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번, 아내에게로 가는 길.
설 연휴 때 아내가 오래 있었기 때문인지, 아내가 다시 출근하기 위해 지방으로 내려간 뒤로 아이는 한동안 나와 나란히 누워서도 제 어미 이야기만 했다. 설 연휴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어데서 그렇게 제 어미 안 입은 치마저고리를 가져다 밀가루인 양 치대고, 장난감에 눌러서 면을 뽑고, 그릇에 담아서 '나왔슘미다~ 맛있게 드세요, 뜨거우니까 후우후우~' 부는 흉내까지 그럴듯하게 내는가 햇더니만 역시나 유튜브였다. 아비어미가 신경 못쓰는 틈에 유튜브로 어찌 되었건 한글 영어 읽을 수 있게 된건 다행이긴 하지만, 반면 이런저런 과한 영향들도 많이 보였는데, 첫째는 온갖 외국 청년들이 순 먹지도 못할 괴악한 음식에 각종 양념까지 과하게 발라 입에 넣고는 켁켁대는 걸 보고 좋아하니 그게 좀 안타깝고(그러나 아내 말마따나 나도 어렸을땐 좋아했겠지...) 두번째는, 유튜브 속 알파벳이며 한글, 각종 도용된 만화 캐릭터들이 먹는 음식들 중 짜장라면은 무조건 나오는 점이었다. 아이는 무엇보다 면을 좋아했고, 냉면, 국수 다 가리지 않지만, 제일로 치는게 있다면 제 어미와 함께 만들어먹는 짜파게티! 짜장라면은 돌고 돌아 결국엔 짜파게티라더니, 아이는 밤마다 나랑 누운 채로 입맛을 다셨다. 아빠. 응? 이번에 엄마한테 가면, 짜장면 지글지글해요? (손으로 냄비 흔드는 시늉을 막 함.) 소은이 짜장면 먹고 싶어? 응, 나아, 엄마가 해주는 짜장면 먹을거예요. 부엌에서 물 넣고, 냄비에 지글지글해서(손 동작 한 번더), 나왔슘미다! 한 다음에, 앞치마 하고, 패티 젓가락 하고 냠냠냠 먹어요! 특유의 억양까지 구성지게 넣어서 손 동작까지 야무지게 하며 창문 아래 새는 달빛 맞으며 졸린 눈을 반짝거리며 말을 하는데 어린 마음에 얼마나 먹고 싶을까, 혹은 주말밖에 못 오는 제 어미 보고픈 마음을 그렇게 어미가 와야 모녀 간에 다정하게 해먹을 수 있는 짜파게티로 푸는건가 싶어서 괜히 목이 메었다. 아이는 아빠, 우리 같이 자요오, 하면서 내 베개 옆으로 와서 폭 안기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짜파게티 이야기뿐 아니라, 슬라임 장난감을 사달라든가, 혹은 칙칙폭폭 기차 타고 포항 할아버지랑 삼춘이랑 다 봐요? 하면서 외가 이야기도 자주 한다. 하기사 손녀 이뻐하는데 친가 외가 구분이 어디 있을까만서도, 아버님과 처남 형님도 아이를 이뻐해주시니, 아이는 그를 모를리 없다.
안 그래도 서서히 날이 풀리면서 아내는 주말 당직이 예전보다 잦을 거라고 걱정이었다. 나는 아직까지 회사의 배려로 특별히 바쁘지 않으면, 가능한 주말 업무를 제외받고 있었기 때문에, 아내는 한 가지 안을 내놓았다. 주말 당직일때는, 차라리 나와 아이가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KTX로 끽해야 한시간 십분, 집에서 KTX 역까지는 승용차로 십분이면 간다. 우리 집에서 대학 통학하던 시간보다 십여분 더 빠르게 경상도의 소도시로 왔다갔다 할수 있었다. 무엇보다 반색하신 분은 아버님이셨다. 아이고, 자네캉 소은이캉 와주기만 하모, 내 맛있는거 바리바리 싸갖고 간데이. 어머님이 일찍 가신 뒤로 항상 손녀 보는 재미로만 산다는 아버님이셨다. 늘상 내 나이 이제 마흔이니 다치지 않게 운동하고 건강을 우선하라고 말씀하시는 아버님이셨다.
