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토 모토히로, Q.E.D/C.M.B 시리즈, 학산문화사.
추리극을 참 좋아한다. 내가 어렸을 때 최초로 읽은 추리소설은 대부분 그렇듯 셜록 홈스(홈즈와 홈스와 호움즈가 혼용되던 시절..ㅋㅋ)와 뤼팽(역시 루팡이 간혹 있었으나 홈즈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ㅋㅋ)였다. 계몽사 소년소녀문학전집을 읽으면서 오스틴 프리먼의 손다이크 박사나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 등도 굉장히 재밌게 읽었다. 특히 알루미늄 단검 의 비밀을 하나하나 풀어헤치는 손다이크 박사의 치밀한 추리는 정말이지 과학수사의 원조라고 할만하다. 어렸을 때는 '혼자 사는 남자' 로 유명하셨던 탈북 '탈렌트' 김용 씨와 당시 잘 나가던 씨름 선수에서 코미디언으로 전업하여 한창 '행님아' 로 인기를 몰던 강호동 씨가 서로 합작한 '김형사 강형사' 시리즈도 꼭 챙겨봤었고, 하여간 '추리백과' '탐정특급' 따위의 일본에서 번역해 들어온 책들도 그저 가리지 않고 읽었다. 퀴즈(Quiz)는 라틴어 qui es(당신은 누구인가?) 라는 말에서 유래했으며, 판도라의 상자 고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잠겨 있는 상자를 풀어 보물을 찾듯' 답을 찾아내는 유희 또한 인간의 본능에 기초한 오래된 역사를 지녔다.
하여튼 소년탐정 김전일과 명탐정 코난까지 대충 섭렵한 뒤에는 추리소설 대신 옴니버스식 수사 드라마에 빠져들었는데, 셜록 홈즈는 읽다 보니 툭하면 '이보게, 왓슨, 혹시 몇 년 전에 일어난 무슨무슨 사건을 기억하나?' '어찌 모르겠나! 신문에도 크게 나오고 여왕 폐하께서도 친히 관심을 가진 사건이었지, 아마?' 이래버리니, 20세기의 한국 독자는 당신들이 읽는 신문 같은건 모른다구요. 뤼팽은 애초에 탐정이라기보다는 은밀한 괴도가 천직인 양반이고, 김전일이나 코난 정도로 가게 되면 이제는 범인은 아무래도 좋고 트릭은 애초에 결과에 맞춰 써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설명을 들어도 맥이 탁 풀리기 일쑤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CSI나 크리미널 마인드 같은 미드도 그냥 자기네들끼리 기계 돌리고 토론하고 해버리면, 보는 나는 재미가 없잖아... 그래서 내가 보는 수사 드라마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1) 큰 줄거리는 있되 각 사건들은 반드시 한 편으로 끝나는 옴니버스일 것. 2)등장인물이 가급적 적어서 지네들끼리만 웃다가 끝나지 말 것. 3) 기계빨, 심리빨로 돌리는 추리 드라마는 거를 것. 이러고나니 안락의자 탐정 같은 명탐정 몽크나, 혹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이먼 베이커가 혼신의 힘으로 연기하는 멘탈리스트, 혹은 요즘 말로 '케미' 가 잘 맞았던 NCIS(근데 이 드라마는 시즌을 거듭할수록 틀이 너무 커지는데다 깁스 역의 마크 하몬께서 고령으로 힘들어하시는게 너무 보여서..;;), 수학 이론으로 범인 잡는게 정말 재미있었던 넘버스(이런 것 좀 만들어줘라!) 정도만 보게 되었다. 여담으로 제프리 도노번이 열연한 번 노티스(Burn notice)도 정말 재미있게 보긴 했고, 개인적으로 우리 나라에서 다시 만들면 잘 어울리고 좋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수사극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첩보물이므로 여기서는 이야기 하지 않겠다.
