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희랍어시간, 문학동네, 2011.
이 소설은, 책날개에 쓰여 있는 광고 문구 그대로다. 빛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어가는 여자가 서로 조우하는 이야기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소설가 한강의 아버지 역시 한승원 소설가다. 한강은 이미 그 전부터 많은 독자들을 끌어모으고 있었지만, 그녀가 맨부커 수상 후보자로 거론되었을 때, 그는 담담히 취재에서 말했다. '딸로서는 그런 글을 쓰는 삶을 살기를 바라지 않았어도, 그러나 소설가로서는 누구보다 독려하고 싶었고, 또 어떤 글을 써내게 될까 궁금해졌었다.' 일찍이 나는 그녀의 글을 '채식주의자' (단편) 보다 '몽고반점' 으로 먼저 알게 되었는데, 김동인의 광염소나타 를 연상케 하는 강렬한 서사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나중에서야 몽고반점이 채식주의자 3연작 중 한 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그 흐름에 따라 읽어보았으나, 마치 피자에서 올리브만 골라먹듯이, 심장 가운데를 뚫는 듯한 기분은 받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나는 한동안 한강을 오랫동안 몽고반점의 작가로 기억했으며, '한강 몽고반점 좋더라'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다가 '형님, 한강에 그런 중국집이 있었어요?' 라고 되묻는 한 지인에게 이런 불학무식한 놈아, 하며 고량주와 탕수육을 사준 적이 있다. 당시 중국집 배달 알바를 하던 그 친구가 지금쯤 어느 강 어귀에서 어떤 근사한 반점을 차렸을지 모를 일이지만, 다만 상호가 몽고반점만은 아니었으면 싶다.
본격적으로 한강을 읽게 된건 역시 북촌 시절부터였다. 말벗이 있어야 외국어도, 공부도 늘듯이, 책도 영화도 감상을 공유하는 사람이 있어야 자극받아 더 읽혔다. 노랑무늬영원, 소년이 온다, 왼손 등 한강의 글들은 몽고반점처럼 사람을 찌르는 감정으로 들끓었다. 문장의 여운과 서사를 운용하는 방식은 일견 에쿠니 가오리를 연상케하지만, 에쿠니 가오리의 행간에서 나른함과 가녀림만이 가득하다면(이십 대에는 그런 여운에 취해서 많이 읽었다만), 한강은 메마르고, 무겁고, 뜨겁고, 건조하고, 날카롭다. 에쿠니 가오리의 글처럼 한강에도 종종 먹는 묘사가 나오는데, 하루키가 먹는 음식 자체를 자랑하고, 에쿠니 가오리는 먹는 일상의 애틋함에 대해 말한다면, 한강의 글에서는 먹는다는 행위 자체가 그야말로 죄악처럼 읽히고 느껴진다. 한강을 읽고 나면 국수 한 가닥 넘기기도 쉽지 않다. 그 우울을 혼자 감당할 수 없어서, 나는 종종 너와 나눠 가졌었다. 일을 마치고 어중간한 시간대에 나는 자주 가회동 성당 거리를 넘어서 너가 일하는 까페로 갔다. 거기서는 너도 항상 늘 그 자리에 있듯이 책을 읽고 있었다.
희랍어시간은, 그나마 한강의 글 중 나 혼자 견딜 수 있을만한 소설이다. 상실과 그리움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단순히 분량이 적어서 그럴 수도 있다. 눈이 점점 멀어가는 남자는 소년 시절부터 독일로 유학을 왔다. 모국어를 잃고 싶지 않아서, 고립되고 싶지 않아서, 그는 화엄경 강해 한 권을 들고 온다. 불법의 세계는 만리타국에서도 능히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보편적인 진리이지만, 그조차도 점점 멀어져가는 그의 눈을 되살릴 수는 없었다. 철학과 희랍어- 어느 쪽이든 점점 이 시대에 사멸해가는 학문을 전공한 그는, 자신의 공부가 곧 멀어져가는 눈과도 같음을 깨닫고, 한때 집착했던 여자에게 문전박대 당하며 한국으로 홀로 쓸쓸히 돌아온다. 그러므로 시력을 잃어가는 그의 눈과, 이제는 몇몇 전공자들이 아니면 필요가 없게 된 언어와, 점점 고독히 늙어 삶의 언저리를 떠도는 한 남자는, 그나마 그가 가장 활기차고 생동감 있었을 때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그가 가장 삶과 사랑에 집착할때, 그 상대가 될 농아 여인 역시 그를 멀리 밀어내었기 때문이다. 가장 사랑에 차오를 때에, 그는 동시에 가장 강렬한 상처를 받은 셈이다.
그의 삶에서 가장 소중했던 여인과 비슷하게 고국에도 말을 잃어가는 여인이 있다. 이혼 후 남편에게 아들을 빼앗기고, 그나마도 아들은 곧 강제로 미국에 사는 고모에게 보내질 예정이다. '삶의 스트레스 때문에' 말을 잃었을거라는 하나마나한 진료들, 막막한 삶의 끝에서, 그녀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한 인문학 아카데미의 구석에 틀어박혀 현대 한국에서는 거의 쓸모도 없는 희랍어를 공부한다. 인류가 가진 최초의 문자 형태 중 하나이며, 다듬어지지 않은 소통 도구인 희랍어에 그녀가 몰두하는 이유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녀 역시 희랍어 강사처럼 살고 싶지 않은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시간적으로도, 의미적으로도 먼 이국의 언어를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나' 와 '여자' 로 화자조차도 자주 바뀌는 이 소설에서, 두 사람의 삶은 서사라기보다는 그저 심상을 연달아 배치하여 보여질 뿐이다. 그러므로 두 남녀가 누구도 찾지 않는 지하실에서 조우하여 겨우 서사의 방향과 의미를 찾을 때까지, 두 사람의 삶은, 삶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상실하고 발버둥친다는 것 이외에는 무엇 하나 겹침없이 각자의 방향대로 두서없이 흘러갈 뿐이다. 한강은 마치 두 사람의 이야기를 교대로 듣듯이, 번갈아 그 두 사람의 말을 그대로 책에 옮아놓는다.
그러므로 바쁘고 번잡스러울 때는 한강이 읽히지 않으며, 한가할 때 한강을 읽으면 며칠이고 우울에 빠져 삶을 추스르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총각 시절에 한강을 참 많이 읽었다. 나와는 썩 어울리지 않는 글이라고 생각했는데도 어느 틈에 늘 빠져서 읽고 있었다. 애 아비가 된 지금 다시 읽으니 늘 좌충우돌하던 총각 시절이 생각난다. 나는 그 시절 어드메에 무엇을 두고 왔을까. 늘 술과 땀에 절어 살던 내 삶의 어느 결이 한강과 닿아 있었을까. 내가 다시 한강을 읽고 깊게 잠겨 지낼 날이 올까 아직을 알 수 없다. 술이 덜 깬 밤에, 발뒷꿈치에 잡힌 물집을 터뜨리면서, 고개를 수그려 곱씹듯이 오래 읽었다. 한잠 자고 나니 문장은 기억나지 않고, 다만 손가락 새로 빠져나가는 아스라한 모래처럼 외로움과 그리움만이 남는다. 나는 원래 한강을 그렇게 읽어왔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소설은, 책날개에 쓰여 있는 광고 문구 그대로다. 빛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어가는 여자가 서로 조우하는 이야기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한 권의 책이 나를 깊게 잠겨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