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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짧은 끄적임)

누구나 겪는 피곤한 삶의 초입

by Aner병문

새로운 환경에서 아직 낯선 이들과 난생 처음 겪어보는 내용들에 대해 배운 지 한 달이 넘었다. 누구도 포도청처럼 무서운 목구멍은 이길 수 없기에 열심히 배우고 익혀 회사에서 밀려나지 않고 가장으로서 본분을 다하고자 했다. 그러다보니 책 한 줄 제대로 읽을 수 없었고, 방역 2.5 단계에 밀려 잠시 쉬는 어학원의 숙제 또한 허덕허덕 해나갈 뿐이었다. 그나마 몸이 아프지 않아 활력을 돋우기 위해서라도 하루 두시간의 훈련은 비교적 거르지 아니하였다.



우리 집은 복층이고, 아이의 공간과 부부 침실은 위아래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얼마전에 대청소를 끝내 침대 옆으로는 한 평 조금 더 되는, 넓다면 넓고 좁다면 좁은 공간이 있었다. 나는 여기서 상을 펴서 책을 늘어놓고 읽거나, 부족하나마 태권도 연습을 하거나 혹은 아내와 보드게임을 했다. (술은 아랫층에서 마신다, 후후..) 소소히 즐거운 나날이었으나 태권도 훈련을 할 때는 문제가 있었다. 아령과 각종 기구로 몸을 번거롭게 한 상태에서 바로찌르기, 반대찌르기라거나 바깥팔목막기, 안팔목막기, 추켜막기, 기타 발차기 맞서기 연습은 비교적 쉽게 할 수 있었지만 틀 연무만은 아무리 제자리에서 연습하려 해도 어려웠다. 이번 달 유단자 쎄미나의 과제는 여러 번 말했듯 틀의 매 동작 마지막 회전 직전부터 타격까지의 동작을 반복하는 것인데, 제아무리 제자리다리를 굴러가며 그 연습을 하려 해도 공간이 모자라 원효 틀이나 율곡 틀에서 이미 난감해져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칠공분혈의 전설, 한 대 치면 적들이 모조리 쓰러져버려 그에게는 두 번 맞은 이가 없다 일컬어지는 팔극권의 명인 이서문 노사는 만년에 차꼬와 족쇄를 찬 좁은 감옥에서도 끊임없이 무공을 연마하며 절초를 창안했으니, 나 같은 범부 졸부는 역시 그 발끝에도 미치기 어렵다.



땀에 젖어 늘어진 몸을 겨우 씻고 아내 곁에서 잠들라 치면 아내는 자주 깨어 아이를 돌보기 일쑤였다. 미처 다 적지 못했지만 아이 또한 이목구비와 몸이 영글어 낙법 치듯 몸을 굴려 뒤집고, 주짓수 하듯 다리를 끌어올려 발가락을 빠는가 싶더니 드디어 시작한 이유식의 영양을 바탕으로 그야말로 총알처럼 온 집안을 쏘다녔다. 처음에는 배만 겨우 끄는가 싶더니 벌써 다리에 힘이 붙어 팔굽혀펴기 자세로 몸을 가누는가 하면 아비어미 사지를 붙잡고 일어나고 싶어 바동거렸다. 요즘 손녀 이뻐하고 이유식 해주는 재미로 사신다는 아버지 어머니 말씀인즉 이러다 금방 앉고 일어서겠다신다. 그러나 아직 그 세월이 오기 전에 아이는 이제 좁은 아기 침대를 걷어치우고 긴 베개를 울타리삼아 너른 바닥에서 자다가 잠결에 엎드리면서 제풀에 놀라 울다 깨기 일쑤였다. 그 소리가 처음에는 어찌나 날카롭던지, 유아 시절에도 밤잠은 잘 자주던 아이였기에 우리 부부 처음에는 익숙치 아니했다. 다만 아내는 피곤한 눈으로도 웃으면서 설명해주었다. 아 몸에서 지금 여러 본능이 싸우는기라, 평소 습관대로 자고도 싶고, 또 엎드리고 구르면서도 자고 싶고, 근데 잘못 엎드리모 또 숨막히니까네 일어나라고 막 뇌에서도 깨우는기고, 야도 밤새 을매나 힘들겠습니까, 밤새 지 몸에서 지도 모르는 본능들이 막 서로 싸우는데, 저런게 이렇게 합의되면서 어른이 되어가는기지, 넘 걱정 마이소.



새벽에 두세 번은 기본으로 깨는 요즘, 그래도 나는 출근해야한다며 기어이 몇 시간이라도 재우는 아내는 아이 옆에서 불편한 잠을 감수하면서도 늘 노랫가락처럼 자상한 설명을 잊지 않았다. 피로가 보풀처럼 일어난 아내의 얼굴도 안쓰러웠지만, 동시에 이제 겨우 여섯 달만에 벌써 저 하고픈대로만 하고 살 수 없는 세상의 신산함에 밀려 밤새 고생하는 갓난 나의 딸아이도 무척 안쓰러웠다. 어쩌겠는가, 삶이란 속세란 본디 그리 번잡스러운 것을. 늘 벌어먹어야 살아지는 삶의 고뇌를 잊으려고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믿음을 갖고 술을 마시며 글을 읽지 않던가. 내 딸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 어줍잖게나마 내 일러주고 전해주고픈 것이 이미 차고 넘치게 너무 많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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