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버린 사람과 남겨진 삶의 무게에 대하여
센 눈이 올 거라던 새벽은 하얗게 비었다. 나는 훠궈요정 사매와 도장 지도 보조 시간표를 바꿨고, 저녁 내내 아이를 돌보면서 무게를 다루는 연습을 했다.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에서 중력을 발견하기 이전부터, 묵자의 글에서 보건대 무공을 익혔던 이들은 이미 땅 밑으로 모든 개체의 중심을 끌어당기던 지속적인 힘에 대해 어느 정도 헤아리고 있었던 듯하다. 어떤 문파는 이 힘에 순응해 이용했고, 또 어떤 유파는 이 힘에 거스르고 저항하며 자신의 힘을 길렀다. 그러므로 관절이 어지간히 나아지고 난 뒤, 나는 둔해진 내 몸의 무게를 다시 이겨내기 위해 팔다리를 허공에 뻗어 버티고, 뻗고, 거두는 연습을 했으며, 12킬로짜리 케틀벨과 10kg짜리 메이스 클럽 두 개로 내 몸에 부하를 더해 무게를 견뎌내는 연습을 했다. 산본에 새롭게 도장을 차린 돌도끼 장 사범의 말처럼, 나이를 먹을수록 몸은 약해지고, 삶은 바빠져서 훈련할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으므로, 한번 훈련을 할때 온갖 도구를 이용해서 효율을 높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어디까지나, 산 사람들의 번잡스러운 이야기이다.
새벽 1시쯤, 먼저 내려가신 사범님의 부고 공지가 왔고, 새벽 4시쯤, 나보다 어린 사모님의 공지 문자가 왔다. 아내의 직장이 있었던 김천구미와는 멀어봐야 차로 이삼십분 거리, 작은 소도시에서 자신의 스승이자 남편이었던 이를 먼저 떠나보낸 사모님은 젊어도 너무 젊었다. 하물며 이제 한창 커야 할 두 명의 유복자녀들과, 세 명의 젊은 부사범들과, 그를 따르는 수없는 제자들은 또 어찌할 것인가. 나는 현장에서 묵묵히 젊은 제자이자 동료를 떠나보내는, 나의 사범님을 생각했고, 안면이 있는 지방 도장의 사형제 사자매들을 생각했다. 코로나가 없었던, 불과 이삼년 전만 해도, 군수님까지 초청해가며 대회를 열었고, 삼겹살을 구워먹었고, 소주를 마시면서 태권도에 대해 밤새도록 얘기하곤 했었다. 나와 동갑이기도 한 고인은, 항상 볼때마다 나를 아꼈고, 나는 항상 그에게 깍듯이 예를 다했다. 당연히 지켜야할 예이기도 했으나, 내가 이 무공 저 무공을 조잡스럽게 건너다니며 얕은 폭력에 연연할때, 그는 이미 나의 사범님께 혈혈단신으로 찾아와 오래토록 태권도를 사사했다고 했다. 그 때 당시 젊다 못해 어렸던 사모님은, 그래 내가 좋냐 태권도가 좋냐는 심정으로 저녁 내내 태권도를 하다가 그예 화장실에서 구토를 하기까지 했는데도, 고인은 끝내 사모님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해주지 않았다며, 내 우짜다 저 인간에게 저리 빠지삣노, 태권도 하는 사람 다 조심해야 됩니데이, 소은엄마도 조심하시이소, 병문 씨도 내 보이까네 태권도 그래 하다 오래 몬 살아요, 맞서기할때보이까네 그냥 막 앞뒤없이 덤비뿌든데, 모. 아내가 나와 주말부부 할 동안에, 심심하면 언제든 건너오라며 아내에게 종종 전화도 해주고, 안부를 챙겨주던 사모님의 농이 지금도 기억에 선연하다.
