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사는 이야기)

비 오는 날엔 가끔 그리움이 짙어진다.

by Aner병문

아침부터 조금씩 온 몸이 흩어질듯 무겁고 아프더니, 그예 늦은 밤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너가 집에서 밑반찬은 무얼 해먹냐며 물꼬를 터서, 술도 없이 글자를 나누며 두어 시간 재미있게 놀았다. 결혼하여 안정된 삶을 얻기 전까지, 나는 쌓아둔 책과 운동기구와 숨겨둔 술병을 제외하면 이 작은 몸 겨우 누일 골방에서 오래토록 낡은 전화기로 보이지 않은 신호를 잡아가며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밤새 비는 세상을 깨뜨릴듯 내리고, 미세하게 두 줄 금이 간 아이폰이 뿜어내는 신호로, 너와 곽선생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술 없이도, 낯을 보이지 아니하여도, 가는 말과 오는 말의 요철만 맞는다면, 사람은 얼마든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우리는 먹어야만 하는 삶에 대해 이야기했고, 먹지 않아도 넘어가는 삶의 야트막한 고랑에 대해 이야기했고, 더이상 감정만으로는 버텨낼 수 없는 글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외의 많은 이야기들은 벌써 빗방울에 씻겨내려간 듯 생각나지 않는다. 친구가 죽어 거문고의 줄을 끊었다는 단현의 고사도 더는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비가 그칠 생각을 아니하지만, 마음이 몸처럼 가물다. 결결이 막힌 이야기가 때로는 몸 속 어딘가에서 뱀처럼 꿈틀거린다. 하염없이 긴 밤이 있다. 그치지 않는 생각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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