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돈이라는데 참 돈이 뭔지.
얼마 전 있었던 일이다. 직장이 바쁜지라 동료들끼리 함께 어깨 맞춰 어울려 점심 한 끼 먹을 시간도 제대로 내지 못해 혼자 독수리처럼 순대국밥 한 그릇 후루룩 먹고 있었다. 혼자 뜨거운 순대국밥을 먹는 설움을 알면 서른의 설움도 안다고 말했던 이가 최영미 시인이셨던가. 점심 때도 훨씬 지나 춥고 조용한 순대국밥집에 행색이 각기 다른 4명의 영감님들이 왁자하게 언성을 높이며 들어오셨다. 때늦은 강추위에 걱정될 정도로 얇은 등산복 차림의 어르신도 계셨고, 또 중절모에 정장까지 차려 입으신 어르신도 계셨으나 형님 아우 하면서 서로 친밀해보이시었다. 그 분들은 한켠에 자리를 잡은 뒤 술국과 수육, 순대 등을 주문하셨고, 소주와 막걸리를 주문하셔서 괜시리 나를 부럽게 했다. 이 추운 날에 뜨거운 국물과 수육에 낮술 한 잔 기울이면 어찌 행복하지 않을까, 했는데 중절모를 눌러쓴 어르신이 그 중 대장 격인지 다른 어르신들께 형님 소리 들어가시며, 갑자기 언성을 높이셨다. 아, 여기 소주랑 막걸리 빨리 안 갖다주시고 뭐해? 그러자 퉁명스레 주방 여사님의 날선 목소리가 돌아왔다. 좀 기다리세요, 막걸리는 우리 안 팔아서 지금 사러 나갔어요! 잠시 말을 않던 중절모 영감님은 거기 주방 아줌마, 조선족이지? 남의 나라 와서 일하려면 더 부지런하고 더 빨라야 되는거야! 뭔 말씀도 안되는 괴이쩍은 호통으로 제 체면을 스스로 세우시고는 다시 아우뻘의 영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셨다.
이렇게 소란스러우니 나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어느 틈에 인덕 좋아뵈시는 사장님이 밖에서 사온 막걸리에 또 사이다를 서비스로 달라느니(막걸리의 텁텁함을 줄이려고 사이다 타서 드시는 어르신들이 꽤 있다.) 뜨거운 물 좀 더 달라느니, 어르신들 각자 연령 값을 한참 하신 뒤에, 다시 중절모 어르신이 건배사를 제의했는데, 사실 목소리가 워낙 커서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다 들렸다. 우리 건배사를 뭘로 할까? ...형님 건강하시는 걸루 하시지, 이미 건강하시지만은. 억만장자를 위하여 어떨까? 억만장자도 좋다, 자, 그럼 우리 월수입 240억을 위하여!
월수입 240억?!! 환상적인 금액에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이 어르신들 어디 피라미드 투자 설명회 같은데에 다녀오신 모양이다. 중절모 어르신이 역시나 소개해주신 자리였고, 나머지 세 영감님은 각자 추렴하여 투자할 돈을 계산중인 모양이었다. 며칠 지난 이야기라 다 기억은 안 나지만, 말투만은 생생하다. 가장 행색이 좋지 않아뵈는 어르신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근데 형님, 진짜 그게 말이 월 240억이지, 진짜 그게 되는거유? 아, 속고만 살았나, 그 누구누구(큰 소리로 이름을 말씀하셨는데 기억이 안 난다.) 봐봐, 집이 몇 채고, 그 끌고 다니는 외제차도 몇십 억짜리야, 옷도 맨날 명품만 입고 다니고, 나도 지금 그보다는 훨씬 못해도 통장에 돈이 착착 꽂혀 들어온다니까. 다른 영감님도 거드셨다. 우리 형님이 뭐 틀린 소리 하시는거 봤나, 두고봐, 240억 아니라 2400억, 몇 조원도 돈 막 들어올테니까, 우린 그냥 돈만 잘 맞춰드리면 뒤야. 야, 이거 큰일났다. 월급쟁이 까페 사장 시절에 늘 제일 비싼 모임 방을 예약하고, 커피와 음료, 간식도 엄청 주문해서 자기네들끼리 설명회하고,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붙잡던, 피라미드 기업 설명회가 문득 떠올랐다. 누군가 낌새를 채고 나가려고 하자, 세련된 보이는 여자 사장님 두 분이 그녀를 붙잡고 양쪽에서 오랫동안 설득했었다. 옛 추억에 잠시 잠기는 동안 중절모 어르신의 덧붙이는 말씀이 웃겼다. 그 여사도 말야, 아주 그냥 이뻐, 돈도 많은데 이뻐, 그래서 더 믿음이 가. 형님도 참, 이쁜거랑 돈이랑 뭔 상관이유. 왜 상관이 없어, 그 나이에 몸매하고 옷 입는거 봐라, 돈 없으면 그게 되나? 안되지, 여러분들은 다 나만 믿고 있으라구! 그렇게 큰소리 땅땅 치는 중절모 어르신의 눈에도, 그 이야기를 듣고 철석같이 믿는 다른 어르신들의 눈에도 소년 같은 열망이 가득했다. 벌써 이십년쨰...(...) 원피스를 찾아헤매이는 루피의 눈이 저랬을까, 금따는 콩밭 에 미쳐버린 주인공 영식의 눈이 그랬을까. 나는 알 수 없었고, 그냥 조심스레 자리를 떴다.
하여간 돈이 참 무섭다. 없이 산다는 건 괴롭고 힘든 일이다. 근 이십년만에 연락이 온 고등학교 동창은, 어느덧 애 둘 엄마가 되어 있었는데, 늘 책만 읽고 다니던 내 생각이 난다며, 자신이 영업하는 책 전질을 좀 팔아달라고 했다. (우리 집 지하실 서재에만 책이 오천 권이 넘는다.) 오래 전 다른 직장의 형님은, 나와 같이 교회를 다니던 사람이었는데, 함께 이직하면서 나는 요식업계로, 형님은 보험업계로 가게 되면서, 자신은 절대 내게 보험 팔아달라 연락은 안할 거라 그러더니 한 달 만에 전화가 와서 제발 보험 좀 들어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그 때 나는 도장 회비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늘 친구들의 은혜에 기대어 살던 사람이라 형님의 보험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지금 오랜만에 연락 온 동창의 책 구입 역시 마찬가지다. 내 작고 귀여운 모든 급여는, 아내에게 가며, 아내는 준절히 아껴가며 쓰고 내게 필요한만큼의 용돈을 주신다. 그래도 늘 부족하고 어렵다. 하여간 사람이 만든 돈이 사람 삶을 졸라매고 산다. 나는 아주 가끔,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표표히 길만 걷고 싶을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