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한 해의 계획
0. 반추 - 지난 해를 돌아보다.
지난 2023년은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많은 욕망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당대를 주름잡던 연예인들이 여과없이 자신의 한계와 비루함과 여린 약한 속내를 내보이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비참하게 삶을 마감했다. 연예인들뿐 아니라 공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배운 이들은 배워서, 못 배운 이들은 못 배워서, 다른 사람을 속이고 때리고 빼앗고 괴롭혔다. 오히려 사랑과 의리를 지키는 이들은, 나라가 시키는대로 오늘은 이 정류장에 가서 섰다가, 오늘은 저 정류장에서 가서 서며 하루 한 시간씩 출퇴근이 밀려도 불평 이외에는 크게 뭐라 않는, 정겨운 소시민들이었다. 나는 더 이상 정치의 시스템론을 믿지 않고, 그렇다고 위대한 영웅이 나타나 시대를 새롭게 이끌어나간다는 정감록 같은 케케묵은 이야기를 끌어다 붙이고 싶지도 않다. 다만 나는 30대의 마지막을 보내면서, 적어도 지금 살아온만큼은 더 살아야할텐데,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더욱 겁이 났다.
어렸을때에는 생활계획표 따위 짜는 일이 정말 귀찮고 싫었다. 어차피 아침 6시면 어머니의 불호령에 일어나 세수하고 아침 준비 될때까지 천자문을 쓰거나 국영수 과목을 예습하다가 학교로 가거나, 혹은 방학이라면 하루 종일 어머니의 감시하에 필수 과목 및 천자문과 영어를 늘 쓰고 외워야했기 때문이었다. 깊은 불면증 떄문에 조금이라도 주무시는 시간을 놓치면, 날이 새도록 종이 한 장 방바닥에 놓고 가슴에 베개 받친채로 엎드려 몽당연필 한 자루로 한자를 쓰시고 또 쓰시느라, 이미 어머니가 주무시는 안방 바닥의 방구석 한 자락은 십수년을 쓰고 쓴 흑연 자국들로 까맣게 멍들어 있었다. 아비가 되어서야, 이제야 조금 어머니 마음을 알련만은, 어린 마음 그때는 참 무섭고 가혹하던 어머니였다. (아니, 어머니, 공부 안한다고 밥 안 주시고 방에 난방도 안 때주시고.. 제가 무슨 한석봉입니까;;) 그러던 어머니도 지금은 손녀 앞에서는 그저 호호 할머니..^^;; 여하튼 어렸을때부터 옛 귀한 글들을 읽고 쓰고 자랐는데, 한때 청춘에 잘못 산 적도 있었어도, 처자식 건사하고 사는 지금은, 그 값은 하고 살아야한다고 늘 다짐해본다.
1. 가장 큰 약속 - 욕심을 줄이기.
나랏일을 하는 아내와, 사기업에 일하는 내가 같이 모아, 떵떵거리고 많이 벌진 못해도 그래도 입에 풀칠도 못할 정도로 굶어죽을 정도도 아니다. 물론 실수령 액 다 합해봐야 대기업 사원 급여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지만, 부모님 덕에 어찌어찌 살고 있었다. 다만, 자꾸 돈이 모이지 않고 이른바 '빵꾸' 가 나니, 솔직히 소은이 동생도 만들어주고픈데 이래 살아서 되겠느냐 아내도 나도 걱정이 앞섰다. 하여 아내와 꼭 약속을 하기로, 우리 둘 다 욕심을 줄여보기로 했다. 아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나도 성격이 예민할지언정, 본바탕이 잔인하고 악한 사람은 아니라서 대놓고 낭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매일 별 생각없이 사먹는 점심이라든가, 커피 한잔, 기분 좋아 술 한잔, 저런 날에 케이크 한 조각, 이런 주전부리들이 다 모이고 모이면 결국 통장의 구멍이 되었다. 솔직히 부모님 모시고 사는 처지인데다, 아직 철없는 부부 일한답시고 어린 아이를 어머니 아버지께 맡겼으니 용돈 겸해서 양육비도 드려야 옳고, 가끔 나들이 가신다고 하면 기름값 얼마라도 응당 드려야 도리다. 그러므로 솔직히 줄인다면 별 생각없이 쓰는 잔돈푼 정도밖에 없었다. 이라도 조금 아껴야 여윳돈이 생길 성 싶었다. 게다가 군살을 줄여야 하는 이는 아내도 물론이거니와 나 역시도 나이가 마흔인데다가 아무리 못해도 아르헨띠나나 이딸리아 고단자 어르신들처럼 실력에 상관없이 칠십까지는 현역으로 뛰고픈 마음이니, 지금부터 날고 기어도 서양 선수들이나 젊은 사제들처럼 뼈대가 굵고 커다란 거한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습관삼아 먹고 마시던 주전부리나 술들을 좀 줄여서 감량도 겸해보고자 했다.
