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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사는 이야기)

오랜만의 본격부녀육아일지 - 소은별곡(塐恩別曲)

by Aner병문


1. 신체적 모독


사실 예전부터 기미가 좀 보이긴 했었다. 작년 봄 무렵부터, 밖에서 실컷 놀다가 지쳤다며, 4층짜리 제 집 계단을 오르려 할때마다 '아빠, 나 힘들어요, 안아주세요!' 해서 안고 올라가는 아비, 칭찬은 못해줄망정, 아비에게 폭 안겨서 제 아비 한번 보고, 제 어미 한번 보고는, '아빠, 아빠는 왜 엄마보다 작아?' ....아니, 작으면 안되냐!! 이 애비가 오랜 세월 끝에 외모에 대한 결핍을 극복했다만, 그래도 이렇게 훅 들어오면, 슬프단 말이다.. 그러더니 여섯살된 올해 들어서는, 교회 집사님이 선물해주신 늘씬한 바비 인형의 금발을 빗겨주다가, 얼마나 힘이 센지, 그만 인형의 노란 머리카락이 훌떡 벗겨지자, 갑자기 제 아비를 보며 배시시시... '아빠다!' 안그래도 이 녀석 자꾸 건널목에서 신호 기다릴때마다, '아빠, 아빠는 왜 머리가 없어? 아빠는 왜 대머리야?' 자꾸 놀려대는 통에, 옆에서 유모차에 기대어 걷고 계신 고령의 어르신께서, 안그래도 굽은허리가 더 밑으로 꺾이도록 웃고 웃으시다 사레가 들리는 대참사도 발생. 몇번 대머리 사건을 겪은 뒤, 제 고모도 아비도 '소은아, 대머리 얘기 좀 그만해.' 하고 지청구를 주자 저도 뭔가 좋지 않은 말이라는 건 알게 되었는지 요즘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는 대머리는 대머린데, 잘생긴 대머리야!' ....그래, 참 퍽이나 고맙다.



2. 갈수록 쑥쑥 늘어나는 어휘!


그때그때마다 적어놓질 않아서, 분명히 잊어버린 내용도 있을듯한데, 이런 말도 아나 싶을 정도로 깜짝깜짝 놀란 적이 있다. 하기사 전해듣기로, 어느 집 소은이 또래 아기는 '아빠, 자꾸 그러면 탄핵한다!' 했다는 말이 있던데 진짠지 아닌지...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가족들 먹이는데는 무엇보다 열성이신 어머니께서, 또 직접 갈치를 조려다가 큰 덩어리를 뚝 뗀 뒤, 가시가 있나없나 꼼꼼히 살피시고, 밥수저에 올려 입에 넣어주려 하시자 소은이 왈, '와아, 할머니, 대형(!!) 고기다, 고맙습니다아~' 어머니 큰소리로 웃으며 쓰러지심. 아니, 대형이란 말은 또 어디서 배웠담.


평소에는 고모나 제 어미 있으면 아비는 본체만체 하다가도, 아무도 없는 듯하면, 아비와 같이 놀자고 애교부리며 치대는 일도, 영락없이 딸은 딸인데, 제 아비랑 하도 자고 싶다고 조르길래 '소은아, 너 아빠 안 좋아하잖아. 왜 자꾸 아빠랑 자려고 해? (웬일로 서울말)' 하자 골똘히 생각하는 듯 하더니, '으음, 아냐, 나 아빠 엄청 좋아해. 아빠가 옆에 없으면, 너무 보고 싶잖아.' 으오오, 감동적이구나. 내 딸내미...



가끔 말 안들으면, 당연히 혼내기도 하는데, 그러면 입술을 삐죽이면서 '아이참, 아빠, 짜증나! 기분나빠!' 하거나, 아니면 주먹을 옹골차게 쥐고 제 아비의 팔을 깊게 찌르기도 한다. '어허, 전소은, 태권도는 아빠하고 연습할때만 하는거야, 누가 찌르기 아빠한테 쓰래!' 하고 혼내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빠, 아빠 찌르기 좋아잖아??' 하고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되묻는다.. 정치적 기질도 충만한 우리 딸..


