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반짝 빛나는 ㅡ 내 청춘과의 거리두기, 혹은 돌아보기
에쿠니 가오리, 김난주 역, 반짝반짝 빛나는, 소담출판사, 일본, 2002.
이제는 그러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내 스스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견딜 수 없이 소설에 대한 허기가 밀려온 것이다. 출퇴근하고, 어머니 아버지 하시고 남은 살림 거드는 흉내나 내고, 애 보고 하다보면, 그래도 오늘이 제일 젊은 날이니, 태권도 연습에 영어, 한자 공부에, 책 한두 줄 더 읽기도 빠듯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이제 나도 마음이 말라가는 아저씨가 되는 탓인지, 예전처럼 격정적인 소설이나 시를 읽어도 그처럼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당분간 소설은 읽지 않게 되려나보다 싶었다. 그런데, 괜시리 읽은 김훈 선생 때문일까. 최근 들어 갑자기 견딜 수 없이, 고프도록 소설이 읽고 싶었다. 그래서 만사 다 젖혀두고 소설을 읽었다. 김훈 선생을 연달아 두 번 읽고, 묵혀둔 마르께쓰의 책을 꺼내다가, 문득 오래 읽어 구겨진 헌 책이 톡 떨어졌다. 에쿠니 가오리의 책이었다. 아, 에쿠니 가오리. 나는 이십대 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 여류 소설가에게 분명 청춘의 한구석, 빚을 졌다. 첫 백일 휴가 때 나는 냉정과 열정 사이 블루와 로쏘를 사다가 낮에는 사람 만나고 저녁에는 술 마시고 놀다 들어와 새벽까지 블루와 로쏘를 번갈아 읽었다. 복귓날까지, 블루를 먼저 읽다 로쏘를 읽었고, 반대로 읽기도 했고, 블루와 로쏘를 번갈아 읽기도 하면서 부대에 쓸데없는 우울을 달고 다녔다. 제대 이후에도 여기저기 사고를 치고 다니면서, 책을 보란듯이 사서 읽고 다녔는데, 에쿠니 가오리는 그 중 항상 들어갔다. 가네시로 가즈키, 오쿠다 히데오, 온다 리쿠, 미야베 미유키,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히가시노 게이고 등, 일본 소설이 인기가 많던 시절이었다. 나는 술마시듯 에쿠니 가오리를 읽고 또 읽었는데, 문장이 얼마 없고 서사가 복잡하지 않아 가능했던 일이었다. 나는 늘 반쯤 취해 에쿠니 가오리를 읽었고, 몇 안되는 구절들을 흥얼거리면서, 에쿠니 가오리는 늘 말하지 않음으로 말하는 작가라고, 에쿠니 가오리를 읽으려면 행간을 읽을 줄 알아야한다고 쓸데없는 요설을 지껄이고 다녔었다.
에쿠니 가오리를 더 이상 읽게 되지 않은 계기는 분명하다. 나는 내 파락호 같은 청춘의 끝을 책임지기 위해, 한때 내 모든 것을 정리해야 했다. 자랑하듯 거만하게 사들인 책도, 보드게임도, 허섭쓰레기처럼 모은 술친구들도, 얼마 안되는 허랑방탕한 지식과 무공과 허세도 다 그렇게 사라졌다. 나에게는 학력도 무력武力도 없이, 그저 무력無力하여서, 미뤄둔 삶의 당연한 것들을 뒤늦게 짊어지느라 젊었을적처럼 허세와 낭만을 부릴 겨를이 없었다. 물론 뼈까지 배어든 사람의 버릇은 쉽게 바뀌지 아니하므로, 나도 모르는 새 분명히 또 새고 드러난 꼴들이 있었을 터이다. 여하튼 에쿠니 가오리를 비롯해서, 또 소설이 한때 분명 심드렁해진 때도 있었다.
그러므로 약간 과장하여, 약 이십여년만의 에쿠니 가오리였다. 이제 나는 젊었을 적처럼, 무엇이든 닥치고 읽어대고, 그대로 앵무새처럼 지껄이고 따라하며 인기를 끌어야 하는 광대 같은 사내가 아니라, 이런 나도 남편과 아비로서 믿고 의지하는 처자식이 있으므로, 부족한 시간을 쪼개어 돈을 더 벌지는 못할망정, 사람답게는 살고 있다는 믿음을 주어야만 했다. 게다가 훗날 얘기하겠지만, 때가 때인지라, 술은 못 끊었어도 어쨌든 교회를 다니는 나로서는, 반짝반짝 빛나는, 의 성적 취향은, 참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성性을 대했든, 나의 천둥벌거숭이같은 천연덕스러움을 마주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 유명한 푸꼬가 성性의 역사에서, 한자 또한 그렇듯이, 섹슈얼리티Sexuality를 통해 그러나 결국 휴머니티Humanity를 조망하듯이, 성性은 삶의 기틀이자 중심이면서 동시에 유희로서도 작동한다는 걸 모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제 나는 유희로서의 성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워야 하고, 거리를 두어야할 입장이 되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의미에서, 나는 이 책이 정말 나에게 지루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허무하리라 생각했으며, 불편하게 느껴질 것이고, 별 의미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 지점이, 바로 이제 이십 년을 써서 그렇게 늙어지고 퇴락하고 익숙해져가는 아저씨의 모습이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사실 초반부를 읽기 전까지는 제법 심드렁하기도 했었다. 이십년전의 나야, 아이고, 넌 참 낭만적이었구나.