부모님께 나가는 양육비와 월세와 보험과 교통비, 소은이 교육비, 거의 두 달에 한번씩 있는 가족들 경조사며, 명절 비용 등을 빼고 나니 1인당 하루 아무리 크게 잡아도 3만원을 넘겨서는 안된다는 계산이었다. 하여 아내도 그렇거니와 나 역시 커피는 특별한 날이 아니면 큰 상자로 카누를 사다가 타서 마시거나, 회사의 캡슐 커피로 버티고, 아침 저녁을 반드시 챙겨먹고, 점심은 아주 간단한 간식만을 하여 철저히 집밥 먹기 작전으로 갔다. 아내가 오는 주말에는 비교적 여유를 두되, 내 스스로는 술은 무조건 고량주 2,200원짜리(이렇게 명분있는 50도를 만든다!) 에 안주도 집반찬으로 주로 마시기로 했다. 나중에 일기에 쓰겠지만, 친애하는 '느린 학문의 연구자' (느린마을 막걸리?!) 정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선물들은 정말 참으로 귀하게 쓰일 듯하다. 아내도 잘 따라주어 무척 고마웠다. 사실 아내나 나나 특별히 사치하거나 돈이 드는 습관, 취미 등이 없어 참 다행이었다. 사실 돈 문제 때문에 오랫동안 기도했는데, 하늘에 계신 분께서는 큰 돈을 주시기보다, 일단 있는 것에 감사하고, 아껴쓰는 법부터 몸에 배도록 하셨다. 마흔 들어 깨닫고 있는 가장 큰 길 중 하나다.
2. 마음의 단련 - 바다는 강을 마다하지 않는다.
사실 최근에 아내에게 좀 미안한 일이 있었다. 차근차근 일기에 쓰겠지만, 결혼식 사회를 준비하고 소은이를 돌보느라 지난 주 나는 하루에 거의 3~4시간 이상을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어머니 체질을 그대로 물려받은 나는, 잘 시간을 놓치면 다시 잠들기도 어렵지만, 한번 깨면 또 쉽게 잠들지를 못한다. 소은이는 잘 잘 때도 있지만, 무슨 꿈을 그렇게 많이 꾸는지 새벽녘에 떄떄로 울면서 소리지르고 큰소리로 잠꼬대를 하기도 했다. 지난주는 감기가 심해서인지 유독 그랬는데, 나 역시 두 달을 버틴 끝에 감기에 걸린데다 결혼식을 마치고 나서, 아내는 다시 또 당직으로 내려갔다. 주말 늦게서야 어머니 아버지가 모처럼의 나들이에서 돌아오시고, 나는 그제서야 대여섯 시간 정도 한번에 쓰러져 잘 수 있었는데, 잠을 자고 제정신이 들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독 바른 선인장처럼 주말 내내 아내에게 툴툴거렷는지 참으로 부끄러웠다. 아내에게 전화하여 사과하자, 아내는 안쓰러움 반, 놀림 반으로 낄낄 웃으면서, 피곤해서 그런거 다 알고 있었지러, 이제부터 여보야는 피곤하면 쫌생이다, 쫌생이라 놀릴 낍니다, 했는데 미안하면서도 부끄러웠다. 내 스스로 늘 덩치 크고 배도 나오고 덥수룩한 수염에 큰 칼 하나 비껴차고, 술은 말술에 피가 뚝뚝 흐르는 고깃덩이 베어씹으며 으하하하 호탕하게 웃어제끼는 수호지 풍의 호걸들을 늘 흠모하는 까닭은, 내가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내가 아무리 태권도를 열심히 하고 말술 말밥을 먹고 마셔 덩치가 커지고 대리석판 열댓장도 한 방에 깨는 호걸을 바란다 해도, 내 속에는 유리조각 처럼 예민하고 날카로워 속 좁은 서생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하여 나이 마흔에 나는 무엇보다 내게 잠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젊었을 때 나는 우울을 견뎌내느라고 무리하게 약을 끊엇다가 정말이지 보름 동안 한 숨도 잠을 못 이루지 못하면서, 열엿새 되던 날에 베개를 침에 절이도록 자고 나서야 잠의 소중함을 알았노라 늘 공언하고 다녔는데, 글 한 줄 다음에 읽더라도 잠 1분이라도 더 자서, 조금이라도 더 여유를 가진 사람이 되어야겠다. 