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화(樹木花) - 이름을 알면 더 가깝고 좋은.
아내는 본디 사람의 몸을 돌보는 일을 전공했고, 그를 업으로 삼다가 그예 고민 끝에 산으로 들어가 꽃과 나무, 그리고 그를 벗하여 깃들어 사는 곤충 동물들을 돌보는 일로 바꾸었다. 내게 시집오기 전의 일이지만, 아내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내는 고산준령을 타거나 우람한 능봉 위에서 절경을 보는 일은 썩 즐기지 않지만, 꽃과 나무로 덮인 호젓한 길을 걷는 일을 좋아하고, (군대에서 하도 봐서) 쳐다도 보기 싫도록 메스꺼운 쥐나 뱀 따위도 신이 나서 보기를 즐겨한다. 오죽하면 반려동물이라 이름붙은 개 고양이도 썩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다만 아내의 취향이니까, 털날려 재채기 하지 아니할만한 거리에서 그러려니 혼자 끄덕끄덕한다.
딸아이 기운도 뺼 겸, 부부 금슬도 다질 겸 내가 쉬는 날마다 종종 가족끼리 자주 나가는 공원 끄트머리 산과 맞닿는 곳에는, 서울대학교 소속의 연구용 관악수목원이 있다. 아내는 늘 그곳까지 올라가면서, 항상 닫혀 있는 문을 아쉬워했다. 참, 볼거 많을낀데... 하며 아내는 육중하게 닫힌 철문을 쓰다듬고 돌아오기 일쑤였다. 아다, 나라 최고의 국립대학에서 연구헌다고 온갖 기화요초는 다 긁어모았을 거인디 우리 같은 일반인이 거그 들어가서 머덜라고, 열릴 일이나 있으까잉, 내려가서 소은엄마 좋아하는 순대국이나 민물매운탕에 나는 소주나 한 잔 헐라네, 하며 잡아끌고 내려오기 여러 번, 설마 열릴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얼씨구, 소은이 고모, 그러니까 내 여동생이 지나가다 문득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다. 언니, 공원 근처에 현수막 보셨어요? 서울대학교 관악수목원 임시개방한대요! 난 솔직히 아내가 그렇게 좋아할지 몰랐다. 아마 아내가 좋아하는 아이돌들 내방 공연 온다면 그렇게 좋아할지 싶다. 아내는 정말로 손꼽아 기다리더니 소은이 기운도 적당히 빼고, 서늘한 시간을 택해 관악수목원 길에 올랐다.
평소 매정하리만치 닫혀 있는 육중한 철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경비를 보시는 선생님들도 눈에 잘 띄는 형광색 조끼를 입었고, 정문에는 임시개방을 기념하는 팻말과 함께 간단한 안내도와 손 소독제, 설문 조사지 등이 있었다. 그 떄쯤 어지간히 공원 아래턱 박물관 정원에서 뛰어놀던 아이도 유모차 속에서 혼곤히 잠이 들어 나와 아내는 맘 놓고 공원처럼 멋지게 꾸며놓은 관악수목원 안을 맘껏 돌아다녔다. 솔직히 나는 연구용 대학 수목원이라고 해서 무슨 브로일러 양계장마냥 촘촘히 심어놓은 나무들을 한데 모아놓고 절대 엄금, 눈으로만 보라는 뭐 이런 분위기인가 했더니 의외로 의자도 있고, 삼림욕장도 있고, 상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공원 다워서 좋았다. 흙도 푹신했고, 꽃이며 나무마다 팻말이 다 붙어 있어서 이름도 알기 쉬웠다. 솔직히 꽃과 나무에 그닥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소설에서나 읽던 알싸한 향기의 미선나무 아래 기대어 앉아 팩소주라도 하나 몰래 빨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으나, 한껏 흥분한 아내는 여, 여, 여 보시소, 마, 엄주 검지!(음주 금지) 불씨도, 소란도, 취식물도 다 금지지만은, 엄주(음주!) 엄주(음주) 가 가장 먼저 검지(금지)라고 안 적혀 있능교? 하기사 내 생각에도 나라 최고의 대학에서 연구용으로 뭐든 한껏 잘 키워놨을텐데, 술기운에 제정신이 아닌 인간이 꽃가지라도 하나 덜컥 꺾어가면, 그거 어찌 보면 국유물 밀반출 중범죄 아닌가, 싶기도 하고, 나도 술을 좋아하긴 하지만, 언제나 농으로라도 아내 고집 꺾고 마셔댈만한 위인은 아니라서 그냥 아따, 그라제, 나처럼 너갱이 빠진 인간이 꽃이라도 하나 꺾으믄 어찔라고, 하며 웃고 말았다.