그래서였을까? 소은이는 출발하기 전날 잘 잤고, 사실 아침 일찍 깨울 일을 다소 걱정했는데, 저가 먼저 눈을 번쩍 뜨더니, 늘 끌어안고 자는 꿀벌 인형 '벌순이' (어린이집에서는 붕붕이 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이미 어머니와 내가 사투리로 '벌순이' 이락 해버리는 바람에, 소은이에게도 언제나 '붕붕이 아니야, 버쑨이야!' 다. 무슨 노먼 베쑨도 아니고^^;;) 를 안고 타박타박 나와서는, 물 한 잔 대차게 마시고, TV를 제 손으로 탁 켠 뒤에, 자, 아빠, 우리 빨리 밥 먹고, 칙칙폭폭 타고 엄마한테 가자! 선언하여 또다시 어머니 아버지, 나를 자지러지게 만들었다. 다행히도 아이는 기차 출발 전에 화장실 일 처리도 잘 해서 나를 안심하게 만들었다.
아내가 급하게 자리를 잡느라, 주말 오전 열차는 난생 처음 나란히 앉지 못하고 마주 앉게 되었다. 아이는 햇볕 잘 드는 창가에 동그란 이마를 찰싹 붙이고 바깥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막 아이가 떼쓸 때를 대비해서 챙겨둔 휴대전화 공기계를 꺼내고, 천자문과 영어를 번갈아 쓰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옆에 앉은 어르신이 갑자기 말씀을 거셨다. 이목구비가 오뚝하게 잘생기고, 연세에 비해 풍성한 머리칼을 기름 발라 정리하여 한쪽으로 멋지게 넘긴, 노신사셨다. 아이가..몇살이오? 다섯살입니다. 내가 그분께 들은 존댓말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미군 부대에 오래 있다가 퇴역하셨다는 어르신은, 보기보다 젊어보였고, 달변이셨으며, 자신의 손자들 얘기에서부터 아들 며느리 이야기,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까지 쭈욱 하시었다. 이야기는 재미있었고, 영양가도 있어서, 나는 예 예 하면서 잘 들어드렸고, 때로는 맞장구도 쳐드렸다. 젊은 아버지가 공부도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이 아주 마음도 됐구만, 됐어. 하는 칭찬이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한시간 십분 꽉 채워서 이야기를 다 들었다. 그리고 내려서 아버님을 만나자, 소은이는 벌써 제 외할아버지를 알아보고, 포항 하라부지!! 를 외치며 기차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역시 도가니가 꽉 찬 나이 다섯살이구나...
남녘은 벌써 봄이었다. 기온이 10도 이상 올라갔고, 이른 꽃이 핀 곳도 많았다. 키가 큰 아내는 늘 꽃보다 더 이쁘고 푸근하였다. 아버님은 짐을 푸시면서 느닷없이 물으시었다. 자네 회 좋아하는 거야 내 잘 알고... 자네 혹시 수구레를 아는가? 수구레요? 여기저기 다니면서 먹을만큼 먹고, 마실만큼 마셔봤다 자부하는 나도 수구레는 의외로 처음 들었다. 자네 혹시 현풍 아나? 현풍이요? 여그 현풍휴게소 있는, 현풍국밥 하는 그 현풍이요? 맞다, 거기 유명한 국밥집이 하나 있그등, 자네 신펭국밥(신평국밥) 사줄까 하다가 그거는 예전에 함 묵지 않았나 싶어가, 대구 넘어오는 길에 수구레 국밥 사왔데이, 이기이 소 껍디이(껍데기, 껍질) 얇게 썰어가 선지랑 끓인건데, 예서는 유명하다꼬. 자네 생각나서 많이 사왔으까네, 어서 무보게, 눈치 보지 말고 술도 한 잔하고, 안사돈 성격 내 다 아는데, 자네가 처가 아니모 어데서 술 편히 묵겠노? 탈만 나지 말고, 예서 술 마이 묵게.
