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테이젼 / 눈먼 자들의 도시
감독 스티븐 소더버그, 주연 로렌스 피시번, 맷 데이먼, 쥬드 로 외, 컨테이젼, 2011. 미국
주제 사라마구, 정영목 역, 눈먼 자들의 도시, 해냄출판사, 2002
감독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주연 마크 러팔로 외, 동명 영화, 미국, 2008
재난물이나 재해물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보고 나면 늘 누리던 일상의 축이 뒤집히는 듯한 생경해지는 공포감 때문에 며칠 동안 견디기 어렵다. 솔직히, 기생충 보고 나서도, 한 층 위의 침실에서 혼자 잠이 들라치면, 배고픈 뉜가가 스르륵 기어올라오는거 아닌가 싶어 클래식 틀어놓고 잔 적도 있다. 명색이 십육년째 무공을 훈련하는 사람치고는 너무 겁이 많은 거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사람 자체가 심약한 것을 어찌할꼬. 그런 의미에서 주제 사라마구를 처음으로 알게 해준 눈먼 자들의 도시, 는 그 동안 내가 꼽는 재난물 중, 더 로드와 더불어 손에 꼽는다. 꼭 언제나 옳은 기준은 아닐지라도, 노벨 문학상에 빛나는 작가이니 그 필력이야 말할 것도 없고, 거의 전담에 가까운 정영목 선생의 번역 또한 출중하다. 주제 사라마구는 돌뗏목이나 도플갱어, 예수복음, 죽음의 중지 등,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따옴표의 분간이 없을 뿐 아니라 때로는 가끔 시공간도 무시하며, 심지어 마치 데드풀처럼 독자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기까지 하는데, 그러한 폭거를 감행하며 펼치는 서사란 이루 말할 수 없이 사람을 푹 빠지게 만든다. 다른 재난물에 비해 눈먼 자들의 도시가 비교적 접근하기 편한 이유는, 사람들을 갑자기 눈 멀게 하는 '백색 실명' 의 원인과 종식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아 의도적으로 현실감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아주 근접하게 겹쳐져 있지만, 완전히 현실 같지는 않은 배경에서, 사람들은 아르놀트 겔렌의 지적처럼, 눈이 먼 것만으로도 인성을 쉽게 상실하지만, 또한 눈이 멀었음에도 마지막 인성을 간직하며 두텁게 결집하며 살아간다. 개인적으로 한쪽 눈에 안대를 찬 노인을 역시 좋아하는데, 나름의 학식과 무공을 갖추고, 또 지도력과 자애로움을 갖춘 노회한 대장부에 대한 내 열망 때문일 터이다. 덧붙여 영화판이 원작에 비하면 폄하를 많이 받는데, 나는 책을 그대로 영상으로 옮겼다는 점만으로도 기본 점수 이상은 주고 싶다. 감독이 필요 이상으로 과욕을 부려 오히려 원작까지 훼손하는 작품들이 얼마나 많던가. 지금은 헐크로 완전히 정착한 마크 러팔로가, 아직은 바텐더를 겸하며 배우하던 시절의 풋풋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요즘, 경인방송에서는 컨테이젼(Contagion)이라는 노골적인 제목의 영화를 편성했다. 우리 아내도 나도 본 적은 없었으나, 우리 아내는 재차 말하듯, 나랏밥 드시기 전에는 병원밥 드시던 분이시었므로 대번에 알아맞히셨다. 전염병에 관한 영환가 봅니더. 이 시국에 하필 가슴 답답하게 전염병 영화라니, 아득해지는 기분이었지만, 언뜻 보이는 출연진만 해도 로렌스 피쉬번, 마리옹 꼬띠아르, 쥬드 로, 맷 데이먼, 기네스 펠트로, 케이트 윈슬릿이라니, 이거 뭐야, 이 영화? 뒤늦게 검색해보니 감독은 그 유명한 천재 스티븐 소더버그인데다, WHO의 자문을 비롯하여 제작진 모두가 인수공통감염질병에 대한 공부를 깊이 하여 이미 이 쪽 계열에서는 명작 취급 받는 영화였다. 그렇다면, 이 시국이기 때문에, 아니, 이 시국이라서 아니 볼 수 없어서, 부족한 잠 깨어가며 며칠에 나눠서 봤다. (사실은 딸의 분유를 갈았더니, 또다시 며칠 동안 잠을 못 이루고 빽빽 울어서 우리 부부 역시 모두 교대로 아이를 안아가며 깨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김성수 감독의 감기나 박정우 감독의 연가시, 혹은 다른 전염병물에 비해 이 영화는 담담하다 못해 메마르게 서사를 밀어붙여 나간다. 동시에 영화의 극적 반전이나 절정을 위한 클리셰도 과감히 깨어버린다. 영화의 서민적인 시각을 담당하는 맷 데이먼은, 어쩌다보니 우연찮게 면역 체계를 가진 남자지만, 그 스스로 '내 피를 뽑아 백신을 만들면 될것 아닙니까!' 라고 강하게 요구해봐야, WHO의 박사는 사무적으로 '현실적으로 시간도 돈도 너무 많이 들어요' 라고 아주 현실적으로 거부해버린다. 대신 영화는, 한 명의 피해자로부터 점점 퍼져나가는 전염병의 동선을 따라, 여러 시각으로 사회가 변화하고 혼란해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WHO의 중심 인물로 나오는 로렌스 피쉬번이 담당하는 정부 측의 시각이 하나고, 앞서 말한 맷 데이먼이 보여주는 서민들의 시각이 하나이며, 나머지 하나는, 전직 기자였다가 실업하여 의학 블로그로 먹고 사는 쥬드 로의 시각이 하나다. 