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F 753일차 - 근 3개월만의 저녁 정규 수련에 참여하다.
모처럼 쉬는 날이었지만 아내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다녀왔다가 출생신고 마치고 이래저래 시간을 보내니 벌써 저녁 무렵이었다. 쉬는 날이 원래 더 바쁘다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도 없을만큼 지쳐 빨래를 돌려놓고 잠시 소파에서 눈을 붙이고 나서야 겨우 몸을 다시 일으킬 수 있었다. 비록 결혼 언제 할 거냐는 부모님의 소리 없는 눈총이 있긴 했으나 먹고 마시며 읽고 훈련하는 시간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총각 시절의 휴일에 비해 미뤄놓았던 모든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남편, 아비로서의 휴일은 더욱 쫓기듯이 빨리 달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내가 조리원에 계시는 동안, 모처럼 생긴 여유에 태권도장을 아니 가기엔 몹시 아쉬웠다. 빨래를 널어놓고 글러브와 레거스 가방을 챙겨 도장으로 향했다.
때아닌 역질에 온갖 체육관이며 수영장이 줄줄이 문을 닫는다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날씨 풀리는 봄인데도 겨우 흰 띠 수련생 셋만 다녀간데다 그 중 두 명은 알지도 못하는 아가씨였다. 고류 합기유술을 병행하는 젊은 민 선생님만 겨우 알아보았다. 턱이 날카롭고 눈썹이 짙은, 젊고 차분한 아가씨인데 곧 승급 심사를 앞두고 있다. 그 외에는 역시나 4단으로 승단한 장사범 님-장산범과 밥 잘하는 유진이, 공룡 동현이 정도였다. 나는 손가락을 꼽아보니 점점 도장 나오는 날짜가 줄다가 작년 12월 말, 연말 수련 및 승단심사를 도와드린 것을 마지막으로 근 3개월 동안 도장을 나오지 못하였다. 3킬로 정도 어찌어찌 줄였는데도, 띠 바깥으로 뱃살이 넘치고 도복이 끼어서 몹시 답답하였다.
모처럼 시간의 여유가 있었으므로, 오늘은 스트렛칭을 느긋하게 한 후, 사주찌르기/막기부터 2단 틀(품새)까지 여유롭게 연무하고, 3보 맞서기를 순서대로 칠판에 적어놓고 흘낏거리며 외웠다. 걸음걸이에 맞춰 불특정한 상황에서 태권도의 기술로 스스로를 지키고 반격하는, 두 사람 간의 약속 대련을 보 맞서기(Step sparring)라고 하며, 각각 3보, 2보, 1보 맞서기가 있다. 어찌어찌 2단 띠를 받았음에도 이 보 맞서기를 다 외우지 못해서 당분간 육아에 전념하여 이 보 맞서기를 외우려 했던 터였다. 이후 가볍게 섀도우 맞서기를 하고, 근력-유연성 운동으로 마쳤다. 무슨 고류 가라테도 아닌데, 장산범과 공룡 동현이가 반듯하게 누운 서로의 몸을 역기 삼아 들어올리고, 업은 채로 스쿼트를 하는 꼴들이 웃겼다.
돌아오는 길에는 모처럼 밥 잘하는 유진이가 태워주었다. 늘 나의 일기에서 적어놓은 것처럼, 아내와 이름이 같은 유진이는, 인사동 밥집에서 함께 일하던, 젊고 믿음직한 쉐프였다. 그녀는 엄격하고 날카로우면서도 여린 주방의 실세였고, 나는 그저 영어 몇 마디 할 줄 안다고 회사에서 차출당한 얼치기 홀 담당에 불과했었다. 늘 술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책 몇 줄 읽다가 팔굽혀펴기 하고 늘 도장 간다고 자주 사라지는 내가 신기했는지, 도장 유진이는 어느 날 나를 따라 도장으로 찾아왔고, ITF 태권도가 몸에 잘 맞았는지, 지금은 초단 띠를 따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늘 나는 요령없이 방만하게 살아왔지만, 마침내 ITF 도장에 몸을 담고, 사범님 이하 좋은 사형제, 사자매들을 만나 늘 믿음직하고 기쁘기 짝이 없다. 나와 닮은 내 딸이 아장아장 걷게 되면, 띠를 졸라 허리에 매어주고 함께 손을 잡고 도장에 갈 그때가 기대된다고 말할 때마다, 아내는 아이고, 벌써부터 태권도 할 생각이십니까, 하며 웃음을 참지 못한다.
사진은 차후 첨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