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가ㅡ 아이는 내게 사람이 무엇이냐 물었다.
지난 토요일과 이번 토요일 출근 대신 일, 월을 쉬게 되어 차라리 직장인 건강검진과 내 병원도 가고, 아이도 데려다주고, 진통제 먹을망정 밀린 훈련도 하겠구나 싶어 좋은 오늘이었다. 아침에 아이를 데려다주면서 같이 티니핑 노래를 쩌렁쩌렁 부르다 갑자기 아이가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빠, 사람이 뭐예요? 갑자기 찌르기를 명치에 맞은 듯 숨이 턱 막혔다. 어, 이걸 5세 딸이 잘 알게 어찌 설명해주지. 일단 급한대로 아리스토텔레스나 공손룡의 범주를 도입했다. 으음… 아빠도 엄마도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고모도 삼촌도 사람이지? (1. 차마 2족보행 영장류가 사람이라고는 아직 말 못하겠어서., 2. 얼마나 놀랐는지 학술적 서울말이 자동 반사…) 뭔가 골똘히 생각하던 딸내미.. 어, 그럼 멍멍이도 사람인가? 아니, 이게 무슨 범신론도 아니고 범인凡人주의… 범주 설명은 실패. 다행히도 딸이 다른 관심사로 바로 넘어가서 더는 말이 이어지지 않았지만, 오죽하면 바로 쪽글을 끄적였을 정도로
나는 진짜 놀랐다.
차라리 태권도의 기술을 물어봤다면 차라리 지시적 용법으로 몸소 보여주거나, 달달 외운 교본의 이론, 혹은 그 용도와 목적을 설명해줄수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사람이 무엇이냐는 근원적 질문에, 나는 사실 본질적 답을 해줄수 없었다. 그동안 읽어온 숱한 책들에도 위대한 거장들의 고민과 답이 있었고, 나도 고등교육의 말석에서 맛이라도 보았으니 어찌 나름의 개똥철학 하나 없겠는가. 그러나 전부 요설이고 난설이며 잡설이었다. 쓸데없는 한자어, 영어, 독일어 등 고유명사랍시고 써대는 철학 특유의 언어를 제하니 내 설명은 난삽하고 앙상하여 5세 아이에게 진솔하게 전달될수 없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규칙을 써도, 호르크하이머의 정의 대신 사용되는 단어의 용도를 고려해도, 소은이에게 이게 바로 사람이다, 라고 언어적으로 납득시킬 그림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발목과 요즘 집중하는 기도만 아니면 술이라도 콸콸 붓고픈 심정이었다.
젊은 소피스트 청년에게 사람이 무엇이냐는 답변을 받은 탈레스 또한 속으로는 기뻤다 했다. 나 역시 얄궂게도 소은이 보다 출근길에 정치며 철학 이야기를 주워섬기다, 발 밑의 패인 곳을 못 보고 다친 옛 발목이 크게 꺾였다. 별을 보다 구덩이에 빠진 탈레스가.지나가던 할머니의 비아냥을 들었듯, 나도 스스로가 웃겼다. 기어이 진통제 두 알로 버티며 억지로 훈련을 마친 뒤 병원에 가니, 젊은 의사 선생님은 나더러 운동을 많이 하시는지 발목뼈가 제멋대로 자라 튀어나오고, 변형이 있어 발이 지저분하다는 표현까지 썼다. 오래전 떨어져나간 발목 뼛조각들 사이로 긴 인대가 끊어져 주사를 맞고, 다시 붙길 기다려야된다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와중에도 아이의 성장이 나 역시 내심 기뻤다.
그 동안, 강신주 선생의 책을 따라 들뢰즈, 버클리, 양주, 한비자, 칸트, 니체를 거쳐 순자와 송견까지 왔다. 마투라나의 지적대로 자신의 해석에 따라 세상에 큰 족적을 남긴 위대한 학자들이었다. 그러다 문득 단재 신채호 선생의 문장에 닿았다. 이익도, 명예도 아니라 오직 진실은 쫓는 이만이 진정 사람이라 할 수 있으리라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