여하튼 이렇게 추리 드라마까지 다 보고 나니 이제는 철지난 국정원 추리퀴즈나 가끔 들여다보며 뭐 재미난 거 없나 하던 차에, 미스터 초밥왕으로 워낙 유명한 테라사와 다이스케 선생이 식탐정 이라는 재미있는 만화를 연재하더니, 급기야 보고야 말았다. Q.E.D 라틴어로는 Quod Erat Demonstrandu- 이미 보여졌어야 할 것, 즉 자명한 논리이자 진리임을 증거하는 고풍스러운 선언이다. 유클리드- 에우클레이데스나 아르키메데스도 썼다고 하니 역사 깊은 용어이지만 1960년대 이후부터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고 한다. 여하튼 난 처음에 무슨 만화에 이런 고풍스러운 이름을 쓰나 해서 들여다봤고, 초반 그림체는 정말 옛날식 소년만화를 떠올리게 했지만, 곧 정신없이 서사에 빠져들었다. 이 만화를 그린 카토 모토히로는 본디 다양한 만화를 그려왔음에도 인기를 얻지 못하던 무명만화가였으나 (마치 봉준호 감독처럼) 이 만화조차 인기를 얻지 못하면 절필하겠다고 절치부심한 끝에 마침내 Q.E.D로 강담사 소년부문에서 을 수상한다. 모든 학문을 아우른다는 건축학도 출신은 카토 모토히로의 만화에는 일단 서사가 단편으로 아주 깔끔하게 끝나며, 천재 주인공이 학술적 이론과 관련된 사건을 마주쳐 그와 연관되는 맥락으로 사건을 해결하게 되는데, 그 맞물림이 제법 인상 깊어 50권까지 많은 인기를 얻었고, 드라마화까지 되었다. MIT를 조기입학-졸업했으나 한번밖에 없는 10대의 고교생활을 느껴보고 싶다며 일본 고교에 재입학한 천재 토마 소가 자연과학과 수학과 관련된 사건을 해결하는 시리즈가 Q.E.D이며, 이 시리즈가 인기를 얻자 C.M.B라는 외전격 시리즈가 또한 발매되었는데, 토마 소의 사촌이자 대영 박물관의 지의 수호자로서 세 개의 반지를 물려받은 천재소년 사카키 신라가 역사와 고고학 등에 관련된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덧붙여 C.M.B는 예수님을 경배코자 찾아간 동방박사 세 명- 캐스파, 멜키오르, 발타자의 앞 글자를 딴 것이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다니며 곳곳마다 끔찍한 살인사건에 휘말리는 김전일과, 지금쯤 그냥 컸어도 애 셋은 낳았을 코난에 비해 Q.E.D/C.M.B는 큰 인기는 없으나 꾸준하게 많은 사랑을 받아오며 장기연재를 해왔다. 국내에서도 그 팬이 적지 않아 '추리와 교양을 둘 다 잡은 학습만화' '가장 학술적인 추리만화' 라는 찬사가 많다. Q.E.D는 일단 50권에서 마무리 지은 뒤 Q.E.D. IFF라는 이름으로 1년 뒤의 내용을 다시 연재하고 있고, C.M.B는 여전히 안정적으로 연재 중이라고 한다. 두 시리즈의 성공으로 마침내 안정적인 환경을 얻은 카토 모토히로는 추리소설도 써내고, 만화 작법서도 출간하는 등 활동의 영역을 점점 넓히고 있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사건들이 있다. 실수(實數) 체계 안의 유리수와 무리수 간의 관계를 절묘하게 표현해낸, 데데킨트의 절단에 관한 이야기. 또 양산(洋算) 못지 않은 정밀함과 개성을 자랑했던 화산(和算)을 연마했지만 끝내 허수(虛數)라는 병제(病題)를 유제(遺題)로 남긴 젊은 여자 수학자의 이야기, 인생의 말미에 린네의 꽃시계를 만들며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죽음을 평화롭게 맞이하는 노인의 이야기 등. 카토 모토히로의 다양한 지식은, 일상의 낭만과 맞물려 여러 크고 작은 사건들을 만들어낸다. 갤러리 페이크와 더불어 공부를 좋아하는 여러분들께 권할만한 최고의 추리 만화이자 학술 만화이자 낭만적인 만화. :)