어머님 살아계실때부터 회, 회, 회 노래를 부르는 사위 두신 덕에 아버님은 이른 아침 부산 잘 아는 횟집에서 광어와 도다리, 흔히 밀치라고 불리는 가숭어를 잔뜩 떠오셨다. 이틀 간 내내 물리도록 먹었던 양이었다. 아직 소은이가 생기기 전, 비오는 부산에서 아버님은 그렇게 유명한 집이라며 신평국밥을 소개해주셧는데, 아침 아홉시부터 맑은 국물에 소주 한 병 하며 감탄을 금치 못하던 그 때가 눈에 선하다. 아버님은 그 떄를 기억하시고, 한번 먹어봤던 탕이라며 이번에는 수구레국밥을 포장해오신 것이었다. 빨간 국물은 겉보기와 달리 맵지 않았고, 소의 겉 피부와 그 아래의 살코기까지 얇게 발라낸 수구레도 쫄깃하고 맛있었지만, 무엇보다 정말 일품이었던 것은, 다름아닌 선지! 굳은 피 삶아 썰어낸 것 아닌가 싶었는데, 아무리 재료가 좋아도 그렇지 뭘 어떻게 삶아냈는지 혀에 닿는 순간부터 탱글탱글하고, 앞니로 자를때부터 어금니로 씹을때까지 짝짝 소리와 함께 약간 끈적하면서도 탄력있는 식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그야말로 선지 회를 먹는 듯한 기분이었다. 사실 아버님이 회를 잔뜩 떠오신단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정 선생님의 위스키를 준비했는데, 도저히 이 절묘한 국물에는 오히려 소주가 더욱 어울릴 터였다. 그래서 나는 염치불구하고 위스키 두어 잔에 생선회를 잔뜩 먹었고, 이후 토렴하듯이, 식은 밤에 더운 탕을 말아서, 참소주 한 병에 모조리 후루룩 먹어버렸다. 아버님은 사오길 잘했다며 정말 좋아하셨다. 특히 못 먹는 것 없는 전소은, 과메기에 이어 선지까지 '우와, 젤리다!' 하면서 뚝뚝 잘라서 모두 냠냠꿀꺽. 너 진짜 선지가 무슨 맛인지 알고 먹냐?!!!!
아버님은 아침 일찍부터 움직였더니 피곤하시다며 금방 낮잠에 드셨다. 근골이 좋으시고 건강하셨지만, 어머님 돌아가실 무렵 먼저 수술을 하시어, 우리 부부는 늘 아버님 건강도 근심이었다. 식사를 많이 하지 못하시니, 조금씩 자주 하셔야 햇는데,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지셨어도 체력이 떨어지시어 아버님은 금세 잠에 드셨다. 우리는 나들이도 갈 겸 서둘러 아이와 함께 자리를 피해드렸다. 늘 자주 가던 호국평화기념관에 가면서 나는 술기운에 타박 아닌 타박을 했다. 아버님 죄송스럽고 피곤해서 어찌까잉, 사위 머 잘해드린거 있다고, 어른이 아침 일찍버텀 나와서 회야 국이야, 아이고, 다음에는 그냥 빈손으로 오시라 하소, 나가 부끄러워서 낯을 못 들겄네, 참말로잉. 이미 술기운으로 얼굴은 벌겋게 기분이 좋으면서 괜히 하는 소리처럼 들렸겠지만, 아침 일찍부터 정말로 사위 손녀 딸 주신다고 온갖 음식 챙기셨을 아버님을 생각하니 목이 메었었다. 아내는 픽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고, 그런 말 마시소. 아부지가 그기이 여보야를 챙기는기라. 우리가 머 하지 말라캐도, 아부지가 머 들으시겠니껴? 다아 아부지 사랑인기라, 그냥 우리는 감사히 이럴때 묵고, 또 아부지 여 계시는동안 잘 모시모 되지 모. 아내 말은 늘 명답이었다.
