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사는 이야기)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역열호아...?!

by Aner병문

쉬는 날에는 밀린 잠부터 좀 자야지- 라고 생각을 해도, 할 일이 많다보니 금세 깨어 다시 잠들지 못한다. 아마 아내가 없는 동안 잠시 다시 다니게 된 도장에서 제일 시간을 많이 보내기 때문일 터이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마다 왜 이리 살이 쪘냐며 놀라고 놀리기에, 이틀 동안 시간을 들여 기초를 다시 다지고 발을 들어올리느라 무진 애를 썼다. 아내와 함께 병원을 다녀오고, 출생신고를 했으며, 과학 선생 곽군과, 늘 별 같은 너와, 그리고 잘생긴 너의 남친과 함께 보드게임을 한 뒤 거하게 밥과 술을 샀다. 나는 괜시리 입이 심심하여 맥주 1병 곁들이며 보드게임을 했는데, 훗날 아주 늙고 나면, 아침에 일어나 무공 훈련을 하고, 아침을 먹은 뒤 느긋하게 향긋한 술이나 홀짝이면서 벗들과 보드게임을 하고 싶다는 꿈을 잠시 이룬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가롭게 늙으려면 빨라도 20년은 더 있어야 할텐데, 너는 문학병도 주책이라며 깔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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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자면, 첫 번째 백수 시절은 두 번째 백수 시절보다는 조금 덜했으나 역시 무기력한 우울로 나를 괴롭혔었다. 그 때 나는 마지막 의지를 끌어모아 지인들과 함께 꿈 중의 하나였던 독서토론모임을 열었었다. 돈 한 푼 없어 집에서 눈칫밥 먹으며 탈취용 커피가루 가져다 내려마시던 시절이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였으며 서울시 지원도 받을 정도로 소소하게나마 제법 운영이 되었던 모임이었다. 우리는 점심 나절쯤 일찍 만나 보드게임을 하며 사람들을 기다렸다가, 인원이 다 모이면 비로소 잡담섞어 토론을 나누었고, 끝난 뒤에는 늘 술을 마셨다. 오죽하면 이름도 그래서 冊 酒 人 을 찾습니다, 라고 내 딴에는 멋들어지게 지었다. 여하튼 정말 입만 가지고 다녔던 나를 위해 돈과 시간을 여투어준 그들은,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마운 벗들이다. 그 벗들도 지금은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사느라 바쁘지만, 십 년 이상 만나는 가장 친한 두 젊은 벗이 아직도 그 때처럼 가끔 함께 어울리고 있다.



아내도 이 두 벗과의 만남에 대해서는 따로 말씀하시지 않았으나, 다만 어젯밤에는 늘 그렇듯 자정쯤에 깨어 유축하시다가 아직도 집에 아니 들어가고 술잔을 붙잡고 있는 나를 타박하셨다. 아이고, 여보야, 이제 애도 낳았고, 아빠도 되었는데, 아직도 남의 집 귀한 아가씨 늦게까지 붙잡고 있으모 우짜노, 또 내 없다고 술도 마이 드셨을기라, 그 남친 보기도 미안하이께네 빨리 고마 바래다 드리소, 밤도 늦었구만은. 술을 못하는 아내는, 나는 둘째치고, 내 결혼식에서까지 소설가 차현 형님과 어울려 글라스(!)로 소주를 퍼마셨던(!!), 두주불사, 소주의 요정인 너를 잘 알지 못하셨지만, 아내에게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 선선히 그러마 했다. 밤 출근을 해야 하는 너의 남자친구는 1차 양고깃집에서 콜라를 마시고 돌아갔고, 의정부에 사는 곽군은 2차 선술집에서 돌아갔다. 너와 나는 불과 2~3일 전에 만났지만 늘 그렇듯 옛날처럼 술을 퍼마셨고, 아내의 부드러운 타박을 들은 뒤에는 군말없이 너의 숙소까지 바래다주었다. 서울 북쪽에 사는 너는, 경기도 남부에 사는 연인을 만나기 위해 옛날처럼 가끔 서울의 등뼈를 타고 내려왔는데, 올 때마다 외국 여행 가듯 길다며 차라리 남쪽에 숙소를 하나 잡고, 하루이틀 쉬어가기가 예사였다. 너는 가끔 날씨가 좋으면 남친을 보기 전에 내려와서 아내의 허락을 받고 커피나 낮술을 함께 하기도 했었다. 도장의 사형제 사자매들과, 회사의 두서넛 되는 형님 누나들을 제외하면 그다지 타인과의 왕래가 없는 편이라, 나는 늘 별 같고 꽃 같은 너와 마시는 술이 항상 반가워서 달았었다. 곽군과의 격투기, 과학 이야기도 즐겁지만, 곽군은 철학이나 문학을 어려워하고, 무엇보다 술이 약하여 항시 아쉬운 마음을 너가 채워주었었다.



그러므로 공부자께서는 그 유명한 말씀을 남기셨다.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역열호아. 멀리서 친구가 찾아오니 어찌 반갑지 않을까. 아내도 나도 주변 사람이 많지 않아 늘 보는 사람만 본다. 좋은 책은 백 번을 읽어도 새롭게 읽히고, 무공의 절초는 가장 기본에 있다고,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늘 말해왔었다. 언제 보아도 늘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반가운 친구들이 있어서 하루가 짧아 아쉬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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