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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사는이야기)

본격부녀육아일지 - 자녀도 부모를 가르친다.

by Aner병문

안그래도 산불이 경상도 전역을 유린하는 요즘, 아내도 바쁜지 토요일 하루 내내 당직을 하고 다음날 오전에 올라온다 했다. 아이의 은근한 낙담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금요일 오전, 제 애비와 나란히 손을 잡고 어린이집으로 타박타박 향하는 시간에, 아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아빠, 엄마 오늘 밤에 오지?' '(뜨끔해서 나온 자애로운 서울말.) 어..엄마, 바뻐, 엄마 포이(아내가 일하는 직장 캐릭터. 숲의 요정이라나^^;;) 랑 바빠서 주일날, 일요일 오전에 온대.' '힝, 엄마 늦어? 소은이 화났어, 슬퍼!' 하면서 아이는 일부러 씩씩거리며 발을 쿵쿵 구르고 어깨를 위아래로 들썩들썩 했다. 안쓰럽기도 해서, 재미있는데 데려가주기로 약속하고 데려간 곳이, 이촌역 앞 국립중앙박물관 부속 어린이박물관이었다. 몇 번 가보려고 햇던 곳인데 이러저러한 연유로 지금껏 미처 가보지 못했으나, 아이도 어느 정도 컸고, 대중 교통이면 나도 충분히 시도해볼만해서(?!) 다녀왔다.



평소 제 어미가 운전하고 뒷좌석에 아비와 같이 타서 도란도란 얘기하는 나들이길이 아니라, 상당히 오랜 시간 대중교통만 타고 가는데는 익숙하지 않은지라, 아이는 약간 흥분되고 긴장한 얼굴이기도 했다. 버스 타고 1호선 역까지 갔다가 다시 4호선으로 갈아타는, 6세 아이에겐 아직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상행선 지하철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는데, 알고보니, 나라 지키러 광화문 가시는 태극기 으르신들...^^;; 정치적 성향을 논하고픈 마음은 없고, 그저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이 애교 많은 6세 소녀를 보았으니 얼마나 귀여우셨겠는가. 아가, 여기 앉아라, 아가, 이거 할애비 사탕인데, 아가도 먹어봐라! 아가, 이거 할미 쪼꼬렛인데 아가가 먹어라! 전소은 인기폭발..^^;; 소은이 3살때 아내가 복직한 뒤, 얼마 안 있어 나와 소은이가 KTX 타고 제 어미 보러 갔다오는 길에, 아직은 제 어미와 이별이 익숙치 않은 아이가, 잠이 설깨어 상행선 열차에 '엄마, 우리 엄마는 어디 갓어요오~' 하며 온 열차를 헤집을때, 맘씨 좋은 부인네들과 대학생들 언니들이 귀엽기도 하고, 안타까워 어쩔줄을 몰라하며 사탕이며 과자를 엄청 주었던 기억이 났다. 그때도 아이는 엉엉 울면서도 과자와 사탕을 남김없이 받아챙기면서 '고맙쯥니다, 크흥, 흥!' 혀짧은 소리로 감사를 표했었다.