그러나 여전히 제 어미 보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기질인지라, 월화수목금토일 1주 7일을 가르쳐놓았더니, 오늘처럼 목요일 저녁이 되면, 내일은 엄마 오는 금요일이냐고 묻기도 하고, 매일 저녁, 더군다나 제 아비가 퇴근이 늦으면, 할아버지를 졸라서 전화기를 연 뒤에 제 어미 이름을 찾아서 영상통화를 걸기도 한다. 장하다, 디지탈 세대..젊은 MZ 우리 딸...



3. 의연하기도 한 우리 딸.


소은이 친구들은 감기가 폐렴으로 옮기도 하고, 고열과 기침에 시달리다 수액을 맞으러 가기도 하는데, 다행히도 소은이는 기침, 가래, 콧물이 가끔 잇긴 해도, 크게 문제없이 어린이집을 잘 다니고 있었다. 그래도 예방접종은 피할 수 없는지라, 1주일 간격으로, 독감, 소아마비, 홍역 접종을 차례로 맞았다. 소아마비 예방 접종은 나도 모르고 있었던지라 '아니, 소아마비 예방접종이 다 있었는가?' 하자 아내는 쌩뚱맞은 소리를 한다는 표정으로 '몰랐니껴? 그래서 요즘 소아마비 걸린 사람 없지 않습니까. 요즘 소아마비 걸린 사람 있으모, 모르긴 몰라도 사연 있는 집안일끼라.' 아, 그렇구나, 싶었다. 뭐든 아이가 아프지 않는다면 좋은 일이다.



처음 독감 접종은, 아내 없이 나만 맞추러 가서 혹시 몰라 소은이 달랠 워터젤리에, 장난감 꼭 사준다고 약속까지 하고 갔었더랬다. 큰 장난감도 사주고, 맛있는것도 많이 사준다는 애비 말에 용기백배한 딸, '소은이는 주사가 무섭지 않아!' 라고 의기충천하여 병원에 갔는데, 초등학교 1학년쯤 되어보이는 언니가 제 어머니와 같이 와서, 분홍색 수액을 맞고 있었다. 소은이보다는 언니라도 아직 어린 소녀일 그 학생도 얼마나 무서웠는지, 울음을 다 그치지 못해 눈가가 붓고 훌쩍거리고 있었다. 소은이도 잔뜩 겁을 집어먹은 얼굴로 '아빠, 저 언니는 왜 핑크 주스가 몸에 들어가요?' 했다. 나는 소은이가 언니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못하게 주의주면서 '소은아, 봐봐, 저 언니도 아픙게 저렇게 주사 맞는거여, 저 주사를 맞아서 몸에 약이 돌아야 빨리 낫는거여. 소은이도 아픈거 싫쟈?' 하니까 소은이도 끄덕끄덕 하고, 잘됐다 싶었을 그 어머니도 '거봐, 저 아저씨도 이거 맞아야 빨리 낫는다고 하시잖아, 그치?' 하고 초면에 두 부모가 어찌어찌 상부상조했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주사바늘을 보고 나서였는데, 소은이가 주사를 맞을 수 있도록 윗옷 아래로 팔을 빼내고, 나는 아주 아기였을때부터 힘이 셌던 소은이를 생각해서 양팔을 버둥거리지 못하도록 겨드랑이 아래로 내 팔을 끼워서 관절을 조였는데, 두 간호사 선생님이 모두 웃으셨다. '아버님, 레슬링하세요? 팔 한쪽은 내주셔야 주사를 맞히죠~.' 아뿔싸(^^;;) 다행히도 내 어렸을때와 달리 주사는 작고 앙증맞아서 금방 맞힐 수 있엇는데, 엉엉 울던 소은이에게 재빨리 워터젤리를 물리면서 '소은아, 주사가 그렇게 아프고 무서웠는가?' 물어보자, 훌쩍훌쩍 울면서도 '나 주사 무서워서 운거 아니야! 엄마가 갑자기 보고 싶어져서 운거야!' 라고 얘기해서 모두 웃었다. 이제 제법 부끄러워서 핑계도 댈 줄 아는 나이가 되었구나.


