석과 같아서 '대체적인 나' 를 형성하고 있지만, 그 탈착이 자유로워 어떤 것은 버리기도 하고, 바꾸기도 하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나는 감히 말하건대, 내 스스로 판단하는 힘이 나를 나답게 만든다고 말하고 싶다. 그 것이 아무리 촌스러워도, 무식해도, 거칠고 멋이 없어도, 내 스스로 생각하여 판단한 것이 나라면, 그 것은 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뇌를 참지 못하고, 강요를 거부한다.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것을 내 스스로 경계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미 오래 전, 아무리 의심해도 '내가 의심한다는 사실 자체는 의심할 수 없으므로' 의심하는 나를 통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성의 힘을 아주 극단적으로 추동하여 정의하고 신뢰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스스로 나를 판단하여 정의내리는 일은, 이 위대한 선인의 맥락 어디 끝엔가라도 닿아 있을 터이다. 그러므로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어 이리 쓰는 사람도, 아내 몰래 술을 홀짝이며 책을 읽다 혼나는 사람도, 기세 좋게 맞서기하러 나갔다가 본전도 못 찾고 두드려 맞고 쓰러지는 사람도, 그래도 아이만 보면 좋아서 입이 벌쭉벌쭉 벌어지는 사람도, 모두 나다. 내 스스로 그렇게 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판단된 욕망만이 나를 건강하게 만든다. 욕망이 나를 끌고 가면, 역시 내 스스로 판단한게 아니므로 내가 아니게 된다.





그러므로 이 잡스러운 문장을 읽는 여러분들께 감히 묻고자 한다. 여러분들은 정말로 어떨 때 스스로 나답다고 생각하시는지, 글을 읽고 쓸 때 여러분들은 과연 스스로를 되찾는 희열에 즐거워 자유로우신지, 몹시 궁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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