금방 가리라 생각했던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주신 과자들을 하나 가득 챙겨 희희낙락하던 아이는, 더 칭찬받고 싶었는지 '나 안 앉을래요, 나도 아빠처럼 어른처럼 서서 갈래요!' 하며 늠름하게 출입문 옆 기둥을 잡고 섰다. 나란히 서기, ㄴ자 서기 얘기도 하며 단란하게 얘기하던 시간은 불과 서너 역쯤 되었을까. 노량진쯤 지나자 아이의 표정이 급격히 흐려졌다. '아빠...이제 다 왔을까?' '(속으로 큰웃음) 오긴 뭣을 다 와, 이 사람아, 안즉 한참 남었네이~ ' '지인짜아아?(얼굴 흐려짐) 노선도를 하나하나 보여주면서 '봐봐이, 여그서 여그까지 다섯정거장, 여기서 또 내려서 또 기차 타고 또 가야제~' '와아, 진짜 멀다아~' 하면서 또 약간 처지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렇다고 끝까지 의자에 앉으려고는 안했다. 그래도 제법 의젓하게 4호선 갈아타서 잘 가기에, 중간에 초콜릿도 하나 먹여주고, 재밌게 잘 놀았다. 갑작스레 날씨가 좀 추워져서, 날씨만 춥지 않앗으면, 참 좋았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사실 본론은 이게 아니라, 지금부터였다. 아이와 잘 놀고, 어린이박물관을 나와서, 나는 아이에게 '소은아, 여까지 왔응게 아빠도 박물관 좀 보게, 아빠랑 같이 도자기도 보고 그림도 좀 보고 할려?' 물었다. 물론 그 때는 제 어미도 있긴 했으나, 의젓하게 미술관에서 그림도, 도자기도 잘 보던 아이 생각이 나서였다. 아이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응, 나도 아빠 따라서 볼래!' 해서 박물관 들어가는 길에 개인적으로 나는 조금 불쾌한 경험을 했다. 옆에 아이가 없었다면, 따지고 들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지금껏 잘 놀던 아이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일 수도 없었고, 그럴 여력도 없었다. 다만, 자신이 전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내 비꼬는 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은 정말 기가 막혔다. 내가 잘못 전달하지 않앗다는 확신도 있었는데, 똑같은 태도와 어조를, 옆에 계신 자원봉사자께서는 안절부절하며 '허허, 이걸 어떡하나, 이걸 어떡하나.' 하면서 난처해하셧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때 나의 검은띠와 단증과 최근에 정식으로 발급받은 교육지도자 자격증까지 생각하며, 젊었을때처럼 여기서 날뛰면, 그냥 무뢰배와 다를게 없다고 눌러참고 있었다.




일단 문화재를 보면서, 마음을 좀 정리하기로 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갓는데, 아이는 그새 배도 고프고 지쳐버린 모양이었다. '아빠아, 그냥 집에 가자아.' '그르까? 그려, 집에 가자.' 나도 맥이 탁 풀려서 다시 되돌아가서 아이에게 주전부리 하나를 사주고, 다시 되돌아갔다. 마음의 응어리는 여전히 남아 있는 채였다. 아내는 내가 예민한 사람이란 걸 알고 있어서 평소 내가 참다 참다 발끈하려 할때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말렸다. 주로 민원을 들어야 하는, 공직에 있는 사람이라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지금 같은 경우에도 아내가 곁에 있엇다면 '아이고, 여보야, 그만 하시소. 우리가 이해하고 마입시더, 와 그러니껴?' 하며 손을 잡아주었을 터이다. 나는 아내 말을 거스른 적이 별로 없다. 그 때 박물관 앞 대나무가 찬 바람에 흔들리면서 소은이 주변을 싸악 감싸는 기분이었는데, 그때 문득 약간 마음이 흔들렸다. 아이는 여전히 행복해하고, 나를 불쾌하게 한 사람은 내 기분도 전혀 모르고 있는데, 여기서 악감정을 가지면, 결국 아이와 기분 좋게 나들이온 나만 혼자 불행한 사람이 되는 것 아닌가? 이 햇볕, 이 바람, 이 주말에, 나는 아이와 이토록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여기서 내가 어찌 결정하느냐에 따라 내 주말 저녁은 또 달라질 터엿다.




그래도 나는 마음이 작은 사람이라, 분이 풀리지 않아서(^^:;) 지하철을 기다리며, 아이에게는 주전부리를 먹이고, 나는 아내에게 전화했다. 오래 전 링컨 대통령은, 누군가를 고발하려는 자신의 지인에게, 그 이야기를 소상히 들려달라 한 다음, 그가 어느 정도 속이 풀렸다는 표정을 짓자 '자, 이제 속이 풀렸는가? 그럼 그 고발장은 이제 그만 찢어버리는게 어떤가?' 하고 달랬다는 일화를 남겼다고 했다. 아내는 다행히도 바쁘지 않은 시간이었고, 아내는 내 얘기를 주의깊게 듣더니, '아이고, 여보, 충분히 화낼만 했니더. 그치만 화 안 내고 소은이 생각하고, 내 생각해가 더 얘기 안해뿌고 그냥 내리온건 천번만번 잘한기라. 썽내서 뭐하겠능교? 그냥 재미야 재미야 하고 내려가입시더.' 하기사 이미 역 앞이었다. 아내는 역시 현명했다. 좁은 내 속을 풀어주면서도, 더 화를 내지 않을 순간을 만들어주었다.