고작해야 잠 몇 시간에 좁아지는 마음을 가진 나도 참 문제다. 몸 이전에 마음을 갈고닦아야할 길이 아직도 멀다. 부끄럽다.
3. 몸의 단련 - 신체 개발 10개년 계획
고속도로는 근대화된 나라의 심장이다. 돌아가신 김대중 대통령과 김영상 대통령께서 현역 의원시절, 국토종합개발 5개년 계획의 시초를 여는 고속도로 사업을 결사반대 하느라고 손에 손 잡고 포크레인 삽 밑에 손 잡고 누웠다는 이야기가 있긴 한다. 자원이 풍부하지 않고 가공과 기술로 먹고 살던 나라들은 하나같이 물류 사업에 사활을 걸었다.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밀려나 대만에 자리잡은 장개석 총통이 휘하의 장병들에게 제일 먼저 지시한 사업도 역시 고속도로 사업이었다. '책임을 내가 질테니 해보기나 했느냐' 호령으로 유명했던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의 일본열도 개조론 역시 이에 근간한다. 한 번에 나라의 축을 다 만들 수 없으므로, 계획을 세워 차근차근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바꿔나간다. 그렇다면 내 몸은 어떻게 해야할까?
스무살 택견으로 입문하여 어느덧 마흔살이 되기 이십 년, 두 번의 백수를 거치면서도 무엇이든 내 스스로의 나약함으로 도망치고 싶어 어떤 무공이든 손에 놓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기초 이상 배워온 무공만 해도 택견, 합기도, 권투, 종합격투, 주짓수, 중국전통권, 킥복싱, 무에타이, 고류 가라테, 합기유술 등 다양하다. 태권도를 제외하면 이 중 권투, 종합격투, 주짓수 순으로 제일 오래하였다. 사실 어느 무공의 누구를 모시고 계속해서 사사했어도 그 분들은 모두 훌륭하신 분이셨다. 물론 내가 기웃거렸던 곳들 중, 돈 몇 푼에 말도 안되는 고급 기술을 함부로 가르쳐주려고 하거나, 밑도끝도없이 장풍을 가르쳐준다는 둥, 혈도를 찍으면 사람이 죽는다는 둥, 허풍을 치는 이들이 없었다고도 못하겠다. 그러므로 공부와 무공은 모두 올바른 스승에게 배워야 한다. 여하튼 지난 이십 년을 가만히 돌이켜보니, 기술을 익히기 위해 몸에 더 많은 부담이 가던 그런 세월이었다. 원래 타고나길 약하고 가늘어서 사실 무공에 적합치는 않으나, 그나마 다양한 격투 기술을 익히기 위한 연습들을 끊임없이 해왔기에 지금 이 정도의 신체 능력이라도 가지고 있다. 만약 내가 아예 무공 연마를 하지 않았다면, 옛 소년 시절의 꿈처럼, 시와 소설을 계속 쓰거나 노래를 했거나 한다면 아마 나는 톡 밀면 데굴데굴 굴러가는 퉁퉁한 중년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기술은 중요하다. 사범님께서는 막강한 힘 앞에서 기술은 무력화될 수 있다 하셨고 나 역시 동의한다. 