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광수, 구운몽 논문 정리 ㅡ 라깡과 보드리야르를 곁들여
1주일 주 5일간 틀 연무 한 번, 보 맞서기 한 번, 그 외의 시간에는 맞서기 연습 등을 기본으로 삼으나 늘 그렇게 훈련을 유지할수는 없다. 나는 돈 받고 반드시 이겨야하는 프로 선수가 아니며 본업 회사와 육아 등 오히려 내 본질에 가까운 일들이 널렸다. 마찬가지로 공부도 차라리 내 본분일지언정 본업은 아니기에 퇴근 후, 혹은 짬날때 짬짬이 읽고 쓸수는 있어도 학교에 있던 젊은 시절처럼 밤새워 공부하기는 무리다. 다만 훈련도 그 날 일정에 맞춰 늘리거나 줄이거나 바꾸듯이, 공부 계획도 가끔은 즉흥적으로 넓히거나 좁힐수도 있다.
2주전 주말에 곽선생이 갑자기 형, 구운몽 주제가 뭐요? 묻기에 인생무상 아니야? 했더니 아니라는데? 하며 냅다 던져준 영상이 그 유명한, 닥치고 정치ㅡ김어준 씨와 국문학자 유광수 선생의 한 시간 남짓한 유튜브였다. 솔직히 재밌긴 했는데, 두 분 웃음소리가 너무 크고 과장된데다 필요없는 비속어들도 많아서 중간중간 중점을 덮어서 명확한 요점을 잡기 힘들었다. 그래도 제법 즐거워서 아침 저녁 설교말씀도 덜 들어가며, (주여!) 두 걸출한 재담가가 연이어 방송한 사씨남정기까지 듣고 나니 유튜브에 한동안 구운몽 관련 내용만 뒤덮였다. 아아, 줏대없는 유튜브 알고리듬이여… 하여간 유광수 선생께서는 꽤 오래 전부터 다양한 방송에서 일관적 강의를 해오셨고, 감히 명문대 국문학과 선생님께 기껏해야 학위도 못받은 학사 출신 철학도가 감히 틀렸다 반박할 마음은 없으나 누가 뭐라 말씀하셨다고 덥석 믿거나 앵무새처럼 고대로 재잘재잘 옮겨봐야 내 지식은 아니다. 하여 아내에게 내려가는 길에 오랜만에 구운몽.원문과 선생님 논문 2부(성진이 양소유 되기, 양소유가 성진되기), 그리고 구운몽을 어떻게 교재로 활용할지 연구한 또다른 선생님 논문까지 총 3부를 모두 재미삼아 읽었다. 굳이 교육학 관련 논문까지 구해다 읽은 이유는, 물론 반농반진이시겠지만, 구운몽을 제대로 강의할수있는 중고등학교 교사가 얼마나 되겠냐는 유광수 선생도, 거기에 무식해! 너무 무식해! 으허허 하며 맞장구치는 김어준 자칭 총수도 그 순간만큼은 심히 경박해보였기 때문이다. 솔직히… 좀 짜치고 빡치잖아? ㅋㅋ 논문 좀 파봐드려야지 그럼.
일단 무려 라깡과 보드리야르까지 곁들인 유광수 선생의 논문 2편은, 같은 말을 지나치게 반복하시거나 중언부언하는 맥락은 분명히 있었으나 매우 재밌었다. 방송보다는 논문이 역시 맛이구나 싶었다. 방송과 논문을 종합한 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절대 구운몽의 주제는 인생무상이 아니다. 어머니를 위로하려고 하룻밤만에 쓴 소설 주제가 인생무상일수가 있는가? 구운몽은 성진의 욕망이 양소유의 삶으로 연결되고, 양소유의 욕망이 성진의 삶으로 연결되는 마치 윤회와 같은 순환 구조다. 이 두 욕망을 추구하는 모든 행동이 헛되며, 성진이 결코 양소유보다 낫다 할수 없다. 그러므로 이 모든 행동이 헛되다고 인정하고 추구하는 제 3의 방향이 금강경의 공 空 사상이며 구운몽은 불교에도 정통했던 서포께서 바로 이와 같은 내용을 전달코자 쓴, 깨달음에 대한, 깨달음의 소설이다.
2. 구운몽의 주된 소설적 장치 중 하나가 속임수다. 성진도
스승을 속이려하고, 스승도 성진더러 윤회도 지옥도 안 보내면서 꿈이 현실인척 속였고, 꿈 속 양소유도 여인을 얻으려 속임수를 쓰거나 또한 속는등 도처에 속임수가 마련되어 있다. 다양한 속임수의 기법을 통해 현실과 꿈을 뒤흔듦으로써 독자들로도 하여금 깊은 몰입을 제공한다.
3. 시뮬라끄르와 시뮬라씨옹. 욕망에 관한 이야기. 사실 유광수 선생은 논문 내에서 보드리야르나 라깡을 초록이나 각주 등에서 언급은 하되 직접 인용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비와 기호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실재가 아닌, 소비자의 자극을 위한 전제된 상황이 시뮬라끄르라면, 성진과 양소유가 각자 맡은 역할 또한 시뮬라끄르고, 그들이 그.역할에 충실하려 애쓰는 일 ㅡ 즉, 시뮬라끄르 하기 가 곧 시뮬라씨옹일테다. 자본은 원래 소비를 위해 허상을 현실처럼 조작하며, 이념 또한 인간을 떠밀고 강제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라깡은 욕구를 미루면 욕망이 생긴다 했는데, 성진의 욕망이 닿는 곳에 양소유가, 양소유의 욕망이 닿는 곳에는 성진이 있었다. 둘 다 각자의 현생에서 욕구를 풀수 없었기에 욕망이 생기었다.
4. 박은정 선생의 논문에서는 구운몽을 메타버스 meta verse의 교재로 쓰자 했다. 세계 2차 대전이 20세기의 시작을 알리듯, 코로나가 비로소 21세기를 여는 삶의 기준이 되었다는 지적은 일견 옳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대학생 대상 수준의 구운몽 활용으로서는 다소 아쉬웠다. 사실 중고등학생 때
끝났어야할 수준의 수업 아닌가? 검은 띠들에게 아주 기초 수준의 찌르기만 1년 내내 알려줄순 없잖은가?. 아니면 지금 대학생들 수준에는 그게 맞나? 나는 삼십대 초반에 중학교에서의 논술 교육을 마지막으로 강단을 떠났다. 나는 이제 회사나 도장에서 무언가를 전하는 일이 더 많다. 그래서 사실 현
재 학생들의 지적 수준에 대해서는 잘 모르나 가끔 깜짝깜짝 놀라는 일은 있다. 좋든 나쁘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