반면 제 어미와 함께 맞은 4~6세 예방접종은, 제 어미 있다고, 어찌나 주사 맞기 싫다며 칭얼대던지, 땀 좀 뺐다. 그래도 어렸을떄에 비하면 정말 거저먹기다. 어렸을때는 정말 젖 먹던 힘이라는게 뭔지 알 정도로, 온 몸으로 버둥거리면서 주사를 거부했었더랬다. 세월 참 빠르네...





4. 장기하 씨 노래처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어렸을때부터 엄격한 할머니를 좀 무서워하긴 했는데(하긴 제 아비도 아직까지 할머니가 무서운데, 네가 오죽하랴!), 최근에는 드디어 할머니를 어떻게 대하면 깨달은 듯 하다. 며칠 전 할머니께서 소은이 잘 자라고 잠시 내려오셔서 인사할때, 소은이는 평소랑 달리 제 할미를 어려워하지 않고 꼭 껴안더니, '할머니, 사랑해요, 안녕히 주무세요, 새해 복도 많이 받으세요오~' 3연타를 직격으로 넣은 뒤에, 진한 뽀뽀로 화룡점정! 그때 어머니는, 이미 소은이를 재우려고 집안 불을 다 꺼놨는데도, 표정이 환해지셔서 '아이고, 이쁜 우리 손녀, 이거이 누구 손녀여, 할미 손녀지? 할미가 머해주까?' 하자마자 전소은, 기다렸다는 듯이 '낙지하고 빨간고기(생고기^^;; 미치겠다 ㅋㅋ)요!' 어머니 또 자지러지시며, '아이고, 비싼것만 찾네. 입은 고급이여!' (어머니가 그렇게 키우셨..^^;;) 하시면서도 얼마나 기분이 좋으셨는지, 그 다음날 바로 낙지 삶아 썰어주시고, 생고기 대신 육횟감 끊어다 들깨와 참기름, 양파, 마늘 썰어놓고 비벼주셨다. 나는 도장 훈련하고 늦게 퇴근해서 남은 것 딱 한 수저 먹었는데, 정말 혀가 녹도록 맛있었지만, 소은이가 정말 맛있게 먹었다는 말씀에, 정말 소은이 얼굴이 눈에 밟혀서 육회가 입에 더 안 들어갔다. 부모 마음이란 다 그럴 터이다.



문제는 소은이가 이 사건 이후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어른들이 선물 잘 사주게끔 만드는 마법 같은 인사' 라는 식으로 인식해버린다는 점에 있었다^^;; 실제로 소은이는 제 아비와 어린이집을 갈때마다 안면 있는 어른들에게 무차별 새해 인사를 퍼부었는데, 당연히 아직은 때가 새해고, 애가 귀여우니, 어른들이 사탕 하나라도 안겨주시게 되어 이 증상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더불어 아침 일찍 일어나, 그토록 무서워하던 할머니에게도 제일 먼저 뛰어가 '할머니, 안녕히 주무셨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며 뽀뽀와 인사를 퍼부어 어머니의 용돈도 꽤나 축났다. 최근에는 교회 친구 얀미가 소은이에게 티니핑 수저 젓가락을 선물해주었는데, 딸내미가 염치없게도 '힝, 하지만 포크도 하나 있었음 좋겠는데! 아빠, 얀미 이모한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해야겠어!' 하면서 '그래, 결심했어' 자세로 주먹을 쥐어 팔꿈치를 아래로 내리는 것을 보고, 아 이 녀석,정말 착각을 단단히 하고 있구나, 생각했다. 일단, 곧 설날이니 설 때까지는 그대로 두고, 그 다음주부터도 새해 인사를 계속 써먹으면 그때는 한번 말을 해줘야겠다.



5. 지금 금방 하나더 추가^^;;



'아빠, 밤 늦게 책 보고 컴퓨터 하면 눈 빨개져! 눈 나빠져! 얼른 코 자!!!' ^^;; 알았다 소은아 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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