결론만 말하자면, 이 책은, 약간 과장해서, 정말 모범적인 가정의 이야기다. 결코 쉽지 않지만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애쓰고, 가정의 평화와 균형을 위해 노력하는, 부부의 이야기다. 그도 그럴것이, 남편은 멀쩡한 애인까지 있는 동성애자이며, 아내는 알코올 중독의 우울증 환자다. 두 사람은 부모님으로부터 완전히 정서적으로 독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둘 다 원인은 다르지만, '결혼하면 나아지겠지..' 하는 각 집안의 부모님의 욕망에 따라 결혼하게 되었다. 물론 사돈끼리는 각각 사위와 며느리의 결핍을 알지 못한다. 즉, 우울중 아내인 쇼코의 부모님도 사위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동성애자 남편인 무츠키의 부모님 역시 며느리가 자해와 음주를 반복하는 우울증 환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그저 부족한 내 자식이 나아지겟거니 하는 고슴도치 심정으로 각자 맺어준 것이다. 그러나 막상 만나보니, (지금의 나처럼?^^;;)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는 보금자리 같은 사이라고 믿게 되어 결혼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날선 총각이던 이십대 때 이 책을 읽었을때 서로의 사랑을 위해 치열하게 지켜나가는 이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소설이기에, 극적으로 과장되고, 비현실, 혹은 초현실, 혹은 희화화되는 부분이 많지만, 이 가족 앞에 놓여진 일상의 난관은 수도 없다. 동성애자 애인을 두었지만, 그래도 비교적 사회화가 잘 되어 있고, 병원의 의사이기도 한 남편 무츠키는 언제 어떻게 파행으로 치달을지 모르는 아내를 늘 다정하게 붙잡아준다. 반면 감정에 잘 휘둘리지만 그만큼 적극적인 아내 쇼코는 남편의 균형을 잘 잡으려면, 동성애자 애인인 곤, 그리고 또다른 동성애자 친구인 카키이 선생이 함께 해야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정을 유지하면서도, 이들과의 관계까지 깨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 한다. 남들이 보기에 이 가정은 지극히 비현실적이고, 극단적이며, 실제로 뉴스나, 혹은 누군가의 술자리 이야기로 전해들었다면, 아이고, 쉽지 않을텐데, 강건너 불보듯 한숨부터 나올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러나 두 부부는 결국 서로가 서로를 설득하거나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상대를 그대로 두기 위해 내 스스로를 기꺼이 파괴하며 견디고 버텨낸다.
다소 난삽하게 느껴지지만, 그래서 장章, Chapter마다 무츠키와 쇼코가 번갈아 옮겨가는 1인칭 시점은 이 소설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십대 때는 워낙 복잡하고 극렬한 두 인물이므로, 제아무리 소설가라도 모든것을 다 아는 양 전지적인 3인칭으로 개입하여 서술하기가 어려워 1인칭을 번갈아 쓰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십년이 지난 뒤 다시보니, 1인칭 시점으로 읽혀지는 이는, 1인칭 화자의 속내가 아니라, 1인칭으로서의 내가 보는 상대방이었다. 즉, 무츠키가 '나'로서 서사를 이끌어나갈때 무츠키의 시선은 아내 쇼코에게 있고, 쇼코가 서사를 이끌면, 실제로 묘사되어지는 이는 반대로 무츠키가 된다. 그러므로 가장 가까운 부부조차도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서, 그저 바라만 보며 최대한으로 설명하려는 그 욕망과 힘이 절절하게 느껴져서 나는 불편하면서도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나 가정이 평화롭길 바라지만, 언제나 그럴 수 없는데, 그런 상황일때, 나는 쇼코나 무츠키처럼 가정을 지키기 위해 저처럼 애쓰고 있는지, 솔직히 자신이 서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렇지도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무관심하고, 무덤덤하고, 심드렁하리라 믿었다. 근데 실상은, 사실은, 그런척만 했을 뿐이고, 이제는 우울이나 불안 근처에만 가도 행여나 옮을까 겁나서 질색하고 도망치는 겁쟁이 아저씨가 되어버린게 확실하다. 반짝반짝 빛나는, 이 말 그대로 반짝반짝 빛나는 낭만과 애정일 수 있었던 때도, 내가 내 가정이 없었던 이십대때나 가능했던 일이다. 나이 마흔의 아저씨가 되자, 나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 책을 읽으며 내 가정과 비교하고, 자꾸 몰입하며, 안심하고, 또 한편으로는 불안해버리기 때문에, 나는 더는 옛날의 낭만을 낭만으로 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다만, 여전히 재미있었고, 여전히 의미는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역시 많은 일을 할 수 없다. 나는 하루의 필요한 일들을 제외한다면, 여전히 책 읽고 태권도하고 가끔은 술로 속을 씻는, 나약하고 심약한 사내다. 나는 아직도 굳세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