이른 봄볕 받아가며 아이와 잘 놀았고, 또 돌아와서 쉬고 계신 아버님과 함께 냉면 한그릇 잘 먹었고, 한숨 푹 잔 뒤에 또 에코랜드에 가서 아이를 실컷 놀리고, 아내와 나는 시범 운영 중이라는 짚코스터를 체험 삼아 탔다. 아아, 타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는 높은데가 정말 싫고,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이날 이때껏 청룡열차 한번 제대로 탄 적이 없다. 아내가 계속 옆에서 이것도 추억 아니니껴? 더군다나 꽁인데?(공짠데?) 해서 에이, 이것도 경험이지 해서 타봤는데. 아내가 먼저 타는거 보니 맙소사, 이 일기를 쓰는 지금도 다시 머리 끝이 쭈뼛 서면서 손발이 떨린다. 그 짚코스터가 쉽게 말하면 군대에서나 하는 유격 훈련 비슷한, 아주 요망한 것인데, 사람 무게가 쏠리면 낙차에 따라 자연스레 위에서 아래로 가속도를 받아 촤라라락 내려가게 설계한 철제 구조물을 따라, 사람한테는 안전장구를 입히고, 그 위에 고리를 꿰어 그대로 내려가게 하는 놀이기구였다. 그런데 헬멧이랑 고리에 연결하는 옷은 줘도, 정작 이 높이에서 밑에 그물 하나 없잖아...(...) 더군다나 막상 타보니까 위아래로만 덜컹거리는 게 아니라 회전하는 곳까지 있어서 좌우로까지 심하게 요동치는.... 게다가 그렇게 빨리 내려가는데도 400m 정도 거리를 1분 40초 정도에 간다고 하니 무려 100초...(...) 아내가 먼저 타는걸 보니 아내는 으하하 웃으면서 잘도 타는데, 난 이미 핏기가 질려 있었을 것이다. 전날까지 기분 좋게 마신 술도 이미 다 깼고, 나는 내 옷을 고리에 꿰어 거는 직원 선생님께 '웜메, 나는 못 타겄어요. 나는 안 탈라요.' 하고 내리려고 했는데, 그분은 못 들은 척 '가마이 앉아만 있으면 되니더, 이 을매나 편하고 좋은교? 자, 갑니데이?' 하더니 나를 그대로 출발시켰다....(....)
지금도 눈에 생생한데 나는 출발하자마자 바로 눈을 감아버렸고, 도저히 눈 뜰 엄두가 안 났다. 앞으로 막 떨어지는 느낌이랑, 심지어 회전할때마다 좌우로 휙휙 도는 느낌까지 나서 너무 무서워서 머리 위 손잡이만, 정말 쥐가 나도록 꼭 붙잡고 있었다. 딱 두 번 눈을 떠봤는데, 너무 빠르고 너무 높아서 바로 눈을 감았다. 소리를 안 지르면서 더 무서워서 나는 계속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게 뭔 일여어어어어어어어어어, 으아아아아아아아, 살려줘요오오오오, 으아아아아아아, 안탈거여,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하면서 내려왔던 기억이 난다. 아내는 진짜 웃겼다고 했고, 내 목소리가 엄청 커서 메아리가 왕왕 울렸으며, 위에서 순서 기다리는 사람들까지 다 포복절도했다고 했다. 으아아아아아아 하다가 누가 내 어깨를 탁 잡더니, '아이고, 다 왔습니데이, 다 왔습니데이, 앉으소, 앉으소.' 해서 그제서야 도착한걸 알았다. 창피하게도 눈물이 찔금 났고, 아내는 완전 배를 잡고 뒹굴고 있었다. 와, 여보야, 진짜 웃겨 죽었데이 ㅋㅋㅋ 나가 고개 너머로 장가 오는 것이 아니었어... 다시는 안 탈 것이네, 맞서기를 백번 하고 말제, 이거는 진짜 사람 못할 짓이여... 나는 투덜거리면서 아내랑 같이 내려왔는데, 진짜로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사실 나는 06년 2월 군번 논산 훈련소로 입소했는데, 전투경찰로 중간에 빠지는 바람에 유격 훈련을 제대로 안해서 높은데 올라간 적은 없었다. 다시 한 번 난 높은 곳을 정말 싫어하는구나, 절감하던 경험이었다. 아무래도 소은이가 높은데를 좋아하고 자주 올라가는 건 아내를 닮아서인듯하다.