여하튼 아내는 정말 신기해했다. 한편으로는 바로 지난 주에 한 시간 동안 젠체하며 이건희 회장 컬렉션을 보던 내 모습이 그런가 싶었다. 내 눈에는 그저 서로 줄기의 무늬와 굵기와 풍채가 다른 나무요, 꽃잎과 꽃송이가 다른 꽃들일 뿐인데, 아내는 무엇이 어찌 다르고, 무엇이 특출난지 대부분 다 알아보았다. 모르는 것은 가까이 다가가서 와, 이기 버즘나무였노, 내는 이래 큰 버즘나무는 첨 본데이, 역시 학교에서 이래 환경을 조성해가 키우이까네 이래 크뿐다, 이래 크뿌, 하며 감탄했다. 이래서 김춘수 시인은 이름을 알아야 비로소 꽃도 꽃이 된다고 했나보다. 일찍이 공손룡이 이끄는 명가(名家)는 그래서 고유명사를 짓고 그 의미를 파헤쳐 논리를 짜는 일이 중요하다고 했고, 비트겐슈타인 또한 모든 철학적 사유는 그 언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했는데, 정약용 선생의 말처럼 사물과 그 이름이 명확히 개념화된 아내에게 꽃과 나무는 그 다시 없는 호화로운 보물 같은 것이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도란도란 얘기하고 걷는 것을 즐겨하긴 하지만, 하나하나 꽃과 나무를 들여다보는 재주나 취미는 없는지라 그냥 묵묵히 아내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혼자 신이 나서 무공이나 역사나 철학이나 술 이야기를 할때 아내도 이렇게 들었겠구나 싶은 마음이 커서 고마웠다.
좌우지간 호사였다. 돈 한 푼 안 들이고 나라 최고의 대학이 정성들여 키운 꽃과 나무를 흠뻑 보았으니 우리들뿐 아니라 풍경을 보러 온 남녀노소 모두가 사람 좀 사는 것 같다며 웃고 즐기고 분위기가 좋았다. 그 때 한 노부부가 다정하게 서로 손을 잡고 어깨를 반쯤 기댄 채 천천히 오르막길을 올라오시자, 아내는 그 분들이 다 지나기를 기다려 그 큰 키를 구부려 내 귀에 속삭였다. 우리도 꼭 저래 금슬 좋은 부부가 되입시더, 꼭 나이 먹어도 지금처럼 변치 말고 이래이래 사입시더. 나는 미소를 가득 머금고 아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그리고 내려가서 구수한 민물매운탕에 빨간색 소주를 한 병 다 비운 다음에야 비로소 대답했다. 아따, 그라제. 아내는 갑자기 뭔소리냐며 고개를 꼬우다가, 내 설명을 듣고 나서야, 그때 그 대답을 지금사 한단 말잉교, 아쵸! 하며 다시 손칼을 내려쳤다. 우리 도장은 이제 서너 번 정도 왔지만, 태권도교본에 나올법한 훌륭한 손칼내려때리기였다. 얼얼.... 우리 부부 이러고 삽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