그러나 내 개인으로서, 상대의 고급 기술을 무력화할 정도로의 막강한 힘을, 나는 현실적으로 기를 수 없었다. 또한 힘만 가지고는 칠천 개에 달하는 태권도의 타격기들을 제대로 실천할 수 없다. 따라서 여전히 기술 연마에 최선을 다하되, 점진적으로 신체 단련의 비율을 늘려서, 군살도 줄이고 근력과 근량, 유연성을 늘려서 좀 더 효율적이고 경쾌한 태권도를 해보자는 것이 현재의 내 목표인 셈이다. 다행히도 서른살때부터 지금까지 십년 간 꾸준히 기초를 연마하여, 이제 제자리에서 버티고 서서 어느 정도 천천히 기초 발차기 및 뒤돌아 차는 발차기들을 어느 정도 높이에서 찰 수 있게 되었다. 아직 턴차기 라 불리우는 돌개차기 나 토네이도 식 다회전 발차기를 나는 전혀 차지 못한다. 수술 받은 왼발목과 무릎 관절들의 여파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내 체중과 기구의 무게를 이용해서 몸의 부하를 더 늘리고, 더 기능이 뛰어난 신체를 만드는데 집중하면 기술도 훨씬 효율적으로 변할 터이다. 사실 이미, 짬날떄마다 달리기 하고 있다. 달리기 솔직히 지루하다. 호흡 터지기 직전까지는 괴롭기까지 하다. 하기 싫어 죽겠다. 그렇지만 만화 군계 의 본보기였던 극진의 나루시마 료 선수도 전날 아무리 술 마셨어도 제일 먼저 일어나서 아침에 토하든 말든 달리기부터 했다는데..ㅠㅠ 해야지..ㅠㅠ
전병문, 나이 40세, ITF태권도 3단..ㅠ 갈길이 멀다. ㅠㅠ
4. 머리의 단련 - 올해부터는 서양을 다시 좀 각잡고 읽어보자.
30대 이후, 특히 결혼하고 나서는 거의 한동안 동양철학만 읽었다. 일단 직장인으로서 시간도 없고, 긴 여유시간은 태권도 연습하는데 사용되니, 소설처럼 서사를 길게 기억해야할 책들을 읽기 어려웠다. 하여 학교 시절 부족한 공부를 만회하고자 동양 고전들을 한동안 오래 읽었다. 나이 마흔이 되어서야 다시 한번 서양 철학과 과학 등을 읽고자 내가 가지고 있는 책들 중에서 나름대로 뼈대가 될만한 책들을 추려 아랫층에 쌓아놓았다. 이 책들을 다 읽고 나면 이번에는 역사 를 기점으로 다시 한번 훑을 계획이다. 내 몸 하나만 있어도 태권도의 무궁무진한 기술들을 연마하며 재미있게 놀 수 있듯이,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은 늘 설레고 즐겁다. 도대체가 지루할 틈이 없다. 늘 바쁘기만 하다. 그래서 젊었을때처럼 쓸데없는 꿈을 안 꾸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이 마흔에 아내와 함께 국궁을 배워보겠다는 꿈은, 아이들을 좀 더 키우고 나서 여유가 될때 하자고 미루었지만, 어학 공부만큼은 더는 미룰 수가 없엇다. 며칠 전부터 시작해보니 한자는, 제멋대로 흘려쓰는 버릇이 손에 익어 마치 대충 치고 차는 태권도나, 어물어물 휘두르는 칼놀림처럼 되었고, 영어 역시도 대충 때려맞춰 해석하고 말하고 듣는 버릇이 익어서, 이 단어 이거겠지 대충 생각해보면 반드시 틀려 있다. 일단 제일 익숙한 영어와 한자의 감을 다시 잡으면, 중국어 일본어까지는 넓힐 계획이다. 문제는, 딸내미가 자꾸 옆에서 스뻬니쉬 알파벳을 틀어놓는다는 것.. 알파벳들이 막 뛰어다니면서 아 베 케 데 이러고 앉아 있다. 소은아.. 너 브라질 갈래..?! ㅠㅠㅠ
5. 항시 처자식을 사랑하고 사람답게 살자. 교회와 옛 어른들의 가르침을 잊지 말자.