사실 운동량에 비해 이틀 내내 술을 곁들여 과식했지만 공중에 매달려 하도 소리를 질러 그런가, 만두전골은 잘 들어갔다. 아내와 자주 먹던 경상도 주변의 체인점인데, 국물이 맑고, 수제만두가 맛있어서 아내와 즐겨먹던 전골집이었다. 소주 생각이 또 났지만, 아이를 데리고 혼자 올라가야 하니 참았다. 술 마시고 기분이야 좋겠고, 소주 한두병 마셨다고 해서 아이 못 보진 않겠지만, 언제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술을 마신 채 혼자 아리를 데리고 또 KTX를 타겠는가. 좋은 시간은 빨리 가므로 벌써 올라갈 때였는데, 사실 우리 부부는 일전에 한번 김천구미역에서 소은이의 그 유명한 '도와줘요, 살려줘요, 집에 가고 싶어요!'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그 사건 때문에 아내는 가능하면 주일 밤에라도 서울까지 올라왔다가 잠깐 눈만 붙이고 바로 다시 새벽녘에 출근하러 내려가곤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이번엔 우리 부부가 정말 독하게 마음 먹고 애가 울건 어쩌건 무조건 부녀간에만 열차를 타기로 마음 먹고 있었다. 그때를 대비해서 나는 공기계 2개에 충전을 다 해놓고, 장난감과 사탕까지 모두 챙겨서 열차탈 준비를 하고 있었다.
18시 30분 차였으므로, 우리는 17시에 역으로 출발했으며, 그때부터 계속해서 소은이 어깨를 잡고 눈을 맞추면서 최면하듯 반복했다. '소은아, 이제 우리 서울 갈건데, 엄마는 같이 안가. 엄마는 회사 가야 되어서 여기 있을거고, 아빠하고 소은이만 같이 칙칙폭폭 열차 타요오, 알았죠?' 를 서울말로 근 한 시간을 반복했다. 한 삼십분 정도는 이이잉, 하고 뒷자리에서 떼를 쓰면서 '아니야, 엄마 회사 안 가요, 엄마도 같이 기차 타요.' 라고 말꼬리를 잡던 소은이가 30여분쯤 지나자 서서히 '...엄마 안가요? 아빠랑 소은이랑 둘만 가요?' 라고 바뀌었고, 마침내 역에 도착해서 소은이 입에 사탕을 물리자, 소은이는 달콤한 사탕 맛에 빠졌는지 어쨌는지 엄마 에게 손을 흔들며 '엄마, 잘 가, 담에 또 봐아~' 했다. 아내가 서둘러 자리를 피하자, 옆에 계신 할머님이 나에게 넌지시 '애들도 다 알어, 뭔 일인지 모르겠지만, 웬만하면 참고 부부가 같이 살어. 그게 좋은거야.' ...저기, 생각하시는 그거 아닌데요...ㅠㅠ 여하튼 나만 걱정한게 아니었으므로, 여동생과 어머니, 아버지 모두 소은이 어떻게 되었냐며 카카오톡 메시지가 많이 왔는데, 무사히 잘 탑승하여 올라올 수 있었다.
아버님은 언제든 맛있는거 잔뜩 사들고 올테니 지금처럼 자주 내려오라고 하셨다. 나도 이제 아이와 둘이 어디든 갈만하겠구나 하는 자신도 붙었다. 아내 덕에 지금껏 잘 가보지 못했던 고개 너머의 산천을 자주 구경하고 있다. 아이가 좀 더 크면, 콜라 부사범과 함께 입문했던 햄버거 사매가 있는 영광에도 가보고, 두루두루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줄 예정이다. 아이는 이제 화장실도 잘 가리고, 제 어미와도 떨어져 아비와 잘 다닐수 있을만큼 의젓해졌다. 부모가 조바심내지 않아도, 아이는 스스로 잘 자라는 지점도 분명 있는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