일찍이 이른바 개 구충제 펜벤다졸이 암 치료에 특효라며, 많은 환자들이 '임상실험' 을 표방하며 위험한 복용을 시도한 일이 있어, 그들을 비판조차 할 수 없어 가슴 아픈 일이 있었는데, 오히려 볼썽 사나운 일은 그 다음부터 더하였다. 그 환자들을 둘러싸고, 온갖 구충제를 비롯하여 검증되지 않은 약을 불법으로 파는 사기꾼들이 있는가 하면, 인터넷이나 유튜브에서 검증되지 않은 정보를 퍼뜨리며 의사나 약사들이 제약 회사의 뇌물을 받아 일부러 이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는 자극을 부풀리는 일까지 빈번하였다. 코로나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다시 한 번 펜벤다졸뿐 아니라 온갖 외제 약품이며 민간요법들이 '의사들은 절대 모르는 비법이네' '돈 욕심에 일부러 알려주지 않네' 하면서 마치 제가 허준인 양 득세를 하기 시작하였는데, 오죽하면 정부에서도 인포데믹(Infodemic)이라 하여 전염병만큼 무서운 허위 정보의 전염이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간호사로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아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나 역시 '이 패를 걸면 왜적이 쳐들어오지 않네' '이 부적을 지니면 병에 걸리지 않네' 식의 유구한 '헬조선식 사기' 를 보는 듯하여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안타깝지만, 정치와 마찬가지로, 위생에 있어서도, 공부를 열심히 해야만 쥬드 로 같은 사기꾼을 경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슬플 따름이다.
영화에서는 발병한지 약 133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백신이 어느 정도 생산된다. 그러나 그 양은 턱없이 모자라서, 결국 미국에서는 모두가 보는 방송에서 무작위로 숫자를 뽑아, 그 숫자와 겹치는 날짜에 태어난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백신을 지급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도 권력이 투영되지 않을 수 없다. 로렌스 피쉬번의 약혼녀는 결혼을 앞두고 결국 자신의 사랑을 담보하여 먼저 백신을 지급받게 된다. 그 이전에 그녀는 이미 약혼자의 직업이 방송에 알려지면서, 백신을 노리는 강도들에게 한 차례 폭행당한 뒤였다. WHO의 전염 경로 조사관인 마리옹 꼬띠아르는 백신 100개와 교환될 인질로서 중국 오지마을에 납치당하게 되는데, 역시 약 때문에 부자나 의사가 납치되는 일은 현실에서도 자주 있는 일이라고 한다. 시카고 봉쇄를 앞두고, 마치 현재의 이딸리아처럼 정에 못 이겨 조금씩 새어나간 정보는 결국 대규모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영화 내에서 면역체계를 지닌 맷 데이먼은, 그저 유일하게 남은 딸을 지키기 위해 혼자 괴롭게 고군분투할 뿐이다.
그러므로 컨테이젼은, 눈먼 자들의 도시 가 가진 낭만과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정말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인성이 드러나는 유일한 장면은, 영화 말미에서 로렌스 피시번이 자신의 사무실을 청소하는 인부의 아들에게 자신의 몫의 백신을 놓아줄 때뿐이다. 그는, 바로 직전 장면에서 고위 공무원과 감염을 막기 위해 요즘 뉴스에서도 자주 보는, 팔뚝을 서로 부딪치는 인사를 하지만, 청소부의 아들에게 백신을 놔준 후에는, 악수의 유래까지 친절히 말해주며 손을 마주 잡는다. 악수의 유래를 알고 있니? 내가 무기를 쥐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한 고대의 인사법이었단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는 눈이 멀어 굶고 더러워진 남녀가 어디에서든 사랑하며, 마지막 정의를 지키기 위해 애처로운 단합을 하기까지 한다. 이에 비하면 컨테이젼의 엄혹한 세계에서는, 악수조차도 점점 사라지는 예법에 지나지 않는다.
케이트 윈슬릿은 영화에서 말한다. 우리는 보통 하루에 얼굴을 삼천 번 정도 만져요, 그러니까 손 잘 씻고, 얼굴 만지지 마요. 코로나 사태를 맞아 컨테이젼의 평가가 더욱 올라가며, 출연했던 배우들은 각자의 SNS에 마스크를 쓰고, 손을 잘 씻기를 당부하는 영상들을 제작했다고 한다. 영화의 말미에서, 처음 전파자는 다름아닌 박쥐가 떨어뜨린 먹이를 물었던, 돼지의 주둥이에 맨손으로 소금을 뿌린 홍콩 주방장이었다. 개인적으로 미식을 좋아하는지라, 섬뜩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영화의 주제는 결국, 손 잘 씻자, 이상한 거 먹지 말자, 그리고 바람피우지 말자.....?! 정도가 되겠다. 언젠가 말했듯 유발 하라리도, 질본도 '두 번 다시 코로나 이전의 세상은 돌아오지 않으므로 뉴 노멀(New normal)에 적응해야 한다.' 라고 했는데, 그래도 애비로서, 솔직히 희망을 잃고 싶지 아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