그래도 나는 마음이 작은 사람이라(2), 나도 모르는 새에 체기가 있었다. 아마 소은이 돌보며 어머니가 싸주신 주먹밥 급하게 먹은데다가, 은근히 끓는 속을 내리누리느라 살짝 체한 모양이었다. 상행선 못지 않게 붐비는 하행선 열차에서, 소은이를 꼭 붙잡고, 발뒷꿈치를 위아래로 실룩실룩하면서, 종아리에 힘을 주었고, 그래서 체기를 내렸다. 오래 전 아내가 알려준, 혈당과 체기를 둘 다 잡는 방법이었다. 남들 모르게 헛트림이 새면서, 미식거리던 속이 좀 가라앉고, 명치에 꼬인듯한 묵직함도 살짝 가셨다. 그때 소은이가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빠, 이걸 집에 가져가서 뭐하겠어? 역에 내리면 그냥 버리자!' 뭔가 하고 봤더니, 소은이 손끝에 붙은, 작은 스티카였다. 아까 내가 사준 주전부리에 함께 들어 있던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애지중지 하더니, 몇번 계속 떼었다 붙였다 하면서, 뒤에 붙은 끈끈이가 사라지자, 저도 흥미를 잃은듯햇다.



체기가 후루룩 내려가는 기분이었고, 순간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기도 했다. 아이는 별 생각없이 제 손끝에 위태하게 붙어 있는 스티카 얘기였겠지만, 내게는 달랐다. 어찌 보면 별것 아닐, 기분 나쁜 일 하나 가지고, 나는 기도를 했고, 태권도의 유단자이자 부사범이라는 생각을 했고, 아내에게 전화를 했고, 온갖 위인들의 인내를 끌어다붙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쌓인 분을 다 삭히지 못하고 있었다. 나라는 위인이 그토록 작았다. 나라는 위인이, 그토록 신동엽 시인의 싯구처럼, '나랏일에는 분노하지 못하면서, 내 국그릇 안의 작은 고깃점에는 화를 내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 때 소은이의 한 마디가 내 마음에 참 오래 남았다. 이걸 가져가서 뭐하겠어?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말이다. 과연, 어차피 며칠 지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될 이 감정을 계속 집까지 가져갈 것인가? 나는 사실 그 떄, 나를 호락호락 보지 말아달라는, 젊었을 적 그 떄 그 고집과 치기를 아직도 버리지 못해 울뚝밸을 부리고 있지 않았나? 용산에서 안양까지, 참 오랜 시간을 보내서야, 나는 겨우 별것 아닌 작은 일을 털어버릴 수 있었다.



아내가 아이를 낳으러 나와 함께 들어간 2박 3일간, (진짜로 이틀밤 꼴딱 샜었다. 이틀쨰는, 간호사 선생님이 무슨 일 있으면 연락드릴테니, 잠깐 쉬시라고 해서, 근처 여관에 들어가 있었는데, 진짜 한숨도 잠이 안와서, 누워만 있다 동터서 다시 병원에 왔었다.) 나는 한 아이를 낳는 일은, 한 우주를 대하는 일과 같다고 생각해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밑줄쳐 가며 읽었다. 그를 다 읽고 나서는, 네루와도 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어서, 네루의 세계사편력을 다 읽었다. 비록 사생활은 다 존경할 수 없다 할지라도, 감옥에 갇혀서도, 자녀를 생각해서 해박한 지식으로 인류의 역사를 다 훑어준 그 부정父情은, 실로 본받고 존경해야 마땅하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아이가 기고, 서고, 걷고, 뛰는 모습을 보며, 도장에 입문하여 숨쉬고, 서고, 걷고, 뛰는 법을 다시 배우듯, 아이를 보는것도 그와 같다고 막연하게만 생각했는데, 이 날 토요일에서야 분명히 느꼈다. 부모가 자녀의 본이 되는 일은 너무 당연하지만, 자녀도 때로는 부모를 가르친다. 여실히 오래오래 느껴 이제라도 급하게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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