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오행 - 오랫동안 공부한 여인의 일상.
정연진, 계절의 오행, 지식과감성, 한국, 2023
그러므로 자주도 인용했지만, 남명 조식은 일찍이 안동의 큰 선비를 넘어서 조선-한국 정신문화의 스승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퇴계와 그 제자들을 싸잡아 비판한다. 퇴계의 제자들은 일어나서 제 이부자리 정돈도 아니하고, 계단 앞 한번 쓸지 않으면서 허무맹랑한 이론으로 헛된 명예만을 쫓는다는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어렸을때부터 소매에 방울을 달고, 허리에 칼을 차서 몸가짐을 정돈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령에도 분연히 떨쳐 일어난 대장부다운 말씀이다. 물론 유학의 가르침 자체가 많이 공부한 자는 마땅히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요즘의 어지러운 세태를 보자면, 과연 많이 공부한 이가 반드시 윤리적인가 하는 회의가 든다. 단순히 과목을 나누어 이른바 '테크니컬한' 학문의 기술만을 가르친다는 사실을 감안해도 그러하다. 요즘 회사의 부사범 역할을 하면서, 여러모로 교육을 해보니 더욱 그렇다. 인성, 윤리와 전혀 관련없는 전산 기술을 알려드린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입사해서 일을 잘하실만한 분들인지, 이른바 사회성에는 문제가 없는지, 다양한 결을 가지고 살아온 남녀노소들을 대상으로 하다보니 신경쓰이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말해서 이력서를 전부 보게 되므로, 학력에 대한 선입견이 생기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뛰어난 기술을 지녔는데도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을 보면 과연 내 생각이 옳은가 회의감에 빠지기도 한다.
여기 정갈하게 살아오시는, 고등교육을 받으며 또한 학문의 길에 정진하시는 한 여인이 있다. 언젠가부터 인연을 맺게 되어 아직 얼굴을 뵌 적은 없으나 벌써 두 번이나 책을 보내주시고, 소소히 일상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주 안부를 주고 받게 되었다. 4년 동안 서로 우정을 다녀왔다는 폰 메크 부인과 차이코프스키가 설핏 떠올랐다면 몹시 우스운 일일까. 어쨌든 하루 세네 시간씩 자면서 훈련하고 출근하여 교육하고, 다음날 교육 준비 및 행정 업무가 하다 늦게 퇴근하고, 집에 오면 어머니 아버지께 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매일 새벽에 나가 늦게 들어오냐며 성화이신 부모님으로부터 소은이를 넘겨받아 얼르다가 같이 자고, 자정쯤에는 반드시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 다시 눕고 하다보면 또 나갈 날들이었다. 이렇게 정신없이 살아오는 와중에 문득 정겹게 써주는 문구와 함께 책을 보내주셨으니 감개무량이었다. 하물며 머릿글에 부끄럽고 감사하게도 나에 대한 글귀를 보태주셨으니 정말로 학문의 길에 오래 계시는 선생님에 비하면 민망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저 좋게 봐주실 뿐이다. 그러므로 짬짬이 책을 열심히 읽었다.
전작 왓슨빌, 에 비해 계절의 오행은 훨씬 작가의 일상에 밀착되어 있다. 나도 철없던 총각 시절, 한때 다섯 번째 계절을 '쓸데없이(?)' 그리워했던 적이 있었기에 처음에 계절의 오행이라는 제목을 보았을때 문득 생각나 웃었다. 스스로 아내가 돼본 적도, 어머니가 돼본 적도 없어 한국 사회에서는 스스로 덜 힘든 여인이 아닌가 하여 자조감이 든다는 작가는, 그러나 우리와 다른듯 같은 삶을 산다. 해야할 연구가 남았는데도 이불 속에서 좀처럼 밍기적거리며 일어나지 못한다거나,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기간 연장 신청을 해야하나 고민하기도 하고, 그런 와중에도 바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한 피아노 등의 취미를 그려보기도 한다. 결국 찰리 채플린의 영화 속 장면처럼 톱니바퀴 바쁜 일상 속에서 학력은 둘째치고 열심히 사는 모든 사람들은 때때로 지치고 닳을 수밖에 없다. 그 와중에도 작가는 어떻게든 여유를 찾고자 최선을 다한다.
글을 쓴다는 일조차 여유로운 일은 아니다. 옛날 시인이나 수필가들처럼 문득 일상 속 흐르는 단상을 잡아 음풍농월하며 쓴 글을 현판으로 걸거나 후세가 자연스럽게 발굴하여 문집으로 엮어주던 시대는 진작에 지났다. 이제는 출판사와 여러 번 회의를 거치며 원고를 다듬고, 반드시 '나의 온전한 생각만을' 글로 전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라고 알고 있다. 나도 어디까지나 들은 얘기다. 내가 다른 작가분들처럼 뭘 출판을 해봤어야 알지 ㅠ) 그러므로 작가는 결코 게으르거나 늘어지는 이가 있다. 게으르거나 늘어지는 이는 걱정조차 하지 않는다. 그 어떤 일상 속에서도 작가는 항상 생각하고 고민하였다. 그러므로 문장을 쓸 수 있다. 제목에 대한 고민이 깊었던 이전 책보다, 훨씬 더 편하게 녹아들듯 다가오는 책을 선물하시어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난 대체 뭘 드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