나중에 쓸 일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아내와는 그냥 대외적으로 넘어진 것으로 해두자고 했지만, 하여간 아버님 생신상에서 느닷없이 소주병이 날아왓을때, 나는 이미 두 살 어린 처남 형님과의 소주 여섯 병에 취해 있었고, 어, 처가 식구들 다 보고 있는데 이걸 어쩌지, 하는 사이에 이미 사범님께서 십 년간 혹독하게 가르쳐주신 왼걷는서안팔목가운데옆막기가 독사처럼 튀어나갔다. 차라리 어설프게 병을 잡으려고 들지 않는 편이 더 좋았을 터이다. 젊었을 때 경험처럼 짧은 칼이나 각목이었다면 좀 더 긴장했을텐데, 소주병이니까 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어설피 손가락을 폈다가 손바닥이 정통으로 소주병과 부딪혔다. 즉, 정확히는 손칼옆으로때리기가 되어버린 셈이다. 어쨌든 소주병이 깨질 줄 몰랐고, 상대도 나도 얼떨떨했지만, 매일 연습한 삼일 틀 동작 중에서 이어서 바로높은데찌르기가 있었으므로 내 주먹은 상대의 쇄골을 찔렀고, 동시에 그 옷에 묻은 소주병 파편이 내 오른손 정권을 긁고 지나갔다. 차라리 선인장 위에 주먹을 문지르는게 나았을 터이다. 전화기 액정은 깨져서 55만원 물었지(처가의 평화를 지킨 명분으로 아내는 지출을 허가해주었다.) , 온통 긁히고 패인 양손바닥과 손가락에 새 살이 돋는데는 2주가 걸렸다. 그 유명한 기생수 를 그린 이와아키 히토시 는 술김에 실수로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커터칼로 베었다가 살이 돋아가는 모습을 보며 외계생물 '오른쪽이' 를 구상했다고 한다. 2주 동안 새 살이 돋고 딱지가 앉는 손을 보면서, 또 억울해서 여기저기 전화도 해보고 기도도 해보았지만, 기어이 조금씩 모아가던 여윳돈 55만원을 한번에 날려버린 전화기 액정을 보면서, 나는 십여 년 전의 청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좀처럼 떠올리고 싶지도 않고, 이토록 수다스러운데도 좀처럼 일기에 잘 올리지 않는, 이십대 중후반 시절 밤골목에서의 생활은, 늘 그저 그런 사내들과 그저 그런 드잡이질로 채워져있었다. 젊었을때 챔피언으로서 세계를 석권하던 관장님, 사부님, 교련님로부터 배운 귀한 기술로, 고작해야 부천역 망나니들 때려눕히는데 쓰고, 술값.몇 푼 벌고자 자료 대필 등도 서슴지 않던 그 때, 다시는 그렇게 살지 말자는 다짐과 각오 빼고는 내게 무엇이 남았나? 다시 한번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 욕망을 줄이고자 결심할때, 작년의 마지막 밤거리에서의 불쾌한 경험은, 오랫동안 묻어두고 싶은 생각들을 또 깨어나게 한다. 20세기 소년의 말미에서, 켄지는, '넌 악당도 못 될 놈이야, 착한 편이 되어라, 착한 편이 좋아.' 라고 아주 직설적인 가르침을 전한다. 올바르게, 착하게 사는게 항시 좋은 일이다. 바다처럼 넓은 사내가 되자. 남자다운 남자가 되자. 나약한 사내는 또 한번 최면처럼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