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짧은 끄적임)
다시 한 번, 닳아지는 삶으로부터 살아남기
아내는 가끔 반농반진으로, 결혼 3년 차에 당신께서 혹시 여인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냐고 물어왔다. 각자의 영역에서 밥을 벌어오고, 아이를 키우며 지쳐 곯아떨어지는 하루가 반복되다보니 아내는 혹시나 자신이 더이상 여성적 매력이 없지 아니한가 싶은 생각도 했는가 싶어 안쓰럽고 미안했다. 제 눈에 안경이 아니라 나의 아내는, 예나 지금이나 키도 크고 늘씬하며 풍만하고, 언제나 활달하고 귀엽다. 단지 아내도 나도 난생 처음 해보는 아비어미 노릇에 지쳐 늘 서로의 어깨에 코를 박고 잠들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아내가 내 삶의 단 하나의 여자이자, 내 생활의 가장 중요한 뿌리라는 사실을 전해주고 싶었지만, 결국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진중권 선생의 말처럼 예술은 아직도 예술가와 작품과 수용자(관람자) 중 어느 쪽에 진리가 배어 있는지 옥신각신하는 중이며 탈무드는 말은 깃털과 같아 입 밖으로 꺼낸 그 순간부터 내 것이 아니므로 멀리멀리 날아간다 가르치기 때문이다. 나는 아내가 자신이 그저 내 삶의 '근천스럽고 번잡스러운 생활로 전락' 했다 여길까 두려웠다. 내심 나는 아내가 육아와 휴식의 공백 사이를 의미있게 채웠으면 하여 "내딴에는 쉽고 재미있는" 책이나 간단한 기본공을 권하기도 했으나 아내가 살아온 결에는 그다지 맞지 아니하였다. 아내는 우렁각시처럼 늘 내가 없을 때 나를 꿈꾸고 기다리며 하루를 보내었다. 감사하고 미안하고 사랑스럽고 황송한 나날들이었다.
그러므로 아내는 마치 숙련된 주짓쎄라나 레슬러처럼 빈틈없이 밀착하여 내 곁에서 지저귀거나 쉬기를 즐겨했다. 나는 직장에서 난생 접해보는 말과 글에 시달렸고, 다시 퇴근하여 육아와 아내에게 집중했다. 어느 나라 어떤 아비나 남편에게도 비슷한 나날들일 터이다. 그러므로 나는 아내에게 차마 나를 끊임없이 닳게하고 바닥나게 하고 소진시키는 일상의 난폭함에 대해 말하기 어려웠다. 아내에게 일상은 단지 원래 그런 것이었고, 그 하루의 마무리는 반드시 나여야 했으므로, 아내는 내가 마음이 아니라 말이 바닥나 다시 책으로 채워야 하는 순간을 가끔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아침 다섯시에 일어나 빨라야 오후 아홉 시에야 비로소 모든 말과 글에서부터 놓여날 자유를 얻기 때문에 반드시 말해야만 하고 닿아야만 하는 그 모든 것이 힘겨워 책을 읽거나 클래식을 틀어놓는 그 시절이 가끔 그리웠다. 혹시나 당신이 싫어졌나 큰 눈을 떼룩떼룩 굴리며 조심스레 내 곁에 스미듯 오는 아내에게 차마, 수없는 말과 글과 다가옴이 빽빽하여, 혼자 있을 때 오로지 자명한 논리와 진리만이 있는 책을 읽거나, 가사조차 버거워 클래식을 들으며 다니거나, 시간을 내어 오로지 훈련으로 땀을 빼낸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없어 아내의 목덜미에 코끝을 묻고 미안함을 삼키곤 했다. 아내는 언제나 사랑스럽지만 가끔 내게는 말없이 채워야할 시간이 하루 단 십 분이라도 필요하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아내가 없을 때ㅡ회사와 어학원과 가끔 허락받는 도장과 아내가 잠드신 새를 쪼개어 비로소 침묵의 시간을 가진다. 나는 그때서야 아무 말도 건네지 않는 클래식을 틀어놓고, 오로지 내가 알 수 있는 글들을 읽거나 혹은 몸에 묻은 생각들을 떨어내듯 땀을 흘린다. 아내는 그저 삶은 삶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아내의 곧고 단려한 가치관은 사실 단하 스님이나 성철 스님처럼 이미 높은 대덕고승의 무엇과 닮았다. 아직 속세에 물들어 잡생각이 많은 이 불민한 남편만이, 굳이 스스로를 생각으로 괴롭히고 또 그 것을 스스로 못 버려 괜히 안달이다. 늘 아내에게 감사하고 미안하다. 2주를 기다려 겨우 도장 사매와 술을 마시었다. 참말이지 너무 가깝고 친밀해서 오히려 속내를 못 꺼내는 관계가 있다. 늘 저 산 위의 푸른 일송 같아 소중하고 고우신 나의 반려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