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탐라기행)

탐라기행 2- 가족과 함께 했었던 이중섭 미술관

by Aner병문

어렸을 때는 가족하면 어머니와 아버지, 여동생만 이르는 말이었지만, 이제는 나도 어느덧 내 가정을 꾸려 내 아내와 내 딸이 생기었다. 9월 첫 날에 만나 12월 첫 날에 결혼하기까지 석 달 만에 헐레벌떡 결혼 준비해주시느라 고생하신 양가 어른들 생각하면, 아직 젊다 해도 우리 부부 역시 부모인지라, 커가는 딸만 봐도 그럴진대, 아내나 나나 아직 손이 가는 자식에서 벗어날 수 없구나 스스로 자책감이 드는 경우도 많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언제 어느 때나 부드럽게 내 편인 이가 있다는 점일까. 아내가 없는 3~4주 동안 거의 하루도 안 빠지고 집중적으로 도장을 간 탓에 내 손에는 다시금 굳은살이 거칠게 박히었는데, 어머니는 크지도 않은 조막만한 손을 왜 저리 못살게 구느냐며 혀를 차셨으나, 아내는 내 손을 한번 쓱 쓰다듬고는 배시시 웃고 말았다. 아내가 좋다는데야 어머니도 더는 역정을 내실 수 없어 아이고, 에미야, 느그 서방이라고 그래도 그렇게 좋으냐? 하시자 아내는 하모예, 어무이, 내 서방이니까 좋다 아입니까, 하여 어머니도 와그르르 웃고 말았다. 아내는 나와 꼭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며 서둘렀는데, 어덴가 했더니 이중섭 미술관이었다. 잘 그리지는 못해도 그림은 웬만치 보고 다녔다 생각하는 나도 제주도에 웬 이중섭인가 생경하여 물으니, 일본에 있는 처자식이 그리워 가장 가까운 남녘 끝 제주도에서 1년 정도 머무른 적이 있다고 한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일세의 거장인지라 과연 가는 곳곳마다 어디든 흔적을 남기는가 싶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중섭 선생이 그리 잘생긴 줄 그제서야 알았다. 명동백작 드라마에서도 그렇거니와 이중섭 하면 언제나 가난과 고독에 시달리며, 가족을 그리워하다, 은박지에 그려넣은 우람한 황소만 주로 있는 줄 알았는데 웬걸, 가족을 중심으로 한 그림도 익살맞은 판화처럼 다양하였고, 아니 무엇보다 진짜 숨막히게 잘생겼다. 길게 빗어넘긴 장발에 서구적으로 오뚝한 이목구비가 수려하여, 그동안 왜 젊은 중섭 선생을 그동안 병약하고 가녀린 이미지로만 보았나 싶었다. 일찍이 로마 사람들은 남자가 어른이 되는 과정 중 하나로, 평생을 함께 할 여인을 일찍 맞이하여 가정을 꾸리는 것이라고 했다는데, 젊은 중섭 선생 역시 평생의 반려와 일찍이 결혼하여 자식을 두었고, 그의 편짓글이며 그림에 모두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히 묻어나서 나는 왜 아내가 다시금 나와 이 곳에 오자고 했는지 알았다. 나보다 키가 큰 아내는 내 손을 엇걸어 잡고 어깨에 기대거나, 혹은 등 뒤에서 턱으로 내 정수리를 누르면서 그림을 말없이 보고 있었다.



아내는 가끔 술에 취하여 내가 들려주는 옛 고사를 그저 웃으며 선선히 듣고 넘기지만, 하나의 이야기만은 분명히 박히듯 기억하고 있다. 후한의 광무제에게는 젊어 과부가 된 누이 호양공주가 있었는데, 이 여인이 광무제의 충복인 송홍을 흠모하였다. 일부다처제의 시대라지만, 황제의 누이를 첩으로 들일 수는 없으므로, 송홍이 공주와 연을 맺으려면 그는 본부인을 내쳐야만 했다. 이에 광무제는 누이를 자신의 옥좌 뒤에 앉혀 보이지 않게 한 뒤 송홍을 불러 넌지시 속을 떠보았다. '자고로 사내가 출세하면 집과 거마를 바꾸듯 아내도 바꾼다고 들었는데 자네는 어찌 생각하는가?' 이에 송홍은 단칼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자는 가난할때 도와준 벗을 잊지 않고, 쌀겨와 술지게미를 먹으며 고생한 아내를 버리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젊어서는 불과 2만명의 군사로 40만 왕랑군을 쳐부수는 곤양대전의 역사를 이루었고, 황위에 올라서는 후한의 전성기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광무제 유수였으나 이치에 닿는 선비의 말에는 어쩔 도리가 없어 옥좌 뒤를 돌아보며 '누님, 안되겠습니다.' 하며 허허 웃고 말았다고 한다. 썬연료도 좋다고 하는 조강지처, 즉 쌀겨와 술지게미(막걸리나 청주 등을 띄우고 남은 곡식 찌꺼기)를 나눠먹으며 고생한 아내를 가리키는 유명한 말은 이 고사에서 나왔다. 아내는 항시 이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진짜 남자는 어데서 술 많이 마시거나, 싸움을 잘하거나, 돈 자랑을 하며 거들먹대기보다 항시 집에서 조용히 가족을 돌보고 바라보며 사는 이라고 내게 다시 말해주곤 하였다.



그러므로 아내가 없을때 나는 적적하고 외로웠다. 내가 늘 먹고, 물에 담궈놓은 빈 그릇들만이 허망한 메아리처럼 반겨주는 집은, 온기없이 차갑고 허망했다. 아이의 깔깔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아내의 밝고 동그란 얼굴도 보이지 아니하였다. 처자식이 어데 안 좋아서, 싫어서 간 것도 아니고, 시부모님 따라 제주도 구경 가고, 처가 들렀다 온 것인데도, 그래서 나도 가끔 술도 마시러 다니고, 그 동안 하고팠던 태권도, 독서, 영화, 시간 쪼개어 실컷 즐겼는데도 늘 마음이 크게 비어 있었다. 단칸방에서 혼자 구들장을 지고 가족을 그리워했던 젊은 중섭처럼, 나 역시 더이상 가족 없이 살 수 없겠구나 싶어서 아내와 나는 서로 손을 걸어잡고 오래오래 그림을 보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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