고인은 생전에 참 멋쟁이였다. 서울에서 세미나가 있으면, 삼십대 중반의, 애 둘 아버지 답지 않게 삐딱한 모자에 야구 점퍼, 청바지까지 색색으로 맞춰입고, 신이 나서 올라왔다. 둔하고 땅땅해서, 무슨 유도나 씨름 선수 아닌가 싶은 나와 달리, 진짜 사범님들은 하나같이 동안에 날렵한 몸매였다. 그러므로 '남편이 아무리 속을 썩여도 얼굴만 보면 다 용서되더라.' 던 엄앵란 씨 말씀처럼, 사모님도 그 멋에 흠뻑 빠졌을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무척 다정다감해서, 누구든 태권도에 대해 물어보면, 언제든 어디서든, 무엇을 입고 있든 가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기술을 보여주고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내가 고인을 처음 뵌 건, 아마도 인천아시아대회 때였을테니, 지금부터 사오년 전이요, 내가 줄파란띠를 매고, 율곡 틀을 주로 연습했을 때일게다. 그때도 그는 5단 띠를 맨 한 지부의 도장주였는데, 같은 나이인데도 저 사람은 어찌 저리 점잖고 멋있는가, 저것이 검은 띠의 위용이며, 자리가 만든 사람인가 싶어 기가 질리지 않을 수가 없었더랬다.
들이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았어도, 나는 도장에 아주 오래 있었다. 무슨 말을 듣건 같은 기술을 오랫동안 반복했다. 마침내 2단 띠까지 받았을때 누구보다 형제처럼 기뻐해주신 분 또한 고인이었다. 내는 병문 씨가 잘할 줄 알았다 아입니까, 좀 늦게 시작했을 뿐입니데이, 누구나 가는 길은 늦든 빠르든 똑같습니더, 태권도 좋아하는 마음이랑 꾸준히 하는 습관이 중요한거지요, 그리고 병문 씨 태권도 결코 몬하지 않습니더, 걱정 마이소, 했던 고인은 이제 없다. 그는 몇년 전부터 피로가 심하고 몸이 예전같지 않아, 동네 병원을 찾았는데, 그 병원에서 간 수치만 좀 높을 뿐 크게 걱정없다고 오진하는 바람에 1년이나 병을 더 키웠다. 주짓수 하던 시절, 역시 약 1년간 다리를 절면서 동네 병원에서 뢴트겐만 찍고 물리치료만 받으며 허송세월했던 나는 그 마음을 깊이 알았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 졸업을 앞두고 대학 병원에 가서야, 내가 다친 곳은 뼈가 아니라 연골과 인대였고,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라는 사실을 그 때 알았다. 덕분에 발목에 못을 박고, 평생 조금씩 절고 다니는 꼴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수없이 했다. 나는 그저 불편으로 남았지만, 고인께서 그렇게 급하게 가실 줄은 아무도 몰랐다.
밥 잘하는 유진이는 새벽길을 운전해서라도 빈소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훠궈요정 사매와 전주댁도 함께 다녀오겠다고 해서 고마웠다. 그녀들 편에 약간의 용돈과 함께 조의금을 보냈다. 나는 3일간 사범님 없는 도장을 다시 지켜야 한다. 고인이 가시고 바로 다음 날에 근현대사에 여러 가지 의미로 큰 흔적을 남긴 이도 뒤이어 떠났다. 참 길게도 산 인생이었다. 나는 밤새 못 잔 머리로, 온다고 예보했으나 오지 않은 눈처럼, 빨리 가지 않았어도 되었으나 빨리 가버린 이와, 대부분의 사람이 빨리 가길 바랐으나 하염없이 늦게 간 이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이 모순적이고 우습고 야속하단 생각을 했다. 사범님은 유튜브에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올리셨고, 많은 이들의 댓글이 달렸다. 내게도 자리를 비운 지 오래된 유단자들이나, 수련자들의 전화가 종종 왔다. 이 모든 것이 결국 철추공이나 철쇄공을 연마하듯, 남겨진 자들이 짊어지고 버텨야할 삶의 무게일 것이다.
그러므로 학교 동문 선배이시기도 한 임성순 작가는, 어머니의 장을 치르고 돌아오는 길에, 글을 쓰겠답시고 이 슬픈 기억까지도 언젠가는 글로 써서 팔아먹고 살겠구나 라는 생각에 느닷없이 길가에 구토를 했다고 했다. 하물며 글도 얕고 무공도 비루한 나는, 박목월 시인의 하관(下棺)처럼, 떠나간 이를 예우할 재주가 없어 그저 몇 자의 문장을 여기에 부려놓는다. 이 빈한한 재주로도, 나는 결코 태권도를 떠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늘 다정하고 성실하던 고인이 지켜보실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죽는 그날까지 태권도를 하며 그 무게를 나눠받을 수밖에 없다. 적적하고, 허망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